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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82: 17세기 (5) 프랑스 예수회 영성과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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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07 ㅣ No.1221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82) 17세기 ⑤ 프랑스 예수회 영성과 가르침


예수회 금지령 아픔 딛고 모든 신자 위한 영성생활 전파

 

 

앙리 4세.

 

 

1589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앙리 4세(Henri IV, 재위 1589~1610)는 1593년에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해서 1594년 2월에 대관식을 치르고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러자 1593년 8월에 피에르 바리에르(Pierre Barrire, †1593)는 앙리 4세를 암살하려 했으며 1594년 12월에 19세였던 장 샤텔(Jean Chtel, 1575~1594)도 앙리 4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마침 샤텔이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앙리 4세는 즉시 프랑스에서 예수회의 모든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다행히 1603년 앙리 4세가 예수회 금지령을 철회하자, 예수회원들은 앞다퉈 가며 많은 저술 활동과 순회 강론을 실시했습니다.

 

 

신학자이자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 리쉬옴므

 

프랑스 디뉴레뱅(Digne-les-Bains) 출신인 루이 리쉬옴므(Louis Richeome, 1544~1625)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565년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리쉬옴므는 1603년 보르도(Bordeaux)에서 예수회 대학을 다시 개교하는 허락을 받고 그곳에서 예수회원이 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리쉬옴므는 예수회 제5대 총장 아쿠아비바(Claudio Acquaviva, 1543~1615) 임기 말년에 그를 보조하기 위해 로마에 머무는 동안 「경건한 영혼의 고별 연설(Valedictio Animae Devotae)」과 「영적 그림(La Peinture Spirituelle)」 등을 저술했으며,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더 나은 삶으로 옮겨가는 이유(De Ratione migrandi ad meliorem vitam)」, 「영혼 불멸(L’Immortalit de l’Ame)」등을 저술하면서 인생의 짧고 덧없음과 후세에 맞게 될 영광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17세기 신심 문학의 영성 작가 비네

 

프랑스 디종(Dijon) 출신인 에티엔느 비네(tienne Binet, 1569~1639)는 이탈리아 노벨라라(Novellara)에서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비네는 1603년 프랑스에서 예수회 금지령이 풀리자 즉시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예수회 운영에 큰 역할을 담당했으며, 루앙(Rouen)과 파리의 예수회 대학에서 학장과 파리, 상파뉴(Champagne), 리옹(Lyon) 등지에서 지부장을 성공적으로 역임했습니다. 이즈음에 비네는 설교가로서 명성을 널리 얻었으며, 다른 설교가들에게도 도움을 주고자 「자연의 경이로움과 가장 고귀한 기교에 대한 수필(Essai des Merveilles de la Nature et des plus nobles Artifices)」을 저술했습니다.

 

또한 비네는 17세기 프랑스에서 수도생활을 쇄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Franois de Sales, 1567~1622) 및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Jeanne Franoise de Chantal, 1572~1641)과 친분을 갖고 있던 비네는 특히 프란치스코가 운영했던 학교에서 실천했던 밝은 분위기의 신심을 따랐습니다. 비네는 많은 영성 작품들을 저술한 영성 작가로도 유명세를 떨쳤지만, 뛰어난 영성가의 면모를 보이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심생활을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피에르 코통.

 

 

문학가이자 왕실 고해사제 코통

 

프랑스 네롱드(Nronde) 출신인 피에르 코통(Pierre Coton, 1564~1626)은 파리와 부르주(Bourges)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1583년 이탈리아 아로나(Arona)에서 예수회에 입회하고 밀라노와 로마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코통은 리옹에서 신학 공부를 마무리하고 설교가로서 경력을 쌓았으며,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와 충돌하면서 가톨릭교회와 예수회를 지키기 위한 논쟁가로서 활동했습니다. 앙리 4세와도 친분을 갖게된 코통은 1603년 프랑스에서 예수회가 재건될 수 있도록 왕실 정책에 영향을 끼쳤으며, 1608년 왕실 고해사제가 되었습니다.

 

코통은 17세기 프랑스 영성 지도자들과도 교류하면서 프랑스 영성이 부흥기를 맞는 데에 기여했습니다. 베륄(Pierre de Brulle, 1575~1629)과도 친분을 맺었던 코통은 프란치스코 드 살의 영성과 유사한 영성을 강조했습니다. 코통에 따르면, 외적인 일에만 치중하면서 사도직 활동을 과다하게 하는 것은 영성생활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성생활에서는 내적 생활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 자신의 마음의 움직임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코통은 외적 활동보다 묵상을 통해 기도생활에 전념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더 유익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영성생활의 권위자였던 랄르망

 

프랑스 샬롱쉬르마르느(Chlons-sur-Marne) 출신인 루이 랄르망(Louis Lallemant, 1588~1635)은 부르주에서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성숙한 신앙심을 갖게 되었으며, 1605년에 낭시(Nancy)에서 예수회에 입회했습니다. 1621년 종신서원을 한 랄르망은 라플레쉬(La Flche), 부르주, 루앙의 예수회 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수련장을 역임하고 파리 클레르몽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1628~1631년 제3수련기 수련장을 맡아 양성자로서 수련자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사실 랄르망은 저서를 집필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랄르망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예수회 신비작가였던 리골뢰(Jean Rigoleur, 1596~1658)와 쉬렝(Jean-Joseph Surin, 1600~1665)이 그의 가르침을 기록했으며 거의 60년 후인 1694년에 샹피옹(Pierre Champion, 1632~1701)이 그 기록을 편집해서 「예수회 루이 랄르망의 영적 가르침(La doctrine spirituelle du P. Louis Lallemant, de la Compagnie de Jsus)」을 출판했기 때문입니다.

 

랄르망은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언급했습니다. 즉, 정화의 길을 걷는 초보자는 추리적 묵상을 실천하고, 조명의 길을 걷는 진보자는 정감적 기도를 바치며, 일치의 길로 나아가는 완전자는 관상과 일치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랄르망에 따르면, 관상의 단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불완전한 관상에 머물 때에는 고요의 기도를 바치게 되고 완전한 관상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일치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랄르망은 기도생활과 사도적인 삶을 연결시켰습니다. 즉, 기도와 행동 두 가지 모두 진정한 사도가 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사도적인 영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행동도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으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완덕은 다른 영혼들을 위한 열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예수회는 잠시 금지령을 받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금지령 해지 이후에 더욱 열정적으로 영적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특히 프란치스코 드 살의 영성에서 영향을 받아 모든 신자들이 실천할 수 있는 영성생활을 가르치려고 노력했습니다. 프랑스 가톨릭교회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얀센주의와 정적주의의 폐해를 조금씩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7월 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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