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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사회]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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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05 ㅣ No.1379

[새로봄]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성당에 왜 다니느냐’는 질문에 대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라고 한다. 교회가 요구하는 정답은 ‘신앙을 통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나 ‘영원한 생명’, 혹은 ‘구원’의 추구이지만, 결국 참된 신앙이 현세에서 누리는 ‘마음의 평화’로 연결되므로 이 대답이부족하기는 해도 꼭 틀린 답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하는 평화

 

일반적으로 ‘평화’는 “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표준국어대사전)로 정의된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 혹은 전쟁의 위협,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권력과 돈을 둘러싼 추악한 비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혼란을 생각하면 ‘우리가 바라는 평화가 이 세상에 한시라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또한, 굳이 거창한 ‘세계 평화’가 아니라 소소한 우리의 일상을 떠올려도 현실은 ‘일체의 갈등이 없는 평온함’과 거리가 아주 멀다. 많은 이에게 일상은 생존을 위한 전쟁터이다. 외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조차도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미움, 시기, 질투, 원망과 같은 감정으로, 혹은 세상의 악이나 질병, 혹은 사고로 말미암은 고통 때문에 마음은 늘 잔잔한 호수가 아니라 거친 폭풍우에 휩싸인 바닷물같이 출렁거리는 삶을 살아간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과연 이런 현실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

 

 

평화, 하느님의 근본 속성

 

구약성경에서 히브리 말 ‘샬롬’으로 표현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고요한 상태가 아니다. 성경의 ‘평화’는 그것을 넘어서는 더 넓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이자 축복의 결과로(말라 2,5 민수 6,26 참조), 마음의 안정이자(레위 26,6 참조) 물질적이고 영적인 안녕과 풍족함이며(이사 48,18 54,13 66,12 참조), 기쁨의 원천이며(잠언 12,20 참조), 정의의 열매이다(이사 32,17 참조).

 

더 나아가 기드온이 “주님은 평화”(판관 6,24)라고 말했듯이 평화는 ‘하느님의 근본 속성’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창조 질서는 평화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것은 창세 1장이 빛의 창조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조화로운 질서를 이룬 피조물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평화이신 하느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피조물은 이처럼 서로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하느님과 ‘흠없는 이’로서 살아가도록 불린 아브라함(창세 17,1)처럼 피조물들은 하느님과 맺는 흠 없고 올바른 관계를 통해, 또다른 피조물과 맺는 올바른 관계를 통해 평화의 길로 초대되었다(《간추린 사회교리》 488항 참조).

 

평화는 신약성경과 예수님의 메시지에서도 핵심 주제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 하셨고,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2,14)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평화를 추구하며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일상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평화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기도와 성찰을 요구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않다”(요한 14,27), 혹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그분의 평화가 단순히 사회적·정치적으로 갈등이 없는 상태나, 불의에 야합하고 폭력으로 반대자를 억누름으로써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평화는 내적인 투쟁과 정화를 거치고, 기꺼이 십자가 죽음마저도 받아들이는 ‘자기 비움’으로써 주어지는 평화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속성’으로서, 풍요로움과 조화로운 질서로서 평화를 선물로 받기 위한 노력은 ‘회심’에서 시작된다. 즉 마음속의 증오와 완고함, 집착, 이기심, 지배욕 등은 버리고 겸손과 온유, 자기 비움과 수용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배척하는 사람은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할 뿐이다.

 

교황 요한 23세는 《지상의 평화》에서 국가 간의 대립으로부터의 ‘무장해제는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무기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113항)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음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점차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와 더 넓은 세상으로 진리, 정의, 자유, 연대를 기초로 한 평화를 확장해 나가야 한다.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다(<사목헌장> 78항)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공정함을 통해 평화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의로운 삶은 일상에서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부당한 욕심을 다스리고 매사에 정직하고 공정하게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정직하면 손해 본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순응하며 주변의 불의와 부정에 눈감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살아간다면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일도 정의의 열매로서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인류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생태계를 착취하고 파괴한다면 이는 하느님이 부여하신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후대에 자손들이 누려야 할 몫까지 빼앗는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다.

 

‘평화는 사랑의 열매’이다(<사목헌장> 78항)

 

사랑은 각자의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정의가 아니다. 정의를 초월해 더 많은 것을 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요구보다 오히려 더많은 것을 내주는 애덕 앞에서는 다툼이 생길 수 없다. 사랑의 열매인 평화는 구체적으로 자비와 비폭력, 용서와 화해를 통해 추구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해 폭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을 선택하셨던 것처럼 평화의 일꾼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에서 사소한 폭력도 거부해야 한다. 이는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십자가의 사랑이 결국 진정한 승리의 길이라는 부활신앙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소명

 

폭력적인 적대와 대립으로 점철되어 온 남과 북은 화해와 협력을 통해 분단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시대적 사명이자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소명이다. 통일 정책을 주관하는 정부의 열린 마음과 지혜로운 대북 정책이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개개인이 남북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북한 어린이 지원 등 인도적이고 평화적인 단체를 후원하며,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정착한 새터민들이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도구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위한 기도’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미움이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평화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다짐하고 그것에 필요한 은총을 늘 하느님께 청해야 할 것이다.

 

* 박정우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1991년 사제 수품), 2004년 미국 포담대학교에서 종교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6년부터 5년간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냈으며 현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서와함께, 2017년 1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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