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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힐링 노트: 감정의 격리, 불안의 전염에 대한 대책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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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01 ㅣ No.353

[하쌤의 힐링 노트] 감정의 격리, 불안의 전염에 대한 대책은 아닙니다

 

 

중동의 낙타에서 옮은 메르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감염되었습니다. 옛날에 비해 인간의 행동반경이 넓어지긴 했지만, 인터넷이나 SNS의 발달로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속도보다 공포가 전염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습니다. 물론 정부의 초기 대응, 소통의 부재가 불신을 낳았고, 불신이 불안을 더 키우기도 했을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괜찮다고 하는데 사태가 점점 확산되는 모습이나 편 가르기를 하는 모습, 전문가들을 존중하지 않는 모습이 세월호 때와 너무 비슷합니다. 재난의 성격은 달라도 재난에 대한 반응은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과도한 불안이 비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뱀에 물린 사람이 뱀을 또 만나면 처음보다 훨씬 더 놀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뱀에 물린 것도 서러운데 “그러게 산에 왜 갔어?”라고 비난을 받거나, 상처 부위가 아물기도 전에 위로는커녕 엄살 좀 그만 피우라고 닥달한다면, 심리적인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채로 시간이 흐르면 다음에는 나뭇가지를 봐도 뱀으로 오인하여 더 불안해집니다. 더 나아가 뱀과 비슷하게 생긴 것만 봐도 내 자신과 가족 등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누구나 맞은 자리를 또 맞으면 아프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르스가 한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지역에 살아도 늘 불안합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막는 방법은 격리입니다. 격리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전염병 예방법입니다. 14세기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에 들른 배를 40일간 강제정박을 시키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한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격리 치료소를 소록도에 만들었습니다. 그러한 격리를 통해 실제 전염병의 확산이 방지되기도 했지만, 남은 사람들의 공포가 줄어드는 효과도 보았습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할뿐 아니라 자유를 원하기 때문에 격리를 당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힘들고 불안합니다. 격리가 강제일 때는 물론이고, 스스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불안이나 공황발작까지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광장공포(agoraphobia)는 원래 넓은 광장 같은 곳에 가면 공포나 불안감이 생기고 동시에 식은땀이나 두근거림, 숨 막힘 등의 신체적 증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요즘은 지하철이나 극장과 같이 사람이 많은 장소 또는 엘리베이터처럼 폐쇄된 곳에서 많이 생깁니다. 옛날과 지금의 모습은 달라도 공통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아프거나 힘들어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고, 불이 나거나 사고가 생겨도 무사히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안에 격리된 사람들은 이러한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메르스가 발생한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자신이 감염되는 것도 두렵지만 사회에서 격리되거나 피하는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두려움을 느낍니다. 격리병동은 물론 자가격리를 택한 사람도 광장공포를 겪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만 공황발작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우울증을 겪을 확률도 높아집니다.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남에게 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기 이전에 본인이 피해자입니다. 또한 손해를 감수하며 자가격리를 택한 분들은 용감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에 대한 감사와 인정이 중요한데, 오히려 격리 대상이라고 하면 그 집 근처도 가지 않거나 그 가족마저도 피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메르스에 걸리기 싫고, 내 가족들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입니다. ‘나랑 내 새끼들만 괜찮으면 돼’라며 비극을 피할 궁리만 하는 것은 결국 감정을 격리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랑 맞서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 이기적인 내 마음을 이겨내야 합니다. 어쩌면 팽목항이 저 멀리 진도에 있어 마음이 더 편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의 격리는 당장에는 병이 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내 감정에 대해서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감정불능증(alexithymia)으로 빠지게 되며 사는 즐거움과 행복을 해치게 됩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길만 빨리 걷는 것, 환경 보호에 대해 SNS에 글은 올리면서 내 쓰레기는 분리수거하지 않는 것, 메르스가 불안하다면서 손을 제대로 씻지 않는 것. 감정과 행동의 불일치 또한 감정의 격리의 일종입니다. 처음에는 격리당하는 쪽에서 광장공포와 같은 불안을 느끼지만, 반대쪽에도 마음의 후유증은 남습니다. 정부가 할 일과 감염 의심자가 할 일 말고 내가 지금 할 일은 무엇이 있을까요? 거창한 행동이나 주장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기다림도 힘이 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눈처럼 하얗게 피부병을 앓은 미르얌이 7일간 격리되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격리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미르얌이 다 나은 다음에 함께 출발했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은 7일이나 지체되었지만, 그 피해는 사람들에게 불안을 사라지게 한 효과보다 훨씬 적다는 말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혹여 자신에게 옮아 오지 않을까 몸을 사리는 우리에게 이 성경 이야기가 시사해주는 바가 사뭇 큽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5년 여름호(Vol. 30), 하주원 마리아 박사(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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