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전례ㅣ미사

[대림성탄] 주님 탄생의 의미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7 ㅣ No.1736

[특별기고] 주님 탄생의 의미


불의한 세상 밝히는 빛으로 오신 순간, 구원의 완성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사람이 되셨을까? 예수께서는 어떻게 인류를 구원하셨을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는가? 주님 성탄은 왜 가난한 이들의 차지가 되는 것일까?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아 곽승룡 신부가 풀어주는 성탄의 의미, 특히 현대 한국 사회 안에서 주님 성탄이 갖는 참된 의미를 돌아본다.

 

광호 신부의 ‘외양간의 성탄’.

 

 

사람이 되신 하느님 사랑의 탄생

 

한국사회가 다종교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교가 갖는 독특한 종교적 특징이 주님 성탄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고 묻는 질문에 주님 성탄의 의미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kenosis)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종교”라는 답이 나온다. 

 

루카 복음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고 기록한다. 주님 성탄은 신학적으로 하느님께서 성령에 의해 마리아를 통해서 사람이 되신 강생(降生)의 날이다. 어느 무신론자가 “자신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자기 비움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드러나는 육화(肉化)의 목적이 무엇인가? 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성 토마스 데 아퀴노에 따르면, 세상이 무질서하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를 하셨고, 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구원에 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롭게 인간이 되셨고, 이는 아주 적합한 것으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희생하는 사랑,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인간 죄인을 구원하셨다. 이와 같이 인간을 위한 하느님 구원의 원의의 시작이 주님 탄생이다. 하느님의 구원이 세상에서 충만히 현실화되는 그 때의 시작이 주님 탄생이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님 성탄은 인간 구원의 “완성”이 시작된 거룩한 순간이다.

 

 

사랑의 탄생, 그 완성이 시작된 순간

 

이제 복음서를 들쳐보자.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은 혈통만이 아닌 법적 족보의 과거, 현재, 미래 안에서 탄생하셨다. 곧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 계약의 계승자이며,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이후 새롭게 갱신된 하느님과의 계약의 계승자시다.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와 나약함과 믿음의 부족함과 함께 인류의 구원자요 심판자로서 태어나셨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한 처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류 속에 들어오셨다는 의미로서 주님 탄생을 기록한다. 주님 탄생은 이러한 구원을 위한 “신비”의 시작으로서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요한 1,13)의 기원이 아니라 이미 근본적으로 “끝까지”(요한 13,1) 인간들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이 개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기의 탄생 목적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이러한 주님 탄생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행동은 주님께서 앞으로 오게 될 많은 반대들을 넘어서야 함을 예고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성탄 이콘에서 아기 예수를 감싼 흰 포대기는 죽음을 의미하는 수의를 상징하는 주님 탄생의 역설적 의미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가난한 사람과 불의한 사회구조 곧 결핍된 인간존재와 국가사회에 대한 하나의 “완성”이다. 각각의 인간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본성”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태오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 이 아기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하려고 할 때 앞으로 오게 될 이 아기의 삶의 미래를 유다적 관점으로 미리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으나 특히 예루살렘에서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진리와 사랑과 하느님을 보여주는 별,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에 관한 에피소드는 민족국가주의가 아니라 보편주의를 말하고, 지금은 헤로데가 박해자로 등장하나 앞으로는 유다인 스스로가 그분의 박해자가 되는 것을 드러내는 이집트로의 피난, 죄 없는 어린이들의 학살 등의 주제는 반복적인 테마다. 즉 하느님의 백성은 죄인이며 하느님의 언약에 믿음이 없고 역사 속에 행위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이다. 이로써 하느님의 진정한 백성은 아브라함의 피를 계승한 민족만이 하느님의 백성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전이고 역전의 사건이 바로 주님의 탄생 안에 있다. 하지만 유다인들의 왕을 흠숭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마태 8,11)

 

루카 복음은 이러한 주님 성탄의 의미가 바로 “가난한 자들”의 차지라고 서술한다.(루카 2,8-20) 즉 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복음은 선포되는 것이며 그들이야 말로 가장 첫 번째 “복음 선포자들”이 되는 것이다.(루카 2,18)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엘리사벳과 동정녀 마리아의 가난과 즈카리아, 마리아, 시메온의 찬미가 등은 바로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의 모든 주제를 불러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인류의 현실로서 이 자리에 예수께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계신다. 그분의 “탄생의 신비”는 거짓 발현들과 거짓신빙성 등을 파괴하시면서 인간의 진정한 모습을 계시하신다. 예수께서는 율법, 아브라함의 후계자, 권력, 부유함을 거부하시고 완성하신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육신”은 “죄의 육신”(로마 8,3)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탄생하는 이 아기 앞에서 우리와 세상의 죄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구석진 땅 출신의 구세주 탄생

 

구세주가 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 나오지 않고, 반쯤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땅으로 변해 버린 구석진 지방 갈릴래아에서 나오느냐는 물음에 마태오 복음은 응답한다. 

 

마태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부정하는 구세주 예수의 파견을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 예수가 참 구세주라고 반증한다. “옛날에는 즈블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요르단 강 건너편”(이사 8,23)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마태 4,15-16)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사 9,1-2)

 

 

가난한 이들과 연대, 우리들의 성소(聖召)

 

화려한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사회는 반면 부의 양극화라는 어두운 면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교회도 급격히 성장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구조가 됐다. 교회가 가난하지 않으면 불의와 부패에 맞서는 ‘예언자의 직무’를 소홀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고, 가난한 이들에 의해 복음화 된다고 말씀하는 교황은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고 인간 증진이라는 분야에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격려한다.

 

교회의 뿌리인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집단이고, 신약의 최후심판에서 예수께서 양이 되는 구원의 길은 가장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하면,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는 자선도 아니고 우리들의 성소(聖召)다. 이것이 주님 성탄의 의미다. 자신의 삶에 빠져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들의 온전한 진보를 분명히 지향하는 결정, 계획, 구조, 과정을 요구해야 한다. 교황은 말씀한다. “스스로 가난한 교회가 돼라!” 가난한 곳이 구세주 탄생의 장소고, 이 구석진 암흑의 땅에 구세주 탄생의 빛이 빛날 것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가톨릭신문, 2017년 12월 25일, 곽승룡 신부(비오·대전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5,42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