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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28: 산서를 떠나 대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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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1-18 ㅣ No.939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28) 산서를 떠나 대주로 가다


압록강 건널 각오 다지며 만리장성으로 향하다

 

 

- 대주 성문은 태원에서 만리장성으로 가는 첫 관문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4년 8월 29일 산서대목구청에서 조선 신자들이 보내온 편지 2통을 받았다. 이 편지를 가져온 이는 1833년 겨울 여항덕(파치피코) 신부를 변문으로 안내한 중국인 교우였다. 조선 교회 밀사는 변문에서 만난 여 신부를 데리고 조선으로 입국하고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쓴 편지들을 그에게 전했다. 중국인 안내자는 편지를 뜯어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그 내용을 보여 줬다. 이 편지 사본들은 만주 전 지역뿐 아니라 북경 인근까지 퍼졌다. 이 중국인 안내자가 조선 신자에게서 받은 편지를 9개월이 지나서야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가져온 것이다. 

 

조선 신자들이 쓴 편지의 골자는 “조선 임금이 주교를 공개적으로 입국하도록 허락하지 않는 한 영접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교황께서 돈을 대어 배 한 척을 무장시키고 값진 선물과 함께 사신을 파견해 조선 국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편지를 읽고 조선 신자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고 판단했다. 편지를 가져온 중국인 교우 또한 “요동의 어떤 교우도 브뤼기에르 주교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려 줬다.

 

이 중국인 교우가 다녀간 후 얼마 되지 않은 9월 8일 왕 요셉이 산서로 왔다. 4개월 동안 요동 땅을 헤매며 조선으로 가는 길을 마련하고 돌아온 것이다. “서부 달단에서 조선까지 가는 길이 하나 있습니다. 만리장성은 늘 파수꾼이 지키고 있지만, 문을 통해서 갈 수도 있고, 성벽이 무너진 틈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서부 달단에, 주교님께서 안전하게 계실 수 있는 장소를 두 곳 찾아놓았습니다. 교우들은 주교님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부 달단인 요동에서는 어떤 교우도 주교님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대주는 만리장성으로 가는 관문으로 진나라 이후 서역 교역 도시로 번창했다. 사진은 청나라 대상들이 교역 물품을 살피고 있는 모습을 꾸며놓은 전시물.

 

 

왕 요셉은 먼저 서만자(西灣子)에서 조선으로 가는 길을 답사했다. 그리고 압록강에서 조선으로 넘어갈 수 있는 시기와 장소를 확인했다. “저는 달단 국경 극단에 있는 중국 관문까지 갔었습니다. 보초들의 경계를 속일 수 있습니다. 중국 관문과 조선 측 첫 번째 초소 사이에는 120리(47㎞)가량 되는 황야가 있습니다. 이 황야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압록강)이 하나 있는데 연중 두 달은 얼어 있습니다. 이 황야에는 그 누구도 거주할 수 없습니다.… 해마다 정기적으로 장이 세 번 섭니다. 음력 3월, 9월 11월에 섭니다. 이들 장은 중국 관문의 이쪽에서 섭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왕 요셉의 보고에 고무돼 교황청 포교성성과 포교성성 마카오 대표부에 편지를 써서 현 상황을 알리고 조선 교우들이 자신과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편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주교는 9월 17일 다시 왕 요셉을 북경으로 파견했다. 조선 신자들의 편지를 가져왔던 중국인 교우로부터 “음력 9월에 조선 신자들이 북경에 올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자신도 9월 22일 서둘러 서만자로 출발했다. 그곳이 산서보다 조선 신자들과 접촉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해서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조선까지 가는 여행길의 최고 동반자로 세 부류 사람을 꼽으며 후임 선교사들에게 추천했다. 첫째 약장수다. 약장수는 말재주가 있어 누가 뭘 물어도 막힘없이 대답하기 때문이다. 둘째, 판각인이다. 목판본을 만들 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셋째, 믿을 만한 복사다.

 

성곽에서 내려다본 대주 모습. 태원부에서 만리장성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 길을 가야했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도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대목구에서 서만자까지 누구와 동행했을까. 이에 관한 어떤 기록도 없다. 왕 요셉을 먼저 북경으로 보냈기에 주교에겐 의지할 복사도 없었다. 하지만 무사히 서만자에 도착했고 “이 여행길이 즐겁고 수월했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이전의 길 안내자들보다는 훨씬 좋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것 같다. 이들은 분명 산서대목구장 살베티 주교가 추천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산서대목구에서 서만자까지의 여정은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로 갔다는 내용이 거의 전부이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앵베르 주교의 조선 입국로를 추적해 보면 거의 드러난다. 앵베르 주교는 서한에서 “산서에서 서만자까지 갔다가 이후 갑사의 명의 주교(브뤼기에르 주교)와 그 밖의 동료(모방)가 다닌 무인지대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보다 더 수월하고 덜 추운 달단만(요동만) 해변을 따라가는 국도로 갔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앵베르 주교가 1837년 12월 8일자로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글에 따르면 브뤼기에르와 앵베르 주교는 적어도 산서대목구청에서 서만자까지 같은 길을 이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서대목구청이 자리한 기현(祁縣)에서 출발한 브뤼기에르 주교는 산서성의 성도인 태원부(太源府)로 갔을 것이다. 이곳을 통과해야만 만리장성으로 가는 관문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앵베르 주교 서한에 따르면 기현에서 태원부까지 하루 반나절 길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잘 정비돼 자동차로 1~2시간이면 도착한다.

 

태원은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76) 때부터 형성된 고도이다. 진(晋)의 땅이었던 태원은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에 속했다가 명ㆍ청 이후 산서성의 성도로 자리해 오고 있다. 태원부로 들어가기 위해선 통행세를 내야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태원의 서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로질러 북경으로 가는 성문을 빠져나간 후 대동부(大同府)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길로 5일을 쉼 없이 가야만 만리장성의 남쪽 성벽에 다다른다. 만리장성을 통과하려면 모든 사람이 대주(代州)에서 관문 관원에게 통행증을 받아야만 했다. 브뤼기에르 주교 일행도 대주 시내 주막에서 관문 관원들에게 돈을 주고 통행증을 구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11월 19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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