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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1: 조선 선교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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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8-19 ㅣ No.919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1) 조선 선교의 임무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 책임 맡아야” 호소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2년 9월 12일 왕 요셉과 함께 조선으로 가기 위해 페낭을 출발했다. 첫 기착지는 마닐라였다. 주교 일행을 태운 배는 태풍을 피해 19일간의 항해 끝에 9월 30일 마닐라항에 도착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마닐라대교구청을 찾아가 교구장 호세 마리아 (Jose Maria Segui, 1773~1845) 대주교를 만났다. 스페인 사람으로 아우구스티노회 출신인 그는 1830년 마닐라대교구장으로 임명됐다. 대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환대했다. 손님들을 자신의 주교관에 묵게 하고 마카오로 가는 뱃삯도 흔쾌히 빌려줬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2일간 마닐라에 머물면서 여러 성당과 도미니코수도회를 방문했다. 엄격한 수도 규칙에 따라 가난하게 수도 생활을 하는 마닐라의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에게 감동했다. 그는 여행기에 “프랑스인들은 아우구스티노회로 가는 걸 선호하는데 몇몇 동료들을 도미니코회로 보내 준다면 그곳 수도자들이 기뻐할 것”이라고 썼다. 주교의 이 바람이 통했는지 알 수 없지만 1839년 4월부터 11월까지 마카오 민란을 피해 마닐라로 피신한 김대건과 최양업, 그리고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사제들은 롤롬보이 성 도미니코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마카오로 가기 위해 10월 12일 저녁 광동이 종착지인 미국 배를 탔다. 주교는 세귀 대주교와 작별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 세귀 대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원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슬픈 예언을 했다. 주교는 “나로서는 희망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항상 생각한다”고 답했다. 

 

배는 다음 날인 13일 아침에 출항해 18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주교는 곧바로 교황청 포교성성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를 찾아갔다. 움피에레스 신부는 주교에게 “파리외방전교회 본부가 마카오의 소속 선교사들에게 브뤼기에르 주교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의 일에 끼어들지도 말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파리외방전교회가 더는 그를 자신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주교는 친정인 파리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에 가지도 못한 채 포교성성 대표부에 머물다 10월 21일 포교성성 차관이 보내온 2통의 소칙서를 받았다. 하나는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였고, 다른 하나는 브뤼기에르 주교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였다.

 

현재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자리. 가톨릭평화신문 DB.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으로 떠나기 전에 마카오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장상들이 자신에게 품은 오해를 우선으로 해소해야만 했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의 책임을 져야만 지속적으로 조선대목구에 사제를 파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주교는 교황청이 이 문제에 대해 아직도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했다. 

 

그래서 주교는 먼저 11월 9일 포교성성 장관에게 “조선대목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줄 것”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특정 선교지를 관할하는 문제를 여러 국적의 신부들에게 맡기게 되면 조만간 그들 사이에 견해의 불일치와 반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한 대립은 조선의 신입 교우들에게 나쁜 표양을 줄 수 있으며, 비신자들의 눈에는 가톨릭 교회가 우스꽝스럽게 비칠 우려가 있다.… 프랑스 교회가 위태로운 시기를 겪고 있지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는 지금과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해 올 수 있었으므로 당장 조선을 맡더라도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 신설 대목구인 조선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장 움피에레스 신부도 11월 11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요청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포교성성) 장관 추기경에게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지지하는 이유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대목구장 가운데 단 한 사람(고르틴 명의 주교 겸 동부 통킹대목구장 자크 방자맹 롱제 주교)을 제외하곤 모두가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을 맡는 일에 찬성하고 있다. 둘째, 조선대목구를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해야만 브뤼기에르 주교의 후임자들도 포교성성에 대해 브뤼기에르 주교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활동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고 느낄 때 기꺼이 일본으로 선교사들을 보낼 것이다.

 

19세기 마카오는 개항의 중심지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사진은 서양 상인들이 중국 관리들과 마카오에서 통상하는 장면을 재현한 마카오 박물관의 미니어처.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에게 편지를 쓴 다음 날인 11월 10일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장상들에게도 장문의 편지를 썼다. “포교성성이 조선 선교지를 직영하겠다는 생각은 오해다. 포교성성이 여러분들의 결정을 기다리다가 나름대로 불쌍한 조선 교우들의 구원에 나선 것뿐이다.… 또 프랑스 정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선 선교 임무를 맡자거나 포르투갈인들이 스스로 이 선교 임무를 우리에게 부탁할 때까지 기다리자는 등의 의견을 장상들이 제안했다.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사업이 끝나거나 완전히 평온한 상태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이 우리에게 조선을 맡길 이유가 없다.… 당장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의 임무를 맡아야 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이러한 노력으로 파리외방전교회는 1833년 4월이 되어서야 조선 선교 임무를 맡기로 공식 결정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8월 2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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