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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동양의 진주, 마카오를 가다: 한국교회 첫 사제 기도 · 열정 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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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91

동양의 진주, 마카오를 가다


한국교회 첫 사제 기도 · 열정 서려

 

 

- 마카오는 김대건 신부가 사제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사진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인근 카모에스 공원에 설치된 김대건 신부 동상.


- 신자들뿐 아니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성 바오로 성당 전경. 마카오교구의 빛과 그림자를 상징하는 듯하다.

 

 

서로 오가는 길이 확대되면서 교회 안팎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마카오 교회는 21세기 아시아 대륙, 특히 중국 교회를 향한 새로운 도전을 보여준다.

 

극동 아시아 선교의 전초기지로 복음화의 산실 역할을 한 마카오 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는 일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밑거름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하다.

 

관광사목의 비중을 높이며 한국 교회에 새롭게 문을 두드리고 있는 마카오 교회의 현재를 통해 아시아 교회의 일원이자 보편 교회의 한 형제로 성장해온 한국 교회의 몫을 돌아보는 장을 마련한다.

 

 

김대건 신부, 사제의 꿈 키웠던 곳

 

한국 교회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으로 한국 신자들에게는 남다른 감상을 던져주는 마카오. 16세기부터 400여년 동안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 지난 1999년 중국에 반환돼 ‘중화인민공화국 마카오특별행정구’로 불리는 마카오는 한눈에도 동양과 서양, 그리고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왕국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 삶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를 위하여 성사를 거행하고, 성교회의 경계를 넓혀 나갈 조선인들을 사제로 서품할 것입니다.”(브뤼기에르 주교 1832년 6월 26일자 편지에서).

 

조선 입국을 위해 말레이시아 페낭을 출발한 초대 조선교구장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가 중국 대륙을 횡단하는 4년에 걸친 여행의 관문으로 삼았을 정도로 마카오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극동지역 선교의 전초기지나 다름없었다.

 

 

가톨릭교회와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마카오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513년. 조르쥬 알바레스가 주강 어귀에 닻을 내린 이래 중국 대륙을 드나들게 된 포르투갈인들은 1553년 중국 무역권을 획득하고 1557년에는 중국으로부터 마카오를 조차(租借)했다. ‘마카오’라는 지명은 이곳에 도착한 포르투갈인들이 처음 정박한 아마가오 항구 입구에 있던 ‘아마가오 사원’에서 유래됐다.

 

마카오는 1557년 이래 가톨릭 국가인 포르투갈의 동양 무역의 근거지가 되는 동시에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 극동지역 선교의 전초지가 되었다.

 

1565년 예수회가 이곳에 본부를 두어, 성 바오로와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해 성직자를 양성했고, 예수회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이곳을 중심으로 극동 각지를 순회하며 선교업무를 관장함으로써 예수회의 일본 및 중국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특히 1602년에 설립된 성 바오로 신학교는 극동 지역 최초의 서구식 대학으로 그리스도교 정신을 심는 산실 역할을 했다.

 

1576년 교황 그레고리오(Gregorius) 8세에 의해 말래카(Malacca) 주교구로부터 분리된 마카오교구는 1588년 일본교구와 1690년 중국의 북경 및 남경교구가 설립될 때까지 중국은 물론 일본 싱가포르 말래카 등 광대한 지역을 관할했다.

 

 

한국 교회와 마카오

 

‘유럽의 향기’ ‘동양의 진주’라는 별칭을 지닌 마카오가 한국 교회 신자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포르투갈의 보호권 아래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선교회들의 선교 전초기지로 활용되며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극동지역에 꾸준히 신앙의 밑거름을 대주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선교 단체 중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성 바오로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해 성직자를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또 파리외방전교회 극동지역 대표부는 1732년 대표부를 광동에서 마카오로 이전해 아시아 선교 활동의 발판으로 삼았다. 이 부분에서 마카오는 한국 교회와 보다 직접적인 연관을 맺게 되는데, 1808년 북경 구베아 주교에 이어 조선 교회 관할권을 계승한 수자 사라이바 주교는 1811년 마카오에서 한국 교회 신자들이 보낸 2통의 편지를 받고 이를 번역해 교황청에 보냈다.

 

또 1825년경에 쓰인 조선교회 교우들의 청원서 역시 북경을 거쳐 마카오에 전달됐는데 당시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부대표 움피에레스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해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리적으로도 마카오는 조선으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의 경유지로 매우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마카오를 거쳐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한국 교회 신자들이 마카오를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성 김대건 신부와의 인연이다. 1835년 마카오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는 본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이듬해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는데 세 신학생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해 사제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경리부 책임자 르그레즈와(Legregeois) 신부는 경리부 안에 임시로 조선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신학생 3명을 교육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르그레즈와 신부 책임 아래 경리부 차장 리브와(Libois) 신부가 주로 세 신학생의 교육을 담당하고 나중에 조선 선교사로 부임한 메스트르(Maistre)와 베르뇌(Berneux) 신부 등이 마카오에 체류하는 동안 이들의 교육을 돕기도 했다. 최양업과 김대건 신학생은 아편전쟁을 전후해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해 두 번이나 필리핀 마닐라로 피난해야 했고, 또 최방제와 1년여 만에 사별하는 등 유학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으나 1842년까지 공부를 계속하며 그리스도를 향한 길을 닦을 수 있었다.

 

 

남겨진 가톨릭 유산과 과제

 

마카오의 상징적인 랜드 마크로 꼽히는 성 바오로 성당 앞 계단은 김대건 신부가 무릎으로 오르며 기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성 바오로 성당은 예수회 선교사가 설계하고 일본 나가사키에게 박해로 쫓겨 온 일본인 신자들의 협력으로 1602년부터 짓기 시작해 1637년에 완성됐다. 한 때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기도 한 이 성당은 1835년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건물 정면과 계단, 좌우측 일부 벽면과 지하실만 남아 있다.

 

김대건 신부는 당시 사제들만 통과할 수 있는 성당 정문 앞 돌계단을 무릎기도로 오르면서 ‘반드시 사제가 되어 이 문을 통과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의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는 이들은 ‘믿음으로는 안드레아 신학생을 따를 자가 없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와 인연으로 마카오 곳곳에는 그를 기억하는 상징물들이 남아 있다. ‘흰비둘기 공원’으로 불리는 카모에스(camoes) 공원에는 1985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가 세운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세워져 있고, 바로 인근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 성당에는 홍콩의 한 한인 신자가 봉헌한 김신부의 목각상이 모셔져 있다.

 

 

마카오 교회의 빛과 그림자

 

마카오 교회는 가톨릭교회의 극동지역 선교 활동 전초기지였다는 명성이 무색하게 현재 10개도 못 되는 본당만이 사목 활동을 펼치고 있을 정도로 초라한 교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제서품식은 10년째 거행되지 못하고 있으며 1년에 영세하는 이들도 300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3만명 가량의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20여명의 교구 신부를 포함한 40여명의 사제로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 번 뿌려진 신앙의 유산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예수회 등 수도회들이 오래전부터 끼친 영향으로 마카오 내 학교시설 50%는 아직까지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다. 또 사회복지 사업도 잘 이뤄지고 있어 교육과 사회복지 등을 통한 선교 활동은 활발한 편이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한국 교회에서 전해준 ‘성서 40주간’ 교육을 접목한 ‘80주간 성서 교육’을 통해 평신도 양성에도 적극 나서며 침체된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한국 교회의 첫 사제를 꿈꾸었던 철부지 소년들이 조선 교회를 가슴에 안을 청년으로 성장한 곳 마카오. 

 

“김대건 신부로 인해 이어진 마카오와 한국 교회 큰 인연이 다양한 교류와 만남을 통해 새로운 열매를 맺길 바란다”는 마카오교구 신자들의 바람이 두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음성처럼 다가온다.

 

[가톨릭신문, 2008년 3월 9일, 서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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