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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서평: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윤민구, 국학자료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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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2 ㅣ No.886

[서평]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

윤민구, 국학자료원, 2014

 

 

잘 알고 있듯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이승훈(李承薰, 베드로)과 그의 지인들이 쓴 글을 묶은 것으로 알려진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소장되어 있는데, 이 책 속에는 이벽이 《천학초함》(天學初函)을 읽고 지었다는 <성교요지>(聖敎要旨), 기해년(1779) 12월 주어사(走魚寺) 강학(講學) 후에 이벽(李蘗, 세례자 요한)이 지었다는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 기해년 주어사 강학 후에 정선암(丁選庵), 권상학(權相學), 이총억(李寵億)이 지어서 주었다는 <십계명가>(十誡命歌), 이가환(李家煥)과 김원성(金源星)이 지어서 주었다는 <경세가>(警世歌), 그리고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등이 실려 있다. 이 밖에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는 《이벽전》, 이벽의 권 씨 부인이 썼다는 《유한당 언행실록》, 초기 천주교 주요 신자들의 《영세명부》,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부인이 세례를 받을 때 이승훈에게 받았다는 영세증명서인 <영세명장>, 이벽과 그의 부인이 세례를 받을 때 받았다는 <영세명패>, 경신년(1800)에 천주교 신자들이 만들었다는 ‘경신회’의 설립 목적을 적은 <경신회 서>(庚申會 序)와 경신회의 규칙을 적은 <경신회 규범>(庚申會 規範) 등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은 구한말 전환국(典?局)에서 쓰던 종이에 적은 것도 있고 역사적 사실과 잘 맞지 않은 내용들도 있어서 철저한 사료 비판이 요구되는 자료였다. 그리하여 교회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이와 같이 철저한 사료 비판이 선행되지 않은 자료들을 연구에 활용하는 것을 대체로 기피하였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사료 비판에 취약한 신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이나 문학을 전공한 연구자들은 이러한 자료들을 철저한 사료 비판 없이 믿을 만한 자료로 여겨 이것들을 활용하여 연구를 활발히 진행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1779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일반 신자들을 상대로 신심 강의를 널리 해 오기도 하였다. 게다가 최근에 와서는 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자료들을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윤민구 신부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관한 자료들을 거의 모두 철저하게 비판하여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 - 성교요지 · 십계명가 · 만천유고 · 이벽전 · 유한당 언행실록은 사기다 -》라는 책을 저술하여 2014년 6월 28일 국학자료원에서 간행하였다. 이에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는 윤민구 신부의 새로운 저서가 한국 천주교회에 미치는 파장이 지대할 것을 고려해 예정에 없던 발표의 장을 특별히 마련하여, 2014년 7월 19일 윤민구 신부가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서 발표하고, 필자와 차기진 박사 등 여러 연구자가 이에 대해 논평하였다. 이때 필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써서 2014년 12월 말에 간행되는 《교회사연구》 45집에 싣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바쁜 사정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제야 서평을 쓰게 되어 미안하기 짝이 없다.

 

먼저 윤민구 신부가 새로 세상에 내놓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의 내용을 요약하여 소개하고, 다음으로 이 책의 성과와 과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글이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관한 자료와 그 연구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 책의 내용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책을 내면서’와 ‘서문’, 본론 ‘제1부 <성교요지>는 천주교 신자가 쓴 글이 아니다’와 ‘제2부 <십계명가>, 《만천유고》,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 등의 실체’, 그리고 ‘책을 마치며’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본론 ‘제1부 <성교요지>는 천주교 신자가 쓴 것이 아니다’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 《당시초선》(唐詩?選)의 한문본 <성교요지>, 별도의 한글본 <성교요지> 등 세 종류의 <성교요지>의 제목 부기(附記), 말미 부기, 용어와 표현, 내용 등을 두루 비교 분석하여 그 실체를 규명한 것이다.

 

저자는 우선 세 종류의 <성교요지>에서 성서와 관련된 인명, 지명, 표현 등을 두 종류의 한문본 <성교요지>에서 6개,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의 주석에서 10개, 한글본 <성교요지>에서 3개 도합 19개를 추출하여 중국에서 간행되어 우리나라에 전해진 한문서학서를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읽은 많은 천주교 서적들의 용례와 중국 · 일본 · 한국의 개신교 성서의 용례와 비교 검토하였다. 이어 세 종류의 <성교요지> 본문의 내용과 주석의 내용도 차례로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그 결과 세 종류의 <성교요지>는 이벽을 비롯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이 지은 것이 아니라, 개신교의 성서를 대충 읽은 사람이 1925년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 79위의 시복을 계기로 한국 천주교회의 순교자들과 천주교회사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때를 틈타 속여 팔기 위해 1920~1930년대에 개신교의 용어로 위조한 위서(僞書)라고 밝혔다.

 

본론 ‘제2부 <십계명가>, 《만천유고》,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 등의 실체’는 <십계명가>, 《만천유고》, <천주실의발>,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 <영세명부>, <영세명장>, <영세명패>, <경신회 서>, <경신회 규범> 등의 내용, 제목 부기, 발문(跋文) 등을 비교 분석한 것이다. 저자는 우선 <십계명가>는 십계명의 분류 방식이 철저하게 개신교식으로 되어 있고, <천주실의발>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을 이만채(李晩采)가 축약하여 《벽위편》(闢衛編)에 수록한 것을 오자(誤字)까지 그대로 베낀 것이며, 《만천유고》의 발문에는 이벽의 호 ‘曠菴’을 ‘曠奄’으로 잘못 표기한 점 등이 있다고 규명하였다.

 

이어 《이벽전》과 《유한당 언행실록》에는 개신교 성서를 대충 읽은 사람이 위조한 <성교요지>를 언급한 내용, 1920~1930년 이후에 사용한 ‘아오스딩’이란 표현, 천주교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영세명부>에는 각 사람의 신상명세가 사실과 맞지 않게 실려 있고, <영세명장>에는 정약종의 출생 연도가 틀리게 적혀 있으며, <영세명패>에는 이벽의 세례명이 잘못 적혀 있고, <경신회 규범>에는 천주교회에서 쓰지 않는 ‘성서’와 ‘천주강림’ 등의 용어가 나오며, <경신회 서>에서는 불합리한 조선 사회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천주교 신봉을 제시하고 있다고 논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그 모두가 <성교요지>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성서를 대충 읽은 사람이 1920~1930년대에 속여 팔기 위해 위조하거나 베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이러한 위조된 자료나 물건을 근거로 하여 1779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였다.

 

 

2. 책의 성과와 과제

 

저자도 책에서 언급하였듯이, 고 주재용 신부는 고 김양선 목사가 《만천유고》를 비롯한 초기 한국 천주교 관련 자료들을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기증하였다는 소식을 1967년 8월 27일자 《가톨릭시보》의 기사를 통해 접하고, 자신이 과거 1937년에 하마터면 책장사에게 속아 위조된 남종삼(南鍾三, 요한) 순교자의 옥중 편지를 살 뻔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이런 위조한 물건의 장난이 심하니,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과 유물들은 엄격하고 세밀한 감정이 있기 전에는 확신이 가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자들도 대체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에 관한 자료들과 유물들을 연구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 신빙성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연구에 활용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이들 자료를 종합적으로 철저히 규명하는 본격적인 연구는 성서와 교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이 아울러 있어야 하고, 또 여러 자료를 비교 분석하는 데 많은 품이 들기 때문에 누구도 그동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비판하는 데 그쳤다.

 

그러는 사이 저자가 책에서 지적하였듯이 김양선 목사는 자료들의 신빙에 대한 충분한 검토도 하지 않은 채 《한국기독교사연구》 2(기독교문사, 1971)에서 “이벽이 주어사 강학 후에 <성교요지>를 지었다”라고 단정하였다. 또한 김옥희 수녀, 하성래 교수, 이성배 신부, 변기영 신부 등 일부 천주교 관계 연구자들도 철저한 사료 비판 없이 《만천유고》에 들어 있는 <성교요지>,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 등과 《이벽전》, 《유한당 언행실록》 등을 주된 자료로 활용하여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런데 일찍부터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역사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서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오던 저자는 2002년 7월에 국학자료원에서 출판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만천유고》에 실려 있는 <성교요지>,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등과 《이벽전》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그 자료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이들 자료의 연구에 첫발을 뗀 저자는 2011년 가을부터 성서와 교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에 관한 자료들의 실체를 모두 철저히 규명하는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여, 그 모두가 1920~1930년대에 속여 팔기 위해 위조하거나 베낀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담은 《초기 한국천주교회사의 쟁점 연구》를 지난해 6월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저자의 연구로 마침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에 관한 자료들이 세상에 알려진 지 47년 만에 베일에 가려 있던 그 실체를 처음으로 낱낱이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랫동안 과제로 물려오던 학계의 난제를 마침내 해결한 점에서 저자의 책은 연구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예정에 없던 한국 교회사 연구발표회의 자리를 특별히 마련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구 성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으로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에 관한 자료들에 대한 연구가 모두 충족된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실마리로 하여 이들 자료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책의 내용 가운데 보완해야 할 점이나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저자는 《만천유고》의 <십계명가> 제목에 부기되어 있는 ‘정선암’(丁選庵)의 표기 가운데 ‘庵’ 자는 ‘菴’ 자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庵’과 ‘菴’은 통용되었으니, 안정복의 호를 ‘順菴’이라 표기하기도 하고 ‘順庵’이라 표기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또한 저자는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 본문의 글씨체와 부기의 글씨체가 확연히 다르다고 지적하면서 《만천유고》의 한문본 <성교요지> 제목 밑에 붙어 있는 부기는 그 한문본 <성교요지>의 본문이 쓰인 후 나중에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천유고》에 수록되어 있는 글은 글자의 크기가 서로 다르기도 하고, 정자로 쓰기도 하고 흘려 쓰기도 하여, 언뜻 보면 글씨체가 다르게 보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사람의 글씨체임이 분명하다. 아울러 저자는 <경신회 규범>의 회원 명단에 천주교 신자가 아닌 이학규가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임성빈 선생이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이학규는 신자였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저자는 《만천유고》에 들어 있는 <성교요지>, <십계명가>, <천주공경가>, <경세가>, <천주실의발> 등을 차례로 검토한 뒤 《만천유고》를 개신교 성서를 대충 읽은 사람이 1920~1930년대에 속여 팔아먹기 위해 위조한 책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만천유고》의 ‘잡고’(雜稿)에는 저자가 검토한 글들 외에도 국한문으로 된 <농부가>(農夫歌)가 들어있고, ‘시고’(詩稿)에는 한문으로 된 시(詩)가 70여 수 실려 있으며, ‘수의록’(隨意錄)에도 <북경일본유구국정도>(北京日本琉球國程度)를 비롯한 여러 편의 글이 들어 있다. 특히 《교회사연구》 8집(1992)에 실려 있는 <이승훈 관계의 문헌 검토 - 《만천유고》를 중심으로 ->라는 이이화 선생의 논문에 지적되어 있듯이, 이들 시에는 천주교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 않지만, 작자가 한때 벼슬살이한 사람임을 알려주는 <경복궁구호>(景福宮口呼), 이벽과 친구임을 나타내 주는 <야여이덕조완월차당절운>(夜與李德操玩月次唐絶韻), 兩水里(양수리) · 마현(馬峴) · 두미협(斗尾峽)에 왕래가 잦았던 사람임을 보여 주고 또 외국에서 돌아와 그 감상을 나타내고 있는 ‘忽看雲峯天半出 故國顔色動孤舟’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두미호주>(斗尾呼舟) · <주행이두>(舟行二頭) 등이 실려 있다. 또한 <북경일본유구국정도>의 중국 부분에는 구련성(九連城)에서부터 북경(北京)까지의 지명과 거리, 일본 부분에는 부산에서 대마도 그리고 왕성(王城)까지의 거리, 유구 부분에는 수로로 일기도(一岐島)에서 두성(頭城)까지의 지명과 거리가 적혀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흔히 외국사행(外國使行)으로 가는 벼슬아치들이 남기거나 참고로 했던 자료들이다. 따라서 저자가 미처 검토하지 못한 이러한 글들에 대해서도 앞으로 그 실체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이벽전》에 이벽이 1778년에 ‘홍군사’에게서 《천학전함》을 받아 읽은 후 천주교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되어 있는 데 대해, 저자는 이벽이 홍대용(洪大容)에게서 천주교 서적들을 얻어 보았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익이 제자들에게 서학(西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도록 계몽하였으나, 신후담(愼後聃)을 비롯한 안정복(安鼎福), 윤동규(尹東奎) 등이 잇달아 천주교를 이단으로 비판함에 따라 성호학파 내에서는 끝내 서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은 서학을 접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익과 그 제자들, 그리고 이익의 제자들 사이에는 서학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이익의 제자들인 안정복, 윤동규, 신후담, 이병휴(李秉休) 대에 와서는 자신의 제자들과 서학에 대해 토론한 사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벽이 사그라진 서학에 대한 불씨를 되살려 마침내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가서 살면서 북학파 실학자들에게서 서학서를 빌려 본 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 점은 황윤석(黃胤錫)이 《이재난고》(?齋亂稿)에서 북학파 이덕무(李德懋)의 말을 인용하여 이벽이 수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히려 이벽이 홍대용에게서 서학서를 얻어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 《이벽전》에 이벽이 갑진년(1784) 3월에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들을 전해 받자, 그 부인인 유한당 권씨가 그것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필사하였다고 되어 있는 데 대해 비판하면서 이벽을 첫째 부인이 죽기 전에 간음죄를 지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족보에 이벽이 1785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벽의 아들 이현모는 이벽이 죽기 바로 전해인 1784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벽의 첫째 부인 권 씨는 무육(無育), 즉 자식을 낳아 기른 적이 없으니, 이현모를 낳은 사람은 이벽의 둘째 부인인 해주 정씨가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814년 갑술보(甲戌譜)와 1873년 계유보(癸酉譜)에 보면 이현모가 ‘승적’(承嫡) 즉, 첩에게서 난 서자가 적자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현모가 아들이 없어서 이정주(李禎周, 계유보에는 李驥榮으로 되어 있음)를 계자(系子), 즉 양자로 들였는데, 이정주는 이현창(李顯昌)의 서자로서 출계(出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갑술보와 계유보의 기록으로 볼 때 이현모는 이벽의 첩인 해주 정씨가 낳은 서자임이 분명하다. 이벽의 부인인 유한당 권씨가 1784년에 천주교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했는지 여부는 사실이 아닐지 몰라도, 이현모가 이벽의 서자인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점은 <성교요지>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한문본 <성교요지>의 정확한 번역과 주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에 관한 자료들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한문본 <성교요지>이다. 그런데 이 한문본 <성교요지>는 문장이 대단히 어렵고 성서나 교리의 내용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문에 정통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사와 성서 및 교리에 해박한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정확히 번역해 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번역되어 간행된 <성교요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 전문가가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교요지>의 실체를 올바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한문에 정통한 전문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 성서와 교리에 해박한 전문가 등이 협력하여 한문본 <성교요지>를 정확히 번역하고 주석하는 작업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위조한 책의 거래와 관련하여 김진소 신부에게 새롭게 들은 내용이 있기에 참고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김진소 신부가 고 김구정 선생에게 1978년 전주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고 주재용 신부가 은퇴해서 1960년대 초쯤에 원주교구 내에 살고 있었는데, 한 책장사가 <김대건전> 한문본이 나왔다며 가지고 왔다. 그래서 펼쳐 보았더니 좀 이상하여, 현재 돈이 없으니 놓고 가면 돈을 구해서 사겠다고 하였다. 책장사가 그 말을 믿고 놓고 갔기에, 그 책을 자세히 보았더니, 당시에 사용하지 않은 용어가 나와서 그 책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책장사가 다시 왔을 때, 돈을 미처 구하지 못했다고 둘러대면서 서울교구의 윤형중 신부에게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이때 책장사에게 라틴어 편지를 한 장 써서 주면서 윤형중 신부에게 전해 드리라고 했는데, 그 편지에는 책장사가 팔려고 하는 <김대건전>은 가짜이니 구입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다. 며칠 후에 책장사가 윤형중 신부를 서울로 찾아가 라틴어 편지를 전해 주면서 <김대건전>을 사라고 권하자, 윤형중 신부가 그 편지를 읽어본 뒤 주재용 신부가 일러준 대로 돈이 없어서 구입할 수 없다고 돌려보냈더니, 얼마 후에 <김대건전> 한글본이 나왔다고 다시 가지고 와서, 역시 구입하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교요지> 등이 속여 팔기 위해 위조되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데 보탬이 되는 자료라고 하겠다.

 

이상에서 지적한 사항들 외에도 좀 더 깊이 검토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 윤민구 신부의 책에 여럿 있다. 이에 수원교구의 시복시성위원회에서 그 후속 연구를 올해 1월부터 진행해 오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가 결실을 맺게 되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기 한국 천주교에 관한 자료들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한다.

 

[교회사 연구 제46집, 2015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서종태(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본문 중에 ? 표시가 된 곳은 현 편집기에서 지원하지 않는 한자 등이 있는 자리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첨부 파일에서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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