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소공동체ㅣ구역반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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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12 ㅣ No.136

[특별기고] 왜 소공동체인가? - 소공동체가 안 된다? (10)


Ⅱ. 복음 중심의 교회

1.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2. ‘말씀’의 중요성

5)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


필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읽고 충격과 함께 감동하면서 내 눈을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성서의 하느님은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시는 분이며 언제나 인간을 향해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1요한 4,9 참조, 함께 걷는 하느님과 인간, 이영헌 지음, 40면) 참으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위해서 존재해야지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말이다. 자녀들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하여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빈털털이가 되고 나이가 들어 늙어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 부모들의 인생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자녀들을 위한 인생이었다. 그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존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니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셨음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려면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사랑을 알아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9-50) 성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은 하나도 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말씀만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9) 그리고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13-15)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자신이 아닌 서로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활동하시고 말씀하신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들으신 것만, 받으신 것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사랑뿐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삼위일체적인 사랑이며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퍼부어 주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20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의 열기가 식지 않고 더 뜨거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랑의 열기를 체험해야 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 설레입니다.”(루카 1,46-47,공동번역)라고 노래하신 성모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 사랑에 매료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셨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이 넘치는 사랑을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 말씀 중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과분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 가슴 벅찬 하느님의 사랑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슬픈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에페 3,18-19) 우리가 이토록 깊고 큰 하느님의 사랑은 모르면서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에 매료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다름 아닌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랑은 ‘말씀’ 속에 있다. 우리가 그 엄청난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먹기 위해서는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성경의 결론은 하느님이며 예수님이고 사랑이다. 한마디로 성경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사랑의 편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의 자애와 자비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자애와 자비는 용서에서 드러난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그분께서는 모두 용서해 주신다. 정말 이해가 안가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성경 말씀(루카 7,36-50)을 소개하면서 하느님의 놀랍고 너무나 크신 자애와 자비, 그리고 용서를 묵상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싶다.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채권자가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 두 채무자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루카 7,43)라고 시몬이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이 비난하는 여자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시면서 하느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런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든 하느님의 사랑이 ‘말씀’ 속에 녹아 있다. 그리고 시편 저자는 이렇게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노래하였다. “주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신다. 끝까지 따지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대로 우리를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우리에게 갚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그분의 자애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굳세다. 해 뜨는 데가 해 지는 데서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신다.” (시편 103,8-12)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콜로 2,13-14)라고 말씀하셨다.

소공동체는 ‘말씀’을 통하여 이토록 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생활로 변화시키고 또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 아무리 많은 다른 신심행위와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고치고 신앙과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이 바로 소공동체이다.

[월간빛, 2013년 7월호, 박성대 요한(제2대리구장, 주교대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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