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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이존창 루도비코 · 정종호 · 임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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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07 ㅣ No.1817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4) 이존창 루도비코 · 정종호 · 임희영

 

 

여주성당 구내에 설치돼 있는 여주 순교자 현양비.

 

 

이존창(루도비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9~1801)은 충남 예산 여사울 출신으로 천인 신분과 달리 부유한 삶을 살았다. 17세 때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권일신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 세례를 받았다. 한국 교회 설립 직후인 1784년 말부터 고향 여사울을 중심으로 내포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는 교회 지도자들이 1786년부터 약 1년간 가성직 제도를 시행할 때 신부로 임명돼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전교에 힘썼다.

 

그는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돼 공주 감영에 투옥됐으나 배교하고 석방됐다. 곧 회개해 신앙을 회복한 그는 1795년 봄 서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난 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해 살다 그해 5월 을묘박해로 체포돼 다시 공주 감영에 투옥됐다. 다시 배교한 그는 천안에서 가택 연금 생활을 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투옥돼 공주 감영을 거쳐 서울 의금부로 이송돼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누구도 밀고하지 않아 참수형을 선고 받고 해읍정법(고향으로 보내 처형해 그곳 사람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판결)에 따라 1801년 4월 10일 공주에서 순교했다.

 

 

정종호(세례명 미상)

 

정종호(1751?~1801)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과 가깝게 지냈다. 그의 세례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1800년 3월 주님 부활 대축일에 당시 풍습대로 개를 잡고 술을 빚어 이중배와 원경도 등 여러 교우를 초대해 대접하고 온종일 길가에 모여 잔치를 벌이면서 부활 삼종기도를 함께 바치고 큰 소리로 성가를 합창했다. 

 

이를 본 이가 여주 관장에게 밀고해 곧바로 체포됐다. 이들은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다 1800년 10월 경기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 강요와 함께 갖은 형벌을 당했다. 

 

정종호와 동료들은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사형 선고를 받고 1801년 4월 25일 고향인 여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임희영(세례명 미상)

 

임희영(?~1801)은 경기도 여주 점들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여 모두 입교했으나 그만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의 부친이 병들어 선종하자 그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임희영이 부친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은 여주 관장은 그를 체포해 “네가 천주교를 믿지 않는데 왜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천주교 신자들과 같이 처형할 수밖에 없다. 네가 제사를 지내겠다고 하면 석방하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임희영은 아무런 말도 없이 옥에 갇힌 채 한 달에 두세 차례씩 관장 앞으로 끌려가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어느 날 옥에 갇힌 신자들이 그에게 하느님을 흠숭하지 않는 한 네가 견디어 내는 형벌들은 너에게 아무 소용이 없으니 목숨을 보전해 석방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권면하자 그때에 비로소 그는 기도문과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임희영은 정종호, 이중배, 원경도와 함께 고향인 여주에서 1801년 4월 25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9년 5월 5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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