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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조용한 혁명, 재가한 구성열 바르바라 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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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17 ㅣ No.1157

[한국 교회사 속 여성 - 순조(교회 재건기)] 조용한 혁명, 재가한 구성열 바르바라 복녀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홀로된 여성에게는 자식에게 의지해서 살라고 권하고 홀로된 남성에게는 재혼을 서둘렀었다. 6·25 전쟁 때 60만에 가까운 전사자가 생기자 정부에서는 전사자 부인들에게 편물이나 이용 기술을 가르쳐 자녀 양육과 생활 방편으로 삼도록 대책을 세웠다. 그러나 ‘홀아비’들에게 홀로 살아갈 방도를 따로 세우지는 않았다.

 


전통적 재혼 제도에의 도전

 

본디 고려 시대까지는 재혼이 자유로웠다. 상황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급변했다. 집마다 사당이 생기고 부계 혈통이 중시되면서 여성의 재혼이 문제가 되었다. 이는 태종과 세종 때 논의를 거쳐 결국 1477년 성종 때 재가(再嫁)를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는데 이 법은 재가의 효력을 부정하거나 형사 처벌하는 직접적인 금지는 아니고, 재가한 여성의 자녀를 관리로 등용하는 데에서 제한하는 간접 금지이며 주로 양반 사족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대단하여 시대를 내려오면서 양반 계급에서는 재가하지 않는 것이 확고한 윤리로 지켜졌다. 그리고 이 의식은 모든 여성에게로 확대되어 갔다.

 

그런데 재혼 금지는 여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남편은 아내가 죽은 뒤, 몇 달간 반상복을 입고 이후 이내 재혼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아내에게는, 특히 상류 계층에서는 평생을 두고 죽은 남편을 서러워하고 복을 입어야 하는 수절(守節) 과부가 요구되었다. 과부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늘 흰옷이나 회색 옷을 입어야 했다.

 

당시 여성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경제 행위가 거의 없는 형편인데 재혼까지 금지해 놓으니 가산이 없는 경우 생활까지 어렵고 궁핍했다. 그래서 재혼시키는 방법으로 ‘보쌈’ 등이 사용되기도 했다. 박지원의 「열녀함양박씨전」은 그 당시 홀로된 여인의 일면을 드러낸다.

 

실학 시대에 들어와서 과부의 가엾은 처지에 대한 공감이 일었고, 열녀관과 여성의 재가 금지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다. 이익은 여성의 정절은 남편이 살아있을 때만 적용된다며, 아울러 개가한 어머니에게도 모친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약용도 열녀 제도의 강제적 시행에 따른 여성의 희생은 비인도적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긍익은 개가 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했다.

 

천주교는 조선의 전통 풍속과 다른 결혼관을 제시하였다. 사회를 향한 외침까지는 아니었으나,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양심법을 실천했다. 곧 신앙 공동체 안에서는 배우자가 죽은 뒤에도 재혼할 수 있었고 권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재혼을 금지하지 않는 조선 사회에서 여성에게 재혼을 금지함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구성열 복녀 가족의 순교

 

구성열(1776-1816년) 바르바라 복녀는 재혼한 여성이다. 그는 충청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앞서 살펴본 강완숙, 이시임 등과 이웃한 마을 출신이다. 구성열은 아름답고 덕행이 비범하여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는 첫 남편을 여의고 서석봉 안드레아에게 개가했다. 이후 재가한 남편의 성인 ‘서 과부’로, 또 본디 성이 아닌 ‘최성열’로 불리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이 있고 나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이어지고 도적과 거지 떼가 들끓으며 거기에 더해 전국에 기근마저 들자 어쭙잖은 교우들의 재산마저 탐한 포졸들이 교우촌을 습격했다. 1815년 부활 축일에 구성열은 청송 노래산에서 남편과 사위를 포함하여 신자 4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된 명단 가운데 딸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경주 진영에서 경상 감영으로 이송되어 조사받았다. 감사는 “이들은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서 배운 바가 비록 십계라고 하고 외우는 것은 불과 몇 구절이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미혹되어 뉘우칠 줄 모른다. … 끝내 뉘우치지 않고 죽기로 작심하여 완고하기가목석과 같다.”고 보고하며 사형을 품신했고 결국 왕은 그들의 사형을 윤허했다. 구성열네 세 식구는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 집행은 약 1년 뒤인 1816년 12월 19일 관덕당 형터(현 대구시 중구 관덕정길)에서 이루어졌다.

 

구성열은 그렇게 강인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는 능장을 맞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이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다행히 같이 잡혀 왔던 사위 최봉한의 격려로 그 위기를 모면했다. 순교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사위의 권면에 그는 그날부터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온갖 고문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견뎠다.

 

구성열은 이시임과 함께 옥살이했다. 그들은 심문 때 배교를 유도받곤 했는데, 이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형 집행 날 관장은 신자들을 처형하고 남은 그 둘에게, 여자이고 하니 이때라도 한마디만 하면 놓아 주겠다며 또다시 회유했으나 그들은 “잠시 지나가는 목숨을 보전하려고 참된 행복과 영원한 행복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단호히 물리쳤고 마침내 참수 순교했다. 한편, 그의 남편과 사위는 옥사 순교했다.

 

사위 최봉한의 활동으로 구성열 집안을 짐작할 수 있다. 최봉한은 순교할 때 갓 서른이 넘었을 뿐인데도 이미 주문모 신부와 정약종, 황사영, 최필공, 김한빈과 더불어 일했고, 신유박해로 기호 지방의 교회가 무너지자 경상도 지역에 와서 교우촌을 세워 활동하였다.

 

 

복녀들의 조용한 혁명

 

조선 후기 천주교에서 가르치던 부부간의 상호 관계에 관한 내용은 당시 사회의 기존 관습과 크게 달랐다. 그러나 신자들은 신부나 지도자 없이도 충실히 이를 지켰다. 이러한 울림은 후에 최제우의 동학에도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100여 년 가까이 천주교 신자들은 과부의 재가를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이를 이어 동학도들이 1894년 혁명 때 과부의 재가 금지를 폐지할 것을 공개적으로 주창했고 이듬해 갑오개혁 법으로 폐지되었다.

 

천주교 여성들은 그저 조용히 자신의 일상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런데 그 생활은 근대 사상의 씨앗이 되었다. 전통 시대와 오늘날 여성의 생활을 비교하면 그 씨앗은 분명 ‘불붙은 심지’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자들을 ‘혁명의 대열에 선 사람,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알았고 결단한 사람들’로 소개한다.

 

*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 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위원이며,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 연구원이다.

 

[경향잡지, 2020년 2월호, 김정숙 아기 예수의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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