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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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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8-08 ㅣ No.48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1) 대구의 3ㆍ1 운동과 성 유스티노신학교

 

 

증축 공사가 끝난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모습.

 

 

1914년 일제 치하 속 문을 연 신학교

 

1910년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됐다. 교회에서도 민족의 위기를 자각했는지 1911년 경성의 용산신학교에는 성소자가 많았다. 소신학교에 70여 명이 새로 입학해  재적 인원이 96명이나 됐다.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수였기 때문에 학교로서는 건물을 새로 지어야 했다. 그해 봄 설립된 대구교구에서도 16명이 용산신학교에 진학했다. 이 새내기들은 서상돈의 재종손 서정도와 신암공소 김승연 회장의 아들 김구정을 비롯해 거의 다 공소를 여는 데 공로가 큰 구교우집 자녀였다.

 

지방에서 오는 신입생들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김구정은 난생처음 기차를 탔고, 한강을 봤다. 용산역에서 내렸다. 붉은 벽돌의 학교와 성당이 13살 소년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오는 대로 교장 신부에게 인사드리고 번호를 받았다. 그 번호는 학생 시절 내내 그의 표시가 될 것이었다. 동행한 부모들은 잘살라며 떠났고, 소년들은 울기에도 너무나 낯선 환경에 남겨졌다. 그들은 수십 년 후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라는 교가를 부르는 소년들의 까마득한 선배였다.

 

대구교구는 조선 교회 교세의 1/3을 나눠 받고 출발했다. 성직자는 주교 1명, 선교사 15명, 조선인 신부 5명이었다. 드망즈 주교는 1900년부터 6년간 용산신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신학교에 관심도 깊었지만, 사제가 부족했다. 두 교구의 주교는 용산신학교에서 신학생을 같이 교육하기로 합의했으나 학교 시설이 허락지 않았다.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도 없었지만 신학교 설립부터 서둘렀다. 그는 부임 직후 즉시 관할하고 있는 각 본당에 신학생 후보를 천거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주교는 재학생 6명에다 신입생 16명을 보탤 수 있었다.

 

드망즈 주교는 조선인 사제가 선교할 때 조선은 마침내 가톨릭 국가가 된다고 믿었다. 그는 유럽 곳곳에 “조선인들은 아들을 바치니 신학교를 하나 지어 달라”고 호소했다. 주교는 익명의 은인으로부터 거금을 받자 서상돈이 헌납한 남산동 언덕의 땅에 학교를 세웠다. 개교 직전에 1차 대전이 시작돼 교구 소속 15명의 선교사 중 10명이 징집으로 자리를 뜨고 원조금은 줄어들어도 주교의 의지는 확고했다. 주교는  신학교 교사를 ㄴ자로 지어 70여 명을 수용할 공간을 확보하고 개강을 서둘렀다. 그는 건물이 완성되면 ㄷ자가 되리라고 메모해 뒀다.

 

1914년 10월 1일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서울에서 내려온 18명을 포함해 총 59명으로 문을 열었다. 용산신학교로부터 전입한 학생들은 첫 입학생들보다 높은 학년에 편성됐다. 김구정은 상급 라틴어반에 속했다. 샤르즈뵈프 신부가 신학교장, 페셀 신부가 교수 신부로 이들을 맞았다. 페셀 신부는 이듬해 줄리앙 신부와 자리바꿈했다. 1918년부터 김승연 신부가 라틴어 교수로 합류했다. 평신도 교사 홍순일도 있었다.

 

1918년 2월 23일 대구교구 첫 사제로 서품된 주재용 신부와 샤르즈뵈프 교장. 김구정은 이날 삭발례를 받았다.

 

 

조선의 어두운 미래 속 치뤄진 삭발례

 

김구정은 1918년 2월 23일 세속을 끊고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봉헌한다는 삭발례를 받았다. 당시에는 삭발례를 받은 후부터 성직자 반열에 들고, 수단을 입을 수 있었다. 이날 수품자는 사제 1명, 부제 1명, 차부제 1명, 삭발례 9명이었다. 주재용 신부가 이때 사제로 서품됐다. 식장에는 교구 전역에서 교우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

 

이렇게 각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조선 사회는 점점 어려워졌다. 더욱이 1919년 1월 22일 아침, 고종 황제가 68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이틀 후에는 황태자로 책봉돼 11세 때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이 일본 황녀와 강제 혼인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고종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급기야 고종의  장례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만세 시위가 일기 시작했다.

 

대구에도 3·1 운동의 여파가 밀려왔다. 이 거족적인 애국 운동의 물결은 성 유스티노신학교에도 닿았다. 신학생은 원칙적으로 외부와 연락을 할 수 없으나 면회, 편지 등은 모두 허락을 받았다. 그들은 방학 때는 집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김구정 등 상급반은 자신들이 이미 사리를 파악할 나이에 나라가 일본에 점령됐다. 그들은 해마다 일본인이 늘어나고 일본 관습이 시행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는 젊은이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드망즈 주교도 이를 읽고 있었다. 그는 젊은이들이 서울과 여러 곳에서 독립을  위한 시위를 했고 많은 사람이 체포됐지만, 신문들이 침묵한다고 지적했다. 3월 5일 저녁 신학교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독립을 위한 노래를 불렀는데, 교장이 말렸다. 주교는 ‘학생들은 화가 나 있으며, 아마도 성소를 잃는 학생이 나올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도 이 운동이 크게 확산되리라 예견했다.

 

성 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3월 9일 오후 약전골목의 만세 시위 대열에 합류하기로  했다. 시위는 3ㆍ1 운동 경상북도 조직부장이며 교회학교인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이 주도하고,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는 홍순일이 사회단체와 연락을 담당했다. 김하정의 동생인 김구정은 독립선언문 복사와 유인물 프린트를, 서정도는 태극기 수기 제작 책임을 분담했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계획이 교장 신부에게 알려져 당일 아침 두 학생은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의 책상 위에는 이들이 만든 선언문 뭉치와 태극기 다발이 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주교에게 알려졌다. 주교는 순종하지 않는 신학교를 원치 않으며 또 신학생들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소요가 한 가지라도 일어난다면 즉시 모두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신학교 문을 닫겠다고 냉혹하게 말했다. 주교의 단호한 결정에 교장 신부는 학생들에게 읍소했다. “나라가 독립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너희의 소명은 따로 있다. 그것은 독립되는 너희 조국 동포들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다….” 그는 ‘신학교가 문을 닫아야 한다니’라며 한탄했다.

 

 

덕망 높은 새 신학교 교장 샤르즈뵈프 신부

 

샤르즈뵈프 신부는 뮈텔 주교가 주교로서 부임할 때 함께 입국해 용산신학교 교장, 조선교구 부주교 등으로 일하다가 1900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수로 발령받았다. 그는 양국에서 교수로서나 영적 지도자로서나 탁월함을 보였다. 대구교구가 창설되자 드망즈 주교는 미래의 대구신학교 교장으로 그를 초빙했다. 그는 이상적인 신학교 건설을 구상하면서 대구에 부임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주교로 또는 대수도원장으로 천거됐으나 그때마다 사제 양성에 전념하겠다며 사양했다. 새로 개교한 신학교의 교장이 된 뒤 그가 지닌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학생들은 학칙보다도 교장 신부의 탁월한 덕성에 감복, 훈도됐고 성 유스티노신학교는 개교 몇 년 만에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한 사람씩 교장과 대담을 했는데, 많은 학생이 교장의 곡진한 말에 감동했다. 교장 신부는 두 주동 학생에게는 “집에서 근신하고 기다리라”며 귀가시켰다. 그때 시민들의 만세 소리가 대구 시내에 울렸다. 그날 밤 교장 신부는 주교에게 ‘신학생들이 반성하고 순종했으며 주교께 사죄드리고 싶어 한다’고 청했다. 그러나 4월 3일에도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 만세 참여 움직임이 있었다. 주교는 일본의 보복을 염려했다. 이미 외국인들에 대한 통제가 시작됐다.

 

대구의 3ㆍ1 만세 시위는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해 4월 28일 달성군에서 끝맺을  때까지 이어졌다. 대구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천주교 신자도 많았다. 해성학교 학생들은 물론, 명도회원들, 또 신학교를 떠난 옛 신학생도 있었다. 한편,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는 평소보다 40여 일 앞당겨 5월 1일부터 방학에 들어갔다. 건강이 좋지 않은 교장 신부의 요청, 신학생들 사이에 일고 있는 만세 운동의 여파, 창궐하는 각기병을 가정에서 보리밥 식이요법으로 치료해 보려는 시도 등이 고려된 조치였다. 신학교에서는 이 기간 개교할 때 못다 한 한쪽 날개를 증축해서 ㄷ자 건물을 완성했다. 주교가 1년여 전부터 미국에 원조를 청해 비용을 마련해 두었던 공사였다.

 

학교는 넓어졌다. 3ㆍ1 운동 주동자 두 학생에게 퇴학 통지서는 오지 않았다.

 

 

연재를 시작하며

 

교회사는 하느님의 말씀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학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소명을 한순간에 발견하고 결정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면한 현실에서 자신의 소명을 꾸준히 추구해 나가다가 마침내 깨닫고 완성해 내기도 한다. 지원(志園) 김구정 선생은 눈에 보이는 재물을 봉헌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 보이지 않는 역사를 읽어낸 분이다. 그래서 그가 읽어낸 가치를 찾아내는 일은 우리의 일상적 선택 과정에서 하나의 지혜를 주게 될 것이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7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2) 사제의 길, 평신도의 길

 

 

김구정의 동기 신학생인 이종필, 이경만, 김영제, 정수길, 서정도, 이필경. 사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얼굴과 이름을 대조할 수 없지만 「사제 수품 오르도」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1923년 사제품을 받았다.

 

 

1919년 9월 10일 유스티노신학교는 개강을 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등교하게 됐다.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는 귀가시킨 김구정과 서정도 두 학생이 사제 성소를 잃을까 염려해 방학 동안 그들의 본가를 자주 방문해서 성소를 잃지 않도록 권면하고 타이르곤 했다. 실제로 주교도 신학교와 일반 교회학교에 대해 다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주교는 해성학교 학생들이나 명도회원이 시위로 경찰에 체포됐을 때는 침묵했다. 그러나 경성일보가 유스티노신학교의 학생이 시위에 끼어있었다고 보도하자 체포된 이는 학교를 떠난 예전 신학생이므로 정정하라고 요구했다. 주교는 시위를 막는다기보다는 신학교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학교는 김구정을 지켜내지 못했다. 

 

두 시위 주동 학생은 11월 23일에 거행된 서품식에서 다른 7인의 동반생과 7품 중 1,2품인 수문품과 강경품을 받았다. 수문품은 성당 문을 여닫는 권한과 성당 종을 칠 수 있는 권한이고, 강경품은 성당 안에서 성경과 기도문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이다. 이는 신학반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받는 품이었다. 유흥모, 이약슬은 이날 사제품을 받았다.

 

 

교장 신부와의 갈등, 퇴학으로 이어져

 

학교에 다시 돌아온 김구정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동기 중에 서품이 더 빨리 진행되는 학생들이 있었다. 한편, 드망즈 주교는 1920년 5월부터 한 달 여 동안 로마에서 개최되는 파리외방전교회 대의원회의 대표로 선출됐다. 주교는 회의 참석 후 귀국길에 미국에서 교구 운영비를 모금하는 등 1년여의 여행 계획을 세웠다. 주교는 서품식 다음 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이때 우르바노대학에 입학시킬 송경정, 전아로도 데리고 갔다. 한국 교회 최초의 로마 유학이었다.

 

- 유스티노신학교 침실(1940).

 

 

그런데 드망즈 주교가 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인 1920년 4월 22일 샤르즈뵈프 교장 신부가 대구교구 사제들의 피정 미사를 집전하던 중에 쓰러져 선종했다. 페네 신부가 2대 교장으로 임명됐다. 한옥 수류성당을 건축한 신부였다. 그는 또 인명학교를 개교해, 학교 경영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김구정은 페네 교장 신부에게 불만이 많았다. 1920년 봄 새 교장이 오고, 얼마 안 있어 김구정은 신경쇠약으로 집에 가서 치료받게 됐다. 그리고 곧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개강 후에도 그는 당분간 집에서 통학하기로 했다. 

 

11월 3일 교황대사 비온디 대주교의 방문 환영식이 있었다. 신학생들이 대구역 환영식에 참가했는데 김구정도 집에서 통학하던 복장으로 학생들 맨 끝에 서 있었다. 때마침 교장 신부가 학생 행렬을 살피러 왔다가 중절모 차림의 김구정을 발견했다. 사절 주교 일행은 주교관으로 들어가고 신학생들은 학교로 왔다. 교장은 김구정을 교장실로 불러 복장을 지적했다. 김구정은 전임 교장 때는 집에서 다니는 학생은 그런 복장으로 등교했다고 말했다. 교장은 “너는 그런 모자가 쓰고 싶으니 그만 사회로 나가 네 마음대로 하라”면서 그의 퇴교를 명했다. 김구정은 성직품에 오른 사람을 퇴교시키려면 주교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그러자 교장은 부주교에게 품달(稟達, 웃어른이나 상사에게 여쭈어 아룀)하겠다며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김구정은 감정이 폭발하여 교장의 태도를 일일이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는 “당신들은 선배 신부들같이 전교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멸시하려고 온 것 같다. 월남 망국에 있어 전교 신부들이 프랑스 식민화에 앞장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고 내뱉었다(1978년 본인 진술). 그 일이 있은 지 삼일쯤 후 해성학교에 재직 중인 그의 형을 통해 계산동본당 주임 겸 부주교이던 베르모렐 신부가 김구정을 불렀다. 베르모렐 신부는 부주교의 직권으로 그를 퇴학 처분한다고 알렸다. 그는 부주교에게도 “2품까지 받은 사람을 그만두게 하는 데는 타당한 이유와 결점이 있어야 하는데 무조건 퇴학 처분이라니 불복이오. 주교님이 오신 다음 상세한 퇴학 이유를 설명한 뒤 주교의 직권 처분을 기다리겠소”라고 답했다.

 

주교는 그해 12월 11일 대구교구청에 귀청했다. 당시는 겨울방학이 없던 때여서 수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김구정은 소식을 기다렸으나 새해가 지나도 주교에게서는 말이 없었다. 그는 직접 주교를 찾아뵙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주교는 그에게 성모동굴에 가서 기도한 후에 다시 와서 보자고 했다. 한참 후 주교에게 다시 갔을 때 주교는 김구정에게 신부가 되겠다는 의사를 확인한 후 다음날부터 학교에 다시 나오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생으로서 교장 신부께 과히 당돌했으니 먼저 용서를 청하라”고 했다.

 

- 드망즈 주교.

 

 

개선장군처럼 신학교로 돌아갔지만

 

드망즈 주교는 독일에 점령된 스트라스브루그 교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파리로 이사했고 그는 파리에서 공부했다. 소신학교 시절 그는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강인한 성격과 발랄한 기질 탓에 품행 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여러 차례 퇴학의 위기도 맞았다. 그러나 그는 4학년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성당에서 열린 선교사 파견식에 참석한 뒤 ‘새 사람’이 됐다. 그런 주교였기에 김구정에 대해서도 한때의 방황은 수정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김구정은 그 길로 ‘개선장군인 양 기쁜 마음으로’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주교의 말을 전하고 용서를 청하러 왔다고 했다. 교장은 당가신부인 쥴리앙 신부를 불렀다. 두 교수 신부는 논의했고, 구내전화로 주교에게 문의했다. 그때 교장실 앞에 있던 김구정의 고해 사제인 김승연 신부가 그에게 다가왔다. “이냐시오, 그만 세속으로 돌아가. 내가 들으니 주교가 이냐시오를 학교로 오게 하면 두 분이 학교를 떠나겠다는구나.… 열심히 살면 천주께서 다 아시는 일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위로했다. 김구정은 그만 물러 나왔다. 신부들은 성소의 문제를 말했고, 김구정은 이를 독립운동에 대한 억압으로 해석해 응대했다. 이들의 대화는 서로 초점이 달랐다. 이 사실이 항간에 퍼지면서 교우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혹자는 그가 3ㆍ1 만세 운동 때문에 퇴교당했다고 하고, 혹자는 품행 문제로 제적됐다고 했다. 

 

젊은 분노는 타고 있었다. 그는 아직 성직의 길과 독립운동 길의 양립 가능성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3ㆍ1 만세 시위가 무위로 돌아간 뒤 김구정은 신학교에 회의를 품었을 수 있다. 다만 자신이 미처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지하고 정리할 수 없었을 뿐. 유스티노신학교에는 그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이해하고 확신할 때까지 그와 시간과 노력을 함께해 줄 교수가 없었다. 그 또한 그런 학교의 입장이 마뜩잖았다.

 

김구정은 1921년 1월 초 유스티노신학교 운동장에 서 있었다. 꼬마 사제 후보들이 신학교의 ‘위대한 어려움’을 견디고 12년 과정을 마치고 사제품을 받게 되는 숫자는 당시 입학 때의 4분의 1 정도였다. 학업 부진, 동상, 각기병 등의 이유로 울면서 보따리를 싼 학생이 남은 학생보다 훨씬 많았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 5시 30분, 기상을 알리는 종소리에 “주님을 찬송할지어다”로 시작해 빡빡한 일과를 소화했다, 수도원과 같은 엄한 규칙이었다. 이들은 잠자리에 들면서 훌쩍거리는 동료들의 울음소리를 몰래 들었다. 서로 말은 안 하지만, 막연하고 긴 사제의 길 문턱에서 밤에는 집이 그리운 어린이들이었다. 친구가 죽어나갈 때는 무섭고 집에 가고 싶기도 했다. 그가 지내온 지난 10년의 생활이었다.

 

겨울바람이 온몸을 에어 왔다. 자신에게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는데도 세상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학교조차도 그 앞에서 평온했다. 천둥 번개라도 쳐야 하는 것 아닌가?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가 숨을 거둘 때 하늘이 캄캄해진 것은 하느님의 위로였나 보다. 

 

붉은 벽돌로 증축하여 새로 넓혀진 공간이 확대돼 그의 눈에 들어왔다. 1911년 대구교구에서는 16명이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그중 1명은 입학하자마자 퇴교당했고, 학업 과정 중 2명이 탈락했다. 그래서 대구에는 13명이 함께 내려왔다. 그중 이종필, 이경만, 김영제, 정수길, 서정도, 이필경 등 6명이 남았다. 그들은 10년 동안 소년의 꿈을 함께 다졌으나, 이제 서로 멀리서 혹은 돕고, 혹은 가끔 견주면서 고비마다 가지 않은 길을 서로에게 비출 것이다. 김구정은 1921년 1월, 23세의 나이로 세상에 새로 던져졌다. 지금은 깨닫지 못해도 그의 길은 따로 있었다. “주여, 말씀하소서.” [평화신문, 2016년 8월 14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3) 방황의 끝, 평신도는 세속에 튼튼히 서야 한다

 

 

- 김구정의 부친 김상연 바오로.

 

 

사람은 태어나는 나이가 있다. 그런데 스물세 살에 갑자기 새 세상으로 던져지면 그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그나마 새로운 출발을 자신의 의지로 결정했을 때에는 개척할 방향이라도 정해져 있다. 그러나 새 세상으로의 노출 자체가 타인의 힘 때문이었다면 그는 정말로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된다. 더욱이 집안과 사회는 신학교에서 나온, 아니 퇴학당한 이에게 적절한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을 수 있다. 특히 김구정의 가족은 공소를 열고 그 공소가 오늘날의 신암본당으로 거대하게 성장하는 데 대를 이어 물적·인적 자원의 중심이 된 집안이었다. 그들은 당시 조선인 신부가 오십 명도 안 되던 때 품었던 기대 때문에 학교를 원망하든가 아니면 김구정에게 실망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신암공소의 뿌리 깊은 신자 가정

 

대구 동대구역 근처에 있는 신암성당은 그가 태어나 자란 그의 뿌리가 있는 곳이다. 김구정은 신암공소를 세운 김상연(바오로, 1865~1934) · 조시아(아나스타시아) 부부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김상연은 1888년 정규옥 승지 형제와 함께 로베르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은 대구의 초기 신자다. 김상연은 영세 후 바로 자기 집에 공소를 개설했다. 그리고 1930년부터는 그를 이어서 둘째 아들이 낳은 그의 손자 김영달이 2대 공소회장을 했다. 김영달은 공소가 성당으로 승격한 뒤에는 초대 본당회장이 되어 도합 30년간 봉사했다. 김상연 집안은 53년간 대를 이어 회장을 지냈고, 그 자녀들은 공소에서 태어나고 성당 마당에서 놀았다.   

 

신암공소는 1933년 준본당, 1945년 본당으로 승격했기에 해방 이전 김구정의 본당은 계산성당이었다. 그의 부친 김상연은 로베르 신부가 계산성당의 한옥성당을 지을 때 물심양면으로 협조했다. 또한 신암성당은 지방에서 대구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근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지역 인구가 크게 불어났고 교세도 급성장했다. 신암성당 신자들은 교구의 중심인 계산성당, 그리고 지방 각 지역 교회 등에 걸쳐 활동 범위를 넓혀 가기에 맞춤이었다.

 

- 1930년대의 대구 신암성당 모습.

 

 

김구정의 맏형은 김하정(1890~1951)이고, 둘째 형은 김우정이었다. 그의 밑으로 동생 김은정, 김윤정이 있었다. 다섯 형제는 각기 분야를 달리하며 사회활동을 했다. 김하정은 1913년 협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해성학교에서 20여 년간 봉직했다. 그는 3ㆍ1 운동 당시 민족진영 지사들을 규합하여 ‘대구강유단’(大邱講儒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조직부장으로 활약했다. 더욱이 김하정은 학교에 못가는 무산(無産) 아동을 위해 ‘노동야학원’을 세웠는데 은퇴 후에는 이에 전념했다. 그는 8ㆍ15 광복 후 ‘건국 1000인’에 선정되었고, 대구교구 가톨릭청년회연합회 초대회장이 되었다. 둘째 형 김우정은 사업가였는데 재정적으로 독립운동을 뒷받침하여 1948년 건국 시에 정부 표창을 받았다. 그는 본인 소유의 과수원을 기증하여 파티마병원이 이곳에 자리 잡는 계기를 만들었다. 김구정의 동생 김은정은 해성여자학원 운영에 봉사했으나 일제 통치가 한창 심해질 때 만주로 떠났다. 막내 김윤정은 인천 지역으로 옮겨갔는데, 그의 두 아들이 사제가 되었다.  

 

김상연 회장 댁은 신암공소의 뿌리 깊은 집안이고 형제도 많다 보니, 그 회장의 아들인 김구정과 연결되는 교회 내의 인물도 많다. 그의 직계로 며느리가 김영환 몬시뇰의 막내 여동생 김말남이다. 김말남의 아들인 손자 김명동은 한국외방선교회 신부다. 조카 항렬에 김영옥 수녀와 김효식 수녀가 있다. 그의 종손(從孫)으로도 김해동 신부, 김성희 수녀와 김인희 수녀 등 수도자 성직자가 이어진다. 인척간 연결로는 김영환 몬시뇰의 외가쪽 정하권 신부, 정하돈 수녀 등이 있고, 정하돈 수녀 쪽으로 소병욱, 소요한 신부 등이 있다. 또한 방계의 사돈쪽에도 신부 수녀가 다수 있다. 종손 김성동의 처남인 송재준, 송창현 신부가 있다. 마산교구 최용진 신부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김구정에게 아직은 먼 미래였다.

 

 

첫 사제의 꿈을 뒤로한 채

 

자신의 집안에서 첫 사제가 되려던 김구정은 이제 자기 힘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평신도는 스스로가 세속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그 바탕에서 교회가 필요할 때 힘을 보탤 수 있다. 김구정은 평신도로서는 교회 일에 대해 당대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갈고 닦아온 배움과는 전혀 다른 지식을 요구하는 사회 앞에 서야 했다. 

 

김구정의 학력은 당시 사회에서는 월등한 수준이었다. 1926년도 조선 ‘빈민’의 교육 정도는 한자를 읽고 약간 쓸 수 있는 사람이 남 0.8%, 여 0.0%이고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남 5.0%, 여 1.0%였다. 1930년도 한국의 문맹률은 평균 78%인데 남 64%, 여 92%였다. 그러나 소신학교부터 사제 양성 교육이 시작되는 김구정 당대 신학교에서는 세속 과목이라고 하는 교양과목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청년 김구정은 친구들이 사제품을 받고 사회에 가장 뚜렷하게 자신을 드러낼 때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분명치 않은 길을 헤맸다. 김구정이 새 생활의 표시로 제일 먼저 택한 일은 혼인이었다. 그는 1922년 2월 9일 이홍남(수산나)과 혼인 신고를 했다. 학교를 그만둔 지 1년여, 그는 자신이 가장 생각하지 않던 생활을 시작했다. 이홍남은 남산동의 구교우 집안 규수로 경산소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의 언니는 동정녀로 살았다.

 

- 김구정과 아내 이홍남. 아들 영일.

 

 

결혼한 그 해 5월 김구정은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부친은 연로하고 동생이 학비를 대야 하는 형편이었다. 또한 그때는 공소의 성당을 짓는 때였으므로 회장 집안은 그리 넉넉지 않았나 보다. 김구정은 고학을 했으나 결국 1년여 만에 유학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이때 신학교 동기 중 서정도와 이필경이 용산신학생 중 마지막으로 신부가 되었다. 김구정은 1924년 9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장으로 취직했다. 이듬해에는 아들 영일을 낳았다. 그렇지만 그는 1926년 만주로 떠나 용정에 있는 해성학교 부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김구정은 1928년에는 다시 대구에 있었다. 이때 맏딸 영민이가 출생했다. 

 

김구정은 이 무렵 계산성당 중심의 청년 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24년 해성청년회의 회원들이었던 최정복 등은 남방천주교청년회를 창립했다. 그들은 1927년 남방천주교청년회의 회보인 「천주교회보」(가톨릭신문의 전신)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창간 당시 편집진으로서는 최정복을 비롯해 5인이 있었는데, 김구정은 나중에 이에 합류했다. 김구정은 7명의 편집위원 중 한사람으로서 1930년까지 그 이름이 보인다. 그는 남방천주교 창립 5주년 기념 강연회에서 이효상, 윤창두 등과 강의도 했다. 그는 청년회가 중심이 된 조선가톨릭협회 결성 준비 모임, 남방천주교청년회 소년부 설치, 문예동호인회 창립 등에 참가했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글재주를 인정받는 기회가 됐지만, 생활 대책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1930년부터 다시 연길 팔도구의 조양학교 부교장으로 있었다.

 

 

의지할 사람 없는 타지에서의 삶 

 

직업이 여럿이라는 것은 생활이 안정되지 않았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다. 더구나 그에게 있어 결혼은 남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대구로 귀향했던 시기에만 자녀를 갖게 되는 것을 보면, 그는 외국에 혼자 간 듯하다. 안정된 무언가를 찾으면 부인을 데리고 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가 부인과 함께 나갔다면 아기를 갖게 되어 해산을 위해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지만 그 어느 쪽이든 불안정하고 의지할 사람이 없는 생활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김구정은 1931년부터 평양교구 전교회장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이제 강연과 집필에 능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1934년 4월 14일 부친이 세상을 떴다. 김구정은 ‘아버님 靈前(영전)’이란 시를 써 그의 회오를 읊었다.

 

아버지는 가실 길 가셨사오니 / 진저리나는 세상을 돌아다 볼 일 없으리다. /

그러나 남달리도 자식을 사랑하시는 / 그 쇠줄은 어찌 차마 끊으셨나이까 /

“내 가슴에 그만 못을 박으라고” / 몇 번이나 꾸짖으시던 이 못난 바람잡이는 /

자식 노릇 못해 보고 그만 보냈사오니 / 이제야 설워한들 무엇하리까 /

나날이 흐려가는 그 늠름한 모습 / 땅위에서는 찾아볼 길 없사오나 /

‘주여 내 깊고 그윽할 곳에서’ 뵈올 때마다 / 하늘가에나 헤매어 찾아뵈오리다(아버님 靈前 중에서).

 

김구정의 방황은 끝나 가는가? [평화신문, 2016년 8월 21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4) 평양교구의 평신도 전교사

 

 

- 1933년 평양성당(관후리성당)에서 열린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 1931년부터 평양교구에서 전교사로 활동한 김구정은 이 강습회에서는 고정 강사가 될 만큼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아랫줄 왼쪽 네 번째가 김구정이다.

 

 

김구정은 예수님이 세속의 일을 완성하던 나이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에게 일하는 터전을 제공한 곳은 평양교구였다. 그는 전교사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전교사로 시작해 「가톨릭연구」 창간 멤버가 된다.

 

당시 평양교구는 생기발랄한 교구였다. 평안도 지역에서도 박해 기간 천주교에 대해 듣고는 있었다. 그 후 교회는 박해를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했고, 설명만 제대로 한다면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을 저항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시절을 맞았다. 그런데 서울교구에서는 평안도 지역에 충족할 만큼의 성직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천주교가 피 흘린 뒤 미처 사람을 보내지 못하는 평안도에서는 개신교가 추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메리놀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1911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미국 내 최초의 외방전교회다. 1916년 메리놀회 총장 월시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한국 진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원래 조선 교회는 교구 분할 때 대구교구에 3분의 1의 자원을 배분하면서 북부 지역에도 새로운 교구를 설립할 예정이었다. 뮈텔 주교는 평안도 지방을 메리놀회에 위임했다. 메리놀회는 1922년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평안도의 포교권을 위임받고, 이듬해부터 그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다.

 

 

전교사 활동 적극 장려한 평양교구

 

늦게 출발한 평양교구는 일꾼이 필요했다. 더욱이 교구가 인수받은 자원은 본당 7개, 대신학생 3명과 소신학생 8명이 전부였고, 서울교구 소속인 김성학 신부가 파견 나왔을 뿐이었다. 이에 교구는 전교사(전교회장) 제도에 주목했다. 전교사는 유급 활동원으로 교회의 전문 인력이었다. 이들은 본당이나 공소 신자들에게 교리교육을 하고, 비신자나 개신교 신자들과 대면했다. 특히 전교사는 가톨릭 선교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는 지역에 미리 들어가 터전을 닦는 일을 했다. 교회는 이들을 통해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교회 소식을 전달하고 신자촌 상태를 파악했다. 전교사는 교리도 잘 알고 외교인을 설득시킬 웅변술도 갖춘 전위대원이었다. 

 

김구정을 평양으로 부른 사람은 김성학 신부인 듯하다. 김성학 신부는 대구교구가 설정될 때까지 대구교구 지역에서 일했고, 평양교구가 탄생할 때는 메리놀회 신부들의 자문역을 담당했다. 그는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이 논의될 무렵인 1922년 평양성당(관후리성당)으로 옮겨가 평양교구 신설을 도왔다. 1927년 평양교구가 설정되고 평양성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지정된 다음, 평안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서울교구 신부들은 복귀했으나 그는 평양교구에 남았다. 

 

이후 그는 1927년부터 2년간 영유본당, 1931년부터 1934년까지는 서포본당에 있었다. 평양, 영유, 서포본당은 모두 교구에서 비중 있는 중요한 본당들이었다. 영유성당 사제관에는 새로 파견된 메리놀회 신부들이 우리말과 풍습을 익히는 한국어 학교가 있었다. 즉 새 선교사들의 선교지 적응 훈련 장소였다. 그리고 서포는 새로 교구청이 들어선 곳이었다. 교구청사는 1931년에 준공됐고, 서포본당은 그보다 1년 앞서 교구청사 옆자리에 신설됐다. 그는 이곳의 초대 주임이었다.

 

김성학 신부는 신자가 없는 서포 지역을 사목할 때 전교사의 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또 신자들의 신심 운동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영유본당에 있을 때 이미 회장단 합동 피정을 실시했다. 이 합동 피정은 해마다 이어졌다. 김성학 신부 자신이 피정 강사로 초빙되기도 했다. 김구정은 이때 김성학 신부와 함께 대중 강연과 잡지 출간에 관여하게 됐다.

 

 

신학교에서의 배움이 밑거름이 되어

 

김구정은 평양본당의 전교사 여섯 명 중 한 명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1931년에는 박천 지방의 전교사로 파견됐다. 교구는 전교사를 통합 관리하면서 필요한 본당에 일정 기간 소속시키고 있었다. 메리놀회에서는 한국 진출 초기부터 전교사를 고용했는데, 물론 전교사가 평양교구만의 제도는 아니었다. 다만 평양교구의 전교사 활동이 훨씬 대규모고 조직적이었다. 평양교구는 본당마다 작게는 1명, 많게는 15명의 전교사를 뒀는데 일반적으로 여성 전교사가 남성 전교사보다 많았다. 평양교구의 유급 전교사 수는 1928년 89명, 1939년 103명으로 신자 수에 비해 높은 비율이었다. 반면에 대구교구 전교회장은 1927년 24명. 1933년 52명이고 무급 전교회장까지 합해야 100명 정도였다.

 

김구정은 전교사들 가운데 탁월했다. 그는 대중 강연 강사로 발탁됐다. 1933년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부터는 고정 강사가 됐고 곳곳에 초빙됐다. 1934년 평양의 관후리와 신리 두 본당 공동 주최 복자성월 강연회에 그는 양기섭 신부와 함께 초빙됐다. 그는 ‘세계 사상과 가톨릭 사상’을 강의했다. 1936년 진남포성당에서 열린 교리 강습회에서는 김구정이 3일 내내 수강자들을 지도했다. 김구정은 전교사로 일하면서 지방 곳곳의 신자들과 소통했고, 신자들에게 긴요한 지식을 설득시키는 인재로 인정받았다.

 

한편, 모리스 교구장은 교구 행사를 전 교구적으로 펼치고 동시에 인력을 조직적으로 묶어 평신도들에게 다양한 활동 무대를 제공했다. 1933년 제1회 전교사 강습회, 1934년 가톨릭운동연맹 결성, 그리고 1935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대회는 평신도 조직화의 계기가 됐다. 본래 전교회장은 교리에 정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교구마다 이들의 교육에 주력했다. 서울의 블랑 주교는 이미 1889년 ‘순회 전교회장 양성 학교’를 설립한 바 있었다. 대구의 드망즈 주교는 직접 전교회장 피정을 지도했다. 물론 평양교구도 전교사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모리스 교구장은 1933년 서포 교구본부에서 제1회 평양교구 전교사 강습회를 개최했다. 이후 이 교육은 ‘하기 가톨릭 대학’이란 이름으로 지속되는데,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에서 개최해 나갔다.

 

가톨릭운동연맹은 1934년 서포 교구청에서 열린 평양교구 평신도대회에서 결성됐다. 모리스 교구장은 교황 베네딕토 15세(재위 1914~1922) 이래 강조되던 가톨릭 운동(액션)을 평양교구에서 실천하고자 이 연맹을 결성했다. 교구관리소에 중앙부를 두고 본당에는 지회, 공소에는 분회를 설치하며 교구장이 총재가 되고, 홍용호 신부가 의장으로 임명됐다. 연맹은 교리 강습회나 묵상회 등으로 신자들의 신앙 실천을 주도해 나갔다.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은 1935년 10월 초 3일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경축 대회’를 거행했다. 이 대회에는 교황대사 마렐라 대주교와 전국 다섯 개 교구 주교가 참여했다. 첫날은 교황대사 환영 대회와 제등행렬, 둘째 날은 경축 미사 및 교리 경시 대회와 기념 축하회, 대회 마지막 날에는 대운동회와 병인박해에 관한 성극을 했다. 행사 중에는 가톨릭 사료 전시회도 열렸다. 전국에서 6000명의 신자가 모였다. 

 

원래 평양은 프로테스탄트의 움직임이 활발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천주교가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해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평양 시민들은 교황대사 일행이 평양역에 내리자 이탈리아 황제인지 로마 황제인지 궁금해 했다. 1년에 한두 번 신부를 만나던 공소 신자들도 교황대사와 조선 각지의 주교를 한꺼번에 뵙는 영광에 도취됐다. 제등행렬을 보느라 밤잠을 설친 시민들은 조선 14만 신자가 다 모였다며 언제부터 천주교인이 이렇게 많았느냐고 경탄했다. 이 행사를 기해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천주교는 계급을 타파하고 새 문화를 수입하게 한 공로가 있다고 설파했다. 조선일보는 천주교의 사회사업을 주목하면서, 자신이 믿는 신조에 충실하고 꾸준히 곤란과 박해를 넘어 나아가는 조선 천주교 순교자의 태도에서 현대인들은 배울 바가 많다고 주장했다. 

 

김구정은 교구의 활동 현장에서 활약했고 호소력 있는 문장으로 기록해 나갔다. 평양교구 교세는 10년 사이 3배 이상 성장했다. 신자들 마음속에 일어난 자신감은 훨씬 더 컸다. 교구는 평신도들의 기를 살려줬고, 신자들은 전 교구적 공감을 창출했다. 수도자나 성직자는 교구의 경계를 넘어가기 어렵다. 그러나 평신도 김구정은 타 교구의 전통과 현상을 이해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그리고 그는 평양교구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됐다.

 

 

드망즈 주교와의 재회

 

천주교 전래 150주년 경축 대회 둘째 날 드망즈 주교는 미사에서 강론을 했다. 김구정은 이날 드망즈 주교를 주교관에서 대회지인 평양성당으로 안내했다. 그는 모리스 주교의 전용 자동차 안에서 드망즈 주교를 만났다. 주교는 김구정에게 “너는 너의 성소를 (사제 성소가 아닌) 다른 일로서 잘 수행하고 있다”고 격려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평화신문, 2016년 8월 28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5) 「가톨릭 연구」와 문서 사목

 

 

- 1935년 평양 서포리 집에서의 김구정과 두 자녀(아들 영일과 딸 영민).

 

 

김구정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톨릭 연구」에 이를 담아냈다. 그는 이 경계 없는 무대 위에서 한껏 부르짖었다. 그리고 홍용호 신부는 그의 좋은 짝이었다. 

 

평양교구에서는 1934년 1월 「강좌 가톨릭 연구」를 발간했다. 이 잡지는 그해 7월부터 「가톨릭 연구」라는 제목으로, 그리고 1937년부터는 「가톨릭 조선」으로 제호와 성격을 바꾸면서 간행됐다. 이 잡지는 5년간 발행되다가 1938년 12월 폐간됐다. 김구정은 창간 때부터 4년여 이 잡지의 실무를 맡았다.

 

「가톨릭 연구」는 태어나기 힘든 잡지였다. 1933년 조선 교회 5개 교구장은 정례 주교회의에서 전교 방침을 논의하면서 언론 출판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전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 교구의 산발적인 출판물 발행을 통제키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당시 천주교의 기관지인 「경향잡지」와 향후 발간될 「가톨릭청년」만이 기관지로 정해졌다. 「가톨릭청년」은 그해 6월 창간됐다. 이에 따라 당시 발행되고 있던 대구교구의 「천주교회보」와 서울교구의 「별」은 자진 폐간했다.

 

 

신앙에 대한 열정, 잡지 창간으로 이어져

 

이러한 움직임과는 달리 평양교구에서 교구 단독으로 「강좌 가톨릭 연구」를 창간했다. 이 잡지의 발간 배경이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평양교구에서는 1933년 9월 전교회장들을 위한 교리 강습회를 열었다. 전교사는 교리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이 강습회는 그들에게 긴요한 기회였다. 강습회가 막을 내리자, 수강생들은 “적어도 매달 한 번은 교리에 대한 굶주림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김성학 신부와 강사들은 그들의 욕심에 놀랐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해도 참가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그때 김 신부는 예레미아 선지자의 “어린 것들이 떡을 달라고 졸랐으나 그들에게 떼어 줄 자가 없다”는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떡은 어디라도 있지만 나눌 심부름꾼이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그는 수강자들에게 “보수는 그만두고 우리의 주머니 끈까지 풀 터이니 그대들도 후원할 터인가?”라고 물었다. 수강자들은 그 즉석에서 전도협회를 조직하고 40명의 회원을 모았다. 강사진은 이 후원회의 재정적 도움으로 강의록 형식의 「강좌 가톨릭 연구」를 발간하게 됐다. 이러한 잡지 창간은 엄밀히 말하면 한국 주교회의의 결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 김구정과 함께 잡지를 만든 홍용호 신부가 평양 교구장 주교가 된 후 모습.

 

 

한편 전교회장으로 구성된 후원회의 움직임만으로는 잡지 간행이 역부족이었다. 그들의 도움으로는 비용의 3분의 1도 충당치 못했다. 창간호는 몇몇 성직자와 후원회원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해결했다. 대성공을 거뒀다. 처음 50부 인쇄를 계획했는데, 3쇄 1500부를 찍었다. 창간호의 성공으로 그들은 모리스 교구장의 인가를 얻고, 평양 관후리 사제관에서 출발했던 사무실을 서포의 교구청 건물로 옮기고 잡지사의 틀을 갖췄다. 1934년에는 홍용호 신부가 평양교구 가톨릭운동연맹에서 중앙부의장이 됐고, 이 잡지는 그 연맹 기관지가 됐다.

 

이처럼 이 잡지는 미리 계획된 잡지가 아니었고 기본 자본금도 없었다. 이 말은 편집과 운영팀이 비용, 원고, 독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가톨릭 연구」는 편집 고문에 김성학 신부, 책임자에 홍용호 신부, 편집 실무에 김구정으로 진용이 짜였다. 잡지 기능이 확대되면서 점차 강창희, 조천수가 충원됐다. 이중 홍용호 신부는 사제 수품 직후부터 이 잡지를 맡아 폐간될 때까지 5년간 모든 책임을 감당해냈다. 김구정은 홍용호 신부보다 여덟 살 연상이긴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일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새 신부 홍용호의 열정과 김구정의 문필력은 잡지 지면에서 신앙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었다. 

 

홍용호 신부와 김구정은 잡지를 편집하면서 독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그들은 독자란, 시사 자료, 지상 토론회, 신춘문예 등의 원고를 공모했다. 또 잡지사에서는 각 지역에 지사를 설치코자 했다. 창간 두 달 후 대구에 첫 지사를 열었다. 이곳 지사장은 최복만이고 총무 겸 기자는 김은정이었다. 김은정은 김구정의 동생이다. 나중에 만주 해북현에 또 다른 지사를 설치했는데 이곳도 김구정과 연고가 있는 곳이었다. 1938년에 들어서면 잡지사에서는 각 본당에 지사를 설립해 주기를 당부했다.

 

잡지가 겪는 제일 큰 어려움은 물론 발간 비용을 마련하는 문제였다. 잡지는 후원을 받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특집호를 기획해 축하 광고를 받았다. 한편으로는 서적을 간행해서 수입을 올리고자 했다. 「가톨릭 연구」 1년 치를 양장으로 합본하거나, 달력을 제작하고, 특집호를 별매하고, 「진교요리」(김성학) 등의 서적을 간행해 판매했다. 상업성 광고도 실었다.

 

- 김구정이 실무를 맡았던 「가톨릭 조선」의 목차.

 

 

급기야는 편집인들이 잡지를 홍보, 판매하러 다녔다. 교구에서는 출판물 보급 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순회 강연을 했다. 나중에는 ‘가톨릭 문화 보급대’를 조직해 사원들이 각 본당에 파견돼 보급운동을 벌였다. 김구정은 각 지방 본당 담당, 조천수는 평양 관후리본당 담당으로 매 주일 미사 후 신자들을 모아 특별 강화와 간담회를 열어 가톨릭 문화 보급에 진력했다. 그들은 광고를 따고 잡지를 홍보하러 다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잡지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글들을 마련했고, 지역의 인적자원을 확보하고 연계해 나갔다. 

 

김구정은 글을 쓰고, 강연을 하며, 사람들을 모아오고, 각 지방과 연결해 나갔다. 그는 주재용 신부 등 여러 사람을 집필자로 모셔왔다. 또 당시 경상도와 전라도 등 조선 남쪽 지방 전체를 망라하던 대구교구의 소식을 실었다. 잡지에 그의 형 김하정이 소개되고 대구 신암동성당 소식이 담긴 것 등이 그 예다. 그의 동생 김윤정이 평양교구 전교사로 취직한 다음에는 이 잡지의 원고나 기사도 쓰고 있다. 대구의 건설회사 ‘쌍흥호’의 광고도 김구정이 얻었을 터였다.

 

잡지 편집진은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수하면서 5년 세월에 많은 내용을 담아냈다. 그들은 당대를 문서 전교의 시대라고 믿었다. 그리고 가톨릭 진리를 선전하는 것보다 더 신성한 직무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들은 교황께서 “대종도(大宗徒, 큰 사도를 지칭하는 옛 표현) 바오로가 20세기 오늘에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기자가 되었으리라”라고 한 말씀을 바탕에 두고 가톨릭 정신으로 무장하고, 순교 정신으로 가슴을 태우며, 당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글로 소통하고자 했다.

 

 

침묵의 교회 전하는 유일한 자료

 

한편 잡지의 기능은 당대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가톨릭 연구」는 당대 큰 행사, 혹은 기념일을 택해 특집호를 냈다. 편집 인원이 적은 데다 월간 잡지에 특집을 마련하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비장한 각오였다. 1935년 ‘조선 천주교 전래 150주년 특집호’를 냈고, 이듬해 7월호에는 ‘대구교구 설정 25주년 기념’을 보도하며 특집으로 대구교구사를 정리했다. 

 

여러 특집 중 정말 귀중한 기록은 1936년 9월호에서 천주교 간도 선교 40주년을 기념해 ‘간도 천주교회 소사’를 엮은 것과 그다음 해 4월 평양교구 설정 10주년 특집으로 평양교구사를 쓴 것이었다. 평양교구사 특집은 교구사를 한꺼번에 다루려던 초기 계획을 바꿔 한 호에 두세 개의 본당을 소개해 나갔다. 이때 잡지에서는 각 본당의 공로자로 공소회장이나 전교사도 조사해 기록했다. 이러한 특집은 당대의 기록자로서 과거를 짚고 현실을 바로 점검하는 연구가 동반된 작업이었다. 더구나 잡지에 기사로 나간 자료는 동시대인들에게 검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김구정은 이제는 ‘침묵의 교회’가 된 평양교구와 연길교구의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공산 정권 하에서 모든 것을 몰수당할 때 사제들은 더는 활동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그곳에 남았다. 그들이 교구 공문이나 교회 기록들을 간수했으리라. 그러나 그 기록들이 이곳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가톨릭 연구」는 이 침묵의 교회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평신도는 교회의 내부까지를 기록하기 힘들다. 그러나 김구정은 평양교구 설정의 자문이었던 김성학 신부가 옆에 있었고, 나중에 주교가 된 홍용호 신부와 함께 일했다. 그리고 잡지사는 교구청사 안에 있었다. 온갖 분야에 관심이 많고, 처음으로 세상과 대한 날카로운 눈과 제대로 발휘된 필력이 평양교구를 실어냈다 은경축도 할 수 없었던 평양교구는 금경축을 맞아 남한에서 「평양교구 50년사」를 발간했다. 「가톨릭 연구」는 그 실마리가 돼 줬고, 당시 생존했던 김구정은 설명을 보탰다. 주님은 김구정을 그렇게 쓰셨다. 평양교구 100주년은 현지에서 할 수 있기를. [평화신문, 2016년 9월 4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6) 만주ㆍ간도의 조선인 천주교회 그리고 선목촌

 

 

김구정이 활동한 흑룡강성 일대. 좌측 하단 작은 지도에 진한 색으로 칠해진 곳이 흑룡강성이다.

 

 

김구정은 다시 만주로 떠났다. 그는 평양 서포에 부인을 묻었다. 교회 일을 해서 떼돈을 버는 이는 없다. 교구장 주교부터 정신적 절제와 물질적 절약을 미덕으로 사는 분들이니 교회에서 부귀를 바랄 수는 없다. 교회 일이란 그 일을 하면서 자기 내면에 차오르는 기쁨으로 보답받는다. 물론 이때 가족들도 그와 같이 긍지를 느끼고 보람에 불타올라야 한다. 따라서 교회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족의 생활까지 봉헌하는 셈이다. 김구정의 부인 이홍남은 객지 생활 6년에 9살, 6살짜리 남매를 두고 눈을 감았다.

 

 

민족의 애환 서린 간도로 

 

김구정은 평양성당의 전교사였다. 그런데 그가 서포에서 생활한 점으로 봐 교회 잡지를 시작할 때 전교사직을 그만둔 듯하다. 그 시절 전교회장의 월급은 교사 월급보다 적었다. 몇몇 공소에서는 교우들이 돈을 모아 그 급료를 마련하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가톨릭 연구」는 창간할 때부터 편집인들이 스스로 주머니를 털겠다고 했으니 수입은 더 적었을지 모른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김구정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을 펼쳤다. 부인은 그를 뒷받침했다. 아내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두 아이를 이모처럼 기르겠다는 채경석(요안나)을 아내로 맞았다. 옳게 사는 사람은 부자는 되지 못해도 사람은 얻는다. 김구정은 반려복이 있다고들 했다.

 

- 김구정이 「가톨릭 연구」에 연재한 간도의 추억 기사.

 

 

김구정이 간도로 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간도는 일찍부터 조선인이 들어가 산 곳이다. 그렇지만 특수한 땅이기도 했다. 조선인이 일제치하에서 살기 어려워 밀려가거나, 청운의 꿈을 품고 찾아간 곳이 간도였다. 그곳은 중국 땅이었지만 조선인이 대다수였고, 치안은 점차 일본인이 담당해 나갔다. 그래서 간도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데 만나 뒤섞여 사는 국제 지구였다. 특히 이곳의 민초들은 늘 공격당하고 끊임없이 옮겨 다녀야 했다. 간도의 조선인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행패, 중국인 마적 떼, 독립군을 가장한 도적 떼에게 항상 시달렸다. 그럼에도 반세기 동안에 조선인의 손으로 간도는 문전옥답으로 변했고, 연길이나 용정 등은 도시 시설을 갖춰 갔다. 천주교인들은 거기서도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만주땅의 조선인 공동체 연길교구

 

연길교구는 만주땅의 조선인을 주된 구성원으로 삼았던 독특한 교구였다. 본래 연길교구는 만주교구에서 분리됐다. 처음 간도지방에 신자가 생기자 조선교구의 브레 신부, 라리보 신부 등이 사목했다. 1920년 원산교구가 설정되면서 이곳을 베네딕도회가 관할했다. 1937년 마침내 연길교구로 독립했다. 1946년부터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됐다. 이처럼 연길교구는 사목 주체가 바뀌고 기록 체계도 바뀌었다. 6년 동안 월간으로 발간된 「가톨릭 소년」이 국내에서는 단 한 권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 역사가 전달되기 쉽지 않은 교구였다. 

 

따라서 1936년 「가톨릭 연구」가 ‘간도교회 소사’ 특집을 엮어 기록을 남겨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연길교구의 역사는 물론 파리외방전교회 문서나 베네딕도회의 연대기 등을 통해 알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의 특집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연길교회사를 종합했으며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적어낸 기록이었다. 그 특집에는 간도 지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첫 장면에 관심을 뒀다. 간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경로는 조선에 천주교가 터 잡은 경로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간도 교회사는 간도에 천주교 신앙의 새벽을 연 김이기를 조선 천주교회사의 이벽에 견줬고, 간도의 사도로 불러준 김영렬(김승렬이라고도 함)을 이승훈과 비교해 서술했다.

 

 김구정은 연길 교회사뿐만 아니라 간도 사정도 알고 있었다. 일찍이 그는 신학교를 나온 직후인 1921년 만주행을 결심했다. 집에는 원산에 가면 독일 유학을 주선할 사람이 있다고 둘러댔다. 그는 친구하고 군용으로 가설한 다리를 몰래 건너 간도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폭탄 테러범으로 의심받아 일본 영사관에 붙들려갔다. 불령선인 9호라는 표를 붙이고 유치장에 갇혔다가 9일째 되던 날 풀려났다. 그는 그렇게 간도에서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며 그곳의 치안과 교회 사정을 직접 체험한 바 있었다.

 

또한 김구정은 「가톨릭 조선」에 ‘밑며누리’를 연재했다. 이 소설은 4회에서 멈춘 미완성작인데 북간도 무학촌이라는 광산골이 배경이었다. 부모의 빚 때문에 민며느리로 팔려갔던 실란이 천주교회에서 세운 노동야학을 다니면서 자아에 눈뜬다는 내용이다. 김구정은 간도의 천주교인들, 광부의 애환, 계몽 정신 등을 폭넓게 다뤘다. 한편의 장편 소설을 계획할 만큼 간도 사람과 사회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김구정이 간 곳은 연길교구가 아니었다. 그는 1938년 만주 흥안령성 징기스칸(成吉思汗)시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효성국민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이 일을 동생 김은정과 함께했던 것 같다. 당시는 일본이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개척단’을 만들어 조선 농민들에게 북방 이민을 권장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김구정은 1941년부터는 소련과의 국경지대인 치치하얼에서 만선일보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때 교리 강사로 초빙받아 교우촌을 순회했다. 그는 해북진 선목촌에 머물며 강의한 바도 있었다.

 

 

조선인 교우촌 ‘선목촌’

 

중국 흑룡강성 해륜시 해북진은 1920년대에 인구가 1만 2000명이었는데 천주교인이 8000명이었다. 거기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대구교구 신자이며 독립운동을 했던 정준수는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 비참한 지경에 이른 현상을 곳곳에서 목격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해 이곳에 농장을 열고, 조선인 교우촌 ‘선목촌’을 일궜다. 그는 자신의 처남 김상교(김영환 몬시뇰 부친)와 함께 신자들을 모아 이상적 교우촌을 만들어 보고자 했다. 그들은 선목촌에 성당을 건립해 놓고 신부를 초빙하고자 했다. 이 초빙에 응해서 서울교구 김선영 신부가 부임했다. 그리고 김선영 신부가 하르빈교구 주교 비서로 떠나게 되자 전주교구 소속이었던 임복만 신부를 모셔 왔다. 성당과 학교를 갖춘 선목촌은 자연히 그곳 교우들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 선목촌 학교 앞 김말남과 그의 동생. 김말남은 김구정의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시 간이 가면서 자녀 교육이 문제가 됐다. 마을에서는 한 가정을 국내로 들여보내 선목촌 출신 자녀들의 교육을 돕기로 하고 정준수의 동생 가족을 서울로 보냈다. 선목촌 자녀들은 정준수 동생 가족에게 의지해 서울로 유학해 명동의 계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유학생들은 자리가 잡히면 명동성당 내에 있는 성가기숙사로 들어갔다. 이때 성가기숙사에서 지낸 학생 중에 성직자, 수도자가 많이 나왔다. 선목촌 출신들인 김영환(대구대교구 몬시뇰)과 정준수의 조카인 정하권(마산교구 몬시뇰)은 이종사촌 간이었다. 또 김영환과 최영수(대구대교구장 역임, 1942~2009)는 이웃 간이었다. 2015년 선종한 부산교구의 김성도 신부는 1924년 해북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머니가 안중근 의사의 친척이었다. 그 집안은 러시아까지 망명을 다니다가 고생 끝에 선목촌에 정착했다.

 

그러나 해방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해방 직후 구(舊) 만주국 군인들로 구성된 마적단의 습격으로 김영환의 어머니와 막내동생은 총에 맞아 운명했다. 그 죽음을 목격했던 김영환의 여동생 김말남은 나중에 김구정의 며느리가 됐다.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되고, 1966년 문화혁명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신중국에서 정준수는 투옥됐다가 길거리로 내몰렸다. 공산당은 사람들에게 그를 돌로 쳐 죽이도록 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갇혀 지내다가 프랑스로 추방됐다. 또 조선인 신부 중 김선영 신부(1898~1974)는 강제노동 중에 눈을 감았다. 임복만 신부(1910~1994)는 중국 공산혁명 과정에서 체포돼 ‘반혁명분자’로 5년간 옥살이하는 등 모두 9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 탈출해 지하교회 사목을 했다. 그는 중국에 파견된 지 50년 만인 1992년 12월 말에 입국해 고향 전주에서 지내다가 1994년 선종했다. 

 

임복만 신부가 귀국한 뒤 김영환 신부는 그를 찾아가 “영환이가 신부가 됐다”고 인사할 수 있었다. 김영환 신부도 말년에 자신이 태어난 중국 동북 지방의 교회 발전을 위해 많이 노력했다. 선목촌의 역사는 숨은 이야기가 많은 교회사다. 주님은 김구정에게 간도 교회를 기록하고, 간도를 체험하고, 간도의 사람들과 인연 맺게 하셨다. 선목촌은 그 고리의 하나였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11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7) 전주교구에서의 교육생활, 귀향

 

 

- 맏딸 영민의 첫 영성체 기념 가족 사진.

 

 

김구정은 자신의 이력을 쓸 때 교육 경력을 매우 자세히 썼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학교 6곳에서 근무했는데 학교마다 대부분 1~2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전문적인 교육자 생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큰딸이 교사인 걸 보면 그는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김구정의 정규 교육 활동은 군산에서 시작됐다.

 

김구정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세 번에 걸친 만주 생활을 정리하고 전북 군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군산은 전주교구에 속한다. 전주교구는 독특한 교구다.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에서 순교했다. 또 1937년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조선인 교구장이 임명된 곳이다. 

 

김구정은 「가톨릭조선」 6월호에 조선인 교구장이 관할하는 전주교구의 설립을 ‘세계적 가톨릭 포교사에 대서특필할 신기록이며 포교의 교황 금상 성하의 위대한 의도적 대영단’이라고 썼다. 그는 이 사실은 한반도를 우리의 손으로 성화하고 동포의 구령사업을 같은 민족의 열정으로 하라는 언약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는 또 향후 비용을 16만 신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김구정은 개인적으로도 전주교구와 인연이 있었다. 1937년 전주교구 설정 당시 김영구 신부는 김구정에게 재단 설립을 위한 사전 조사를 부탁했다. 김영구 신부는 이 무렵 「가톨릭조선」에 평양교구 10년사 개괄을 썼다. 그때 김 신부는 군산에서 새 성전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건축 사업에는 김구정 부인의 친척 채씨 일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구정은 1937년 대구 신암동에서 둘째 딸을 낳았다. 이후 그는 전주에 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동생 김은정이 있는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군산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었다.

 

평양 출신인 김구정의 부인 채경석은 전주여고를 나왔다. 그러므로 채경석 집안의 친척들 가운데 일부는 일찍부터 군산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배로 남북한을 오갈 수 있어 평양과 군산은 바다로 쉽게 이어졌다. 

 

채씨 가문과 관련된 기록은 군산본당 초기 기록에 나타난다. 군산본당은 1915년경 김 마리아와 만동리 옹기점의 교우들이 시내 영동에서 공소를 시작한 데서 출발했다. 또 김 마리아는 당시 개신교도였던 동생 김용진(초대 본당 회장)을 설득, 개종시키고, 채용수 등 몇 사람과 함께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1928년 14칸 기와집을 사서 강당으로 개조했다. 1929년에는 드디어 김영구 신부가 군산본당 설립 임무를 지게 됐다. 그는 나바위본당 보좌 신부로 지내면서 다음 해에 신자들과 함께 둔율동 군산보통학교 옆에 있는 대성원(옥구군청 구 관사)을 매입해 성당으로 개수하고, 부속 건물을 사제관과 기타 필요한 시설로 사용했다. 1931년 군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김영구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새 성전 건축에 적극 활약한 채용수 등이 김구정 부인의 일가였다.

 

김구정이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은 1944년 4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후상 신부 때였다. 김후상 신부는 김구정보다 한 반 아래로 1914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소학과에 입학해 1926년 수품했다. 1947년부터는 박성운 신부가 군산 둔율동본당에 새로 부임했고, 김구정은 그를 도왔다. 이때 김구정이 전교한 김용규(전주교구 원로사목자 김진소 신부의 부친)의 활약이 컸다. 김구정과 그의 동생 김윤정도 군산으로 이사와 본당 기관지인 「샛별」을 발간했다.

 

 

김진소 신부와의 인연

 

김구정은 ‘입이 푸짐하고 그가 100명에게 말을 하면 101명이 다 빨려 들어간다’는 평을 들었다. 이 시절 김구정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가 김진소 신부 집안을 개종시킨 일이다. 김진소 신부 집안은 원래 가톨릭이 아니었다. 충청도의 부유한 양반 집안이었고, 김 신부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그런데 김 신부의 아버지 김용규는 1920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 교회를 세우거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시골 교회의 가난한 목사나 전도사들의 생활비를 대줬다. 또 서천 서면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김진소 가족은 해방 후 군산으로 내려와 둔율동에 정착했다. 그들은 군산성당 앞을 지나 개복동 교회를 다녔다. 1946년 김구정은 일제 초기 군산 부윤이 살던 집으로 이사 왔는데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아 김진소네 집으로 물을 길러 다녔다. 그러면서 자연히 집주인 김용규와 교류하게 됐다. 김구정은 설득력이 있었다. 개신교 장로 김용규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개종을 결심했다. 

 

1947년 9월 25일 김용규는 온 가족과 함께 개종했다. 김진소 가족은 당시 주임인 김후상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나 영세는 1947년에 새로 부임한 박성운 신부에게 받았다. 온 집안이 한꺼번에 영세해 김구정의 가족이 대부대모가 됐다. 김구정은 김용규의 대부가 되고, 김구정의 부인 채 요안나는 김 신부 모친 한영수의 대모가, 김구정의 아들 김영일은 김진소의 대부가 되는 등 서로 대부대모 관계로 엮였다.

 

김용규 장로가 개종한 후 몇 달 동안은 개신교 신자들이 김진소 집에 와서 통성기도를 했다. ‘마귀 들린’ 장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에 열성이던 그 신앙을 그대로 실행했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과 순교자의 일화가 결국 김진소를 신부의 길로 이끌고 또 살게 했다. 김진소는 1972년 7월 5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한공렬 대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부친 김용규는 김 신부가 사제품을 받기 열 달 전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구정은 김 신부 서품 때 자신이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김 신부는 평생 교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설득력을 갖춘 김구정이지만 교육자로서의 이력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1946년 군산여자고등학교 교감,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군산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구한말에 시작한 군산여고는 1945년에 4년제 국립군산여학교로 1947년 6년제(2학급) 군산공립여자중학교로 개편됐다. 이 변화의 시기에 김구정이 교감으로 취임했다.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김구정은 이어 군산대학(1951년 전북대학교로 통폐합됨)으로 옮겼다. 군산대학은 1947년 개교했다. 김구정은 신설 학교에 들어가 학교의 연합 발전에 기여했다.

 

- 군산 둔율동성당 전경.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정은 대구로 귀향을 계획했다. 당시 남한 6개 교구 중 대구교구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김구정은 생애 최대의 혹독한 귀향 신고식을 치렀다. 1ㆍ4 후퇴가 단행되자 군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맏딸 영민과 막내딸 영진이 대구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1951년 5월 두 자매는 큰딸의 약혼자인 국군 장교의 차에 이삿짐을 싣고 대구로 향했다. 이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공비의 습격을 받아 두 딸이 다 죽었다. 운전병하고 약혼자만 살아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할머니가 손녀들을 화장했으나 김구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김구정은 끊임없이 떠돌며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에 그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길렀다. 김구정은 두 딸의 사망 신고를 굉장히 나중에서야 했다. 또한 김구정의 형 김하정은 반공 학생운동 간부였던 둘째 아들 김영한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되자, 충격으로 이듬해 세상을 떴다. 

 

대구에 돌아온 김구정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쯤인 1956년 그는 대건고등학교 윤리 과목 강사로 나가게 됐다. 대건학교는 바로 자신이 다니던 유스티노신학교 건물에 있었다. 대구 유스티노신학교는 1945년 3월 폐교당하고 건물은 일본군에게 징발됐다. 일본군은 광복 후 한 달이나 뒤에 건물에서 물러갔다. 그리고 학교 건물은 다시 경찰학교가 사용했고 이듬해에는 미군이 사용했다. 6ㆍ25 전쟁 때에는 육군병원으로도 사용됐다. 

 

대구교구의 첫 중등교육기관인 대건중학교는 유스티노신학교가 있던 건물에서 1946년 9월 16일 개교했다. 김구정은 윤리를 가르쳤다. 그가 남겨 놓은 교재를 보면 성모무염시태 축일(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나 루르드 이야기 등의 원고가 있다. 김구정은 그곳에서 자신의 사회 경력을 마무리했다. 주님께서는 20여 년의 타향 생활에서 온갖 사회 변화를 겪은 김구정에게 소년 시대의 꿈을 돌아보고 생의 의미를 느낄 기회를 주셨다. [평화신문, 2016년 9월 25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8) 순교사 연구와 교구사 편찬

 

 

- 1946년 2월 대구대교구 제4대 교구장에 취임한 후 주재용 신부.

 

 

사람은 오묘하다. 누군가 나와 함께한다는 것을 느끼기만 해도 어떠한 어려움도 의연히 넘어간다. 함께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없애 준다거나 아니면 감해 주리라는 기대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누군가’가 여러 명일 필요도 없다. 김구정에게는 주재용 신부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의 소통은 교회사 연구로 묶였다.

 

김구정이 사회 경력을 접는 환갑 무렵 주재용은 그에게 교회사 연구를 권했다. 당시는 ‘한국 교회사 연구’라는 단어 자체도 낯선 때였다. ‘교회사’라면 세계 교회사를 일컬었고, 한국 교회에 관해서는 순교자에 대한 기억이 역사를 대체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주재용은 김구정에게 교회의 사건들을 시간과 공간을 고려하면서 종합적으로 묶어보라고 권했다. 주재용은 물론 김구정의 작업을 교열하고 사료를 제공하고 방향을 잡아주었다.

 

주재용은 용산신학교에서 공부하다가 1914년 대구에 유스티노신학교가 설립되자 이곳에 편입했다. 그는 1918년 제1회 졸업생으로 서품돼 대구교구가 배출한 첫 사제가 됐다. 주재용이 사제품을 받던 날 김구정은 삭발례를 받았다. 주재용은 수품 후 함양본당 주임을 거쳐 전라도 지역을 사목하다가, 1931년부터 성유스티노 신학교 교수가 됐다. 이때 그는 김구정의 권고에 따라 평양교구에서 간행하던 「가톨릭 연구」에 ‘성경 강의’를 연재했다. 

 

1942년 주재용 신부는 전주교구 2대 교구장이 됐다. 그리고 1946년에는 대구교구 4대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그는 대건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에 역점을 뒀다. 그러나 엄격하게 원칙을 고수하던 주 신부는 결국 1948년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춘천교구로 옮겨갔다. 그는 춘천교구로 이적한 뒤 교회사연구에 몰입해 1958년 「선유(先儒)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를 출간했다. 김구정도 이 무렵 대건학교에서 퇴임했다.

 

- 김구정이 마지막 교정을 보아 출간한 주재용 신부의 「배론 성지」

 

 

「천주교 호남 발전사」 출간

 

김구정은 「천주교 호남 발전사」(이하 호남 발전사)로 교회사 연구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 책은 김영구 신부와 공저로 주재용 신부가 교열해 1964년 전주교구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해 만든 만큼 책 앞에 교구장의 권두사, 교열을 맡은 주재용의 글, 공저자 김영구 신부의 책 간행 경위. 그리고 김구정의 일러두기 등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교구사 집필은 일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힘든 작업임을 드러낸다. 

 

「호남 발전사」는 김영구 신부가 지녔던 집념의 산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해 낸 조상들에게서 신앙인의 본보기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호남사’를 펴내야 한다고 30여 년이나 희망해 왔다. 그러던 중 한공렬 주교가 전주교구장이 되자 호남 교회사 편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위원장이던 주교의 병환으로 김영구 자신이 위원장을 맡았고, ‘외우(畏友) 김구정’에게 집필을 의뢰했다. 김영구 신부는 호남 지역의 자료를 제공하고, 각 성당의 협조를 얻어 냈다. 출판비도 직접 부담했다. 

 

김영구 신부는 한국 교회의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유례가 없는 동정부부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가장 어린 순교자 김아나스타시아, 병인박해의 평신도 가경자 중 3분의 1이 있는 ‘방인 자치교구’의 선두에선 전주교구의 역사에 큰 긍지를 가졌다. 이 긍지가 한국 최초의 교구사를 출간시켜 줬다. 이 책의 간행은 ‘태양 아래 동류의 것이 아직 없었던’ 빛나는 작업이었다.

 

 

교회사 약술하면서 저서의 틀 만들어

 

김구정은 1961년 대구교구 설정 50주년을 기해 ‘남방교구사’를 쓰려고 일찍부터 사료를 수집해 왔다. 최정복의 「대구교회사」가 간행되자 이를 포기했지만, 이때 준비했던 자료들을 「호남발전사」에 활용할 수 있었다. 약 800여쪽에 이르는 「호남발전사」는 해당 지역에 대한 지리인문적 개괄에 이어서 전사(前史)로서 한국천주교회사를 약술했다. 그리고 교구 설정 사실과 당시까지의 교세를 서술하고, 이어 각 본당의 연혁을 기록했다. 이러한 형식이나 작업 방법은 김구정이 쓰게 될 저서들의 기본 틀이 됐다. 

 

김구정은 「호남발전사」를 펴내고 2년 후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조하며 「영남 순교자」를 집필했다. 서정길 대주교는 1966년 병인 대교난의 백주년과 을해박해 15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작업을 그에게 의뢰했다. 여기에서 그는 홍유한이 신앙을 자유로이 실천하기 위해 경상도 영주 고을에 머물렀으므로, 경상도는 한국의 첫 신자가 살던 지역임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김구정은 이듬해 부산교구설정 10주년에 맞춰 「천주교 경남 발전사」를 엮었다. 최재선 주교는 부산 교구의 10년간의 발전을 감사하면서 이 작업을 김구정에게 맡겼다. 이어 김구정은 1981년 한국 선교 200주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과 대구교구 설정 70주년을 맞아 90이 넘은 나이에 「대구의 순교자들」을 엮었다. 이 책은 김구정 자신이 이미 출간한 「영남 순교사」에서 순교자들의 약전을 뽑아 이를 능숙한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처럼 김구정은 「호남 발전사」 「영남 순교사」 「천주교 경남 발전사」를 차례로 펴내면서 남한 지역 각 교구의 발전을 정리했다. 이에 훨씬 앞서 그는 1930년대 「가톨릭 연구」를 통해 대구교구 25년의 역사를 개괄했다. 그리고 「가톨릭 조선」에 평양교구 10년사, 연길 선교 50년사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그 개요를 직접 집필했다. 또 김구정은 「가톨릭 연구」에 ‘교구 설정 전 남선 교회약사’를 집필한 바 있었다. 

 

다시 말하면 김구정은 한국 교회사에서 교구사 집필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구 단위로 지나온 과거를 살피려고 했다. 그것은 당대 교회가 필요로 하는 주문에 맞춘 작업이었다. 모두 교구 내지는 교구장으로부터 의뢰받은 작품이어서 그의 저서는 늘 해당 교구장이 권두사를 썼다. 김구정은 「호남발전사」에서와 같이 진실한 동료들을 둠으로써 저술의 기회를 얻었다. 또는 그 스스로 각 교구의 기념사업에 맞추어 미리 자료를 준비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그는 주문자에 맞춰 자신의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김구정은 당대 사회가 요구하는 역사와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으로 돌렸다. 그러므로 기존의 교회사가 복음의 전파와 순교사 위주이며 통사였는데 비해 그는 새로운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교회사연구의 주제와 방법의 폭을 넓혀갔고, 다루는 시기도 자신의 당대로까지 확대했다. 그의 글은 땅 위에 바탕을 둔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며, 박해기에는 없던 본당의 역사를 담아냈다.

 

- 주재용 신부.

 

 

열성적 기록자에서 연구자로

 

흔히들 김구정이 현장을 찾아다녔다고 해서 발로 쓰는 역사가였다고 말한다. 그는 직접 만남을 통해 소통을 이루면서 자료를 찾았고, 또 집필 의뢰를 하는 사람과 교감을 이뤄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교회사는 공감을 일으켰고, 당연히 대중화에 이바지하게 됐다. 

 

김구정은 교구사 서술의 기초를 놓고, 교구사 연구의 출발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본격적인 연구자라기보다 아직은 열성적인 기록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교구사 서술에서 그 교구의 발전이 한국교회서 전반과 가지고 있는 연관성을 밝히려 노력했다. 김구정은 당대 현장자료를 수집하기도 했지만, 또한 문헌자료도 많이 봤다. 그는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병인 치명사적」 「재판록」 등 귀한 자료를 참고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어 자료를 오히려 후대의 연구자들보다 더 열심히 읽었다. 

 

주재용 신부는 김구정과 각별한 관계를 갖고 김구정의 교회사 연구와 집필활동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주재용 신부는 「호남발전사」가 출간된 이후에도 150여 군데의 오류를 잡아내고 이를 편지로 알려줬다. 주재용 신부는 말년에 건강 악화로 직접 글을 쓰지 못하게 됐다. 이때에도 주재용은 대필을 시켜서 교회사에 대한 의견을 김구정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주신부는 생애 끝 무렵 「배론 성지」를 탈고해 출판 과정에 있었다. 주신부는 김구정에게 교정을 봐 마무리해 달라는 대필 편지를 보냈다. 그 책은 그렇게 빛을 봤다. 

 

주재용 신부와 김구정이 교회사에 관심을 갖고 저술을 남기던 시절은 교회사를 전공해 정규직을 가질 수 없었고, 또한 연구보조자 한 명 얻지 못했던 때였다. 이 열악한 연구환경을 그들은 연구자들끼리 협조하는 협업을 통해서 극복해 냈다. 오늘의 교회사 연구자들도 그 협업의 현장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2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에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9) 정결한 백합꽃과 성스런 영웅의 이야기

 

 

- 김구정이 소장한 삽화.

 

 

작가에게는 대표작이 있다. 김구정 하면 사람들은 「피묻은 쌍백합」을 기억한다. 그리고 「성웅 김대건전」도 말한다. 이 책들은 한국 순교자의 개인 전기로는 처음 만들어진 단행본이었다. 게다가 사료에 입각한 단단한 구성력 및 김구정의 순교자에 대한 존경심이 함께 발휘돼 독자들에게 오랜 추억으로 간직됐다. 김구정의 책을 읽어야 눈물이 난다고 할 만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내용은 연극, 소설, 만화 등으로 재현되면서 사랑받았다. 특정 순교자를 조선 후기 19세기 사회 속에서 재구성한 작업들은 순교자에 대한 연구만 아니라 그의 교회사 전체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이는 그가 뒤이어 집필해 낸 여러 교구사에서 사람이 살아있는 흔적을 찾아내게 하는 훈련이 됐다. 

 

교회사는 자신의 생애를 투영하며 연구해 그곳에서 위로를 발견하고 그 위로를 전해 주는 작업이다. 김구정은 우리 교회사에서 중요한 메시지로 순교사를 생각했고, 유중철,이순이 동정부부를 모든 순교자 중 찬연히 빛나는 진주로 선택했다. 젊은 시절 사제직을 지망했던 김구정에게 있어 순결은 보다 치열한 주제였다. 그리고 김대건은 한국의 첫 사제였다.

 

 

「루갈다전」을 펴내다

 

- 이순희 묘에서 나온 십자가.

 

 

유중철 · 이순이 부부는 동정으로 신앙을 굳게 지키다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특히 이순이는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편지에 의거해 「피묻은 쌍백합」을 저술했다. 김구정은 1955년 이 필사본 옥중서간을 찾아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이것이 그가 「루갈다전」을 펴낸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이 루갈다의 「옥중서간」은 1874년 출간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도 전문이 실렸다. 다블뤼 주교는 박해 당시 국내에서 이 편지를 보고 프랑스어로 번역해 비망기에 기록했다. 그러나 한글로 된 원본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1955년 여름에 원본에 가까운 한 필사본이 나타났다. 이 사본은 바로 1868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순교한 김종륜 복자가 직접 복사해 소지했던 수택본이었다. 김종륜의 손자 김병옥이 필사본 「옥중서간」 1권과 「사후 묵상」, 「신명초행」 등을 김구정에게 기증했다. 박해 시대 신자들은 이 루갈다의 옥중서간을 필사해서 읽었던바, 필사본은 결과적으로 순교 복자 김종륜이 직접 필사해서 지니고 있던 편지였다. 한편, 김종륜의 손자였던 김승연 신부는 김구정이 유스티노 신학교에서 퇴학당할 때 그의 고해 신부였다. 이 옥중서간은 후일 김구정이 자신의 대자인 김진소 신부에게 기증해 현재 호남교회사연구소에 소장돼 있다.

 

김구정은 이런 특별한 인연에서인지 이순이 동정부부 생활을 눈앞에 보듯이 묘사함으로써 교회 안팎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평소에도 루갈다 누님이라고 부르며 생활했다. 또한 책을 마무리하며 이순이 묘에서 스스로 특별한 체험을 했다. 그는 「피묻은 쌍백합」을 탈고하면서 최종 보충자료를 얻으려고 전주에 갔다. 그리고 루갈다의 묘소를 찾았다. 그 묘는 본디 초남촌에 있었는데 나중에 치명산으로 옮겼다. 이 산은 제법 높고 험해서 나이 든 사람은 단번에 오르기 어려웠다.

 

- 「피 묻은 쌍백합」 삽화.

 

 

김구정이 세 번째 쉬고 목적지를 향해 돌아섰을 때였다. 묘소 위에서부터 광목 폭 넓이만 한 흰 구름이 두 가닥 공중으로 뻗쳤는데 대략 20m가량은 두 쪽으로, 그다음에는 어울려 한폭이 되었다가 또다시 두폭으로 갈려서 좀 긴 북쪽 폭은 중바위 너머로 사라지고, 남쪽 폭은 조금 짧은데 공중으로 차차 사라졌다. 이 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까지는 7~8분 걸렸다. 김구정은 이를 각기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 지키기로 허원하고, 혼배하고, 또다시 갈라져 순교하는 상징으로 나타났다고 믿었다.

 

김구정은 루갈다를 ‘동녘 하늘에 일찍 뜬 샛별’, ’첫 새벽 금수강산에 핀 백합‘. ’천국의 공주‘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영의 욕망이 육의 욕망을 이긴 것이 기적인데 순교자는 인간의 육정을 넘어선 사람들이라고 보았다. 그중에 금지옥엽은 이 루갈다였다.

 

“비록 한때이나마 / 사람으로 가장한 천사를 / 성서 여러 곳에서 보았노라/ 눈 깜빡 사일망정 / 천사로 가장한 인간만은 / 본 바도 들은 일도 없노라 / 만일 여기에 / 천사로 화한 인간이 있다면 / 이는 엄청난 기적이리라”(피묻은 쌍백합 서시, ‘루갈다께 드림’에서).

 

그러나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 천사가 되기는 힘든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이순이의 무덤에서 나온 청동 십자가는 이순이의 손길에 예수의 몸체가 아름답게 닳아 있었다. 

 

한편, 김구정의 「피묻은 쌍백합」과 쌍벽을 이루는 작품은 3년 뒤에 나온 「성웅 김대건전」이다. 김구정은 김대건이 세계 교회사에 빛날 만큼 위대한 일을 했는데도 전기 한 권 없이 ‘위대하시다’ ‘성웅이시다’라는 뜬 말로만 칭찬하나, 우리 겨레조차도 그의 일생을 잘 모른다면서 이 책을 저술하는 목적을 밝혔다. 그는 집필과정에서 김대건 신부에 대한 국내 문헌만을 참고했다. 김구정은 그럼에도 이 전기에 나타난 사실만으로도 김대건 신부는 가톨릭 2000년사에서 어떤 순교자나 선교사의 행적보다 더 훌륭하므로 세계 5억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우러러야 할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6세의 청년 김대건 신부가 당시 세계정세와 우리나라의 형편을 꿰뚫어 보는 뛰어난 정신과 사상, 포부와 경륜, 기백과 용단을 보였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특히 그는 김대건 신부의 애국애족 정신이 어느 순국열사에 못지않았음을 강조했다. 즉, 그는 김대건을 쇄국주의, 사대사상으로 썩어빠진 보수 정책에 신사상 신문화의 횃불을 들고 패기 있게 반항했던 혁명 투사로 규정했다. 그리고 그는 김대건이 진리와 복음을 겨레에게 전하려고 구사일생의 선을 여러 번 넘나들었고, 청춘을 희생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성웅적 사도였다고 주장했다. 지원 김구정은 이 책에 김대건을 위한 헌시를 담았다.

 

“지원 형제여 내 목에 칼을 서슴지 말라 / 제단에 오른 희생이 피흘리지 않으면 / 알뜰한 내 겨레를 죽음에서 못 구한다니 / 내 몸을 죽임으로 형제여 너는 살아라”(복자 김대건 안드레아를 추모하고).

 

- 「성웅 김대건전」.

 

 

「피묻은 쌍백합」은 김현배 주교가 추천사를 쓰고 윤형중 신부가 출간을 도왔으며, 「성웅 김대건전」은 노기남 주교가 추천 글을 쓰고 김옥균 신부가 출간을 도왔다. 주교들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묶어 한 권으로 읽기 쉽게 해 놓은 그의 노력을 한결같이 반겼다. 물론 두 책은 다 주재용 신부가 교열을 봤다. 

 

「피묻은 쌍백합」은 2002년 김환철 신부에 의해 재출판되기도 했다. 김신부는 대신학생 때 이 책을 읽은 뒤 40년여 년을 옆에 간직했다. 결국 그가 전주교구 초남이성지 담당으로 부임하면서 성지에 오는 이들에게 책을 권유하다가 아예 재출간하게 됐다. 김구정은 1970년 중반에 들어와 그동안 잡지 등에 발표했던 순교 사화들을 정리해 「순교사화」 1~4권을 출간했다. 쌍백합은 2권에 그리고 성웅 김대건은 4권에 다시 실렸다. 실제로 김구정의 순교사화를 통해 교회사 연구를 결심했다는 이들도 있다.

 

 

신자들에게 순교자의 삶 전해

 

김구정은 역사와 소설의 경계에서 독자들을 감동시켰다. 작가 김구정 자신은 이 전기들이 추상적 혹은 허구적으로 꾸미는 사화나 역사 소설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김구정은 모든 문헌을 참작해 뼈로 삼고, 순교자의 일생을 순서로 엮어 나가는데 살을 붙였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역사적 사실(史實)을 그대로 살리되 그 당시에 입어야 할 의복을 갖춰 입힌다든지, 사실에 꼭 있어야 하나 생략돼 없는 말을 살려 넣었다고 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이 그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해 역사란 얼굴에 화장을 시켰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김구정의 글에서 위로를 받았다. 또 다른 이들은 그로 인해 교회사에 흥미를 갖게 됐다. 그는 실제로 사람들이 사료를 이해할 때 필요한 질문들을 던졌다. 사료에 없는 내용을 생각해내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지칭하는 살이다. 오늘날 교회사 연구가 진행되고 다른 사료들이 나옴으로써 새로운 사실이 알려져서 그가 붙인 살이 소설적 요소가 됐을 뿐이다. 그 정결한 백합꽃과 성스런 영웅의 이야기를 통해서 김구정이 독자와 소통하고자 하던 노력을 오늘의 우리는 기억하고자 한다. [평화신문, 2016년 10월 9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빛과 소금, 20세기 이땅의 평신도] 교회사 연구에 여생을 바친 교육자 김구정 이냐시오(1898-1984)

 

(10 · 끝) 말하는 글쟁이, 그의 가톨릭 정신

 

 

- 김구정이 전교회장을 맡은 신암본당의 고등부가 선보인 ‘피묻은 쌍백합’ 공연에 참가한 학생들과 당시 본당 보좌 신부였던 고(故)최영수 대주교, 1970.

 

 

교회사 연구와 이를 대중화하기 위한 강연은 서로 다른 영역이다. 교회사 연구는 또한 직접적인 교회 홍보나 선교와도 구별되는 분야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교회는 이 모두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을 요구해 왔다. 김구정은 당대에 사람의 심금을 울린 교회사가이고 작가며 강연자였다. 이 모든 분야에 신명이 있던 사람이었다.

 

김구정은 신앙을 주제로 폭넓은 분야의 글을 썼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시, 소설, 극본, 역사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었다. 그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던 순교자들의 문학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도 천주가사를 지었다. 이렇게 다양하게 활동하다 보니 그가 사용하는 이름도 많았다. 김구정은 본인 이름 이외에 이냐시오, 지원, 달성선인(達城仙人), 금솥 등으로 글을 썼다. 그 밖에 달선생, K 기자 같은 이름도 보인다.

 

 

순교사 전파하며 신앙의 모범 보여

 

그는 종이 위에 글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이 직접 강연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그는 박해시대 신자들의 일상사를 마치 옆집 아저씨네 집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듯이 엮어갔다. 그래서 1970년대까지 대구교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였다. 또 그는 직접 순교극 대본을 쓰고 무대에 올리고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여러 본당에서 연극으로 공연됐다. 그는 일찍이 1934년 조선교회 150주년 기념대회를 계기로 병인박해를 배경으로 한 순교성극 「거룩한 피」를 썼다. 해방 이후에는 이순이 루갈다와 성웅 김대건 등에 관한 희곡을 썼다. 그는 이렇게 신자 대중에게 순교사를 체험토록 했다.

 

- 김구정의 교회사 노트.

 

 

그는 또 트럼펫을 잘 다뤘고, 오르간도 쳤다. 이는 신학교 교육의 산물인 듯싶다. 물론 대구교구는 1910년대 명도회, 그 이후 성유스티노신학교에 브라스밴드를 운영하고 있었고, 이러한 문화적 환경은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조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군산대학에서처럼 자신이 거쳤던 학교의 교가도 지었다. 

 

김구정은 고향인 신암본당에 돌아와서 전교회장을 했고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단장도 했다. 그는 매일 미사에 참여하고 세 시가 되면 어김없이 성체조배를 했다. 조배 후에는 성당 문앞에 있는 김기연의 집으로 가서 바둑을 두며 소주 한 병을 반주 삼아 부부 앞에서 순교사화를 구수하게 풀어놓았다. 그는 순교사를 썼으니 이제 성모님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되뇌었으나, 그 숙제를 우리 몫으로 남겼다. 대구대교구에서는 1981년 김구정에게 교구 설정 70주년 공로상을 수여했다. 

 

김구정은 평생 성무일도를 바친 평신도였다. 그는 라틴어로 성무일도를 바쳤다. 자다가도 성무일도를 꼭 챙겼다. 프랑스어도 잘해 프랑스어로 된 기도서를 들고 다녔다. 그가 성경을 읽으면 성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는 낭랑해서 모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는 또박또박 정성스럽게 읽으라고 당부하곤 했다.

 

 

순교 현장 누비며 순교 정신 기려

 

김구정은 책을 집필할 때마다 짐을 싸들고 생각이 집중되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몇 달씩 머물다 돌아오곤 했다. 그는 순교자들이 피 흘린 현장을 누비며 그 정신을 기렸고, 지방 교구의 발자취를 좇았다.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그에게 교회사 정보를 제공하거나 찾아왔다. 그리하여 그는 진목정, 정난주 묘 등 성지 개발에도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대구교구의 신나무골 성지 역사를 밝혔는데, 1977년 그가 쓴 비가 마을 앞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1868년 울산에서 순교한 이양등, 허인백, 김종륜 등의 묘소가 있던 경주시 산내면에 소재한 진목정의 유래를 밝혔다. 이때 순교자에게 감동한 호랑이 사연도 발굴해 냈다. 박해를 당해 순교자 세 가족이 진목정 뒤편 산 아래 단수골에 이르러 큰 동굴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에 피신했다. 밤에 호랑이 두 마리가 굴 앞에 나타났으니 그곳이 바로 호랑이 굴이었다. 이때 죽기를 각오한 허인백이 사정을 설명하고 박해가 그치면 돌아갈 테니 그동안 집을 좀 빌리자고 애원했다. 그 말을 듣고 맹수들이 어슬렁어슬렁 가버렸다고 한다. 

 

김구정은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의 묘도 확인했다. 1970년에 그는 대구에서 황사영의 4대손 황찬수를 만나 그로부터 관련 자료를 받았다. 김구정은 1973년 김병준 신부의 도움으로 정난주의 무덤을 확인했다. 정난주는 1838년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37년 만에 선종했다. 그런데 1909년 제주본당 2대 주임 라크루 신부가 추자도를 사목 방문했다가 황사영의 증손자를 만나 정난주의 생애를 듣게 됐다. 라크루 신부가 정난주의 삶을 프랑스에서 간행되던 전교지 「가톨릭 선교」에 소개하자, 프랑스에서 익명의 후원금이 답지했다. 라크루 신부는 황사영의 후손에게 집과 밭을 사줬으며, 이때 정난주가 유배 생활 중에 아들에게 보낸 서한을 얻었다. 김구정이 확인한 정난주의 묘는 오늘날 제주교구의 대표적 성지가 됐다.

 

 

교회와 사회 관계 중시하며 교회사 연구

 

- 김구정이 글을 쓴 ‘신나무골비’를 읽고 있는 마백락 회장.

 

 

김구정의 교회사 연구는 세계 교회사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세계적 종교며, 교회사는 사상과 교리뿐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조직체의 역사라고 인식했다. 그는 인류 역사는 그리스도교를 떠날 수 없고 그리스도교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정수라고 주장했다. 김구정은 또 가톨릭이 문명을 개화시켰고, 사회에 선한 이득을 끼쳤다고 믿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생각과 이를 전달하는 메시지는 웅장했다. 

 

그의 천주교와 한국사 이해는 이 맥락에서 전개됐다. 그는 천주교가 도입되기 전의 한국사는 암흑이라고 보았다. 이벽이 「천주실의」를 읽은 것은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을 본 것과 같았다. 그리고 이승훈이 영세함으로써 4000년의 밤이 새기 시작했다. 이벽과 이승훈 등 초기 신자들의 움직임은 동트는 새벽에 호미와 괭이를 잡고, 4000년 묵은 황야 삼천리를 개척하려는 생(生)의 약동이었다. 그렇게 이 땅에는 새벽이 오고야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혜택을 누리려면 한국은 순교 정신으로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복식을 소개하면서 우리 복자들은 이러한 대사상을 이 땅에 수입해 이 민족에게 참된 행복과 문화를 베풀다가 희생됐고,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을 세계에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사상적 혼란에 고민하는 조선은 조선 순교복자의 열로 모든 병든 사상을 불사르면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고 역설했다. 동시에 그는 시대와 사상은 유행을 탄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가톨릭은 시대를 초월한 처세 철학을 가르치는 영원한 진리다. 그러므로 세속인이 시대에 살려고 배우는 것과는 달리 시대에 속지 않기 위해 또 시대를 확고 불변한 진리로 지도하기 위해 가톨릭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중요시했다. 

 

원래 역사는 사건과 해석의 결합을 말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 결합 작업을 본격적인 전문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김구정은 역사 연구 방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은 바가 없었다. 그는 박해 시대의 자료를 모으고 그 증언을 기록해 내는 작업을 교회사라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오늘날의 엄격한 기준으로 볼 때 그를 전문적 역사학자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열정적으로 우리의 교회사를 전해 주었고, 사료를 모았다. 현장의 증언에 귀를 기울여 거기에서 교회사의 편린이라도 찾고자 했다. 이러한 데에서 그가 발휘했던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교회사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聖殿)을 짓는 작업이다. 성전은 내가 쌓지만 남이 사용하는 ‘봉헌’이다. 복음서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책이라면 교회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생활과 증거를 수록한 책이다. 가톨릭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을 두 개의 원천으로 삼고 있다. 우리 교회의 박해 시대 순교자들이 드러냈던 삶의 기록은 우리의 성전이다. 김구정은 우리의 성전(聖傳)을 존중했고 이를 성전(聖殿)으로 되살려 내고자 노력했던 한 시대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한국 교회가 설립된 이후 교회사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까지 적지 않은 공백이 있었다. 김구정은 이 공백을 메꿔준 유능한 연구자였다. 

 

1984년 5월 1일 김구정은 머리카락 수도 세신다는 하느님께 86년간 받은 생의 몫을 올리고 글로 남았다. 그가 더하고 싶었던 말은 주께서 조합하시리라. 그리고 오늘은 김효동(성물조각가)과 김명동(한국외방전교회) 신부 등 손자들이 조부의 체온과 소망을 전하고 있다. 김구정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통해서 또 다른 김구정이 조명되기를 빈다. <끝> [평화신문, 2016년 10월 16일, 김정숙 소화데레사(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 다음 호부터는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가이오) 편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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