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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105: 끝맺으며 -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영성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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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12-22 ㅣ No.1276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105 · 끝) 끝맺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영성의 길을 걷다

 

 

-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짚어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CNS 자료사진]

 

 

우리는 고대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고대는 삼국 시대에 해당됩니다. 고구려(기원전 37~668), 백제(기원전 18~660), 신라(기원전 57~935) 모두 기원전 초세기에 개국했으며, 6세기까지 영토 확장을 위해 합종연횡(合從連橫)하다가 7세기에 통일신라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던 가야(42~562)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실정입니다.

 

삼국 시대 초기까지 우리나라의 종교적 배경은 토속 신앙과 샤머니즘이었다가, 중기부터 불교가 주류로 바뀌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에, 소수림왕(小獸林王, 재위 371~384) 2년인 372년에 전진(前秦)에서 온 승려 순도(順道)가 왕실의 지원을 받아 불교를 전했습니다. 백제의 경우에, 침류왕(枕流王, 재위 384~385) 원년인 384년에 동진(東晋)에서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왕실의 환영을 받으며 불교를 전했습니다. 특히 백제는 불교를 예술로 승화했으며, 성왕(聖王, 재위 523~554) 16년인 538년에 불교 예술과 함께 일본으로 불교를 전했습니다. 신라의 경우에,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 시절에 승려 아도(我道)와 함께 온 시자(侍者)들이 불교를 포교함으로써 왕실의 공식 외교를 통하지 않고 민승(民僧)의 활동으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다만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14년인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왕실과 조정에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유럽 역사는 로마제국의 흥망과 함께했습니다. 기원전 초세기 로마 제국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Augustus, 재위 기원전 27/30~기원후 14) 황제는 이후 180년까지 ‘로마의 평화(Pax Romana)’로 불리는 태평성대 시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285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재위 284~305) 황제의 로마제국 분할과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재위 306~337) 황제의 로마제국 통합 및 330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제국의 수도 천도, 그리고 395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재위 379~395) 황제의 사망으로 인한 로마제국 재분할 등의 어수선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결국, 476년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재위 475~476) 황제가 정변으로 물러나면서 서로마제국은 멸망했고, 이후 수 세기 동안 게르만족 계열의 여러 민족의 정복 전쟁으로 인한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심한 박해에 시달리는 가운데 313년 종교 자유를 얻었고, 392년에 로마 국교가 되었습니다. 물론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에 서방 교회도 여러 민족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영성생활은 교회와 믿음을 지키면서 순교 영성을 실천했고, 올바른 교리를 토대로 수도생활을 발전시켰으며, 유럽 전역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기도생활을 보편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도 다 적응하면서 영성생활의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세 역사는 어떤가요?

 

유럽의 중세는 우리나라에서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해당합니다.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마저 멸망시킨 통일신라는 935년에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이 고려에 투항하면서 1000년 사직(社稷)을 마감했습니다. 통일신라 말엽인 900년에 견훤(甄萱, 재위 900~935)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901년에 궁예(弓裔, 재위 901~918)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잠시 후삼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지만 918년에 후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 재위 918~943)은 936년에 신검(神劍, 재위 935~936)에게 항복을 받고 후백제까지 멸망시킴으로써 다시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고려는 1392년까지 거의 500여 년을 유지했습니다.

 

통일신라가 당나라를 통해서 선불교와 정토교 등 불교 내에 다양한 종파를 받아들이면서, 불교는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고 백성들에게 국교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하는 목판 인쇄물이며, 대승불교 경전 내용을 담고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751년 이전에 제작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통일신라는 이미 682년에 유교를 가르치는 국학을 설치하면서 유교도 받아들였습니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이미 유입된 도교, 유교, 무속신앙 등을 배척하거나 금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습니다. 1236~1251년에 제작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은 고려 시대에 대표적인 불교 유산이었습니다.

 

한편 8세기에 통일신라는 중국 동남부의 양저우(揚州)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을 만나면서 이슬람 세계와 교류를 시작했으며, 9세기에 아라비아 상인들은 교역을 하러 직접 통일신라를 찾아왔습니다. 페르시아인 지리학자였던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hibah, 820경~912경)는 846년에 출간한 저서 「왕국과 도로에 대한 책(The Book of Roads and Kingdoms)」에서 이미 아라비아인들이 통일신라에 정착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아라비아인은 회회인(回回人)이라고 불렸습니다. 원나라가 고려를 간섭하던 시기에도 이슬람 종교를 가진 몽골인들이 고려에 살면서 회교 사원을 지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은 범(汎) 게르만계 민족들의 이동과 정착 및 건국의 역사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중세 초기는 여러 민족의 침략 전쟁으로 혼란 속에서 암흑기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중세 중기에 프랑크족과 게르만족이 차례로 유럽 전역에서 패권을 장악하자, 유럽 사회는 안정을 찾고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킬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한편 동로마제국이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이슬람제국을 막고 있었으나, 중동 이슬람 종교와 문화는 꾸준히 유럽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톨릭교회가 800년에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Charlemagne, 황제 재위 800~814)에게, 그리고 962년에 독일 왕국 오토 1세(Otto I, 황제 재위 962~974)에게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부여했는데, 교회의 기대와 달리 신성로마제국은 교회의 수호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중세 초기에 수도원을 중심으로 고대 교부들의 신학과 영성을 보존하면서 관상생활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수도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중세 중기에 세속 학문의 발전을 계기로 가톨릭교회도 이성에 바탕을 둔 스콜라신학을 펼치면서 관상생활을 멀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성신학을 정립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머리로 헤아리려고만 했고, 개인 신심 중심의 영성생활을 실천하면서 때로는 오류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당신의 일꾼을 부르시어 새로운 형태의 수도회를 설립하고 영성 사조를 일으키면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을 이끌어가셨습니다.

 

 

근현대 역사는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우리나라 근현대 역사는 조선 왕조와 함께합니다. 이성계(李成桂, 재위 1392~1398)는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恭讓王, 재위 1389~1392)으로부터 선위(禪位)의 형식으로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1392~1897)을 개국했습니다. 조선 마지막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1897)은 대한제국(1897~1910)을 선포하고 초대 황제(재위 1897~1907)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주류 종교는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유교였습니다. 따라서 불교는 대외적으로 왕조의 견제를 받았으나, 왕실 내에 개인 신앙이나 백성들 사이에서 민중 신앙으로 실천되었습니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 다양한 민간 신앙도 퍼져 있었습니다. 

 

한편 1784년 천주교가 전래되었으나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1860년 서학(천주교)에 대항하여 창립된 동학이 1905년 민족주의 신흥 종교인 천도교로 개편되었습니다. 1886년 ‘조불 수호 통상 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을 통해 프랑스 선교사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종교의 자유를 얻어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근현대 유럽 역사는 몇 마디로 정리하기 어렵습니다. 반(反)종교적인 사상들이 난립하고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세속적인 도전에 직면했으나, 그때마다 위기를 극복하며 오늘날까지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습니다. 미래의 역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되짚어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올바른 여정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한민족의 역사도 살펴보면서 우리나라의 복음화를 위한 영성생활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2년간 저와 함께 가톨릭 영성을 찾기 위한 여정을 함께했던 독자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또 다른 기회에 또 다른 형식으로 만나서 영적 여정을 함께 걷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2월 25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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