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4: 하느님의 계시(50-73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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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1-19 ㅣ No.2101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4. 하느님의 계시(50~73항)


하느님은 계약으로 계시하신다

 

 

부부가 말다툼을 하고 나면 자연적으로 이전보다 대화가 더 줄어듭니다. 그리고 서로 말을 하지 않은 채 며칠을 지내보면 그런 상태가 지옥처럼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관계회복을 위해 누군가가 먼저 화해의 표현을 하고 만약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 집안엔 다시 평화가 찾아옵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이렇듯 사랑의 증거이고 그 목적은 관계회복에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아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끊임없는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당신과 관계 맺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데 숨어있을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인간이 손만 뻗으면 항상 닿는 위치에, 눈을 뜨면 항상 볼 수 있는 곳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드러내시려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당신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에게까지도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위는 당신 사랑의 본성을 드러내는 계시입니다. 당신 본성이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은 당신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만 계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관계는 계약’입니다. 계약은 서로 간의 필요에 의해 맺어지고 그 계약이 유지되기 위해 서로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집을 사기로 계약을 맺었다면 집 주인은 집을 내어주어야 하고 그 집을 사는 사람은 돈을 내어주어야 합니다.

 

교리서는 특별히 구약(옛 계약)에서는 노아와 아브라함, 그리고 모세의 계약을 예로 들며 계시와 연계시키고, 신약(새 계약)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계약을 그 계시의 정점으로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과의 계약을 잘 지키면 당신 나라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우리가 지킬 ‘계명’을 부여하십니다. 노아를 통해 당신 말씀을 잘 따르기만 하면 결코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임을 알려주셨고(56~58항 참조),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당신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복의 근원이 될 것임을 보여주셨으며(59~61항 참조), 모세의 계약을 통해서는 당신의 사랑의 계명(십계명)을 지키기만 한다면 새 에덴동산인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해 주실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62~63항 참조). 

 

신약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셨고(64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65~67항 참조).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나기에, 신구약의 이 모든 계약의 성취들이 하느님 사랑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계약은 쌍방의 원하는 것을 먼저 알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집을 파는 사람은 그 집을 보여주어야 하고 계약 조건을 제시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계약의 성취자들을 먼저 보여주시며 당신 구원계획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마치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처럼 집을 사려는 사람을 위해 이미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내어 집을 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 나라에 머무는 값으로는 그저 이웃을 사랑하라는 조건 하나만을 주셨습니다.(요한 13,34: 15,12) 세상에 이런 불공정한 거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번 웃어주면 아파트 한 채를 주겠다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입니다.

 

그분의 계시 앞에서 미움이라는 선악과를 먹어 영원히 그분과의 관계회복을 거부할 것인지, 이웃을 용서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영원히 살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계시는 이렇듯 계약을 통해 실현되고 그 실현된 계약의 성취가 새로운 계시가 됨으로써 또 다른 계약을 위한 도구가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20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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