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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에세이77-92: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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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2 ㅣ No.788

교회사 에세이 (77)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

 

 

2세기부터 교회는 다양한 동기에 따라서 그리고 지역에 따라 수많은 공의회들이 개최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한 교회들에서 실시된 공의회들을 소위 ‘일치 공의회’(concili ecumenici)라고 부르는데 그것들은 교회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주목을 받는 것들입니다. ‘일치 공의회’라는 이 용어는 이런 시노드들이 교회의 한 부분만을 대표하지 않고 또 지엽적인 주제에 국한 된 것을 다루지 않았음을 가리켜 줍니다. 오히려 이 공의회들은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전교회를 드러내고, 보편 공의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모두가 지켜야 하는 방법으로 규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16세기부터 개최를 헤아렸고, 지금까지 보존된 것을 따를 때 오늘날까지 보편 교회의 역사에서는 스물 한 번의 일치 공의회가 있었고 이들 중 여덟 번이 고대 교회에서 이뤄졌습니다. 무엇이 일치 공의회의 기준이 되는지, 그 주제와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회법은 일치 공의회에 대해 이런 비판적 규정을 제시합니다. 일치 공의회라 불리기 위해서는, 어떤 공의회가 교황에 의해 소집, 주재되고, 그리고 교황이 주제를 선정하고 회기의 순서를 결정할 뿐 아니라, 작업들을 마치고 의결을 비준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고대 교회엔 이런 규정들이 존재하지 않았고, 현실에 상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여덟 번의 일치 공의회들은 교황에 의해서 소집되고, 개최 되지도, 지휘되거나 비준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공의회들은 황제들에 의해서 소집되었고, 지휘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치’라는 강한 이유가 황제를 압박하였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교의와 문화, 그리고 통일적인 규율, 정치적 안정들이 공의회를 지배하는 주제들을 형성한 것은 단일성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황제에게 직접적인 역할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황제에 의해 명령받은 모든 공의회가 그러나 언제나 일치의 의미를 획득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치 공의회는 참여자의 다양성과 주제들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시노드가 교회에 미친 영향들에 대한 평가도 고려되었습니다.

 

이제 살펴보게 될 초기의 네 개의 일치 공의회들은, 그 주제들의 중요성 덕분에 이런 위치를 차지하였고, 교회와 교회의 역사에서, 교회의 실천에 주목할 만한 영향을 끼친 것들입니다. 이 공의회들은 근본에서 그 결정된 내용들 때문에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다른 공의회들의 규범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 공의회들에서 결정된 신앙의 형식들을 보면,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미지(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상과 인간에 대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Gregorio Magno, 590-604)는 이 네 개의 공의회를 네 복음에 비유하였고, 시빌리아의 이시도르(Isidoro di Siviglia, 560-636)는 천국의 네 개의 강줄기에 비유하였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이 초기의 공의회들은 계속된 공의회들의 결정에 있어서 시금석이라 평가됩니다. 교회 역사에서의 이런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의 신앙 고백은 유일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마음으로 공유하는 신앙의 마지막 고백이라고 칭해야 옳을 것입니다.

 

공의회의 과정에 있어서 고대의 공의회들은 어떤 결정에 도달하기 위한 적합한 방법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아직 어떤 직접적인 표결의 형식들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다양한 입장의 생각들을 청취하였고, 이어서 자유로운 토론이 행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토론 중에 자연스럽고 즉흥적인 동의와 반대가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많은 호응을 받는 명확한 입장이 결정되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이 입장은 이제 성령의 원의의 표현과 하느님의 논쟁할 수 없는 진리로, 그리고 그 순간부터 모든 교회가 지켜야하는 것으로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2016년 11월 20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8)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2)

 

 

초기 교회의 공의회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공의회가 필요하게 된 배경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이란 신비를 탐구해 나감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흔적을 우리는 사실 고대 교회사의 이곳 저곳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신학적 관점에서 그 여정을 살펴보겠습니다.

 

3세기 중엽 즈음, 동방에서도 서방에서도, 그리스도 혹은 로고스(Logos)와 하느님(성부) 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들이라는, 즉 하느님께 대한 그리스도교 개념에 대한 논쟁적 의견들이 표출됩니다. 당시의 신학은 신약의 전통과 그것을 이어받아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로고스와 성령에 대해서 말해왔지만 사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였습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당시까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이해되었습니다. 즉 아들도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보다는 ‘하위’(subordinazionismo)라고 이해되었습니다. 하위의 관계는 또한 다양한 방법들로 표현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명료화는 부족하였습니다. 이런 하위의 도식은 모든 교회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고함에 있어서 어떤 공통된 모델을 갖게 했습니다. 이런 도식은 유일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 명백했던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유대적’인 일신론으로부터 일관되게 연유하였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일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명백하였고, 신적인 로고스와 성령에 대한 언급은 유일신과 함께 납득할만한 방법에서 일치를 허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세기에 접어들면 이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당시까지 고백되었던 신앙과 성경적 단언들을 정확한 방법으로 개념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극명히 다른 신학적 입장들에 의해 지지되는 토론들의 혼란한 모습은 형식과 주된 모델, 그리고 신학적 뉘앙스에서 거리가 있는 지역 교회 전통의 다양성 안에서 그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다양한 입장들을 표준화하고자 하는 전 교회 차원에서의 교의적 토의는 아직 없었습니다.

 

2세기의 말에서 시작하여 ‘유주론’(일위격적 신론, monarchianismo)이란 이름을 가진 하나의 신학이 특별히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유주론 신학의 강조점은 성서적 개념과 상응하여 하느님의 단일성과 유일성, 그리고 절대적 주권의 고정에 있었습니다. 이 신학은 일부분, 2세기 경 아버지 하느님의 곁에서 두 번째 하느님처럼 호교론자들에 의해서 언급된 ‘로고스 신학’에 대한 반응을 대표한다고 하겠습니다.

 

로고스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하느님’이란 호칭을 통해 많은 이들이 위험천만하게 하느님의 단일성과 유주론을 희석시키게 됩니다. 이런 경향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을 통해 하느님의 단일성을 지켜내려는 시도가 이뤄집니다. 즉 그리스도는 ‘외형적’으로 하느님이시라고…. 이 경우는 예수님 안에 신적인 힘(dinamismo)이 작동하거나 혹은 예수님은 양자됨(adozionismo)의 방법을 통해 후차적으로 하느님께 합하여졌다는 식의 설명이었습니다. 이런 해설에 따르면 예수님은 분명 신적 유일한 위격으로 온전히 남아계신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게 됩니다. 혹은 그리스도는 마치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형식(modus)의 하나라고 개념짓습니다. 하나이신 하느님은 항상 유일하고 동일하신 분으로 남아계시면서, 처음엔 아버지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다음엔 마치 아들로, 그리고 마지막엔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설명입니다(modalismo-양태). 유주론은 2?3세기 전환시대에 가장 널리 유포된 신학이었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일반적인 신앙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신학자들은 마치 하느님처럼 개념지어진 로고스를 성부로부터 구별지으려 했고, 혹은 나아가 하느님 안의 삼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Tertulliano, Novaziano, Ippolito). 이들의 주장은 많은 신앙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직면합니다. 일반 신앙인들은 ‘둘 혹은 셋’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교의를 다신론의 형식처럼 여기거나 이단으로 여기면서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2016년 11월 27일 대림 제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9)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3)

 

 

2-3세기의 신학적 혼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혼란을 정리하기 위한 ‘일치 공의회’들이 시도되겠지만 아직 우리는 이런 혼란에 대해서 더 살펴봄으로써 공의회가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요청이었으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양태론(modalismo)은 사벨리오에 지지되었고, 그 신학은 그의 이름을 따 사벨리오주의(Sabellianismo)라고도 불렸습니다. 약 217년경을 전후하여 그는 로마에 있었고, 여기서 첫 번째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의 극단적인 유주론(monarchianismo)은 로마 공동체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즉 이단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주교 갈리스도(Callisto)에 의해 파문됩니다. 약 몇 십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사벨리오의 신학에 대한 논쟁이 그의 조국인 리비아에서 재점화 됩니다. 사벨리오의 추종자들인 리비아의 몇몇의 주교들은 이제 ‘하느님의 아들’을 마치 독립적인 형상으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그들과 그들의 반대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Dionigi di Alessandria, +264) 주교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디오니시오는 답신에서 양태론자들을 거슬러 성부와 성자의 실제적 구별을 강조합니다. 사벨리오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반론을 지속합니다. 즉 디오니시오는 성부로부터 아들을 분리시켰고,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이 아니라는 것을 첨가하면서, 아들은 본성에서 아버지와 다르고 또 영원하지도 않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같은 본성’(homousios)이라는 그리스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니체아 공의회의 중심 주제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리비아의 사벨리오 추종자들은 유주론의 경향에서, 로마의 디오니시오 주교의 확언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디오니시오는 사벨리오의 주장 뿐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초에서 로고스는 항상 아버지께 속해 있고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는 반대로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로고스(아들)는 아버지로부터 창조되었고, 성부께 종속되며 성부와 구별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계속된 서신을 통해 합의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신학적인 차이를 유지하면서도, 유주론과 극단적인 형식에서 아들을 종속시키는 생각도 단죄합니다. 이것은 복잡한 상황의 쉬운 해결처럼 보였지만, 신학 용어의 측면에서 분명하지 않았기에 결국 동의에서 파문으로 건너갈 운명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는 사벨리오 신학의 핵심에서 사용된 ‘같은 본성’(homousios)의 개념에 대해서 우려합니다. 그는 실제적 삼위를 보호할 의도를 갖고 있었기에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단일성은 삼위로 쪼개지 않는 범위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편에서 삼위가 혼재, 혹은 섞인 채로 보존되는 결론에 이릅니다. 한편 로마의 디오니시오는 하느님의 단일성도 또한 삼위도 지지하였습니다. 그들은 정확한 개념을 찾는 데는 실패했음에도 서로 간의 입장이 비슷함에 동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벨리오주의 주교들의 편에서 이미 삼위란 하느님께는 허용될 수 없는 분리이며, 다원성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안티오키아에서도 논쟁이 퍼져나갔습니다. 사모사타의 주교 바오로(Paolo di Samosata)는 신적 유주론을 지지하며 아들의 종속적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처럼 각지에서 삼위와 관련된 논쟁들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열려 있었고 해결은 각각 달랐고, 반면 신학적 단어들은 분명하지도 한 목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4세기 신학적 문제의 중심은 단일성과 신적 삼위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은 2-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역사(preistoria)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니체아 공의회를 통한 그 논쟁 해결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016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0)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4)

 

 

니체아 공의회

 

아리오 신학은 성부와 비교해서 성자의 존재론적인 ‘종속’,’하위’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아리오는 하느님의 배타적인 특성 혹은 특질을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 홀로 낳음 받지 않았고, 기원을 갖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영원하고, 시작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분만이 오직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절대적으로 유일하시고 원천이며, 그분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고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아들은 창조되었고 기원된 분이시라는 설명입니다.

 

온 교회의 격렬한 반응에서도 아리오는 이런 자신의 신학 때문에 고립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그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솟아난 이 문제는, 그리고 아리오가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가 이와 관계되는 신학의 최고의 대표자가 되는 순간부터 ‘아리오주의’(Arianesimo)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지게 됩니다. 당시는 아직 이런 삼위에 관련된 공식적 정통 교리도, 교회의 일반적 교의도 존재하지 않았었습니다. 오직 당 시대 신학자들의 전망들과 전통들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구속력을 갖는 성질의 어떤 공동 결정들은 단지 교회 정치의 영역에서 아리오 주변에서 촉발된 분쟁을 통하여 적용되게 된 것이었습니다.

 

잘 꼴 지어진 교의적 입장에 의해 지지되는 아리오의 신학은,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길로 부터의 탈선을 내포하기란 시작부터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에게 동의하는 정통 교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키아의 루치아노(Luciano)의 제자인 그는 자신의 ‘성자 종속설’이 고대 신학과 경의할 만한 신학에 기반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적 전통을 취한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는 실제로 자기 주교의 전임자,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주교가 성자 종속적 입장을 무엇보다도 지지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오는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입니다. 한편 그의 주교 알렉산드로는 종속론을 거부하는 디오니시오에 반대하는 신학을 통해, ‘같은 본질’(homousios)의 신학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단지 알렉산드리아의 전통 안에서만 보더라도 구체적으로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아리오는 이미 주변에 존재하는 교의적 사고의 결정적 전통과 함께 하기를 거부합니다. 다른 삼위의 신학을 지지하는 이들을 통해서 아리오의 신학에 대해 제시된 도발은, 이제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교회 정치적, 그리고 교의적 논쟁과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와 단일성에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데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정치적 연루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황제 코스탄티노(Costantino)는 제국적인 사상의 동기들과 정치적 이유를 기회로 이 논쟁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이 문제를 과소평가하였고, 후에는 이 모든 상황을 손 안에 쥐고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으며, 그 과정을 분명하게 인도해 나갑니다.

 

아리오 신학은 성부와 비교해서 성자의 존재론적인 ‘종속’,’하위’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아리오는 하느님의 배타적인 특성 혹은 특질을 표현합니다. 즉 아버지 하느님 홀로 낳음 받지 않았고, 기원을 갖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 아버지만이 영원하고, 시작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분만이 오직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절대적으로 유일하시고 원천이며, 그분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이고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이와 같지 않습니다. 아들은 창조되었고 기원된 분이시라는 설명입니다. [2016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1)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5)

 

 

지난 호에서 간략하게 훑어보았듯이, 성부, 하느님의 배타적 특성을 강조함으로 인해 두드러진 아들, 성자의 하위적인 아리오의 논쟁적 정식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 분은 창조되기 이전에 계시지 않았다.’ 혹은 달리 말해 ‘그 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는 아리오와 그의 추종자들의 이 진술은 잠언 8장 22절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는 구절로부터 증명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확언들과 이런 성서적 증거에 따라 아리오는 ‘성자는 그러므로 다른 모든 피조물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하고, 존재론적으로 상위라는 것과 그와 같이 또 중요한 것은 그러나 성자는 하느님께 종속됨(하위)을 드러내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 볼 때 성자는 틀림없이 질적인 의미에서 좀 더 완전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창조되었고 기원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오주의는 ‘종속주의적인 그리스도론’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리오는 문제를 철학적으로 학문적인 방법으로 생각하였다’는 점입니다. 그의 확언들은 그 시대의 철학적 형식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초월자와 지고의 실재(神)로부터 시작하여 세상을 건설하는 하나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개념에서 ‘지고(至高)의 실재’는 또 다른 두 번째의 존재가 다다를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약 2세기부터 그리스도인들은(요한 복음에서 보듯 1,1.14) 성자를 로고스(Logos)라고 불렀고, 이런 개념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와 철학과의 중재를 시도했습니다. 철학은 실제(서로 다른 개념들로) 세상과 초월자 사이의 중재적 존재에 대해서 말해 왔고, 이 존재들은 마치 로고스처럼 지칭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중간자적 위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런 중재적 위치는, 창조를 말함에 있어서 성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느님-피조물, 양자의 상호 교류로서의 ‘주어지지 않은 제3자’(tertium non datur)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경의 로고스에 대해서 하느님의 입장으로부터인지 혹은 피조물의 입장에인지를 결정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아리오는 그것을 피조물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이고, 그의 반대자들과 니체아 공의회의 입장은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로 주교와 그의 반(反) 아리오주의자들은, 그분의 구원적 의미로부터 성자의 신성(神性)을 추론한다는 의미에서 좀 더 사목자적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분이 참 하느님이 아니라면, 인간의 구원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어떤 탈출구도 갖지 못한 상황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를 우두머리로 하여 100여 명의 이집트와 리비아의 주교들이 모인 시노드에서 아리오는 이단으로 단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아리오와 아직도 그를 추종하는 그룹들을 교회 내로부터 축출합니다. 두 명의 주교와 다섯 명의 사제들, 그리고 여섯의 부제들이었습니다. 아리오는 이 단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도처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신학자들을 모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오리게네스주의자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o di Caesarea)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결단력과 정치적 수완이 있던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Eusebio di Nicomedia)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지역에서 알렉산드리아의 결정문에 대해서 항의하고, 아리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자 노력합니다. [2016년 12월 18일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2)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6)

 

 

아리오(Ario)가 지역 시노드에서 단죄된 후 아리오 추종자들이 시노드 결정에 대해 저항함으로 상황은 혼잡스럽고 격렬해졌습니다. 그러자 이런 분열의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코스탄티노(Costantino) 황제는 처음으로 제국 모든 교회의 시노드를 개최할 것을 명합니다. 즉 제국과 제국의 안정성의 기둥인 황제와 주교들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일치를 백성들의 눈에 보이게 하려는 미래적 비전에 영감 받은 공의회를 거행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의회는 그렇게 광범위하지도, 대표성을 띠지도 못하였습니다.

 

325년 5월 20일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약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는데, 1/3은 주로 가까운 소아시아 지역의 주교들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동방 교회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들이었고, 반면에 서방 라틴 교회에서는 5명이 넘지 않는 주교들이 대표로 참석하였습니다(이들은 아마도 왕궁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교황 실베스트로(Silvestro I, 314-335)가 어떤 이유들로 개인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는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대리자들을 보내는 것으로 제한합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고대 교회의 공의회들에서 교황들은 실베스트로 교황처럼 처신합니다.

 

니체아에는 당시의 삼위의 교리와 관련되어 지지되던 모든 신학적 조류들이 대표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서로 같은 그룹을 형성하기에 거리가 먼 아리오의 지지자들도, 그 반대자들도 있었습니다. 반대자들 중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드로(Alessandro di Alessandria)가 부제 아타나시오(Atanasio)를 동반하여 참가하였고, 그 시작부터 아리오주의(Arianesimo)는 교회에 극적인 위험이라고 선언하며 반대 입장을 취하던 코르도바의 오시오(Osio di Cordova)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유주론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 광적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구별을 짓는 아리오로부터(마치 피조물처럼 개념지어진), 그리고 양태론적으로 어떤 구별 없이 활동하지 않는다는 점으로부터(사벨리오 주의자들과 양태론주의자들) 신학적으로 더 먼 관점을 가진 이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안티오키아의 에우스타지오(Eustazio di Antiochia)와 무엇보다도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o di Ancira, 사벨리오 주의자로 336년 단죄)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비(非) 아리오 추종자들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반(反) 아리오 추종자들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니체아 공의회의 경과와 결과들에서는 공의회의 교부들이 교의적 논쟁에 대하여 격렬하게 토의한 후, 마치 기초에서 ‘이미 존재하는(마치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교회의 그것처럼) 신앙의 고백처럼 선택하였다’는 사실이 결정적 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반(反) 아리오의 특성을 언급하는 몇몇의 명제 혹은 형식을 이끌어 내면서 하나의 신앙 고백을 통합해 내었습니다.

 

아들(성자)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고백은 이미 정확하게,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고, 상징으로는 빛에서 나신 빛이시다.” 그 자체로 분명한 이 정식은 공의회 교부들에게 논쟁의 상황에 충분한 힘이 되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확신에 찬 결정적인 개념의 통합을 가져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첨가하기도 합니다.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성부와 같은 본체로 창조되지 않고 나신 분.”

 

니체아 신경의 이 몇 줄은 공의회의 신학이 응축되었습니다. 이 신학은 반 아리오의 형식 혹은 더 확실히 말해 에우세비오를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결정적이고 선명한 것은 그 신학에서 ‘같은 본체’(homousios)의 개념이었습니다. 즉 성자는 성부와 같은 본성이고,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이며, 구별된 ‘위격’이란 점에서, 좀 더 늦게라고 말해지게 될 것이지만, 그분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신학은 성자에 대해서 ‘같은 본성’ (consubstantialis),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본성의 동일’(eiusdem substantiae) 개념을 알고 있던 서방 교회의 개념에 틀림없이 상응하고 있었습니다. [2016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3)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7)

 

 

앞서 살펴본 것처럼 최초의 보편 공의회는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정식을 완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이 순수히 신학적인 측면만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코스탄티노 황제는 공의회의 주재석에 앉았고, 결론을 내리는데 일조했습니다. 그리고 ‘동일본체’(homousios)의 개념을 확정함에 있어서도 그의 입김은 충분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력을 통하여도 공의회의 결과물들을 지지하였습니다. 이런 자신의 원의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아리오와 그의 열렬한 추종자들, 니체아 공의회의 신경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두 명의 주교들도 함께 귀양을 보냅니다. 황제는 자신의 황제 즉위 2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였고, 공의회의 평화적인 마무리는 교의적 문제에서도, 교회 정치적 문제에서도 그 해결책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속의 하모니였습니다.

 

 

니체아 공의회 이후

코스탄티노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던 니체아의 합의는 취약함을 드러냅니다. 공의회를 끝낸 지 막 세 달이 흐른 뒤, 에우세비오(Eusebio di Nicomedia)와 325년에 귀양에 처해진 두 명의 주교들이 자신들의 서명을 철회합니다. 이것은 니체아 공의회에 대한 격렬한 반대와 교회에는 오랜 위기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습니다.

아리오주의자들과 신학적 이유 때문에 공의회에 동의하지 못한 유사한 입장의 사람들은 동일 본체homousios 확언의 결과들을 거부합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특히 성경과 관련 없는 철학적 개념인 이 용어가 신앙의 고백에 사용된 사실에 대해 심한 당혹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당혹과 망설임들은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것에 동의하던 이들에게 까지도 니체아 공의회를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렵게 했습니다. 이 개념은 또 사모사타의 바오로(Paolo di Samosata)가 그것을 이단적 관점에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통해서 더욱 불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교의의 시스템에 속한 그의 존재는 교회 신앙의 고백에 이 개념의 사용을 의심하게 하였고,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그 개념의 거부는 공의회의 거부로 나아갔습니다. 한편 니체아의 입장에서는 이 특별한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어떤 방어나 명료화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기에 추가됩니다. 반면에 이집트 교회를 포함한 서방 라틴교회는 이런 상황에서 공의회가 선택하였고(이런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격렬한 토론에 대해서) 동방교회가 그들의 심오한 묵상으로 지지하였던, 그것들과 같은 방향에서 단순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일찌감치 응답하면서 문제없이 니체아 신조에 충실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이 문제들은 그리스적 문제로부터 생겨났고, 그리스 철학적 사고의 선로 위로 인도되었습니다.

실제 공의회 반대입장의 승리의 기록이 적지 않았습니다. 공의회가 끝난 지 삼년이 지날 즈음에 코스탄티노 황제는 정치적으로 아리오주의자들에게 호의적인 정치적 입장을 결정합니다. 비록 이것이 공의회의 신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수준에서 공헌을 하였습니다. 니체아 공의회주의자들의 편에서 황제의 종교 정치에 대한 뚜렷한 전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몇의 가정을 전제해야만 하는데 첫째, 당시 코스탄티노가 니체아 공의회주의자들보다 니코데미아의 에우세비오를 비롯한 아리오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입니다. 또 그는 아리오의 신학이 그의 교계적 구조를 통해, 즉 그의 신학을 통해서 황제가 지상의 하느님의 왕국을 대표한다는(오직 한 하느님, 오직 한 황제, 오직 한 왕국이란) 그의 정치적 이상에 더 적합하다고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또 아리오주의자들이 동방 지역에서 뚜렷하게 백성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는 정치적 고려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코스탄티노에게 제국의 단일성은 아리오주의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거스르지 않음을 통해 재건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이제 아리오와 에우세비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이 귀양으로부터 되돌아오게 되었고, 서명된 신앙의 정식은 모호해졌습니다. 그리고 니체아의 주교들은 자동적으로 해임되었습니다. [2017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4)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8)

 

 

지난 호의 말미에서 보았듯이 상황은 이전과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황제의 반니체아적 정치로 인한 반대급부로 인해서 가장 고난을 받은 인물 중, 그 정점에 있던 인물이 바로 아타나시오(Atanasio)였습니다. 그는 328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습니다. 코스탄티노와 그의 계승자들의 통치 아래서 그는 적어도 다섯 번 이상 귀양에 처해지고, 그 전체 기간은 약 17년가량이었습니다.

 

주교들은 올바른 정식과 정의를 찾아내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를 열고, 모였지만, 매번 토론의 주제보다는 교의적 차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중상과 도덕적, 정치적 성격의 개인적인 고발과 중상이 매번 되풀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단적 논쟁과 권력을 위한 충돌에 있어서 시류가 되어버렸습니다. 코스탄티노 황제를 시작으로 이후의 황제들은 이런 대결에서 주교들을 보호하기도 하고 임명하기도 하면서 그리고 특정 당파들에게 호의적이거나 그들을 무력화하는 방법으로 계속된 개입을 하였습니다.

 

코스탄티노는 337년 세상을 떠나고, 그의 두 아들이 왕권을 승계합니다: 서방 지역은 지역 교회와 조화를 이루는, 단호한 니체아주의자인 코스탄테(Costante, 337?350)가 황제가 됩니다. 동방에서는 반대로 역동적으로 아리오를 지지하는 코스탄조 2세(Costanzo II, 337-361)가 왕위를 승계합니다. 코스탄조의 통치 아래서 교회(니체아 신경을 따르는)는 첫 번째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과 전혀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그리스도인 황제로부터 난폭한 탄압을 받고, 그에 의해서 심지어는 이단으로 판정되게 됩니다.

 

350년부터 코스탄조는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그는 시노드에 모인 주교들에게 억압을 시도하는데, 즉 주교들에게 아리오의 정식에 서명할 것과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면서, 니체아 신경을 따르는 서방 교회에 대한 탄압을 실행합니다. 이런 조치에 대한 거부하는 이는 귀양에 처해지고 투옥되었습니다. 특별히 표적이 되었던 분은 교황 리베리오(Liberio di Roma, 352-366)였습니다.

 

서방에 몇몇 결정적인 반대자들은(Lucifero di Cagliari, Ilario di Poitiers e Odio di Cordova) 모든 타협을 거부하였고, 심한 고통을 받았으며 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치 정통을 수호하기 위한 ‘순교자들’(martiri)처럼 여겼습니다. 어쨌든 황제는 계속하여 아리오주의를 제국의 공통 신앙 고백으로 만들기 위해 잔인한 방법들을 시도합니다.

 

아리오는 이미 335년에 세상을 떠났고,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 또한 약 33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341년 말경에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공의회에서 새로운 정식을 위한 제안과 논쟁들에서 서로의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 멈춰지지는 않았습니다.

 

서방 교회는 니체아 공의회에 일관성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머물렀고, 반면에 동방 교회는 니체아 공의회에 맞서는 새로운 정식을 찾는 노력을 더 강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제안들은 아리오 노선도 아니었고, 또 반 니체아주의 노선도 아니었습니다. 그 제안들은 ‘보수주의자’들의 노선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정식들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해 더욱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을 단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문제는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아주 짧은 분열이었지만 이 위기는 심각했었습니다. 황제의 종교 정치적 영역에서의 개입 때문에 어떤 조류도 확정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 성령이 연결되게 됩니다.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5)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9)

 

 

새롭게 등장한 문제적 제안, 성령과 관련된 이 제안을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360년 경 이 문제는 이집트에 다다른 것으로 보이고, 조금 늦게 소아시아에 도착하고, 이 논쟁의 외형은 복잡하게 됩니다. 이 논쟁에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같은 본체’ 라는 것을 지지하는 이들도, 그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두 번째의 사람들을 성령의 같은 본체를 ‘부정하는 자들’(Negatori)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중에서 특히 체사레아의 바실리오(Basilio di Cesarea, 330-379)는 자신의 저술과 철학적 논증들을 통해서 성령의 명백한 신성, 동체성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두 번째 일치 공의회의 준비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다른 주교들과 함께 그는 동방에서 공고하게 니체아의 경향을 지지하였던 것입니다.

 

예기치 않게 이런 경향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로 인해서 결정적으로 강화되게 됩니다. 스페인 출신으로 서방 사람이며, 니체아 결정에 확신을 갖는 테오도시오 대제(Teodosio il Grande, 379-395)가 동방의 황제라는 권위를 통해 380년 2월 28일 모든 제국의 신민들은 니체아 신경에 구속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국가교회를 창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황제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의 신성’에 대한 니체아 신앙을 재작업합니다. 즉 모두가 같은 위엄을 갖는 ‘거룩한 삼위’를 회복시키고, 아리오의 주교들은 귀양에 처해지며, 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Costantinopoli) 공의회(381)

 

아리오주의를 둘러싼 논쟁을 끝맺고, 교회 상황을 정상화하기 위해 테오도시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그는 이 공의회를 개최함에 여러 목적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단일성을 재건하려는 것에 국한하여 검토하자면, 황제의 목적은 아리오의 성자 하위적 경향을 띤 모든 조류들을 제거하고 단죄함에 이르고자 합니다.

 

애석하게도 이 공의회의 문서와 결정들은 전혀 보존되지 않았고 특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동일본체’에 대한 채택 문서가 보존되지 못했습니다. 이 신앙 고백은 17년이 지난 후 네 번째의 일치 공의회인 칼체돈 공의회(Concilio di Calcedonia)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거룩한 교부들의 신앙으로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고백은 두 번째 일치 공의회의 신경처럼 기록되어 남아있지만 공의회가 어떤 정식을 작성하지는 않았고, 기존하는 문서를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칼체돈 공의회의 수집을 통해서 콘스탄티노 공의회는 일치 공의회라는 각별한 지위에 들어가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된 신조는 ‘위대한 신경’ 혹은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이후 교회의 전례 안에서 사용됩니다. 이것은 진정한 일치를 드러낸 유일한 신경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교로부터 받아들여진 신경이란 것입니다. 이 신경은 니체아의 정식에 반 아리오주의의 강화를 담고 있습니다. 교의적 측면에서의 새로움은 성령의 ‘동일본체’에 대한 확증이었습니다. 니체아의 교부들은 “우리는 거룩한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제한적으로 말했던 반면, 이 신경의 정식은 정확하고 더욱 구체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부로부터 발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이런 명제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그것들 전체가 성령에 대한 ‘신성의 확증’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서 삼위일체 교리는 완성을 가져오게 됩니다. [2017년 1월 22일 연중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6)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0)

 

 

계속해서 그리스도론 문제들과 그 해결을 위한 신학적 노력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호에 니체아 주의를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자,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아폴리나리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반대 편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인 것 같습니다.

 

아리오주의의 반대 편에서 타르소의 디오도로(Diodoro di Tarso, +340)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도 아폴리나레를 거슬러 ‘로고스에 의해서 취해진 인간 본성 전체가 온전함’을 강조합니다. 즉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 그들 사이가 뚜렷해지고, 그 자체로 각각의 활력이 강조됩니다. 이때부터 이것은 디오도로가 속해있는 ‘학파’의 전형적인 특성 혹은 안티오키아 학파의 특성이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의 학자들은 분명한 구분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지상적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생각이 그리스도 안에 어떤 분열이나 분리를 이끌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식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대인들로부터,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로부터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려 한다는 의심과 고발을 받게 되었습니다. 디오도로는 그러므로 이렇게 첨가합니다. “여기에는 두 아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론은 구별과 동시에 단일성을 표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 때 부터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 단일성과 이중성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시도에서 안티오키아 학자들의 특성은 인성과 신성의 구별에 강조를 두었고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안티오키아 학자들이 갖고 있는 이 이중성에 대하여 단일성을 지켜내려고 노력합니다.

 

안티오키아 그리스도론의 사조는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Teodoro di Mopsuestia, +428)에 의해 한 발 더 나아가게 됩니다. 그는 강생한 로고스 안의 인성으로부터 신성을 분명하게 구별하였고, 로고스가 온전한 인성을 취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즉 두 본성의 단일성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합’(unione, 그리스어로는 synapheia)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반대자들의 눈에는 너무나 약하고 모호하게 비쳐졌습니다. 여기에는 늘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론은 그리스도 안의 어떤 분열을 이끌어 내고, 주장한다고 의심하는 다른 견해의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의견들이 극단화하는 경향에서 서로 다른 입장의 적대자들이 정치적 혹은 교의적으로 ‘실수’하기를 공개적으로 기다리는 논쟁과 긴장의 분위기가 팽배하게 됩니다. 테오도로는 제5차 일치 공의회에서 사후 단죄를 당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은 테오도로의 제자 네스토리오(Nestorio, +451)가 코스탄티노폴리의 주교좌에 오를 때, 안티오키아 학파의 약점을 더욱 뚜렷하게 보게 됩니다. 사실 정치적인 현실이기도 하지만, 알렉산드리아는 첫 자리를 두고 항상 코스탄티노폴리와 경쟁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네스토리오는 그가 선출된 이후 가까운 시일에 마리아에게 봉헌된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 테오토코스)란 칭호의 적합성에 대한 논쟁의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안티오키아 학자들처럼 네스토리오는, 마음에 어떤 모호성도 없이 이 칭호를 교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모호하다고 말하였는데, 왜냐면 그의 생각에 마리아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인간의 어머니이지 하느님의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어머니’란 칭호가 마치 신들의 어머니처럼 신화적 개념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네스토리오는 일치를 위해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크리스토토코스)를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단일성 안에서 두 개의 본성을 가리키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반대하기에 이릅니다. [2017년 1월 29일 연중 제4주일(해외 원조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7)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1)

 

 

지난 호에서 본 것처럼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 이어야 한다’는 네스토리오 주장에 대해 알렉산드리아 학파 진영의 사람들은 강력히 반대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극단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분리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미 마리아께 헌정된 이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오래된 칭호에 애정이 있었던 대중적 신심도 네스토리오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이 논쟁의 세세한 점들은 여기서는 생략합니다만 이 논쟁은 그리스도론에 토론의 장을 열었고 결국 일치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일치의 과정은 치열하고 험난했습니다.

 

토론의 신학적 외관을 관찰하는 것은 이어지는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을 구분한다는 사실은 안티오키아 학자들을 그리스도론적 진술에 있어서,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와의 비교에서 독특함을 간직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 두 본성의 긴밀한 단일성의 기초 위에, 그 본성들의 독자성이 동일하게 그 분에게 입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본성에 대해 독자성이라 언급된 두 본성의 하나만이 그리스도의 공헌 아래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환의 예를 보면, ‘하느님의 말씀, 로고스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리고 ‘로고스가 고난 받으셨다’라는 문장들입니다. 이 두 경우는 신성과 관련을 맺은 그리스도 덕택에 인간성 위에 확인되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어지는 공의회들은 이 가능성을, 즉 교회의 교의적 언어에 포함된다고 승인합니다. 이제 ‘하느님의 어머니’(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칭호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은 안티오키아 학자들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지키려 했는지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네스토리오가 고안한 독자성은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에게는 두 본성의 단일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쪼갰고’ 이단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그의 작품들의 연구를 보면 두 본질 안에 그리스도의 ‘분리’, 혹은 ‘쪼갬’이라고 덧 쓰여진, 네스토리오가 이단이라는 설은 지지되지 않습니다. 그가 당시대에는 근본에서 비판받았지만, 그의 주장은 정통이었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 학자들 편에서 네스토리오에 대한 항의와 저항이 있었고,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교 치릴로(Cirillo)가 열성적이었습니다. 로마 교회도 치릴로에 대해서 긍정적이었습니다. 네스토리오는 이런 상황에서 그의 편에서 치릴로가 한 것과 같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치릴로의 그리스도론은 또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지지되었는데, 그것은 ‘하느님 중심주의’(teocentrica)라고 정의될 수 있습니다. 모든 진술의 출발점은 로고스(Logos)의 신성입니다. 이것은 2세기 호교론자들과 3세기의 오리게네스도 로고스를 ‘신성’, 혹은 ‘하느님’이라 불렀던 고대의 전통과도 부합하였던 것입니다. 안티오키아 학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의 약점과 큰 위험을 봅니다. 만약 신성이 지배한다면, 그 지점부터 그리스도론은(인성과,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완결되지 못하고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안티오키아 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의 인성이 신성 안에서 해체되지 않도록 주의 깊게 정통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권고합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두 입장을 생각해 보면, 안티오키아의 그리스도론은 성경에 충실하게 남아 있는데 관심을 기울였다면(즉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것을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말한다면),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은 인간이 하느님께로 올라감과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비슷해짐(신화 Deificazione)이라는 영성에 관심을 두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치릴로는 자신의 반대자들과 지지자들 모두에게 편지를 보내고 열정적으로 반박하여 430년 8월 11일 로마 지역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오를 단죄하고, ‘그의 신학을 조정하고 직무를 해임하라’고 위협합니다. 치릴로는 전통적인 정식을 되살리면서 자신의 교의적 주장을 펼칩니다. “강생한 신적 말씀, 로고스의 본성은 하나이다.”

 

이제 안티오키아 학파들의 반격과 일치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2월 5일 연중 제5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8)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2)

 

 

안티오키아 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치릴로의 그리스도론은 하느님과 인간이라는 이중성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치릴로의 주장들은 그들 편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독자성이라는 이유에서 볼 때, 많은 점들이 불분명했습니다. 네스토리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안티오키아 학자들은 치릴로의 논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도론을 이단으로 알고 부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치릴로의 입장에서는 안티오키아 학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치릴로는 서신과 외교적 방법들을 통해 선전하였고 책략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불화와 적대는 광범위하게 퍼져있었습니다. 또한 초기부터 자연스럽게 황제를 통해 자신의 객관적 원칙을 세우고 단일성의 재정립을 의도하는 일반 공의회를 개최할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430년 11월 19일 황제 테오도시오 2세(Teodosio II)는 다음해에 에페소(Efeso)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통고합니다. 준비를 위해서도, 일의 진행에 있어서도 소동이 일었습니다. 이 경쟁에서 치릴로는 대단한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였고, 반대편에 대한 어떤 주저함도 없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사용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물리력에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시작부터 결정적인 우위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와 인접 지역에서 온 주교들은 네스토리오를 지지하는 안티오키아의 요한(Giovanni di Antiochia) 주교의 지도 아래 모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급하게 길을 떠나지는 않았는데, 이미 그 때부터 공의회로부터 어떤 좋은 소식도 기대하지 못하였습니다. 로마의 대리자들조차도 아직 그 자리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치릴로는 431년 6월 22일 즉 동방의 주교들(시리아와 팔레스타인)과 로마의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 공의회를 임의대로 개막하면서 상황적 이득을 취합니다. 공의회의 목적은 치릴로가 네스토리오를 고발하는 것의 정당성과 적법성에 대해 살피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왜냐면 치릴로의 선제적 행동으로 당파들을 역전시켰고, 네스토리오가 아니라 치릴로가 그 자신의 입장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동방 주교들은 5일 후에 도달했고, 로마의 대리자들은 2주가 지난 후에야 도착하였습니다. 치릴로의 시노드는 참석을 거부한 네스토리오를 단죄하고 해임시켜버립니다. 로마의 대표들은 430년 로마 시노드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 결정문을 비준합니다. 동방 주교들은 그들의 입장으로 또 다른 에페소 시노드에서 치릴로를 해임시키고, 그의 자리에 메논네(Mennone)를 임명합니다. 치릴로의 시노드는 안티오키아의 요한과 그 추종자들을 해임하면서 응수합니다. 혼란은 엄청났고, 아주 어려운 지점을 서로 건드렸습니다. 사태가 그러하자 두 당파는 모두 황제에게 호소합니다. 황제는 네스토리오도, 치릴로도, 메논데도 모두 체포합니다. 그러나 이 절충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사건은 이 외에도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수도자들도 참여하게 됩니다. 그들의 신앙이 실제로 그들을 이 신학적 토론에 휘말려 들게 합니다.

 

황제는 비록 동방 주교들을 단죄하는 것을 금하긴 하였지만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지지하였습니다. 합의와 일치의 희망이 작아지기 시작할 때, 깊게 실망한 황제는 주교들을 거칠게 질책하며 추방하였고 431년 10월 공의회를 폐막합니다. 마지막으로 치릴로의 편이 승리합니다, 그 때부터 황제는 네스토리오를 투옥합니다. 네스토리오는 알렉산드리아 진영의 마음에 드는 이로 교체되었습니다. 네스토리오는 451년 에집트로 귀양가고, 그 곳에서 죽게 됩니다. [2017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89)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3)

 

 

지난 시간에는 에페소 공의회의 험난하고 거칠었던 일치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공의회가 일으킨 파문의 완성 과정을 쫓아갈 차례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일치 공의회의 사건들에 대한 평가는 특별합니다. 실상 두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는 공의회였습니다. 양측 모두는 지극히 편파적이었고, 전혀 일치적이지 않았습니다. 치릴로 편의 공의회는 일치 공의회들의 수를 헤아리는 데 받아들여집니다. 무엇이 그 공의회의 중요성을 이루는 것일까요? 유일한 공의회의 결과물은 네스토리오의 단죄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의 확증이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어떤 정식도 어떤 문서나 신조도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고대 역사에서 신학적인 일치라는 중요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회가 사후적 명성에서 아주 높은 위치를 점하는 데 이르게 합니다. 이 외에도 그 평가들에 분명함을 더하는 공의회와 연결된 역사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교황 시스토 3세(Sisto III, 432-440)와 황제는 평화와 하나 됨을 재건하려는 노력들을 다시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치릴로와 안티오키아의 요한 사이에(이 시대에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일치에 이르려는 노력과, 반면에 반대를 마주해야 하는 새롭고 힘겨운 절충들이 있었습니다. 양측은 양보했습니다. 안티오키아 편에서는 네스토리오의 단죄에 반대하지 않았고, 치릴로의 편에서는 결정적인 주장들을 취하하는 것이었습니다. 치릴로가 안티오키아 학자들에 의해서 작성된 신앙의 고백을 받아들인 사실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433년에 중요한 일치의 정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이것은 431년의 늦은 결과를 다루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정식은 신학적인 관점에서 결정적인 진보를 드러내줍니다. 양 측면들,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구별도, 그들의 단일성도 같은 정도에서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혼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툼 속에서 전망들 사이의 종합의 시도였습니다.

 

이 일치 정식의 중심적 내용들은 말해줍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느님이시고 온전히 사람이심을 고백합니다. …… (그 분은) 두 본성이 결합됨에 따라서, 신성에서는 아버지와 한 본체이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우리와 같은 본성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님만을 고백합니다. 이런 혼동 없는 결합이라는 개념에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동정녀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진술들은 두 개의 입장을 일치시켰고 두려운 양측에게 만족스런 방법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측 모두의 극단주의자들은 이 정식을 반대하며 저항하였습니다. 화합은 힘으로 강요될 수 없었기에 현실적으로 효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 논박들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진술의 논조는 교의적 관점에서 온전히 분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토론은 계속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국면에서 새로운 주역들을 보게 됩니다. 로마의 교황은 이제 대 레오(Leone Magno, 440-461)였습니다. 안티오키아의 요한은 이미 441-442년경에 죽었고, 치릴로 또한 444년에 세상을 뜨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좌는 이제 치릴로보다 더 완고하게 행동하는 디오스코로(Dioscoro)가 승계합니다. 446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이제 플라비아노(Flaviano)로 바뀌게 됩니다. 논쟁은 447-448 사이에 늙은 수도자 에우티케(Eutiche)가 도발적인 그리스론을 지지하면서 재점화됩니다. 그는 분명한 반네스토리오(antinestoriano)주의자이고, 치릴로의 추종자이며 433년 화합의 정식에 용감한 적대자였습니다. 그는 아주 근본적인 입장을 지지했는데, 즉 그의 경우는 단성설(monofisismo)이라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은 동시에 오직 하나의 본성만을 형성하는데, 그는 여기서 신성에 집중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한 가지 본성, 신성만이 남게 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인성을 소홀히 하는 경향은 이런 단성론자들에게서 보여집니다. [2017년 2월 19일 연중 제7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90)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4)

 

 

에우티케와 함께 이제 단성론자들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다시 논쟁이 점화됩니다. 이 단성론자들의 생각을 설명하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의 인성은 마치 한 방울의 단물이 짠 바닷물에 녹아들듯 그렇게 신성 안에 녹아든다는 것입니다. 에우티케는 이런 전망들을 지지합니다. 그리스도는 두 본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합일과 강생 이전에 두 개의 본성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하나의 본성을 형성하는 것으로 합일되었습니다. 그러나 합일 안에서 오직 신성 만이 남게됩니다. 이런 에우티케의 신학은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계승하고, 이런 입장을 시도하는 신학을 ‘단성론자’라 부르게 됩니다.

 

500명이 넘는 주교들이 왔고,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동방의 교회에서 온 이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황실의 대표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공의회는 그 첫 번째 부분은 449년의 ‘강도 공의회’를 지우는 것으로 이뤄졌습니다. 플라비아노는 복권되었고, 디오스코로는 해임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일반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신앙 고백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절충에 임한 이들은 레오 교황의 작품 Tomus Leonis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치릴로와의 일치를 의미했습니다.

 

예를 들면 안티오키아 학파의 원로, 치로의 테오도레토(Teodoreto di Ciro)가 어떤 역할을 맡는 것이 거부되었습니다. 같은 방법들이 협상에서도 디오스코로에 의해서 사용되었습니다. 디오스코로는 공의회에 참석한 단성론자가 아닌 주교들을 위협했습니다. 갖가지 저항이 발생하는 것은 예방되었고, 로마측의 대표자들의 반복적 요구에 반하여, 교의적 측면에서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오 교황의 작품의 낭독을 방해했습니다. 디오스코로의 주재로 공의회는 에우티케를 복권시켰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대표적 대변자들 모두(플라비아노와 테오도레토 등)를 해임시켰으며, 그들을 네스토리오 추종자들인 이단들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저항의 거대한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안티오키아 학자들과 로마의 교황, 그리고 프랑스와 이태리의 주교들, 서방의 황제 발렌티니아노 3세(Valentiniano III)가 그들이었습니다. 동방의 황제 테오도시오 2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49년의 공의회에 충실하게 머물렀습니다. 이제 공의회는 ‘강도들의 공의회’(Sinodo dei briganti)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기에 이릅니다. 단성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절망적 상황이었습니다.

 

450년에 황제 테오도시오 2세가 죽습니다. 변화는 국가의 최상부에서 일어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서로 다른 빛 가운데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났습니다. 여제 풀케리아(Pulcheria)와 황제 마르치아노(Marciano)의 통치 아래 앞의 사람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반면에 다른 이들은 힘을 되찾습니다. 황제의 궁정은 로마의 황제와 접촉을 가졌습니다. 교회 정치에서 하나의 전환이 어렴풋이 나타납니다. 새로운 공의회를 겨냥하는 이 국면은 대부분 주교들로부터 동의되었습니다. 이 둘은 그러므로 네번째 일치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가까운 칼체도니아에서 451년 10월 8일 부터 11월 1일까지 지속됩니다.

 

500명이 넘는 주교들이 왔고,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동방의 교회에서 온 이들이었습니다. 공의회는 황실의 대표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공의회는 그 첫 번째 부분은 449년의 ‘강도 공의회’를 지우는 것으로 이뤄졌습니다. 플라비아노는 복권되었고, 디오스코로는 해임되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일반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신앙 고백에 대한 연구였습니다. 절충에 임한 이들은 레오 교황의 작품 Tomus Leonis을 따르게 됩니다. 이것은 치릴로와의 일치를 의미했습니다. [2017년 2월 26일 연중 제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91)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5)

 

 

이제 상황은 전복되었습니다. 칼체돈 공의회는 레오 교황의 신학적 노선을 따라 치릴로와 다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칼체돈 공의회를 통해 치릴로는 정통의 증거자로 복권되고, 그와 함께 431년 에페소 공의회도 제자리를 찾습니다. 수많은 어려움들을 겪은 후 위원회는 후에 승인될 초안을 작성할 수 있었고, 그것 또한 고되게 이뤄졌습니다. 이것이 451년의 신앙의 정의를 말합니다. 이 정의는 무엇보다 흥미롭게도 니체아(325)와 콘스탄티노플(381)의 두 신조를 신앙의 전해오는 정통으로 인용하면서 서언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네스토리오와 단성론의 두 오류들을 거부합니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참되고 고유한 신앙의 정식이 따라옵니다. 이 정식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안의 단일성과 구별을 확증하고, 433년의 화해의 정식이 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어머니’ 칭호를 확인합니다.

 

정식은 아직 교회에서 신앙의 고백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원래의 형식이 뒤따릅니다.

 

“한분이신 그리스도, 아들이시며 주님이신 분, 두 본성이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은 독생성자이신 분, 왜냐하면 두 본성의 차이가 일치를 무효화시키지 않으며 또한 각 본성은 고유의 속성을 유지하면서 한 위격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정식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중성과 단일성을 강조합니다. 즉 그분은 두 본성 안에서 하나의 위격이십니다. 이 두개의 결정적인 개념들, 즉 위격(Prosopon)과 본성(Physis)은 철학적 틀입니다. 공의회들을 통해서 고대 교회는 그 분의 존재론적 문제와 그 분의 개별적 존재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예수의 구원적 의미에 대해서 그리스 개념들의 틀 안에서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질문에 응답이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유일한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서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개별자입니다.

 

451년 10월 25일 이 정식은 제국 공의회의 신앙 고백으로 성대하게 선포되었고, 상응하는 예절과 환호가 뒤따랐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정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칼체돈 공의회는 그리스도론 논쟁의 끝을 전혀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적 관점에서도, 그리고 정치적 관점에서도 보편적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계속된 역사는 공의회에 대한 반대적 유포의 역사였습니다. 5세기의 말과 6세기는 이런 위기들이 깊은 자국을 남겼습니다. 국가는 공의회의 정식이 승리하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대주교 디오스코로의 단죄에 강하게 반대하는 이집트 교회로부터 용감하게 반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신학(단성론적 경향)에 충실하게 머물렀습니다. 이런 역사적 반대에서 출발하여 에집트에 건설된 교회가 꼽트(Copta)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아직 오늘까지도 칼체돈 공의회 이전의 교회입니다. 신앙 고백의 그리스도론은 치릴로적이고, 본성의 ‘단일성’의 특성을 갖습니다.

 

칼체돈 공의회에 대한 반대는 그 시대에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서도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저항들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지지되었지만, 수도자들과 그리스도교 백성들 사이에서도 또한 호감을 얻었습니다.

 

금욕적 영성의 전통들도, 대중들의 신심들도, 인간의 신화(神化)의 개념과 인간의 하느님께의 ‘동화’에 깊게 뿌리내렸고, 두 본성의 일치의 교의는 그리스도와 인간의 구원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드러나게 했습니다.

 

제국의 정치도 또한 가끔 칼체돈 공의회와 단성론 사이를 오락가락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칼체돈 공의회를 재해석하려는 이런 동기들로 ‘신칼체돈 신학’이라 명명되는 시도들이 이뤄집니다. 그것은 신칼체돈이라는 비젼 안에서 칼체돈에서 설명되어야 했던 치릴로의 정식과 다시 손을 잡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2017년 3월 19일 사순 제3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92) 초기 교회의 일치 공의회들 (16)

 

 

지난 호의 마지막에서 신칼체돈의 비젼 아래서 치릴로를 다시 살펴보는 시도들이 있었음을 언급했습니다. 또한 이런 시도들 중에서 단성론자들은 네스토리오적 칼체돈 신앙을 판단하고 그 신앙 고백 안에 위대한 치릴로 신학의 결정적 강조점들의 부족을 언급합니다. 반면에 이 신칼체돈 학자들은 치릴로와 공의회를 화해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몇몇의 정식 혹은 그 시대의 평화와 433년의 정식에 도달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치릴로의 진술에서 칼체돈 공의회에 이를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치릴로는 그 자신의 결정적 정의들을 통해 새로운 현실성을 손에 넣게 됩니다. 이런 신칼체돈 운동의 구별되는 태도는 이집트의 수도승들로부터 주로 지지받았고, 그 구별되는 태도, 즉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 간의 정확한 구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신학이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한 통교의 모든 결과들을 이끌어 냈고 특별한 유형의 진술을 선호했습니다. ‘삼위 중의 하나가 수난 받았다’는 진술 같은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로고스가 고난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본성의 구별은 교의적 영역에서 어떤 결과들을 갖지 않는다’는 방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단일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칼체돈주의는 단성론자들과의 합의에 이르고자 했던 처음의 의도를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네스토리아니즘을 격파하는 공헌을 합니다.

 

이런 교회상황에 가장 많이 개입한 정치가였고, 또 그 자신이 4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의 하나였던 이는 바로 유스티니아노 황제(Imperatore Giustiniano I, 527-565)였습니다. 그는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Costantinopoli) 일치 공의회에서 단성론자들과의 합의를 도출하고자 시도했지만 허사로 돌아가 버립니다. 교회의 모든 역사는 오랫동안 칼체돈 교회 안에 네스토리안주의와 단성론자들이란 하나의 분리를 남겼습니다.

 

이런 주제는 아직 또 한 번 교회를 비탄에 떨어뜨리는 기회를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런 갈라섬의 기간 동안의 역사가들은 그 이유들이 ‘오직 교의적인 문제들’이라고만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한 중심부에서 일어났던 분열의 주된 이유들은 오히려 정치적, 국가적 그리고 감정적인 것들이 본질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고대 교회사에 대한 개략적인 역사 서술을 마칩니다. 세상의 주변부였던 팔레스타인에서 울려 퍼진 복된 소식은 그 찬란한 순교의 씨앗을 통해 세상의 중심, 로마에 그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초기의 유대적 요소는 그리스?로마적인 요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새로운 문화 안에, 역사적 체험의 예수를 선포하기 위한 신학적인 노력은 수많은 분열과 갈등을 인내롭게 이겨내면서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신조를 만들기에 이르렀고, 또한 이 세상에 교회를 건설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당시대의 정치,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가시적 지상 교회의 기초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에 막 뿌리 내린 교회가 어떻게 안정적인 틀을 만들어 가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중세시대의 수많은 성공과 실패의 드라마를 써 가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017년 3월 26일 사순 제4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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