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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영화 속 시간여행, 그리고 생명 구하기: 너의 이름은과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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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5 ㅣ No.1001

[영화 속 ‘시간여행, 그리고 생명 구하기’] ‘너의 이름은’과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지나간 시간으로 다시 한 번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지나간 삶을 다시 선택하면서 살고, 그 선택으로 현재를 바꿀 수도 있으니.

 

누구도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삶과 자연의 질서를 뒤흔들고,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선(線)이고 흐름이다. 어느 누구도 정지시키거나, 건너뛰거나, 늦출 수 없다. ‘벤자민의 시계’처럼 결코 거꾸로도 가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다. 과거는 과거의 현재이고, 현재는 미래의 과거이며, 삶은 그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는 흐름 위에서의 선택이다. 시간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기에 언제, 어디서나 같다. 영화 <인터스텔라>는 지구보다 시간이 수 천 배 느린 은하계가 존재한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고, 설령 있다 한들 미지의 세계이니 의미가 없다.

 

그 ‘불가능’을 알지만, 우리는 상상으로나마 시간여행을 꿈꾼다. 지금의 삶이 힘들고 후회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욕망은 강할지 모른다. 지난 삶에서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과 후회 때문이다. 시간여행의 소설과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소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도 “누구나 한번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인생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것”이라면서 애틋하고 간절한 시간여행에 초대한다. 소설은 시간여행에 동참한 누리에게 묻는다. 인생을 다시 쓸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실수를 바로잡고 싶은지. 인생에서 어떤 고통, 회환, 후회를 지워버리고 싶은지. 진정 무엇으로 존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홍지영 감독이 이국적 냄새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한국영화로도 만든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한다. 그래서 폐암으로 죽음을 앞둔 초로의 소아과 의사 수현(엘리엇)은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 ‘기적’이 그럴듯한 과학적 법칙에 의해 가능하든, 엉터리 주술에 의해서든 상관 없다. 시간, 횟수도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허구이고 상상이니까.

 

영화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팀(도널 글리슨)은 가문의 유전적 초능력으로 어두운 곳에서 눈을 감고 주먹만 쥐면 몇 번이고 돌아가고 싶은 시간으로 이동한다. 일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감성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열여섯 살의 고교생 타키와 여고생 미츠하는 꿈속에서 서로 몸이 바뀌면서 3년의 시간을 넘나든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수현을 아홉 번이나 30년 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캄보디아 노인이 준 특별한 성분도 없는 알약이다.

 

그렇게 과거로 돌아가는 영화와 소설들은 시간을 필요할 때마다 되돌려, 과거를 멋대로 바꾸고, 그 결과로 현재(미래)를 뒤죽박죽으로 만들기도 한다. <터미네이터>처럼 거창하게 인류의 미래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와 <너의 이름은>은 삶에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다. 수현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30년 전 자신의 이기심과 무관심으로 죽은 여인을 두 번이나 살려놓는다. <너의, 이름은>의 타카 역시 운명적인 인연으로 이어진 미츠하를 구하기 위해 3년 전 마을에 혜성이 충돌하기 직전으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이보다 더 간절하고, 아름답고, 숭고한 선택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허구일망정 영화와 소설도 그들에게 ‘시간여행’을 허락한다. 삶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까지 던져서라도 새로운 선택으로 과거의 후회와 아픔을 씻고 돌아올 기회를 준다.

 

이렇게 ‘기적’을 만나 과거를 다시 살고, 현재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그것으로 미래(현재)를 바꾸면 인생에 후회는 없어질까. 지금보다 행복한 세상과 삶이 될까. 솔직히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세상에 또 하나의 ‘나’인 아바타가 존재하지 않는 한 인간은 두 개의 시간과 인생을 동시에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새로운 선택과 시간에도 후회와 미련은 남을 것이다. <어바웃 타임>의 팀이 끝내 사랑하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듯, 세상에는 아무리 기회가 다시 주어져도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선택한 시간이 쌓인 것이다. 이를 부정하고 버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와 의미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도, 설령 간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수현도 이미 30년이란 또 다른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사랑하는 딸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절반의 선택만 했다.

 

시간여행은 전혀 새로운 인생, 후회 없는 선택이란 달콤한 환상만 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재’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지금의 ‘나’를 함부로 되돌리거나 바꾸려 하지 말고, 미래에 과거가 될 이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선택을 하라고 충고한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현수도 30년 전의 자신에게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30년 전 자신도 나중에 후회와 회환으로 ‘시간여행’을 또 해야 하니까.

 

톨스토이는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소설에서 죽음의 천사가 등 뒤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늘 저녁까지도 살지 못하는 한 남자가 그 사실을 모른 채 1년을 신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뜯어지지 않는 튼튼한 장화를 주문한다.

 

그러니 하물며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인간은 동시에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없고, 선택하지 못한 것의 결과 또한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매순간 선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내가 선택한 것을 소중히 해야 한다. 인생에서 후회는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기억 하나쯤 갖고 있다면 굳이 영화와 소설의 상상을 빌려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는 능력은 주지 않았지만, 대신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시기에 모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가르쳐 주셨으니까.

 

[평신도, 2017년 봄(계간 55호), 이대현 요나(국민대 겸임교수 ·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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