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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크루즈로 떠난 성지순례5: 크레타,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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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706

[예수님을 따라 성인들을 따라] 크루즈로 떠난 성지순례 (5 · 끝) 가톨릭 신자 ‘마음의 고향’ 바티칸서 ‘신앙 증거’ 다짐

 

 

크레타 섬 제 2의 도시로 알려진 하니아(Hania, Chania) 지역의 베네치아 부두(Venetian Port) 전경 . 크레타 섬에서 베네치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다.

 

 

크레타

 

섬들의 나라라고 알려진 그리스에서도 가장 큰 섬, 신(神)들의 왕 제우스가 태어난 곳이며 그리스 문명의 시초가 된 것으로 전해지는 크레타 섬.

 

크루즈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 지역 마지막 일정으로 진행된 크레타 섬 방문은 바쁜 일상 중의 커피 타임처럼 순례 마무리에 앞선 휴식 시간과도 같은 ‘선물’ 이었다.

 

에게해의 푸른 풍광 속에 느껴지는 신신(新新)한 바람 내음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고, 생전에 이미 묘비명을 써놓았던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시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고 묻힌 그. 고향 크레타 섬을 배경으로 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세계적 작가로 일으켰다.

 

순례객이 내린 항구는 크레타 섬 제2의 도시로 알려진 하니아(Hania, Chania).

 

크레타 섬에서 베네치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다. 항구 북쪽의 베네치아 부두(Venetian Port)가 특히 유명하다고 했다. 그리 길지 않은 자유 시간이 주어진 가운데 순례객들은 하니아 지역의 이곳저곳을 삼삼오오 탐방에 나섰다.

 

베네치아 부두는 4백여년 동안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았고 그후 터키 영향아래 있었던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그리스이면서도 베네치아의 분위기를 닮아 있고 또 16세기에 건설된 모스크도 찾아볼 수 있는, 이국적이면서 고풍스런 정취가 가득한 곳이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15세기경 건설했다는 성곽이 그 기운을 그대로 남기고 있는 가운데 옛스런 항구에 정박된 현대적인 요트들은 한편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고 있는 이색적인 모습이었다.

 

이태리 아씨시 천사들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작은형제회 최초의 공동체가 있었던 포르치운꼴라(가장 작은곳)의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사도행전 27장과 티토서 1장에서도 크레타 섬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는데, 특히 티토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신이 아끼는 동료 티토를 교회 체제의 정비를 위해 크레타에 남게 한 내용이 나온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티토는 크레타에서 주교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출신 여가수 나나무스꾸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는데, 그렇게 크레타 섬은 역사와 사연과 이야기가 풍성한 곳이었다. 배로 돌아오는 길, 카페들이 모여 있는 길을 지나려니 그리스인 조르바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상상이 들었다.

 

 

이탈리아

 

크루즈 순례의 대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이뤄졌다. 크루즈가 시작됐던 로마 치비타베키아 항을 떠나기 앞서 순례객들은 이틀 동안 청빈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의 흔적이 가득한 아씨시를 비롯, 라떼란 대성당 등 몇 곳의 로마 순례 일정을 가졌다.

 

이태리 폼페이 로사리오대성당에 모셔진 ‘묵주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화’. 폼페이는 성모순례 성지로도 유명한데, 복자 바르톨로 롱고에 의해 묵주 기도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전파되었다.

 

 

또 크루즈 기항의 첫 일정으로 나폴리 폼페이 유적 및 ‘로사리오 성모기념성당’을 방문하며 묵주기도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던 복자 바르톨로 롱고 등 이탈리아교회 성인들의 삶과 신앙을 찾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이제 십여일의 순례 일정을 마치며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수도, 바티칸에서 그간의 여정을 마무리 하고 다시금 세상 속으로의 파견 시간을 맞게 된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배경을 지니고 있고 베드로의 후계자들인 교황들과 연관된 ‘교황 도시’라는 면에서 로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 ‘교회의 배꼽’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순례지가 아닐 수 없다.

 

현지 스태프의 설명 속에 로마 시내로 진입한 순례객들은 다시 한 번 ‘영원한 도시’ 로마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식 직전 로마를 떠났던 순례객들은 시복식 후 십여 일이 지난 시간임에도 로마 도시 전체에 시복식 열기가 그대로 남아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복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내용의 배너들, 그리고 언제 보아도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진들이 거리 곳곳에 게시된 채 였다. 베드로광장에도 복자의 대형 사진이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순례객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묘지 카타콤바 순례 후 교황청의 여러 미술품과 고대 유물들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바티칸박물관을 찾았다. 이어진 베드로 대성당 순례. 수없이 많은 시간 전부터 가톨릭 신자들이 평생의 순례지로 소망했던 베드로 대성당은 이날도 세계 각 곳에서 온 많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특별히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유해가 모셔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옆 성세바스티아노 경당 제대에는 참배객들이 길게 줄 서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로마 베드로광장. 5월1일 시복된 복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대형 사진이 그대로 게시돼 있었다.

 

 

90년경 교황 아나글레토가 베드로 무덤 위에 세운 작은 경당으로 비롯해 1626년 지금의 대성당 모습을 갖춘 베드로대성당은 그야말로 가톨릭 신자들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광장 중앙의 로마 제국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서 가져와 원형경기장에 세웠다는 오벨리스크는 남다른 감회를 갖게 한다. 사도 베드로가 원형경기장에서 처형된 것을 감안할 때 이 오벨리스크는 그야말로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보았다는 추측을 하게한다. 그 순교의 장면을 후대 신자들에게 말없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파견미사는 바오로 사도 무덤위에 세워진 바오로 대성당에서 봉헌됐다. 예수님과 성인들의 발자취, 특히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정이 주요 순례의 모습이었던 것을 되돌아 볼 때 다시 한 번 그 의미들을 마음에 되새기는 자리가 됐다.

 

미사 주례를 맡은 이성도 사장신부는 “순례의 길에서 마주친 신앙의 자리들, 예수님과 성인들의 목소리를 마음에 담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의미들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녹여내고 실제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스라엘 그리스 터키에서 지냈던 순례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대성당안에 울려 퍼지는, 신앙을 증거하고 믿음을 본받겠다는 내용의 한국어 성가가 새삼 마음 안을 가득 채워 왔다.

 

 

로마의 도미틸라 카타콤바.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지하 묘지다. 순례객들이 지하 묘지 위에 지어진 성전을 거쳐 카타콤바로 내려가고 있다.

 

 

 

복자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유해가 모셔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옆 성세바스티아노 경당 제대 모습.

 

 

로마의 상징이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 콜로세움.

 

[가톨릭신문, 2011년 7월 3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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