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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추기경 정진석 회고록40: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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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13 ㅣ No.439

[추기경 정진석] (40) 기적


노숙인을 이웃으로… 꽃동네의 도전과 희망

 

 

- 1982년 음성 꽃동네 노인요양원 기공식.

 

 

“우리 교구 신부들도 궁핍한 가난뱅인데 누가 누굴 먹여 살리겠습니까?”

 

교구 신부들이 어렵사리 꺼낸 말이 화살이 되어 정진석 주교의 가슴을 찔렀다. 그러나 정 주교는 내색하지 않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신부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위태위태한 처지를 드러낸 것은 한 신부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며 계획서를 제출한 직후였다. 전국의 걸인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구상은 당시로는 허무맹랑한 발상인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최대 사회복지 시설인 꽃동네는 그렇게 힘겹게 시작했다. 정 주교는 이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꽃동네의 시작은 정말 우연한 일이었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꽃동네는 청주교구 무극본당 주임이었던 오웅진 신부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밥 동냥을 하는 최귀동(1990년 선종)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나면서 비롯됐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금왕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일제 강점기에 강제노역에 끌려갔다기 금왕으로 돌아왔을 때는 가족들도 죽고 자신이 살던 집도 전쟁통에 사라져 아무런 연고도 없게 됐다. 결국 무극천 다리 밑에서 천막을 치고 사는 걸인이 되고 말았다. 기구한 신세였다. 

 

최귀동 할아버지는 여느 걸인과 다른 점이 있었다. 자신도 빌어먹어야 사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집집이 돌아다니며 남는 밥을 얻어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걸인들에게 나눠줬다. 오 신부는 그 모습에 큰 감동을 하여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모토로 충북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 용담산 기슭에 전 재산 1300원을 털어 ‘사랑의 집’을 짓고 꽃동네를 시작했다. 시멘트를 구매해 걸인들을 위한 ‘사랑의 집’을 지었다. 5칸짜리 ‘사랑의 집’에 최 할아버지를 비롯한 걸인 18명을 데려오니 하나둘씩 걸인이 늘어났다. 그런 오 신부가 전국의 걸인들을 위한 꽃동네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안을 교구장인 정진석 주교에게 가져왔던 것이다.

 

- 1992년 가평 꽃동네 부랑인 시설 준공식 및 정신요양원 기공식. 앞줄 왼쪽 세 번째부터 김옥균 주교, 정진석 주교와 오웅진 신부, 당시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사회복지 시설에 관심이 많던 정 주교는 사제단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제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충청북도가 남한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데, 전국 거지들을 다 모아 놓으면 그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겠습니까?” 

 

“음성군은 농업이 주 산업인데 전국 거지들이 모여들면 우리 군이 무슨 돈으로 그들을 먹이나요?” 

 

부정적인 의견을 낸 사제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었다. 청주교구 사제들도 외국의 도움을 받고 있는 판에 걸인들을 돕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냐는 것이었다. 많은 신부에게는 뻔히 실패할 길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웅진 신부는 더욱 강하게 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시대적 사명이기에 반드시 우리 교구가 해야 합니다. 교구 재정에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고 운영하겠습니다.”

 

정 주교는 양쪽의 의견을 들을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이 역시 교구장 주교에게 주어진 몫이었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부평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먹여 살렸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사실 당시의 정 주교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하게 되는 체험을 많이 하게 되어 하느님의 사업은 인간의 사업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믿었다. 정 주교는 팽팽히 맞서는 사제회의에 별다른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주님의 뜻대로 흘러갈 것임을 정 주교는 굳게 믿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문을 연 꽃동네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가족과 수도자, 봉사자, 직원이 함께 살아가는 종합 사회복지 시설로 성장했다. 도움받던 공동체가 어느덧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가평, 강화도 꽃동네를 비롯해 미국 린우드, 테메큘라, 뉴저지, 조지아 등과 필리핀, 방글라데시, 인도, 우간다, 아이티 등에도 꽃동네를 세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맞았다.

 

더 나아가 1979년에 창립된 예수의 꽃동네 형제ㆍ자매회는 2015년에 청주교구 설립 수도회로 공식 인준되어 교회법적 지위와 함께 고유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았다. 수용자 시설에서 나아가 요양원, 병원, 대학과 연수원 설립 등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 나눔의 정신을 전하기 위한 기관들을 설립했다.

 

한없이 몸집이 커지던 꽃동네에도 위기가 닥쳤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한 오웅진 신부는 2000년대 초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조사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다. 2003년 태극 광산 금광 채굴과 관련해 오 신부를 비롯한 수도자 두 명이 재판을 받고 수도원이 압수수색을 당한 것이다.

 

이는 법정에서 무죄 판결이 나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최고의 찬사를 받던 꽃동네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하루아침에 이미지가 추락했고, 자원봉사자마저 꽃동네를 떠났다. 꽃동네로서는 설립 이래 처음으로 큰 타격을 받은 셈이었다. 꽃동네 설립 계획안으로 씨름하던 때부터 보아온 정 주교는 멀리서 꽃동네의 시련을 지켜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

 

천주교회는 예전부터 많은 복지사업을 했는데 책임자는 대부분이 신부, 수녀들이었다. 국내 후원금은 극히 일부였고, 주로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다 보니 복지사업체의 시스템이 잘 정비가 될 수 없었다. 정부도 최소한의 간섭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회복지 단체들도 좀 더 투명한 시스템과 법질서 안에서 운영돼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됐다. 법을 어겼을 시에는 제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부정하게 착복한 돈은 한 푼도 없었더라도 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면 범법이 되어 처벌을 받아야 했다. 과거처럼 양심적으로 떳떳하면 된다는 식으로 운영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법적인 절차에 맞춰 따라야 했다. 꽃동네 사례는 안일하게 넘어갔던 부분을 이제 더 늦추지 말고 새로 고쳐 나가야 한다는 것을 한국 교회 전체가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정 주교는 미사 강론에서 자주 “꽃동네는 봉사와 기부 정신이 만들어낸 기적의 현장”이라고 치하했다. 정 주교의 청주교구 사목에서 특별한 체험이었던 꽃동네는 다시 일어나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회복지가 자리 잡지 못했던 시절 가난한 교구에서 먼저 노숙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인 기적이 일어난 만큼 이제는 우리 주변 곳곳에서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는 기적이 퍼져나갈 것이라고 정 주교는 굳게 믿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3월 1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사진=서울대교구 홍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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