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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프란치스칸 영성 – 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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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9 ㅣ No.604

프란치스칸 영성 – 순명 (1)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뜻에 따라가기를 좋아하고, 자기와 같은 사상을 가진 이에게 기울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때때로 평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각자의 뜻을 양보할 필요가 있다. 누가 그리 지혜로워 모든 것을 완전히 알 수 있으랴?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관을 과도히 믿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기쁜 마음으로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하느님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면 좋은 효과를 얻을 것이다.

 

우리는 종종 의견을 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받는 것이 올바를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당한 이유가 있고 까닭이 있음에도 남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교만과 고집의 표일 뿐이다.

 

수도자들은 세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그 복음적 가치를 드러내는 자들이다. 이들은 복음적 권고의 서약을 통해서 “정결하고 가난하고 순명하시는”(봉헌생활 1항)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알리고,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 세상에 미리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수도자들은 이러한 복음적 삶 안에서도 특히 순명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확실히 실행한다. 순명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이 세계에서 실현되도록 준비하며, 그 상태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명이 단순히 누군가에게 복종함, 즉 힘이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에게 뭔가를 시킬 때 그것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뜻한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순명은 자기 스스로 기쁘게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프란치스칸적인 순명이란 어떤 것인가? 우리 프란치스칸은 어떠한 방법으로 순명을 이해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순명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순명의 개념

 

순명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여러 덕행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뜻 대신 자신을 파견한 하느님의 뜻에 따르려는 행동이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도구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합치시킬 때 할 수 있다.

 

순명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아주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연결시키는 정신 성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순명처럼 그리스도인의 순명도 그의 주변 인물을 통하여 그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를 알 수 있는가? 이 같은 순명 의지는 인격적 자유의 진지한 행위, 기도 중 하느님 대전에서 꾸준히 심화되는 선택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사에 의해 그리고 교회의 위계적 구조에 의해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순명의 덕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자신의 순명 의지를 강화하고, 그리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순명하는 하느님의 종이 되신 그리스도의 순명의 활력에 참여하는 일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희생 자체는 성부의 뜻에 대한 그분의 순명과 신의를 통하여 구원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히브리서1)나 필립비서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성부께 대한 순명은 그리스도의 사제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모든 신앙인의 핵심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프란치스칸 순명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명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리에게 복음적 순명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모든 생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노력했으며,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이루고자 하였다. 다시말해 가난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생활을 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를 사랑하신 나머지 순명하셨기에 인류에게 구원을 주셨음은 필리피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 6-8)

 

프란치스코는 순명생활의 근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아버지께 대한 순명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사랑으로 성부의 뜻에 순명했다면,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명의 삶을 지향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삶을 사는 사람은 외적 · 내적 가난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순교의 삶과도 비교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구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죽음을 받아들이실 정도로 하느님께 순명하셨기 때문에 구원된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순명은 구원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프란치스코는 바오로 사도와 같이 죄를 아담의 불순명에, 구원을 그리스도의 순명에 연결시킨다. 하느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찾는 사람은 아담의 죄를 범하면서,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 선물을 부당하게 소유한다. 반면에 하느님 때문에 자기의 뜻을 포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구원의 길을 따른다. 프란치스코는 인간이 불순명으로 말미암아 타락했듯 순명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로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순명과 형제적 봉사

 

프란치스코 성인의 순명은 형제들에 대한 봉사로써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봉사를 함으로써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단계에 이른 자율성이며, 자기 자신의 포기를 전제로 한 서로의 정신과 마음의 일치이다. 즉, 순명함으로 형제가 형제를 섬기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므로,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순종이 됩니다.”(권고 3,6)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순명은 대수도원의 규율생활이 요구하거나 공동생활의 질서가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회개 생활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작은 형제가 순명해야 하는 일차적인 동기는 장상의 명령을 지키는데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사랑의 선물을 바치는데 있다.

 

이와 같이 영적이고 내적인 순명을 보나벤투라 성인은 ‘완전한 순명’ 또는 사랑에 의해 충동된 순명이라고 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기에게 순명이 주는 은혜를 얻기 위해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상을 두기를 원하였다. 그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한 일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여러 은혜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입회한지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어느 수련자가 나의 원장이 된다면, 나는 그에게 노인이나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여 복종하듯이 그렇게 순명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은혜입니다. 순명하는 형제는 장상 안에서 인간을 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장상이 부족한 사람이면 부족한 사람일수록 그에게 순명하는 형제의 겸손은 하느님을 더욱 즐겁게 할 것입니다.”

 

주1)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성모기사, 2018년 5월호, 반홍철 토마스 모어(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프란치스칸 영성 – 순명 (2)

 

 

장상의 역할과 순명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순명이라는 개념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들 할 것 없이 모두를 포함한다. 모두 다 ‘주님의 정신으로’ 이끌려 질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 곧 상대방에 대한 순명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프란치스코의 글(인준 받지 않은 회칙 4-5장) 안에서도 알아 볼 수 있다. 즉 그는 장상직을 위임받은 형제들이 ‘봉사자와 종(Minister et Servus)’으로 호칭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장상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각 형제 안에서 성령의 길을 발견한 후 형제가 그 길을 따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각 형제는 장상에게 순명함으로써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확실한 표를 발견한다. 따라서 형제들의 봉사자이며 종으로서의 장상은 형제들을 방문하여 권고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훈계할 것이며 그들의 영혼과 회칙에 반대되는 것을 명하지 말아야 한다.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양심과 회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무것도 명할 수가 없다. 곧 ‘거룩한 순명’이라야 하는 것이며, 이 또한 장상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순명을 통하여 하느님의 뜻이 인간 생활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기에 순명이라는 구실로 악을 행하거나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장상은 순명으로 요구하는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주의해야 한다.

 

장상은 어려움에 있는 형제들을 사랑과 친절로 맞이할 것이며, 주인이 하인을 대하는 것처럼 형제들이 자신 곧 장상을 대하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애정을 보여 주어야 한다. 즉, 모든 형제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은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기가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각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한다. 또한 어떤 형제의 죄 때문에 그 형제에게 화를 내지 말고 오히려 온갖 인내와 겸손을 다하여 너그럽게 훈계하고 부축하도록 가르친다.

 

그러므로 장상은 섬기는 사람들이며 아래 형제들에게 상냥해야 하며, 너그러운 마음을 지녀야 하고, 개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관습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또한 호감을 사려고 은혜를 베풀지 말며, 권리를 행사하기보다는 직무를 수행할 생각만 해야 한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장상은 직무를 형제들로부터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상에게 특혜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정반대로 수도자의 순명이 위대하고 거룩한 만큼 장상의 직분은 더 무겁다. 장상은 순명을 자기 개인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에 이용해서는 안 되며 그가 형제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느님 뜻과 일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장상은 주님이 주시는 것 외에 형제들에게서 다른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그들이 보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기를 바라지 말고 오히려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아랫사람의 순명

 

프란치스칸 순명은 장상의 결정을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형제는 그가 올바른 지향에 따라 자발적으로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순명 안에 움직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여 책임감 있게 하느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길을 택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참되고 거룩한 순명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순명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여 있고, 능동적으로 그분의 뜻에 맞추어 기쁘게 섬기는 것이 프란치스칸 순명이라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장상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라고 본인 자신이 알고, 또한 그 일 자체도 선이라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참된 순명이 됩니다.”(권고 3,4)

 

이것은 능동적인 순명의 형태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나타낸다. 공동체 안에서 형제들 각자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일이라면) 순명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에 순응하여 하느님과 형제들을 책임감 있게 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장상이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명령, 즉 공동체 안에서 다른 형제들의 마음속에서 들리는 성령의 부르심을 무시하고 배제할 때 형제들은 자기 자신의 권리를 드러내고 내세울 수 있다.

 

장상이 양심과 회칙에 반대되는 것, 즉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어떠한 것을 명할 때나 혹은 어떤 형제가 장상 때문에 혹은 외적·내적으로 주어진 환경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영적 · 육적으로 회칙을 지킬 수 없고,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는다면 아래 형제의 정당한 저항은 보장되어 있다.

 

이는 복음적 생활의 이상을 사는 데 있어서 그 마지막 책임은 형제들 각자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순명의 핑계로 인해서 수도생활의 주체가 하느님과 각 형제들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도 이야기 한다. “아랫사람의 눈에 장상이 명하는 것보다 자기 영혼에게 더 좋고 더 유익하게 보이는 것이 있을 때라도, 자진해서 자기의 것을 하느님께 희생할 것이며 장상의 뜻을 실천에 옮기도록 힘쓸 것입니다.”(권고 3,5)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진실로 합당하지 않거나 교의에 어긋나는 행위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생활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비록 자신의 생각이 더 좋다고 생각할지라도 장상의 뜻을 따를 것을 권고하는 것이다. 이는 자칫 교만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형제들의 주체적인 권리를 겸손 안에서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명이라는 것은 첫째로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을 위해서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아랫사람에게 명한다면, 순명은 하지 않아야 하지만 장상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됨을 강조한다.1)  순명은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 하는 것이기에 사랑의 순명이어야 하며, 만약 이 때문에 핍박을 당하더라도 하느님 때문에 그들을 더 사랑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 간의 순명이 이루어지기 위한 가장 밑바탕에는 바로 형제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영적 사랑은 작음과 순명을 함께 묶어, 형제적 공동체라는 더 높은 가치관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형제적 공동체는 모든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열려 있고 포용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 앞에서 순명적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2) 그 결과로 그는 모든 형제가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 순명하고,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 앞에서도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종과 같이 드러내고 그들에게 양순함을 보이기를 원하였다.

 

 

순명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

 

다른 이에게 순명하면서 산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왜 순명하기 어려운가?

 

우선 많은 사람이 애덕으로 순명하기 보다는 억지로 순명하기 때문이다. 즉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를 굴복시켜 순명하기 전에는 마음의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순명이 그릇된 자유개념에서 잘못 사용되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우리가 알아서 사용하면 된다지만 이는 인간의 근본선인 자유를 그것이 진리와 윤리규범과 가지는 본질적인 관계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과 민족들이 당하는 불의와 폭력 등 자유의 남용에서 오는 비정상적인 결과들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자유의 신비가 성부의 뜻에 순명하는 길임을, 그리고 순명의 신비가 점진적으로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길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수도자들이 이 독특한 순명 서원을 통하여 천명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신비이다. 그들은 순명을 통하여 자신이 성부의 자녀들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주1) 장상이 그의 영혼에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아랫사람에게 명한다면 순명하지 말아야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상을 떠나지 말 것을 이야기하면서 형제들의 순명에 대한 판단으로 인해서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막고자 함을 볼 수 있다. (권고 3,7)

 

주2) 프란치스코는 어느 피조물에게나 순명하는 종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이 말을 한 것은 모든 피조물에서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모기사, 2018년 6월호, 반홍철 토마스 모어(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프란치스칸 영성 – 순명 (3)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순명

 

우선 순명 생활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다함께 실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공동생활을 같이 하는 형제들 사이의 봉사의 증거는 수도생활의 특징인 공동체적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형제적 공동체 생활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받아들이며,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걸어가는 탁월한 공간이다.

 

이러한 공간 안에서 순명은 사랑으로 생명력을 얻으며, 개성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동일한 증거와 동일한 사명 안에 회원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성령의 은혜를 받는 공동체생활에서,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효과적인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발견하고, 통솔하는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 부성의 표현과 하느님께 받은 권위의 수행을 함께 인정한다.

 

그러므로 공동체 생활은 교회와 사회 앞에서 인종과 신분, 언어와 문자는 다르지만 동일한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순명하려는 공통된 소망에서 생기는 유대를 보여주는 특별한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순명하는 사람은 ‘1) 주님을 따르고 2) 자기 자신의 욕망이나 사심에 이끌리지 않으며, 3) 참으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주님의 성령께 인도를 받으며, 커다란 역경 속에서도 그분의 강한 손이 붙들어 주심을 고백할 수 있다.

 

매우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길이라 위로하며 순명을 할 때 우리에게 희망(하느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이는 너무나 가혹하고 힘든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상한 빵을 주시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당장은 좋아 보이더라도 결국 가서는 해로운 것이 되는 것은 결코 주시지 않으신다. 언젠가 진짜로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이러한 희망이 순명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 그리고 이 희망을 갖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성모님 또는 모든 성인과 성녀가 위대한 것은 이 믿음에 따른 순명을 하였기 때문이다.1)

 

결국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렇게 큰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오롯이 순명하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쉽게 거스르는가에 대해서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10계명만 생각해보아도 그렇다. 우리는 계명들을 어긴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두 다리로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서 꼼짝없이 매달려 계셨으며, 우리가 두 손으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두 손 역시 못에 박힌 채 움직일 수조차 없으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아닌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겸손된 순명의 길을 가야하며, 그러기 위해서 더욱 작아져야 한다.

 

이렇게 겸손을 통한 순명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1) 하느님을 묵상하고 - 모든 선한 것을 만드신 주인으로서 하느님을 늘 보아야 한다. 2) 그리스도를 기억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지극히 치욕적인 죽음조차 겪으시기까지 겸손하셨다는 것. 나병환자에 비유될 정도로 낮추셨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 좋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지셨다는 사실 말이다. 3)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끝으로 순명을 하려면 순명하고자 하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주1)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의 지배 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18-22.24)

 

[성모기사, 2018년 6월호, 반홍철 토마스 모어(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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