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교회문헌ㅣ메시지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제4장 혼인의 사랑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0-02 ㅣ No.793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2) 제4장 혼인의 사랑 ① (89~100항)

 

화목한 가정 만드는 사랑에 관한 묵상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오로 사도의 유명한 사랑의 찬가(1코린 13장 특히 13장 4-7절)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성찰과 묵상으로 ‘혼인의 사랑’에 관한 제4장을 시작한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이 사랑이 우리가 가정생활에서 날마다 체험하고 가꿔야 하는 사랑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3회에 걸쳐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랑에 관한 묵상을 먼저 살펴본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91~92항)

 

참고 기다린다는 것은 충동적으로 또 공격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교황은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화를 내고 반발하고 나서 늘 변명거리를 찾고자 할 것이라고, 더불어 살 수 없게 될 것이고, 자신의 충동을 통제할 수 없게 되고, 가정은 싸움터가 되고 말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우리는 참지 못해서 부부 사이에 또 자녀와 관계에서 불화와 갈등을 초래하는 경우를 숱하게 체험하고 있지 않은가. 교황은 또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똑같이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참고 기다릴 수 있다고 밝힌다.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이 없으면 참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사랑은 친절합니다(93~94항)

 

친절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도움이 된다는 것, 곧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황은 “사랑은 늘 보조할 준비가 돼 있다”(93항)고 말한다. 교황은 “사랑은 말보다는 행동에서 더 드러난다”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친절한 사랑은 내어줌의 행복을, 보답을 요청하지 않고 오로지 내어주고 섬기는 데서 오는 기쁨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행위의 숭고하고 장엄함을 체험하게 해준다”(94항)고 말한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95~96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기는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으로 인한 슬픔의 한 형태”로 “타인의 행복을 위해 관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복지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성취를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우리를 시기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교황은 나아가 시기하지 않는 참된 사랑은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적게 소유하는 불의를 배격하게 해준다고 지적한다.

 

 

사랑은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97~98항)

 

뽐내지 않는다는 것은 거만하지 않고 잘난 체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 관해 지나치게 많은 말을 삼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관심을 보이고, 약한 이들을 포용하는 사랑”(97항)이라고 교황은 적시한다. 이런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의 교만을 치유하고 겸손을 키워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1베드 5,5)라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는 가정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99~100항)

 

무례하지 않다는 것은 “온화하고 사려 깊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다른 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싫어한다”(99항). 사랑이 깊어질수록, 다른 사람의 자유를 더 존중하고, 다른 사람이 마음을 열 때까지 더 기다린다. 

 

다른 사람들과 진정한 만남을 하려면 친절함이 있어야 한다. 친절함은 자신의 한계 너머를 보도록,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하고 그들과 협력하게 해준다. 무례하지 않고 친절함을 드러내는 사람들은 편안하고 힘이 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와 관련한 예수님의 말씀을 보기로 제시한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마태 9,2)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마태 15,28) “일어나라!”(마르 5,41) “평안히 가거라”(루카 7,50)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가정에서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온화함을 본받고 배워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한다. [평화신문, 2016년 7월 24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3) 제4장 혼인의 사랑 ② (101~110항)

 

집에만 가면 긴장되고 짜증 난다면…

 

 

지난 호에 이어 사랑의 찬가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묵상을 계속 살펴보자.

 

 

사랑은 관대합니다(101~102항)

 

바오로 사도는 “저마다 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아 주십시오”(필리 2,4) 하고 당부하는데, 이것이 ‘관대한 사랑’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관대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지만, 자신에게 마냥 인색하거나 엄격하라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에게도 관대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서다. 구약의 집회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에게 악한 자가 누구에게 관대하겠느냐? 그는 자기 재산도 즐기지 못한다. 자신에게 인색한 자보다 더 악한 자는 없다"(집회 14,5-6).

 

관대한 사랑은 주고받는 정의를 넘어선다. 정의와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의를 실현하고 초과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정의의 초과 달성’이다. 이것이 사랑은 정의를 초월한다는 의미다. 이 사랑은 “바라지 말고”(루카 6,35) 주는 사랑이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103~104항)

 

성을 낸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뭔가 자극을 받은 내면의 분개와 관련이 있다. 성을 낸다는 것은 내적인 폭력적 반응을 가리킨다. 이런 “내적 적대감을 키우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상처와 소외를 야기할 따름”(103항)이라고 교황은 지적한다. 하지만 중대한 불의를 보고 터뜨리는 분노는 건강하다. 이를 의로운 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갑자기 적개심이 밀려온다고 느끼는 것과 거기에 굴복해 적개심을 마음에 깊이 담아두는 것은 별개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빌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라고 권고한다. 교황은 이 말씀을 가정에 적용한다. 가정에서 하루를 마칠 때까지 화 난 채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105~108항)

 

앙심을 품지 않는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용서한다는 것이다. 용서는 다른 사람의 약함을 이해하고 봐주는 것이다. 속상했을 때 또는 실망스러울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바람직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용서가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아무도 용서가 쉽다고 말할 수 없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가정의 친교는 큰 희생정신을 통해서 보존하고 완성할 수 있다. 그러려면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저마다 이해하고 참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관대하고 열린 마음을 기꺼이 지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아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체험을 할 때에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밝힌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용서하려면 우리 자신의 과거사를 놓고 기도하는 법을,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는 법을,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그리고 용서하는 법까지도 배워야 한다”(107항)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용서를 체험했음을 전제로 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비록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나쁜 짓을 했다 해도 그들을 거듭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의 가정생활은 이해와 지원과 격려의 자리가 아니라 끊임없는 긴장과 상호 비판의 자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교황은 지적한다.

 

 

사랑은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109~110항)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다른 사람의 존엄함을 보고 그들의 능력과 선행을 평가하면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 심지어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늘 비교하고 경쟁하면서 그들의 약함을 남몰래 즐기는 그런 이들은 이렇게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를 위해 선행을 할 수 있을 때 또는 다른 이들이 행복한 것을 볼 때 그 자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또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2코린 9,7)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주님께서는 다른 이들의 행복에서 기쁨을 찾는 이들을 특별히 고맙게 여기신다”면서 “가정은 언제나 가족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길 때 다른 이들이 함께 기뻐 축하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110항). [평화신문, 2016년 7월 31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4) 제4장 혼인의 사랑 ③ (111~119항)

 

가장 어두운 때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이번 호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 모든 것을 믿으며 / 모든 것을 바라고 /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는 대목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풀이와 묵상을 살펴본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111~113항)

 

모든 것을 덮어 준다는 말은 입놀림과 관계가 있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풀이한다. 그래서 판단을 억제한다는, 단정적이고 무례하고 단죄하려는 충동을 억제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야고 4,11) 라고 한 야고보 서간의 말씀이 이와 관련된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서로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며 배우자의 약점과 흠이 아니라 좋은 측면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우리 인간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 그러나 아내의 사랑이 또는 남편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인 것은 아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각자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한다. 사랑은 결함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교황은 “사랑은 불완전함과 공존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114~115항)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또는 속이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이상이다. 잿더미 속의 잉걸불처럼 어둠 저편에서 비추시는 하느님의 빛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신뢰가 조성될 때 자유로운 관계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상대방을 장악하지 않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뢰한다는 것은 “통제하고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며 이 자유는 “관계를 풍요롭게 하고 확장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서로 믿고 신뢰하는 부부는 가정 밖에서 얻고 배우는 모든 기쁨을 서로 나눈다. 

 

배우자가 자신을 늘 의심하고 무조건적 사랑이 결여돼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은 비밀을 유지하려 하고 자신의 잘못과 약점을 감추려 한다. 반면에 사랑으로 신뢰하는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도록 도와주며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해준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고(116~117항)

 

이 말은 사랑은 미래에 대해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것이 현세에서 바뀌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만사가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굽은 길을 곧게 펴시고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시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 희망은 죽음 이후의 삶을 포용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부름을 받았다. 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모든 약함과 어둠과 허약함이 사라질 것이고 그 사람의 참된 존재가 지극히 좋고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이 희망은 현세의 질곡 속에서도 천국에서 누리게 될 충만함을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또 현세에만 희망을 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희망이 아닐 것이다(로마 8,24-25; 1코린 15,19 참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118~119항)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는 것은 온갖 시련을 긍정적 태도로 견디어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교황은 풀이한다. 이는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도발에 대해 관대하게 참아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떠한 도전에도 항구하게 기꺼이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118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의 대표적 본보기로 어떠한 시련이나 환난도 형제적 사랑으로 대면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들면서 그가 1957년 11월 17일에 미국 앨라배마에서 한 연설을 길게 인용한다 

 

이런 사랑을 가정에서도 가꿔야 한다. 그래서 교황은 “가정생활에서, 가정을 위협하는 온갖 악과 맞서 싸우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랑의 힘을 키워야 한다”면서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의 이상적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강조한다(119항). 

 

가족 구성원 가운데 누가 나를 화나게 할 때 똑같이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견디어 내는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한결같이 대한다면, 그것이 참사랑이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7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5) 제4장 혼인의 사랑 ④ (120~130항)

 

혼인성사로 맺어진 부부의 사랑, 유통기한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까지 묵상한 바오로 사도의 사랑의 찬가를 토대로 부부 사랑의 특징을 언급한다. 이번 호부터는 이에 관해 살펴보자.

 

 

부부 사랑의 성장(120~122항)

 

부부 사랑은 혼인성사의 은총으로 거룩해지고 풍요롭게 되고 빛을 발하는 사랑이다. 우정의 따뜻함과 에로틱한 격정이 결부된, 영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감정과 욕정이 가라앉은 이후에도 지속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십자가의 희생에서 절정에 이르는 그리스도와 인류와의 깨지지 않는 계약을 반영한다. 

 

혼인성사로 부부는 서로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한다.  하지만 부부 사랑은 또한 한계를 지닌 인간들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와 교회가 이루는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부부가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 은총으로 그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역동적 과정”이다.

 

 

평생 함께함(123~125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한 부부의 사랑은 “우정의 가장 위대한 형태”(123항)로, 우정의 온갖 좋은 점들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곧 “상대방의 선익에 대한 관심, 상호부조, 친밀함, 따뜻함, 안정, 그리고 함께 하는 삶에서 생겨난 닮음” 등이다. 부부는 평생 이를 함께 나누며 서로에게 헌신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관계가 일시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혼인 당사자들은 혼인의 흥분과 기쁨이 일시적일 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혼인의 증인들은 새 부부의 사랑이 시련을 극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자녀들 또한 부모가 서로 사랑하며 충실하게 지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 사랑이 모든 시련을 넘어 끝까지 충실하게 머무르기 위해서는 그 사랑을 강화하고 들어 높여 주는 은총의 선물이 필요하다”(124항). 

 

혼인은 자녀 출산만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 아니기에 혼인의 사랑은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그래서 이 사랑은 부부의 결합 안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며, 서로 끊임없이 존경하는 가운데 모든 것을 공유한다. 이 사랑은 “부부가 자유로이 서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이를 다정한 마음과 행동으로 드러내도록 이끌어 주며 부부의 온 삶에 스며든다”(「사목헌장」 49항).

 

 

기쁨과 아름다움(126~130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쁨과 아름다움을 가꾸고 키워 나가는 것 또한 결혼 생활의 큰 특징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기쁨이란 육체적인 또는 물질적인 즐거움이 아니다.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 집착하게 되면, 거기에 노예가 될 뿐 아니라 다른 데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기쁨은 우리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뿐 아니라 육체적 즐거움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다른 것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혼인의 기쁨은 슬픔 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 

 

결혼 생활이 만족스럽고 안락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긴장과 고통이 있고, 귀찮고 성가신 일도 함께한다. 혼인은 이 모든 것을 부부의 사랑, 부부의 배타적 우정 안에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아름다움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사람의 외적인 아름다움이나 심리적 매력보다 더 큰 “가치”, 그 사람의 타고난 미와 신성함을 관조하고 음미하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그래서 더는 육체적으로는 매력을 지니지 않는다하더라도, 오히려 육체적으로는 보기에 거슬린다 해도 그 사람 내면의 선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사랑은 자유로이 내어주는 데 있다.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해준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를 수시로 경험한다. 여기서는 교황이 언급하는 몇 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 남편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아요.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할 때는 제발 좀 보세요!” “마누라가 나를 더 이상 보지 않아요. 그녀는 아이들만 바라본다니까요.” “우리 집에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아요.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나를 보지도 않아요.” 

 

교황은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모든 것을 넘어 한 인간의 위대한 가치를, 볼 수 있도록 해준다” (128항). 우리는 이렇게 바라보는 사랑의 기쁨을 가꾸어야 한다. 

 

하지만 기쁨은 또한 고통과 슬픔을 통해서도 성장한다. 역경을 거친 후 부부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그 고통을 겪으면서 기쁨도 성장한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14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6) 제4장 혼인의 사랑 ⑤ (131~141항)

 

내 말 귓등으로 듣는 배우자, 변할 수 있을까?

 

 

사랑으로 결혼하기(131~132항)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가. 아니면 결혼해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젊은이들에게 사랑으로 결혼하라고 권고한다. 물론 사랑은 외적인 동의나 계약을 훨씬 넘어서지만 그런데도 결혼이라는 가시적 형태를 택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혼인은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사회적인 성격을 지닌다. 혼인은 서로에게 헌신하는 가운데 사랑 안에서 더욱 성장하도록 해 사회 전체의 선에 이바지한다. 

 

두 사람이 참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들은 이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사랑이 혼인의 계약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 표현될 때, 그 사랑은 당사자들이 자유로이 그리고 남김없이 서로에게 응답한 그 서약을 드러낼 뿐 아니라 지켜지도록 한다. 이는 사랑하는 두 사람은 어려움이 생겼을 때뿐 아니라 새로운 매력거리나 자신만의 관심사가 생겼을 때도 언제나 서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표현되고 크는 사랑(133~135항)

 

혼인의 사랑이 지니는 또 다른 특징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고 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자유롭게 그리고 관대하게 드러나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침묵은 때로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 부모와 자녀 사이에 그리고 동기간에도 무언의 억압이 될 수 있지만, 제때 하는 적당한 말은 사랑을 보호하고 키운다. 

 

사랑은 또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다. 얼마나 성장해야 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사랑의 성장에는 한계가 없다며 거듭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여러분, 더욱더 사랑하십시오”(1테살 4,9). 

 

교황은 나아가 혼인의 사랑은 사랑에 관한 교리를 강조한다고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의 은총에 날마다 행동으로 응답할 때만 성장할 수 있다. 혼인성사에서 부부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은 또한 부부가 은총 안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키워나가라는 요청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좋은 와인은 시간과 함께 숙성된다’는 표현으로 사랑의 성장을 강조하면서 칠레 주교단의 말을 인용, ‘소비주의자들이 선전하는 완벽한 사랑이란 가정에서 가장이 날마다 부딪쳐야 하는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공상’일 따름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우리의 한계와 결함과 결점들에 관해 현실적이 되는 것이, 또 함께 성장하고 사랑을 키우고 일치를 강화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다”(135항).

 

 

대화(136~141항)

 

교황은 이어 대화의 중요성과 방법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대화는 “혼인과 가정생활에서 사랑을 체험하고 표현하며 촉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136항). 하지만 대화는 장시간 힘들게 훈련을 거쳐야 한다.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어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사랑을 표현하고 참다운 대화를 촉진하는 태도를 계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황은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우선 함께하는 시간을 내야 한다. 그 시간이 소중한 시간이 되려면 상대방의 말을 인내하며 주의 깊게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부부간의 대화는 대체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배우자는 자신의 아픔과 갈망과 분노와 희망과 꿈을 알아주길 바라는 경우가 많다. 그런 배우자의 요청에 나는 어떻게 대하는가. “그이는 내 말을 안 들어요. 듣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딴생각을 하고 있다니까요.” 나의 태도는 이렇지 않은가.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을 결코 함부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관심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아가 늘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오히려 내 생각을 바꾸고 키워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일치는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안의 일치’다. 교황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단어도 신중하게 선택하기를 당부한다. 대화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이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토론에서도 자신의 가치, 신념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지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하는 자세는 좋지 않다. 

 

교황은 또 소중한 대화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할 말이 있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따분하고 부질없는 대화가 될 것이라 지적한다. 그러려면 독서나 개인적 성찰, 묵상, 기도 혹은 주변에 대한 관심을 통해 내적으로 풍요로움을 가꿔야 한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7) 제4장 혼인의 사랑 ⑥ (142~152항)

 

성(性), 하느님이 피조물에 주신 놀라운 선물

 

 

격정적인 사랑(142~144항)

 

부부 사랑은 “인간 전체의 행복을 다 포괄한다.” 그래서 “이 사랑은 몸과 마음의 표현을 특수한 품위로 풍요롭게 하고 또한 이 표현들을 부부 애정의 특수한 요소와 표시로 삼아 고귀하게 할 수 있다”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르친다(「사목헌장」 49항). 부부 사랑은 단순히 정신적인 사랑, 영적인 사랑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말하자면 성애(性愛)와 감정으로도 표현되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제 부부 사랑과 감정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다.

 

 

감정의 세계(145~146항)

 

욕구와 느낌과 감정, 열정(passion) 등은 모두 혼인 생활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실제로 현세를 사는 인간이 추구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는 즐거움과 아픔, 기쁨과 슬픔, 온유함과 두려움 같은 감정의 세계가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 또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분은 예루살렘이 당신을 거부한 것에 대해 아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이 움직이셨다. 예수님의 이런 민감함은 그분의 인간적 마음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열려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그 자체로는 윤리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우리가 “좋다고 느낀다”고 해서 정말로 좋다고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그런 느낌이,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감정이 실제로 가정 전반에 또 가족의 공동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내나 남편에 대해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나 느낌 자체를 가지고 아내나 남편을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은 자녀들의 기쁨을 사랑하신다(147~149항)

 

“교회는 그 모든 계명과 금기로 삶의 가장 고귀한 것을 쓰디쓴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가? 창조주의 선물인 기쁨이 우리에게 신적인 것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주는 행복을 주는 바로 그 순간에 교회가 금지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닌가?”(147항)

 

이 내용은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에로스(남녀의 사랑)와 관련해 그리스도교에 대한 세간의 그릇된 인식을 질문 형태로 표현한 것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랑의 기쁨」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를 통해 베네딕토 16세는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하는 바람에 에로스가 점차 악한 것으로 변질돼 버렸다고 주장한 20세기 무신론적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임 교황의 답변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다. 과장이나 일탈한 형태의 금욕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성경에 충실한 교회의 가르침은 “결코 에로스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왜곡되고 파괴적인 형태의 에로스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에로스를 그릇되이 신격화하는…행위는 사실상 에로스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에로스를 비인간화하기 때문이다”(147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4항).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은 그러나 에로스가 절제되고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순간적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절정 곧 우리의 온 존재가 열망하는 지복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주려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한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4항). 프란치스코 교황도 전임 교황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본능의 영역에서는 훈련이 필요할 뿐 아니라 때로는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과도할 때, 억제하지 못할 때, 또는 즐거움에만 집착할 때는 오히려 그 즐거움 자체를 약화시키고 가정생활에 해를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본능에, 감정에 절제와 정화가 필요하고 성숙이 요청되는 것이다.

 

 

사랑의 에로틱한(性愛) 차원(150~152항)

 

여기서 혼인의 성적 사랑에 대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性)은 하느님 친히 창조하신 것이고 당신 피조물들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150항)이라고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몸의 신학’으로 혼인과 가정생활의 의미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따른다. 그래서 성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 또는 성이 출산을 위해 필요하기에 관용할 따름이라고 하는 주장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적 욕구는 멸시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150항). 성애(性愛)는 “부부의 관계를 풍요롭게 해주는 하느님의 선물로 보아야 한다”(152항). [평화신문, 2016년 8월 28일, 이창훈 기자]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해설] (18) 제4장 혼인의 사랑 ⑦ (153~164항)

 

부부 관계 소원해졌다면, 혼인 서약 떠올리자

 

 

폭력과 조작(153~157항)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性)과 관련한 현실의 문제를 직시한다. 곧 상대방을 육체적 만족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 매력이 없어지면 버리는 물건처럼 대하는 그릇된 문화가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황은 혼인 생활에서도 “성이 고통과 조작의 근원이 될 수 있다”(154항)고 우려하면서 “이교인들처럼 색욕으로 아내를 대해서는 안 된다”(1티모 4,6)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또 부부가 물릴 줄 모르는 성적 탐욕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는 선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염려를 언급하면서 부부의 상호증여 행위가 상대방에 대한 탐욕과 지배가 될 경우 이는 성을 도구로만 이용하고 부부의 결합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교황은 또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에페 5,22)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남편이 아내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으로 곡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에페 5,28)는 말씀과 “서로 순종하십시오”(에페 5,21)라는 말씀을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말씀으로 삼을 것을 당부한다.

 

교황은 성의 왜곡이나 애로주의는 배격해야 하지만 그것이 성과 성적 사랑 자체를 경멸하거나 홀대하는 것으로 이어져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밝혔다. “인간이 순전히 영적 존재가 되기만을 갈망하고 육체를 단지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 거부하려 한다면, 영혼과 육체 모두 그 존엄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157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5항).

 

 

혼인과 동정(158~162항)

 

혼인하지 않고서도 가족이나 친구, 교회 공동체나 전문 직업 분야에서 헌신하며 큰 도움을 주는 이들이 있다. 자선과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재능을 교회 공동체에 바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혼인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동정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동정은 장가가거나 시집갈 필요 없는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보여 주는 표징이다. 그러면 동정이나 성적 금욕을 바탕으로 하는 독신은 혼인보다 우월한가?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따라 혼인이 동정이나 독신보다 열등하다거나 반대로 동정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주장할 하등의 근거도 없다고 지적한다. 교황은 “완전한 삶(상태)은 금욕 자체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 권고(곧 청빈, 정결, 순명)에 입각한 삶의 전체적 측면과 관계가 있다”(160항)고 밝힌다. 

 

동정이 결혼의 필요가 없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는 표징이라면, 혼인의 사랑은 한편으로는 삼위일체에서 발견되는 일치의 표징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강생을 통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표징이다. 부부는 서로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정과 혼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동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표징인 반면 혼인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역사적’ 표징, 우리와 하나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지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표징이다. 동정과 혼인은 사랑의 서로 다른 방식이고 그래야 한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161항).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배우자에 대한 육체적 매력은 물론이고 더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인데도 끝까지 혼인 서약에 충실한 부부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아낌없이 헌신하는 부부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 편해서 독신을 택하는 이들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동정을 선택하고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표양이 된다. 

 

교황은 세속화로 인해 평생의 결합과 혼인 성소의 아름다움이 무색해지는 오늘날 부부 사랑의 이 같은 긍정적 측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랑의 변용(163~164항) 

 

시간이 흐르면서 부부는 젊을 때처럼 강력한 성적 욕구에 끌리거나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다. 하지만 부부는 그래도 여전히 삶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동반자다. 그래서 혼인 때의 약속을 갱신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정서적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삶을 함께하고 용서하며 계속 살겠다는 결심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가운데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며 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이 사랑은 성령께 기도하지 않고는, 성령의 은총과 초자연적 도우심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4일, 이창훈 기자]



3,922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