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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 성소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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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19 ㅣ No.583

[시대의 징표] 수도 성소의 위기

 

 

몇년 전부터 거론되는, ‘문제’로까지 인식되는 수도 성소의 위기. 이미 유럽 등 서구 사회에서는 성직자와 수도자의 수가 줄어든 지 오래되었다. 얼마 전부터는 한국 교회 안에서도 수도 성소의 위기와 해결책이 거론되며, 새로운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연구와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가톨릭평화방송(CPBC)뉴스를 그대로 인용하자면, 2013년 말 기준 한국 교회의 수도자 수는 11,737명, 20년 전과 비교하면 남자 수도자는 74.1%, 여자 수도자는 48.6%나 증가했다(2015년 2월 2일자, ‘벼랑 끝, 수도 성소, 돌파구는 없나?’). 수치만 놓고 볼 땐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은 심각하다. 서원을 준비하는 남자 수련자는 1994년에 비해 41%, 여자 수련자는 무려 67%나 급감했다. 이처럼 수도 성소가 급감하면서 수련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수도회가 전체의 절반이나 된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은 수도회와 신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감소는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렇다고 그저 ‘한국 천주교회의 일’일 뿐이라고 미루어 놓기엔 현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이 어딜 향해 가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는 현재의 좌표이자 시대의 표징이다.

 

2016년 2월 1일 ‘봉헌 생활의 해’를 마감하는 자리에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수도 성소가 급격히 줄었다고 좌절하지 말고 기도를 더 열심히 해서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다. 특별히 봉헌 생활을 떠받치는 중요한 세 개 기둥으로 예언자가 되는 것,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희망을 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수도자들이 세 개의 기둥을 받치며 제대로 잘 산다면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최근 많은 젊은이를 만나며 유독 늦은 사춘기를 겪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요즘 젊은이들은 수도 성소에 관심이 없다.”라고 쉽게 단언하기엔 너무 복잡한 현실 안에서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소의 위기’만을 외칠 일이 아니다. 세상의 위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린 어떤 어른으로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가?

 

 

질문을 제대로 던지고 있나

 

우리는 가치관 부재의 시대에 산다. ‘어떻게 살까?’라는 물음은 인간이 혼란스러운 세상 안에서 삶의 길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지도의 구실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주의가 팽배하고 자본주의로 점철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을 ‘무엇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살까?’라는 질문으로 잘못 알고 있다. 오로지 직업에만 국한된 생각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사람들을 소비자로 만드는 사회 분위기는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벌고 고급 소비자가 되는지에만 몰입하게 한다.

 

자신에게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 물은 적이 있나? 조금 더 살아온 인생의 선배로서 이제 막 가치관을 형성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잘못된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또한 그들이 용기 내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할 때 “그게 돈이 되겠니?”라는 위험한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닌지도 반성해 볼 일이다.

 

 

예언자적 용기를 가지고 있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2017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에 “생존의 유혹을 뿌리치고 예언자적 용기를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색하게 우린 생존의 유혹에 빠져 예언자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예언자적 용기를 내어 산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외치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물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특별히 이 혼돈의 시기에, 지난 시절의 수도자와 성직자 선배님들이 그러하셨듯이, 어디서나 가차 없이 진리를 외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니 이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용기여야 한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나

 

성공과 성취가 중요한 이 시대에 우리는 모든 것의 결과와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고 있다. 흠 없는 사람만을 인정하던 시대, 자신의 선택이 아님에도 가난이나 장애로 말미암아 ‘죄인’으로 불리던, 예수님이 계셨던 그 시대와 다를 바 없다. 사람을 수단으로 쓰고,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 마치 기계의 부품 다루듯 그렇게 쉽게 놓아 버리는 관계 안에서 우린 사람답게 살고 있지 않다.

 

‘죄인’들과 밥을 먹고 손을 잡으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는가? 현상적인 결과가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는 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청소년을 만나지만, 사실 그들을 만나는 수단인 일에 최선을 다하고 훌륭히 해내고 싶은 나 자신을 의식한다. 마음과 시간의 여유를 가질 수 없어 정작 학생들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개인적 시간을 내주지 않는 강퍅한 나를 만나며 ‘나는 진정 사람을 만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을 품고 있나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희망을 품으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 본보기로 삼을 ‘어른’이 없더라도, 세상이 맘몬에 휘둘리고 성공에만 매달리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일 것이다.

 

사실 절망이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어른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지향하며 묵묵히 살아간다면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물론, 아주 천천히 말이다. 이것이 당장 ‘문제’라 일컬어지는 수도 성소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할 여지를 안겨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선 안 된다. 괄목할 만한 입회자 수에 마음이 홀려서도 안 된다. 희망을 품어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면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 이 느린 변화는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구실을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세상과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아닐까? 우리가 ‘무언가’로 살아가는 것은 ‘그다음의 일’일 것이다.

 

* 이지현 로사 - 성심수녀회 수녀. 성심여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향잡지, 2017년 4월호, 이지현 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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