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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전례ㅣ미사

[전례] 전례 톡톡: 미사 때 강론은 왜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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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4-13 ㅣ No.1474

[전례 톡톡] 미사 때 강론은 왜 하는가?

 

 

교회에서 듣게 되는 지루한 설교들에 대해 몇몇 신문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저 또한 설교가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혹 불필요한 게 아닐까 하고 자문하게 돼요. 신자들이 항상 의무적으로 들어야 됩니까? 안 들으면 안 될까요? - 코센차에서 프란체스코 -

 

 

많은 이들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주일 강론 수준이 지난 삼십 년 사이에 내려갔다고 합니다. 이는 독자께서 살짝 언급하신 몇몇 신문들을 보시면 확인이 되겠죠.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은 많은 설교가들의 추상적이고, 장황하며, 즉흥적으로하는 이야기 때문에 지루하다 못해 고문당한다는 느낌을 점점 더 받고 있지요.

 

 

공의회와 새로운 요구들

 

신세타령이 계속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는 옳지 않고 무익한 일입니다. 많은 사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알아듣기 쉽게 선포하려고 신경을 쓰며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준비하지요(강론 준비에 아주 유용한 도구들도 있죠). 한편 어떤 사제들은 신자들과 만나 독서 말씀들을 함께 연구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공의회의 개혁으로 주일 강론이 급격한 방향 전환을 맞았다는 점이죠. 무엇보다 새로운 성경 독서 규정 때문이었고, 전례 거행에서 선포된 성경 말씀과 강론의 연관성을 재천명한 덕분이었어요. 다른 한편, 교육 수준이 높고 의사소통 방식에 더욱 민감한 신자들이 더 많은 요구를 하게 됐죠. 미래의 사제들인 신학생 양성과 설교자들의 쇄신도 그 정도로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새로워진 종교 ·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강론이 외적으론 심각한 상황에 처한 것처럼 보이지만, 강론은 그 본성과 역할을 재발견할 때 해방하고 구원하는 하느님 말씀의 기쁜 선포라는 내적인 힘을 되찾게 돼요.

 

강론(이 용어를 공의회가 쓰지요)은 아무 종교 주제를 특별한 형태로 연설하는 설교와는 다릅니다. 또한 복음을 단순히 설명하는 것과도 달라요. 강론은 나자렛 회당의 예수님, 바로 그분께로 데려다 주지요. 이사야서를 해석하시며 성경 말씀이 바로 그 순간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신(루카 4,21) 그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거나, 또는 엠마오의 제자들을 설득하시며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을 겪고서 부활한다는 것을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루카 24,27) 설명해주신 그 때로 데려다 주는 거죠.

 

이 관습은 회당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회당에선 율법을 읽고 나면 주석이 뒤따랐지요. 이를 그리스도인들이 발전시켜 모든 전례 거행에서 오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됐음을 강조하는 거죠. 현재화되지 않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란 있을 수가 없어요. 즉 직무를 통하여 해석되고 적용되고(빵처럼) 쪼개져 영원토록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단 말이지요.

 

 

왜 의무인가

 

쓰여진 말씀은 특정한 시대와 문화의 범주 안에 고정돼 있기 때문에 한 번 듣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전에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전례 거행 안으로 들어와 오늘 당신 백성의 모임에 주어지는 살아계신 말씀이 되시는 거랍니다. 따라서 쓰여진 본문은 현재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선포되어, 역사가 되고, 육화돼야 해요. 이 때문에 공의회는 강론을 모든 주일 미사에 의무로 정했고 평일의 어떠한 전례 모임에라도 하기를 권했어요. 따라서 강론을 없앤다는 말은 말이 안 돼죠.

 

오히려 강론의 구성 요소들(성경 말씀, 전례 거행, 회중)과 이들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할 필요가 있어요. 사제 또는 강론자(어떤 경우, 부제나 일반 평신도가 될 수도 있지요) 앞에는 성경 말씀과 신자 회중이 함께 하는 전례 거행이 있지요. 강론을 결정하는 것은 거룩한 본문이랍니다. 이는 기원을 보나 내용을 보나 강론의 근본적인 특성이지요. 출발은 거룩한 본문에서 하고는 이내 활주로를 벗어나 자유 여행을 떠나는 식이 돼선 안 돼요. 본문의 추가 설명, 현재의 선포 그리고 현실 적용이 돼야 해요. 다른 말씀이 아닌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해야 돼요. 핵심을 제시해야지 주석이 되어선 안 돼죠. 가르치는 게 아니라 건설하며 믿음을 북돋우고 그 믿음을 삶으로 살 수 있도록 격려해야 돼요. 그래서 선포와 해설은 온전히 하나를 이룬답니다.

 

 

신자들은 듣기만?

 

그밖에 강론은 무슨 이물(異物)이 아니라 전체 예식 안에 완전히 끼워진 것으로서 전례 행위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어요. 그러므로 강론가는 성찬례와 더불어 말씀이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써야만 돼요. 강론이 ‘참으로’ 목적 달성을 이루려면, 미사 독서집에서 말하듯, ‘묵상의 열매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준비하여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않으며, 모든 참석자가, 어린아이나 못 배운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동기 때문에 설교자와 회중의 직접적인 관계가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청중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지 않고 청중의 양심 안으로 내려와 그들의 일상 생활에 방향 지침이 되기를 바란다면 말이지요. 성경 말씀은 참석자들에게 오늘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 돼야 하죠. 즉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 실현되는 그 순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랍니다.

 

신자들의 고질적인 수동성에 관해선 응급 처방도 없고 한 방에 듣는 약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교회의 새로워진 분위기(이른바 공의회의 친교 교회론)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어요. 사제들과 신자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들, 즉 우정의 관계, 협력의 관계, 나아가 상호 교정의 관계 등에 초점을 두는 거죠. 성경을 주제로 한 만남도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특별히 주일 독서 말씀을 함께 묵상하는 거죠. 또한 마음을 연 대화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말로 하든 글로 쓰든 칭찬 같은 것도 하고 또 가능하다면 우정어린 부탁 같은 것도 해볼 수 있겠지요. 정말 바라보지만, 형제적 상호 교정이 제대와 신자석에서 서로 마주 보며 존경을 담고 사심 없으며 자유롭고 용기있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R. Falsini, La liturgia. Risposta alle domande piu provocatorie, San Paolo, Cinisello Balsamo 1998, 24-27)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6년 봄호(Vol. 33), 번역 최종근 빠코미오 신부(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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