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9일 (금)
(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강론자료

루카복음 20,27-38 부활과 살아계신 하느님 (2016. 11. 6. 연중 32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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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충희 [korangpo] 쪽지 캡슐

2016-11-04 ㅣ No.2148

사두가이파는 사람이 죽으면 부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들 중 몇 사람이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선생님, 모세의 기록에 따르면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후사를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곱 형제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맏이가 결혼하였는데 자식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둘째가 형수와 결혼하였습니다.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어서 셋째가 그 여자와 결혼하였고, 이런 식으로 일곱 형제가 차례로 그 여자와 결혼하여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활시키셨을 때에 이 여자는 그들 중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 형제가 모두 그 여자와 결혼하였으니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死後의 세계에서 되돌아온 사람이 있다면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능하다. 시간은 일방적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므로 그 어떤 사람도 죽은 다음에 시간을 거슬러서 다시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경험에 비추어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모기 한 마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코끼리 한 마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듯이, 사람 또한 죽으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후의 세계에 대하여 천국, 지옥, 윤회 등등과 비슷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특정의 이야기를 공유하더라도 이야기가 사실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두가이파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다.

 

사두가이파 몇 사람은 일곱 형제에게 일어난 일을 근거로 삼아서 부활을 부정한다. 이것은 물론 가공의 이야기이다. 사두가이파의 논리인즉,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에게 복종한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사람은 율법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사람이 하느님께 불복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율법)에 따라 부활은 없다. 부활을 주장하는 자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다.

 

 

예수가 대답하였다. “이 세상 사람들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 부활할 자격을 얻은 사람은 결혼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천사처럼 될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생명으로 일으켜졌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두가이파는 부활을 믿지 않은 반면에 바리사이파는 부활을 믿었다. 그렇다면 바라사이파의 주장은 옳은가? 그렇지 않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가 각각 부정하고 인정하는 부활은 사후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모두 틀리다. 사람이 알 수 없는 사실에 대한 주장은 무조건 오류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활이 바로 현세에서 시작되는 사건임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하늘나라와 대비되어 욕망을 따르는 자아를 가리킨다. ‘결혼은 욕망을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결혼할 수도 있고 결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는 결혼을 하더라도 배우자에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 그는 욕망에 따라 물건과 사람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성령에 따라 생활한다. ‘천사는 욕망에서 자유로운 신적 존재임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새로운 자아임을 가리킨다. ‘생명은 육적 생명을 초월하는 영적 생명을 가리킨다. 영적 생명은 죽지 않는다. , 하늘나라의 제자는 육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

 

 

모세는 떨기나무 대목에서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분명히 밝혔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죽은 사람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뜻입니다.”

 

떨기나무는 회개를 상징한다. 회개는 성령을 불러들이며 성령은 겸손과 온유의 품성을 드러낸다.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시오.’(마태오복음 11:29) 말하자면, 하늘나라의 제자는 큰 나무처럼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흔하디흔한 떨기나무처럼 작은 사람이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은 하느님은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각각 아버지/망덕, 아들/애덕, 성령/신덕에 상응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모습으로 사람에게 다가오시고 사람은 망덕, 애덕, 신덕의 활동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직접 말씀을 건네고 계시다. 사람은 그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느님께서 실제로 계시다는 것을 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영적인 자아의 깨달음을 주시기 때문이다. ‘살아계신 하느님이란 하느님께서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누시며 사람에게 영적 깨달음을 주신다는 뜻이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영적 자아의 깨달음으로 거듭나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아름다운 언사와 전례형식을 동원하여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계속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사랑하되, 죽은 사람은 죽은 하느님, 곧 우상을 사랑한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살아있다. 그러나 하느님 앞을 떠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세상을 헤매는 사람은 죽어있다. 사람은 제 선택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살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하느님은 우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죽은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死後의 생사에 관하여 왈가왈부하고 있다. 死後(죽은 후)에는 (죽음)가 있을 뿐이다. 영적 생명은 바로 지금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시작된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저 죽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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