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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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1-15 ㅣ No.142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6)



Ⅳ 친교의 교회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1. 이웃이 없다.

가. 개인주의 시대

다음은 2013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내용이다. “지난 16일 오후 2시쯤 부산 서구 남부민동 4층짜리 다세대 주택. 이 주택의 건물주 이모(39)씨는 수도관이 동파되는 바람에 보수 공사를 해야 했다. 이씨는 동파된 수도관의 위치를 찾기 위해 2층에 세든 김모(55)씨의 집 보일러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진 백골 상태의 시신이 보일러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출동한 경찰은 보이러실 천장 철골에 매듭진 전기줄에 김씨의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경찰은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미뤄 김씨가 보일러실에서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집안에선 2006년 11월 달력이 펼쳐져 있었고, 2007년 1월부터 배달된 전기, 수도 등 각종 고지서와 독촉장 등이 쌓여 있었다. 경찰은 김씨가 2006년 말 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자살자의 죽음을 이웃도 가족도 모두 7년간이나 몰랐다는 충격적이고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3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또 다른 기사이다. “택배회사 로고가 찍힌 차량이 일본 도야마현 다카오카 시에 있는 560년 된 고찰 앞에 멈췄다. 택배 기사가 네모난 상자를 승려에게 건넸다. 승려가 허리를 굽혔다. ‘잘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장의업체. 상자 속 내용물은 불과 일주일 전까지 일본 열도 반대쪽 해안 지바현에서 가족없이 혼자 살다 지병으로 숨진 64세 할머니의 유골이었다. 친척들은 다들 ‘인연 끊긴 지 오래라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르기 곤란하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장의업체가 지자체 허가를 받아 할머니를 화장한 뒤 유골을 수습해 이곳 다이호지 절에 택배로 보낸 것이다. … 이 절에는 이런 식으로 일본 전역에서 홀로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 하루가 멀다하고 택배로 온다.… 2009년 한 장의업체가 이 절에 신자들의 합사 묘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연고 사망자의 유골을 받아달라.’고 부탁해 왔다. 다이호지 절 관계자 히즈메 나오쓰구 씨는 “처음엔 정말 난감했다. 그분에게 ‘만약 우리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폐기된다.’고 해서 유골함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 일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서 ‘무연고자 유골’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다이호지 절에 쉬고 있는 영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죽어도 시신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선 ‘무연사(無緣死)’지만, 정말로 가족도 친척도 없는 혈혈단신은 아니다.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고 몇 년 전까지 멀쩡하게 직장도 다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인연이 끊겨 홀로 숨진 경우가 많다. 젊었을 때 가족을 팽개치고 회사에만 올인하다가 나이 먹어서 가족에게 외면당한 샐러리맨도 있다. ‘고령화·핵가족화·개인주의화’를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는 게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일본만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도 이런 일이 곧 일어날 것이다. 작년 한 해 ‘무연고자’로 처리된 사람이 810명으로 불과 3년 전보다 95명 늘었다. 독거노인도 더 많고 고독사도 더 잦은 서울에서는 일단 화장해서 10년간 납골했다 500~700명씩 한 봉분에 묻는다고 한다.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아 이 사회가 깊이 병들어, 아니 죽어가고 있다. 유골이 택배로 배달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필자가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일이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찾아 오셨다. 그 분의 하소연이다. “신부님, 배고픈 것은 참아도 외로운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일년 내내 내 방문 한번 열어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신부, 수녀는 뭣 하는 사람들이며 구역장, 반장은 뭣 하는 사람들입니까?” 이 말은 들은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에게 본당 사목자로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할머니께 용서를 빌었다. 필자가 소공동체를 하게 된 직접적이고 강한 동기가 되었다. 현재의 반과 구역은 본당의 행정 조직에 불과하다. 지금 본당의 반 모임과 구역 모임이 단순한 본당의 행정조직의 차원을 넘어 교회가 되어야 하고 거기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며 특별히 이웃 안에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한국사회에 또 하나의 심각한 현상은 ‘자살’이다. 한국은 OECD 30개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보건복지부의 조사에 의하면 하루 34명이 자살을 하고 있으며 한 해의 자살자 수가 울릉도 도민(1만 235명)보다 많다. 그리고 20~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고 한다.

왜 자살을 할까? 이유는 뻔하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이웃이 없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없고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사람도 없다. 요즈음 일본에서는 화장실에서 혼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화장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변소 밥’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왕따를 당해 친구가 없는 아이가 화장실 밥을 먹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변소 밥을 먹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친구가 없다.’는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이다. 어느 학자는 학교와 직장에서 함께 식사를 할 친구가 없는데 대해 극도의 공포감을 가지는 것을 ‘점심 친구 증후군’이라 불렀다. 타인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자신을 매우 부끄럽게 여기는 일본인 특유의 질병이다. 화장실은 이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쉼터이다.”(매일신문 2011.7.9) 일본만 그런것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나라의 회사에서도 ‘화장실에서 밥을 먹지 맙시다.’라는 글이 회사의 여기 저기에 나붙을 날이 곧 다가오리라 예감된다. 아니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

소공동체가 안 된다고들 아우성이다. 안 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개인주의 시대를 살고 있고 모두가 이웃 없이 살고 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말씀은 아랑곳없이 이웃 없이 ‘나홀로’ 신자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많은 신자들이 ‘이웃이 되어주는 삶’(루카 10,36)을 살지 않고 ‘이웃이 되어주기’(루카 10,36)를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요즈음 많은 신자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본당에 교적을 옮기지 않고 옛날에 다니던 성당으로 먼 길을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옆집에 살고 있는 같은 천주교 신자들에게까지 이웃이 되어주지 않고 있다. 지역공동체에 관심없이 자기 편리한 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공동체성을 상실한 삶, 혹은 공동체성을 상실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거기에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계시지 않는데 말이다. 하느님의 신비, 즉 삼위일체의 신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나홀로’ 신앙을 통해서는 하느님도, 예수님도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도 붕괴하고 교회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공동체만이 이 세상을 살리고 우리 교회도 살릴 수 있다. 소공동체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소공동체를 통하여 죽어가는 신앙생활을 살려야 하고 침몰하는 교회를 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려야 한다. 소공동체만이 살 길이다. 소공동체만이 대안이다.

[월간빛, 2014년 1월호,
박성대 요한 신부(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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