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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과 간옹 이헌경의 천학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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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9-14 ㅣ No.920

18세기 西學 비판의 맥락과 艮翁 李獻慶의 <天學問答>

 

 

국문 초록

 

본고는 이헌경의 <천학문답>(天學問答)을 검토하여 그의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살펴보고,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이헌경의 위상을 논하였다.

 

이헌경은 근기 남인 계열 학자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서학서를 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학서를 접하고는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었으며, 나아가 서학이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음을 근심하였다.

 

이헌경은 남인 계열의 인사였지만 당파를 넘어 소론 계열의 인사였던 홍양호와도 교유하며 반서학적 입장을 공유하였다. 또 18세기 서학 비판의 핵심 인물이었던 안정복과도 서신을 주고받고 각자의 서학 비판 저술을 교환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의 저술 <천학문답>은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서학의 속성을 드러내고 이를 배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서학의 그릇된 실질을 비판하며 서학은 불교보다도 보잘것없는 학설이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이헌경은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천문 역법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서학 관련 저술들은 명말청초 호사가들이 해괴한 이야기를 만들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헌경은 서학을 금할 방법으로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고 그들의 학설을 뽑아내려는 행동과 더불어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쳐 다시금 중화의 도를 제고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주목할 점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성호우파 계열과는 관계없이 근기 남인 계열 안에서 이헌경으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인사가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건대, 이헌경은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 서학 비판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천학문답>은 후대 서학 비판 저술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1. 緖論

 

본고는 18세기 후반에 산출된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의 <천학문답>(天學問答)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그의 서학(西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울러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이헌경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서학서들이 조선에 전래된 이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서학서에 대한 전면적인 독서를 통해 그에 대한 자신의 이해 관점을 밝히는 한편 서학과 서교를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내었다. 아울러 서학을 통해 인지하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긍정하고 그것의 유의미성을 초보적 형태로나마 논의하였다. 이것은 성호를 기점으로 조선의 재야 학계에서 서학에 대한 학문적 논의를 전면적으로 진행하게 되었음을, 그럼으로써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지평이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1) 한편 이 같은 성호의 학문적 성향에 의해, 성호의 문하에서는 서학과 서교를 두고 대립하는 두 계열의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성호의 후학들은 이기론 등 성리학의 주요 이론 때문이 아니라, 서교와 서학의 대면에 대한 관점을 둘러싸고 분화가 된 것이다. 먼저 윤동규(尹東奎) · 안정복(安鼎福) 등은 서교와 대립하면서 성리학의 이론틀 안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입장에 서고, 이들보다 후배였던 권철신(權哲身) · 이기양(李基讓) 등은 서교와 서학을 적극 수용하면서 성리학의 이론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는 입장에 선다. 결국 서학과 서교를 대면하면서 수용과 배척의 입장이 공히 성호의 문하에서 나왔으며, 이는 당시 근기 남인 학자들에게 두루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에서 그간의 선행 연구에서 주목한 중심인물은 성호우파 계열에 속하는 신후담(愼後聃)과 안정복(安鼎福)이었다. 이 두 인물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2) 잘 알려져 있듯이, 신후담은 <서학변>(西學辨)(1724)을 지어 성호학파에서 읽었던 주요 서학서에 대한 비판적 논변을 담았다.3) 이는 당시 성호 문하에서 나온 최초의 반서학적(反西學的) 저술이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이후 안정복은 <천학설문>(天學設問)(1784) · <천학고>(天學考)(1785) · <천학문답>(天學問答)(1785)을 지어4) 서학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안정복이 입언(立言)한 일련의 저술들은 18세기 서학 비판의 논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들과 같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 이들과 동시대에 활동하면서 서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인물들과 그들이 남긴 관련 논설들, 예컨대 본고에서 다루려는 이헌경의 <천학문답>, 조술도(趙述道, 1729~1803)의 <운교문답>(雲橋問答)(1785), 신체인(申體仁, 1731~1812)의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1791) 등은 그동안 연구자들에게 거의 관심이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기실 이러한 연구의 기형성을 극복하고 18세기 서학 비판의 실질과 제 양상을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후담 · 안정복을 포함하여 앞에서 언급한 여러 인물들까지 모두 망라해야 함은 필수적이다. 본고의 문제의식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본고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이헌경은 정계 진출 이후 중앙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품계가 정2품 한성부판윤에까지 올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18세기 근기 남인의 핵심 인사 중에 하나로서, 목만중(睦萬中) · 정범조(丁範祖) · 채제공(蔡濟恭)과 더불어 ‘남인 4대 문장가’로 꼽힌다.5) 그는 정조대 탕평 정국을 주도했던 채제공에 견준다면 정치적으로 특출한 자취를 남긴 인물은 아니지만, 남인 세력 안에서 정치적인 입지를 꾸준히 지니고 있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또 그는 자신의 당파를 넘어 소론 계열 인사였던 홍양호(洪良浩)나 노론 계열 인사였던 황경원(黃景源) 등과도 폭넓게 문학적 · 사상적으로 교유하였다는 점에서, 그가 근기 남인 계열 인사들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은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근기 남인 계열 인사들 가운데 18세기 반서학적 입장을 지녔던 대표적 인물인 신후담 · 안정복은 물론이요 채제공6)까지도 모두 성호 이익의 문하생이었던 바, 기실 18세기 서학 비판은 성호우파 문인들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들의 반서학적 입장은 모두 스승인 성호와의 학문적 토론과 문답의 과정을 통해 일정 부분 형성되었다. 반면에 이헌경의 경우에는 근기 남인 계열의 인사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스승이 없이 가학(家學)을 통해 학문의 길로 나아갔기에, 그의 반서학적 입장이 어떠한 경위를 통해 형성되었으며 나아가 그의 <천학문답>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저술되었는가 하는 점이 규명되어야 하리라 본다. 즉, 18세기 근기 남인 계열 안에서 성호의 문인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측면에서도 서학 비판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본론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이헌경은 남인 계열 인사 중에는 목만중 · 채제공과, 소론 계열 인사 중에는 홍양호와 서학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를 주고받으면서 비판적 입장을 형성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당파를 넘어서서 반서학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가 <천학문답>을 저술한 후에는, 안정복의 요청으로 각자의 저술 <천학문답>을 바꾸어보면서 서로의 반서학적 입장을 견주어보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헌경의 <천학문답>은 이후 신체인의 <천학종지도변>의 형성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헌경의 반서학적 입장과 이를 드러내는 관련 저술은 18세기 후반 서학 비판의 흐름에 있어 중층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바, 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2. 李獻慶의 생애와 西學에 대한 태도

 

이헌경(李獻慶)은 1719년 9월 21일 한양의 흥인문(興仁門) 자지동(紫芝洞, 현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세종(世宗)의 10남 담양군(潭陽君)의 후손이다. 초명은 성경(星慶)이었으나 45세 때인 1763년에 헌경(獻慶)으로 개명하였으며,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이다.

 

이헌경의 학문적 연원을 따져보면 특징적인 것이 오로지 가학(家學)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고 별달리 외부의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았다7)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종대부(從大父)였던 이명시(李命蓍, ?~?)에게 학업을 전수받았는데, 이명시는 퇴계 이황 → 한강 정구 → 관설(觀雪) 허후(許厚, 1588~1661)로 이어지는 남인의 학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8) 허후는 미수(眉?) 허목(許穆)의 종형이었던 바, 생각건대 이헌경은 17세기 근기 남인 학자들이 고문경전(古文經典)과 육경(六經)을 기본정신으로 중시했던 학풍을 전수받아 당시 주류적 학풍인 주자성리학보다는 육경의 학문에 침잠하여 그 본의를 탐구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학풍은 자연스럽게 박학(博學) · 다독(多讀)을 통해 여러 학문을 접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그의 독서 목록에 서학서들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一]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이를 근심하고 탄식하여 번번이 그 天主의 학설이 결국에는 필시 백성들을 그르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9)

 

[二]

府君[이헌경]께서는 弱冠 때부터 이미 西學이 백성들을 그르치는 것을 근심하여 매양 근심하고 탄식하셨다.10)

 

위 인용문 [一]은 이헌경이 안정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며, [二]는 이헌경의 손자 이승진(李升鎭)이 쓴 글이다. 두 글을 통해 이헌경이 학문의 길로 접어든 이후 이른 시기부터 서학서를 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그는 서학서를 접하고는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었던 듯하며, 나아가 서학이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음을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즉 이헌경은 젊은 시절부터 서학을 접하였지만, 서학이 끼칠 해를 우려하여 서학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헌경은 1738년(20세) 진사시에 합격하고, 1743년(25세)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에서 남인 인사 중에 채제공 · 정항령(鄭恒齡)도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그는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 집의, 양양부사,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하지만 중년기에 들면서 연이은 가족 · 친척들의 상을 당하면서11) 정조가 즉위하기 전까지 10여 년간 출사하지 않고 은거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게 된다.

 

관직에 오른 후 그가 가장 돈독하게 교유했던 인물은 바로 채제공과 목만중이었다. 채제공과는 관직 생활 이전부터 약하시사(藥下詩社)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시문을 주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문과 급제동기이기도 했다. 목만중과는 서원시사(西園詩社) · 계사(溪社) · 만사(蔓社) 등 여러 시사를 결성하여 함께 자리를 하였다.12) 이들의 시사에는 당시 남인 계열의 인사인 신광수(申光洙) · 정범조(丁範祖) · 이동욱(李東郁) 등이 두루 참여하고 있었다. 기실 이상 열거한 인물들은 온건-강경의 정도 차이는 존재하지만 모두 서학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과의 교유 현장은 문주위연(文酒爲宴)의 장이었던 동시에 서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인식을 공유하는 자리이기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훗날 목만중과 채제공 사이에 1780년(정조 4) 무렵을 기점으로 간극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채제공이 서명응(徐命膺) 정권에 의해 축출당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목만중이 홍유보(洪秀輔) · 채홍리(蔡弘履) 등과 함께 그를 공격하는 편에 섰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진산사건(1791)을 거치면서 두 사람의 간극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헌경은 채제공과는 점차 거리를 유지하고, 목만중과는 지속적으로 교유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보다 강화해 나갔다.

 

정조 즉위 후에 이헌경은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으나, 당시 홍국영(洪國榮)과의 불화 속에서 지방으로 좌천되어 북청부사, 삼척부사, 회양부사 등을 지냈다.13) 이헌경의 직접적인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언사는 이즈음에 처음으로 보이는데, 1782년 10월 홍양호(洪良浩)가 동지겸사은부사로 연경(燕京)에 갈 때 써 준 송서(送序)가 그것이다.

 

이제 듣자 하니, 천주학이라 하는 것이 중국에 성행한다고 한다. 내 비록 자세히 그 학설을 듣지는 못하였지만, 그 학설은 본래 西洋國에서 나온 것이다. … 중국 사람들은 이러한 학설을 얼핏 듣고 처음 보면서도 괴이하다 놀라지 않고 酷信 하고 있다. 이것이 점차 우리나라에도 흘러들어 우리나라의 학자들 중 天人性命에 관한 이치를 논하는 자들이 왕왕 그 학설을 종지로 삼고, 옛 聖人 · 賢人의 논의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제대로 살필 줄도 모르니, 아! 그 미혹됨이 심하도다.14)

 

홍양호는 소론 계열의 인사였지만, 이헌경과 교유를 통해 반서학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던 인물이다. 위 인용문에서 이헌경은 중국에 천주학이 성행하는 현실을 거론하며 중국 사람들이 천주학을 처음 접하면서도 이를 괴이하다고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거기에 완전히 매료되어 존신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중국의 상황으로 끝나지 않고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도 천주학에 미혹된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홍양호는 이러한 현실을 꼬집으며 이어 천주학을 맹비난하는데, ① 서양은 풍기(風氣)가 좋지 않아 백성들 중에 요사스런 기예를 부리는 자들이 많으며, ② 서양 오랑캐들과는 더불어 대도(大道)를 논할 수 없으며, ③ 그들이 추보(推步)에 뛰어나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④ 천주학에서는 천주를 한낱 귀신과 동일시하니 이는 하늘을 업신여기고 하늘을 더럽히는 행위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또 송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헌경은 홍양호를 향해 중국에 가게 되면 연경의 사대부들에게 이러한 천주학의 폐해를 명쾌하게 설득시켜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헌경의 서학에 대한 우려와 비판적 입장과는 달리,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뒤 오히려 동류 남인들 중에 천주교에 빠져드는 인사들이 많아지자, 이헌경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지어 ‘서학서를 모두 불태워버리고 그 학설을 모두 추방하자’는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천학문답>은 1785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이헌경은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있었다. 이에 홍양호는 이헌경을 위해 <이아헌기>(爾雅軒記)15)를 지어 주면서 서학을 배척하는 종지로 삼도록 하였다.

 

한편 이 무렵 남인 계열 인사 중 서학 비판에 가장 열을 올리고 있었던 인물은 바로 안정복이었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안정복은 <천학설문>(1784) · <천학고>(1785) · <천학문답>(1785)을 지었으며,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 젊은 사류들을 모아 서학을 공부하는 것을 심하게 꾸짖기도 하고,16) 채제공에게 편지를 보내 남인계 소장파들이 천주학에 빠져 있는 현실에 미온적으로 대처함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였다.17) 이러한 과정에서 안정복은 이헌경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一]

생각해 보니 옛날 丁巳年[1737년] 가을에 族弟 廷益과 함께한 자리에서 비록 대감의 모습을 접하기는 했으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라서 한마디 말도 서로 주고받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오십여 년이 되었는데 대감께서는 기억할 수 있으신지요? … 불행하게도 근자에 젊은이들에게 天學의 움직임이 있는데, 듣자 하니 대감께서 논지를 세워 배척하셨다고 하던데 그것이 과연 그렇습니까? 천하의 사변은 일정함이 없거늘 뜻하지 않게 우리 무리들 중에도 이런 자들이 있으니, 이것이 과연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폐하고자 해서 그런 것입니까. 어찌 그 그릇됨을 모르고 마음으로 좋아하며 미혹되고 탐닉하는 것인지, 비유하건대 이는 또한 西士들이 말하는 마귀의 幻弄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만약 대감께서 앞장서서 그들을 깊이 배척하지 않으시면 누가 그들을 배척하겠습니까? 혹 人便을 통해 제게도 보여주시면 매우 고맙겠습니다.18)

 

[二]

<天學問答>을 찾아보니 과연 그런 論著가 있었습니다. 근래 듣자 하니 天學을 행하는 자들이 이것을 보고 비웃으며 전혀 천학의 妙處를 모른다고 했다는군요. … 이른바 <天學問答>과 <연경으로 사신 가는 홍양호에게 준 서>를 별지에 기록하여 보내오니, 자세히 살펴보시고 그것이 가한지 불가한지 가르침을 주십시오.19)

 

[三]

보내주신 <天學問答>을 읽고 또 읽어보았는데 내용이 근엄하고 뜻이 정중하며 문장이 간결하여 흠탄하기를 마지않았습니다. … 저도 이 천주학을 배척하는 문자를 쓰기는 썼는데 한갓 남의 구설에만 오르고 그 효과는 없어 곧바로 스스로 후회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그 正本은 영남의 선비가 빌려 가고 없고 初本만 여기 있어 보내드리니, 보시면 그 핵심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감의 저술이 여기에 있으니 제가 지은 것과 한 책으로 합쳐 잘 보관해 두고자 합니다.20)

 

위 인용문 [一]에서 안정복은 이헌경에게 보내는 편지 서두에서 두 사람이 50년 전의 모임에서 함께 자리한 적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기억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두 사람은 공히 남인 계열에 속한 인사이기는 하였지만 오랜 기간 전혀 왕래가 없었던 것이다. 이어 안정복은 근래 젊은 인사들이 천학을 결행하고 있는 현실을 언급하며, 이헌경이 서학 비판의 논설을 지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실제로 그것이 맞는지 묻는다. 그러고는 해당 자료를 인편을 통해 자신에게도 보여주기를 부탁하고 있다.

 

편지를 받은 이헌경은 곧바로 답장을 보낸다. [二]에서 이헌경은 자신이 천학을 비판하는 논저를 지은 적이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하지만 천학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도리어 ‘천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한 비판적 논저를 지었다’고 하는 비웃음을 샀음을 말하며, 자신이 지은 <천학문답>과 앞서 홍양호가 연경으로 사신 갈 때 지은 송서를 함께 보낼 터이니, 실제로 자신의 논설이 논리적으로 적절한 것인지의 가부를 좀 알려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러자 안정복은 이헌경의 논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을 다시 보낸다. [三]에서 안정복은 이헌경의 <천학문답>을 읽고 또 읽었는데 내용상에도 문체상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며 오히려 매우 훌륭하였다고 답하면서 이헌경을 치켜세우고 있다. 또 자신도 서학에 대한 비판적 논저를 지었다가 남의 구설에 올랐던 점을 언급하며 두 사람이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어 안정복은 자신의 천주학 비판 저술도 한번 살펴보라며 이헌경에게 보내주고, 아울러 자신의 저술과 이헌경의 저술을 한 책으로 합쳐서 잘 보관해두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편지를 주고받을 당시 이헌경과 안정복은 일흔에 가까워가는 노구였지만, 이처럼 두 사람은 자신들이 지은 서학 비판의 저술을 공유하고 함께 반서학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헌경은 1789년(70세)에 호조참판, 1790년(71세)에 예조참판,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가 1791년 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3. <天學問答>의 내용과 西學 비판의 시각

 

<천학문답>(天學問答)은 이헌경의 서학 비판 저술로 그의 《간옹집》(艮翁集) 권 23 <雜著> 항목에 실려 있다.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艮翁先生集抄’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필사본 1책 《천학문답》이 소장21)되어 있고, 1931년 이만채(李晩采)가 간행한 《벽위편》(闢衛編) 권1에 ‘이간옹천학문답’(李艮翁天學問答)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세 자료는 약간의 글자의 출입이 있을 뿐 거의 동일하다.

 

<천학문답>은 총 2,260자 분량의 객과 이아헌 주인의 문답을 7개 항목으로 구성하여,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서학의 속성을 드러내고 이를 배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저작물이다. 각각의 항목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드러난 이헌경의 서학 비판의 내용과 시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제1항 : 천학이 치성해지는 현실

 

客이 爾雅軒主人에게 물었다. “몇 해 전에 洪良浩가 燕京에 사신으로 갈 적에, 듣자 하니 그대가 글을 지어 그를 전송하면서 천주학을 강하게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천주학 서적이 비록 중국에 유행하였으나 중국 사람들은 크게 존신하지 않았으며 또 우리나라에 유포되지도 않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것이 천하에 화근이 될 것을 미리 헤아리고 엄하게 배척하였던 것입니까? 그런데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천주학 서적이 과연 우리나라로 들어오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왕왕 깊이 믿으며 칭송하고 흠모하여 그 형세가 천주학으로 휩쓸려 들어가 나날이 치성해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입니까?”22)

 

첫 번째 항목에서 객은 이아헌 주인(爾雅軒主人) 곧 이헌경을 향해 과거 홍양호가 중국으로 사신을 갈 때 이미 천주학의 확산에 대해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는데, 지금 실제로 조선에서 천주학이 크게 유행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니, 혹 선견지명이 있어서 이런 상황을 미리 예견한 것인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기실 이 질문은 천주학이 중국은 물론이요 조선에서도 왜 이렇게 빠르게 확산되고 학자들은 왜 그렇게 천주학에 빠져드는 걸까 하는 현실 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상통한다. 이에 대해 이헌경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성인의 학문은 조리가 있고 평이하지만 공부하는 것은 힘들며, 이단의 학문은 말이 매우 신기하지만 공부하는 것은 빠르다. 후세 사람들은 마음이 거칠기 때문에 힘든 공부를 꺼리고, 학업에 게으르기 때문에 빠른 길로 나아가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老子의 無爲와 佛家의 頓悟는 이처럼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빠른 것을 기뻐하는 마음에 딱 들어맞기 때문에 그리로 나아가는 자들이 매우 많아서 마침내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취사선택에 현혹되게 만든 것이다. … 大禹 · 孟子 이후로부터 中華의 운수가 점차 쇠하여 夷狄의 화가 더욱 치성해진 뒤에 西河 毛奇齡이란 자가 주자를 비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무리가 점차 성하자 주자의 언설과 저작은 모두 우리들이 논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 천주학이 이러한 때에 창도되었으니, 나는 진실로 천하 사람들이 필시 양식을 싸 들고 그리로 달려들 것을 알았다. 그러니 천주학의 서적들이 어찌 중국에서 유행하는 데에만 그치고 우리나라에 전래되지 않겠는가! 또 어찌 한 시대에만 유행하고 천하 후세에 화근이 되지 않겠는가!23)

 

이헌경은 두 가지 층위에서 현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첫째는 학문 자체의 성향이다. 성인의 학문 즉 유학은 조리가 있고 평이하지만 공부하기란 어려운 반면에 이단의 학문은 말이 아주 신기하여 공부하기도 쉽고 빠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예전부터 노(老) · 불(佛)에 지속적으로 빠져들었으며, 주자(朱子) 또한 초년에는 여기에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의 맥락에서 이헌경은 천주학 역시 노 · 불과 같은 이단의 학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여기고 빠져들기 쉬운 속성을 지녔다고 인식한다. 둘째는 시대적 변화상 즉 중화의 운수가 쇠하여 이적(夷狄)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헌경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변화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청나라 초기 학자였던 모기령(毛奇齡, 1623~1718)을 주목한다. 모기령은 본래 양명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였으나 고증학을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자 경전의 주해가 오류임을 주장하며 《사서개착》(四書改錯)이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모기령은 주자에게 무슨 심사가 꼬였던지 주자의 학설이라면 괜찮은 것도 증거를 찾아 억지로 부정하는 짓을 서슴지 않아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모기령의 경학이 18세기 후반에는 조선 학계에도 수입되어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24) 이헌경은 주자성리학이 비난받고 부정되는 현 세태를 중화의 운수가 쇠퇴한 징조로 인식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학이 절묘한 시점에 창도되어 유학으로부터 아무런 비판과 견제를 받지 않게 되어 나날이 치성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중국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조선의 경우도 시간의 문제일 뿐 마찬가지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제2항 : 천학의 그릇된 실질 비판

 

객이 물었다. “천주학은 비록 매우 해괴하고 이상합니다만, 《書經》에 이르기를 ‘위대하신 上帝께서 下民들에게 본성을 내려주었다.’라고 하였고, ‘선을 행하면 온갖 상서를 내려 주고 불선을 행하면 온갖 재앙을 내린다.’라고 하였으며, 《詩經》에 이르기를 ‘상제가 너를 지켜보고 있으니 네 마음을 달리 갖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천주학은 실제로 여기에 근본하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 심하게 배척하는 것입니까?”25)

 

두 번째 항목에서 객은 천주학이 해괴하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서경》 · 《시경》 등 유가 경전의 천(天)과 상제(上帝) 관념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를 배척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주지하듯이 초기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한 마테오 리치는 유교와 천주교와의 친연성을 강조하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리치는 고대 유가의 천과 상제 등의 용어는 바로 궁극적 주재자로서 신을 인지하는 것으로 천주교의 ‘천주’ 관념과 부합하는 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영혼의 존재와 불멸에 대하여도 고대 유가의 혼백(魂魄) 관념을 근거로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리치의 논리는 당시 유학자들이 천주학을 수용케 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이헌경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하늘을 주재하는 측면에서 말하면 ‘上帝’라 하는 것이니, 이는 옛 성인들이 하늘을 높인 말이다. … 사물에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이치가 상제이며, 마음에 부여된 본성이 상제이다. 《大學》에서 말한 지극한 선에 이름[止至善]이 곧 상제를 따르는 것이요, 《中庸》에서 말한 본성을 따름[率性]이 곧 상제를 섬기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상제에게 이목구비가 있어 그 형상을 그릴 수 있겠으며, 혼백 · 정신이 있어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 … 그런데 지금 (천주학에서는) 형상을 그려 밝히고 성전을 지어 엄숙하게 하여 상제를 높이기를 귀신과 동일하게 하니, 하늘을 업신여기고 하늘을 더럽히는 것이 누가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 (利瑪竇는) 별종의 요상한 마귀 같은 품성으로 세밀한 영리함과 자질구레한 지식을 가지고는 감히 聖學의 바깥에서 기이하고 괴벽한 논설을 만들어내었다. 이에 천당 · 지옥설은 佛家를 모방하였고, 상제를 경외하라는 논의는 유가의 경전에 의거하였으며, 천문 · 역법을 추산해내는 학문은 璇璣玉衡을 推演하였다.26)

 

이헌경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입장에서 천주학에서 말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로서의 천과 상제의 관념을 강하게 반박한다. 이는 유학의 ‘천 · 상제’ 개념을 천주교의 ‘천주’와 연계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서, 18~19세기 천주학을 비판하는 유학자들에게 공히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이다. 이헌경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상제는 인격적 신의 요소가 없는데, 즉 신이 아닌데도 이를 형상으로 그려내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면서 상제를 마치 귀신을 떠받들 듯이 대하니, 천주학은 천 · 상제를 높인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하늘을 업신여기고 하늘을 더럽히는 학설이라 치부한다. 더욱이 이는 마테오 리치가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만들어낸 기이하고 괴벽한 논설에 불과하며, 독창적일 것도 없이 불교의 천당지옥설과 유학의 상제 개념을 차용한 것이라고 평가 절하한다. 나아가 서양의 천문 · 역법조차 고대 중국의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원리를 추연한 것이라 말한다. 이처럼 이헌경은 천학의 실질이 매우 그릇되고 형편없는 것이라 평가한다.

 

3) 제3항 : 천학과 불교와의 비교

 

객이 물었다. “불교는 참으로 허탄하고 망령스럽습니다. 그러나 천주학은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늘을 받들며 남들에게 선을 행하라 권면하니, 불교보다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27)

 

세 번째 항목에서 객은 불교와 천주학을 비교하면서, 불교는 매우 허탄하지만 천주학은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하늘을 받들며 사람들에게 선을 권면하는 등 그래도 불교보다는 훨씬 낫지 않느냐고 묻는다. 기실 동아시아에서 불교와 노장은 유학자들에게 오랜 세월 이단으로 배척되어 왔으며, 마테오 리치 또한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며 유교와의 친연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객은 불교보다는 그래도 천주학이 비교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이헌경은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아니다. 釋迦는 본래 夷狄 사람이었다. 이적들은 탐욕스럽고 죽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석가가 지옥의 설을 주창하여 공갈로 위협하며 금하게 한 것이다. 이는 비록 허위로 속이고 꾀어내는 것이었으나 先儒에게 배척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 본심을 따져보면 선을 권면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禪家의 寂滅의 학설은 말라죽은 나무나 꺼져버린 재와 같아서, 그 폐단이 인륜을 끊고 풍속을 어지럽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의도를 근원해보면 생각을 맑게 하는 데 있다. 비록 이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천하에 화를 끼쳤지만 그럼에도 천주학이 오로지 망령되고 허탄한 것을 일삼으며 실제로 근거하는 바가 없는 것보다는 못하였다. 佛 · 老는 천하를 이적 · 금수와 같은 상태로 빠뜨렸으며, 천주학은 천하를 도깨비와 같은 상태로 빠뜨렸다. 이적은 그래도 사람의 부류이며 금수는 또한 형체가 있는 사물이니, 도깨비에 견준다면 실로 큰 차이가 있다.28)

 

불교보다 천주학이 더 낫지 않느냐는 질문에 이헌경은 반대로 답변을 한다. 불교의 지옥설은 본래 목적을 따져보면 선을 권면하는 데서 나온 것이고, 선가(禪家)의 적멸은 그 의도를 더듬어보면 생각을 맑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분명 문제점과 폐단이 크지만, 그래도 본래의 주된 취지는 인정할 만한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학은 이마저도 없이 허황되고 실제 아무런 근거하는 바가 없이 천하를 도깨비와 같은 상태로 빠트려 뭐라 칭할 만한 지점도 없다는 것이다. 일언지하에 천주학을 오히려 불교만도 못한 학설로 치부해 버린다. 기실 이러한 이헌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가 천주학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과 이해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이 같은 피상적인 식견에 근거하여 다분히 감정적인 비난에 가까운 언설의 편린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4) 제4항 : 천학에 대한 우려와 그 대응

 

객이 물었다. “우리나라의 다스림과 교화가 아름답고 분명하여 선비들이 바른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학 서적이 나온 뒤로 臺閣에서 배척하고 刑曹에서 금하고 있습니다. 비록 한두 명의 그릇된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분명하게 마음을 고쳐먹었으니, 그 학문이 다시 세상에 팔릴 수 있는 바가 어디겠습니까? 그대의 우려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29)

 

네 번째 항목에서 객은 우리나라의 천주학 파급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앞서 중국의 경우에는 천주학이 크게 확산이 되어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조선의 경우에는 정치와 교화가 잘 이루어지고 조정에서도 분명한 금지의 입장을 보이고 있으니 천주학이 세상을 크게 어지럽힐 것이라는 우려는 지나친 염려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헌경이 <천학문답>을 집필할 무렵에, 천주교 신도들을 처벌한 첫 사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1785)이 일어났다. 이때 형조에서는 양반 신분의 신도들은 효유(曉諭)하여 석방하고 중인 신분의 김범우(金範禹)는 충청도 단양으로 유배하는 처분을 내렸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일반 사람들로서는 천주학이 향후에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헌경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이 十二重天을 논하면 믿고, 그들이 五大州를 논하면 믿으며, 고상하게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경우 그들의 학설을 참이라 여기지 않음이 없다. 그들의 한 구절 한 마디도 程子 · 朱子의 논설과는 같지 않지만, 그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크게 떠벌리며 조금도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 … 만일 몹쓸 나무라는 것과 거센 물결임을 알았다면, 어찌 그 뿌리를 잘라내고 그 근원을 막지 않는가? 천주학의 서적을 모두 믿으면서 오직 천주에 대한 설명 하나만을 배척하니, 저들은 반드시 변명할 거리가 생기는 것이요 우리는 스스로 해명할 거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그들의 학설을 모조리 뽑아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비록 그들을 배척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반드시 믿게 될 것이다. 어찌 기름 덩어리를 가까이하는데 찌들지 않겠으며, 화톳불을 가까이하는데 데지 않겠는가. 나는 그들이 날로 더욱 치성하고 퍼져가는 것은 보았지만 그들이 막히고 끊기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30)

 

이헌경은 기본적으로 천주학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인물이다. 이에 천주학을 몹쓸 나무, 거센 물결에 비유하여 발본색원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런데 당시 학자들 중에 서학서를 보면서 서양의 십이중천설을 믿고, 세계 지리학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서학에서 말하는 하늘관 및 인간관까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을 목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자들이 천주학에 대해 비판하는 점은 오직 천주에 대한 관념 정도에 불과했다. 이헌경은 앞선 1항부터 3항까지 줄곧 천주학의 그릇됨을 이야기해 왔으므로, 4항에 이르러서는 천주학을 철저히 금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학의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고 그들의 학설을 모조리 뽑아내야 한다는 적극적인 주장을 편다. 그렇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천주학의 유행이 수그러들더라도 다시금 치성해질 것이라 역설한다. 이러한 이헌경의 주장은 18세기 반서학적 입장을 드러낸 논설류에서는 가장 강경한 입장에 해당한다.

 

5) 제5항 : 서양 천문학에 대한 인식

 

객이 물었다. “서양의 천문을 계산해내는 학문은 오묘하여 천하의 曆家들이 모두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도 장차 모두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까?”31)

 

이상의 네 가지 항목의 질의-응답을 통해 객 또한 천주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된 듯하다. 이에 다섯 번째 항목에서 객은 서양의 천문학까지도 배척해야 하는 것인지 묻는다. 기실 18세기 서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피력했던 하빈 신후담, 순암 안정복조차도 서양의 천문 역법이나 상수학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이헌경은 다른 입장을 보인다.

 

서양인들이 비록 천체의 도수를 잘 관측한다고 하지만 이는 복희 · 황제 · 요 · 순의 舊法에 불과하며, 천문을 잘 부연하여 설명을 한다고 하지만 이는 허탄하고 망령되며 요망하고 괴이한 변론일 뿐이다. 만약 羲和의 閏法과 순임금의 璇璣玉衡이 없었다면 저들이 어찌 천지의 조화를 포괄하고 해와 달의 운행을 관찰할 수 있었겠는가. 서양이 중국과 통교하기 이전에도 司馬遷 · 壺遂 등이 大初曆을 만들었으며 당나라 一行이 歲差法을 수립하였다. … 설령 서양의 천체를 관측하는 학문이 중국보다 낫다 하더라도, 이는 겨우 한 부분에만 밝은 것이니 실로 귀하게 여길 바가 못 된다. 하물며 그 학문은 본래 중국의 역법 밖에서 나왔음에랴.32)

 

이헌경은 서양인들이 천문 역법에 뛰어나다는 평가가 존재하지만, 이를 허탄하고 망령되며 요망하고 괴이한 변론이라 치부해 버린다. 또 서양인들이 천문 관측에 뛰어난 이유는 중국 고대의 제도를 잘 활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저들이 어떻게 천체 운행을 잘 관찰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이는 이헌경이 당시 ‘서학중국원류설’(西學中國源流說)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데서 기인하는 듯하다. 주지하듯이 서학중국원류설이란 서학의 원류가 중국에 있다는 논리로, 중국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던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생겨난 학설이다.33) 예컨대 황종희(黃宗羲)는 서양 수학의 원류가 중국 고대의 구고술(句股術)에서 기인하였다고 하였으며, 방이지(方以智) · 매문정(梅文鼎) 등은 천문 역법 분야의 중국 원류설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서학 중국 원류설은 조선에도 수용되어 18세기 후반 서학 수용의 논리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이헌경은 이를 서양의 천문 역법 기술에 대한 폄하 논리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서양과 통교하기 이전에도 독자적으로 역법과 관측법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나아가 설령 현재 서양의 천문 역법이 중국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이는 겨우 한 부분에서만 뛰어난 것이라 귀하게 여길 바가 못 된다며 애써 서양 학문 일체를 부정한다. 이처럼 이헌경은 동양의 가치를 긍정하면서 서학 전반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6) 제6항 : 마테오 리치에 대한 평가

 

객이 물었다. “서양은 중국과의 거리가 구만리로서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通交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利瑪竇가 처음으로 통교하였으니, 비록 聖智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34)

 

여섯 번째 항목에서 객의 질문은 마테오 리치를 향해 있다. 앞서 2항에서 이헌경은 천주학을 마테오 리치가 간교한 지혜를 짜내어 만들어낸 기이하고 괴벽한 논설이라 하였다. 그렇지만 객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과 서양을 통교하게 한 공을 생각한다면 그를 성자 · 지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이한 사람으로는 평가할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헌경의 인식은 줄곧 부정적이기만 하다.

 

이마두가 중국에 온 것은 과연 먼 유람을 하고자 한 것인가, 아니면 항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한 것인가. 이것을 알 수 없다. 당나라 때 玄?을 파견하여 서역에서 佛經을 구하였으니, 호사가들이 이것을 인하여 <西遊記>를 지었다. 송나라 때 宋江이 난을 일으키자 張叔夜가 그를 토벌하였으니, 호사가들이 이를 인하여 <水滸傳>을 지었다. 중국의 재주 많고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이러한 일에 익숙한 자들이 많았다. 내 생각에 호사가들이 이마두가 중국에 온 것을 인하여 먼 나라 사람임을 가탁하고 황당하고 허탄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권의 책을 엮어 엄청난 양에 이르게 되자, 위로는 유가의 서적에 대항하고 아래로는 불가의 경전에 맞서면서 세상을 희롱하고 사람들을 우롱하며 스스로 괴이한 말을 떠벌렸을 뿐이다. … 이는 필시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의 경박하고 괴이한 자들의 소행일 것이다.35)

 

먼저 이헌경은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온 연유에 대해 유람을 온 것인가, 표류해서 온 것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는 마테오 리치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게다가 이후 이헌경의 답변은 엉뚱한 상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헌경은 마테오 리치에 관한 이야기와 천주학 관련 저술들은 중국의 호사가들이 마치 <서유기> · <수호전>을 지어내듯 꾸며낸 것이며, 이는 명말청초의 경박하고 괴이한 자들의 소행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 항목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지만, 이헌경이 천주학을 왜 터무니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왜 이렇게 부정 일변도의 입장을 보였는가 하는 점을 추정케 한다.

 

7) 제7항 : 천학을 금할 방도

 

객이 물었다. “천주학 서적이 천하에 두루 퍼져 모두 불태워 없애기는 쉽지 않을 것인데, 장차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금해야 합니까?”36)

 

이상의 질문을 거쳐 오면서 천주학은 허구로 꾸며진 학설이고 그릇된 학설이며 불교만도 못하고 세상에 끼치는 해악이 극심한 학설이 되어 버렸다. 서양의 천문학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며, 마테오 리치는 중국으로 온 연유조차 분명치 않은 수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에 자연스레 천주학은 축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지막 손의 질문은 이러한 천주학을 어떻게 금할 것인가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우리의 도를 밝히고 가르치는 방법뿐이다. 해가 저물면 도깨비불이 출몰하고 날씨가 음산하면 여우가 울부짖는다. 우리의 도가 밝아져 탄탄대로처럼 보인다면 좌도(左道)에 미혹되는 것과 삿된 길로 달려가는 것을 근심할 것이 무엇이겠는가!37)

 

이에 대하여 이헌경은 천주학을 금하고 축출할 방법으로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치는 방법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기실 앞서 천주학이 치성하는 이유에 대해 이헌경은 중화의 도가 쇠하였기 때문이라 진단하였다. 따라서 이적의 가르침과 이단의 학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고 그들의 학설을 뽑아내려는 행동과 더불어,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쳐 다시금 중화의 도를 제고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말한다. 서적을 불태우고 이단의 학설을 뽑아내는 것이 국가적 제도적으로 강제성을 동반하게 되는 영역의 실천 방법이라면,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치는 것은 학자들의 소임이자 개개인이 의무감을 가지고 결행해야 하는 당위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4. 18세기 西學 비판의 흐름과 李獻慶의 좌표

 

18세기 서학 비판의 흐름은 근기 남인 계열 중에서도 성호의 문하에서 비롯되었다. 신후담, 안정복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성호 이익은 선구적으로 서학서에 대한 전면적 독서를 행한 후에, 제자들에게도 서학서를 읽기를 권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제자들과 서학에 관한 토론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신후담, 안정복의 경우에는 주요 서학서에 대한 비교적 높은 수준의 이해가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나름의 비판적인 입장을 전개해 나갔다. 신후담은 그의 저술 《서학변》에서 《영언여작》(靈言?勺) · 《천주실의》(天主實義) · 《직방외기》(職方外紀)에 대한 핵심 내용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안정복의 <천학설문> · <천학고> · <천학문답>을 살펴보면, 그가 《직방외기》 · 《천주실의》 · 《교우론》(交友論) · 《기인십편》(畸人十篇) · 《진도자증》(眞道自證) · 《칠극》(七克) 등을 읽고 서학에 대한 비판적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에 비해 이헌경은 어느 정도의 범위로 서학서들을 접하였고 또 서학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식견과 이해가 있었는가 하는 점을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기실 그의 저술 <천학문답>을 살펴보면 서학의 이론이나, 천주학의 주요 개념을 두고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지점은 찾아보기 어렵다.38) 논의 과정에서 간단하게 ‘십이중천설’, ‘오대주’, ‘천당지옥설’ 등을 언급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주요 서학서를 보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며 설령 서학서를 보았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지녔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신후담이나 안정복조차도 긍정한 서양의 천문 역법이나 상수학마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마테오 리치의 행적이나 천주학의 발생에 대해서는 잘못된 이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성리학적 관점에서 천주학은 오히려 불교만도 못하다는 다소 편파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헌경이 서학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하고 깊이 있는 식견을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가 주목하고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성호우파 계열과는 관계없이 근기 남인 계열 안에서 서학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무리의 인사들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헌경과 목만중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근기 남인 계열의 인사로서 서울에 거처를 두고 특별한 스승 없이 가학을 통해 학문의 길로 나아갔으며 과거를 통해 관직 생활을 지속했던 인물들이었다. 또 이들은 관직 생활 중에 노론 · 소론의 인사들과도 폭넓게 교유하면서 당여(黨與)에 대한 인식도 상대적으로 느슨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분명 남인 계열의 인사였지만, 안정복의 경우처럼 자기 당의 와해와 체제 이탈에 대한 불안감39)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서학을 어느 정도로 접하고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은 천주학이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까지 유입이 되어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을 매우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천주학이 유입되면서 함께 들어온 서양 문물들이 청나라와 조선 사회에 큰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階當日是天津 禍의 근원이 당시 天津에 있었으니

媚?由來自寺人 조왕신에게 아첨함은 환관들에게서 유래하였네.

從此西方通漢? 이로부터 서방이 중국과 통교하기를 구하니

至今中國事胡神 지금 중국에서는 오랑캐 신을 섬긴다네.

奇奢物像窮機巧 기이하고 사치스런 物像은 기교를 다하였고

幽遠星?幻故新 아득한 별의 궤도는 옛 것과 새것을 뒤바꾸었네.

徐李何心啓?盜 徐光? · 李之藻는 무슨 마음으로 도적들을 들였던가

鄒馮遺院化灰塵 鄒元標 · 馮從吾의 서원은 재와 먼지가 되어버렸네.40)

 

위 시는 목만중의 대서학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목만중은 《명사》(明史)에 기록된 “신종(神宗) 만력(萬曆) 29년 신축년[1601년] 2월에 천진세감(天津稅監) 마당(馬堂)이 대서양(大西洋) 마테오 리치의 방물(方物)을 올렸다.”는 기록을 근거로 서학의 중국 전래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목만중은 서학의 중국 전래를 재앙으로 나아가는 사다리로 인식하였다. 그는 서양과 중국의 통교 결과, 중국 사람들이 서양 문물에 경도되어 서학을 받아들이면서 천주학에 빠져들게 된 작금의 사태를 초래하였고, 이로 인하여 서양의 문물은 물론이요 그들의 천문 역법이 종래의 중화 질서 체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고 판단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학을 강론하던 수선서원(首善書院)이 서광계(徐光?) 등에 의해 역국(曆局)으로 바뀌고 급기야 천주당으로 바뀌는 일이 발생했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 속에는 사람들이 뛰어나다고 일컫는 서양의 천문 역법조차 신구의 질서를 뒤바꿔 놓은 부정적 대상일 뿐이며, 예수는 오랑캐 신으로 성물은 기이하고 사치스런 물상으로 폄하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목만중과 이헌경에게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무조건적으로 거부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헌경의 <천학문답>에서는 천주학에 대해 일관되게 비난과 폄하 조의 발언으로 점철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서학서는 모조리 불태워야 하는 대상이고, 천주학의 학설을 모조리 뽑아내고 축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추구하였던 목표는 ‘동방 조선만큼은 결단코 서양의 먼지에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것’[東韓判不汚西塵]이었다. 이들은 당여에 대한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하였기에 소론 · 노론의 인사들과도 운신의 폭을 넓혀가며 서학 비판의 인식을 공유하였다. 이헌경이 오랜 세월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던 안정복과 더불어 서학 비판의 인식을 공유하였던 것도 같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헌경은 <천학문답>을 짓는 등의 강경한 발언 수준으로만 끝났지만, 목만중의 경우에는 진산사건(1791) 당시 권일신을 사학을 조장하는 교주로 지목하여 처단을 촉구하는 등 천주교도에 대한 강경한 배척활동을 벌였고, 신유박해(1801) 때는 대사간(大司諫)으로서 천주교도들을 엄정하게 심문하는 등 이른바 공서파의 핵심인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정약용은 같은 근기 남인으로서 당여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힌 목만중에게 강한 반감을 표하면서 ‘악인’(惡人)41)이라고까지 칭하고 있다.

 

이처럼 이헌경은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 서학 비판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면서 서학 비판의 핵심 아이콘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1791년 1월 이헌경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헌경의 동류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칭하고 있다.

 

[一] 홍양호, <哀艮翁李京尹獻慶>

倡言闢西學 창언(倡言)하여 서학을 물리침은

深爲吾道憂 깊이 우리의 도를 근심해서라네.42)

 

[二] 안정복, <挽艮翁李判尹獻慶>

一朝?忽仙?遠 하루아침 갑자기 신선 되어 떠나다니

不死??淚眼辛 죽지 못한 외로운 신세 눈물이 절로 나네.

異敎喧?今漸熾 이교가 지금 점점 번지며 떠드는데

正論闢廓更誰人 그를 물리칠 정론을 누가 다시 펼 것인가.

寥寥獨我成?? 나는 홀로 외로이 벙어리가 되었는데

濟濟?賢說道眞 많은 현자들은 참된 도라 말한다오.

豈意三韓君子國 생각이나 했겠는가 삼한의 군자 나라가

居然化作竺西民 금시에 천축국과 서양으로 변할 줄을.43)

 

한편, 신체인(申體仁)은 1791년 안정복, 이헌경, 조술도(趙述道) 세 사람의 서학 비판 논저를 읽고 이를 보완하는 입장에서 <천학종지도변>(天學宗旨圖辨)을 지었다. 이 글에서 신체인은 천주교가 얼핏 보면 의리에 맞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의리에 위배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신봉할 가치가 없다고 강조하며 강력하게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이헌경의 <천학문답>은 후대 서학 비판 저술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저술이라 생각한다.

 

 

5. 結論

 

지금까지 이헌경의 <천학문답>(天學問答)을 검토하여 그의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살펴보고,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이헌경의 위상을 논하였다. 앞선 논의를 정리하여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이헌경은 자신의 종대부였던 이명시(李命蓍)에게 학업을 전수받으며 가학(家學)을 통해서만 가르침을 받고 별달리 외부의 스승에게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17세기 근기 남인 학자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박학(博學) · 다독(多讀)의 분위기 속에서 서학서들을 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학서를 접하고는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었던 듯하며, 나아가 서학이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음을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이헌경은 관직생활로 접어들면서 채제공 · 목만중 등과 돈독하게 교유하였으나 진산사건 이후에는 채제공과 멀어지면서 목만중과 더불어 반서학적 입장을 한층 강화해 나갔다. 특히 그는 남인 계열의 인사였지만 당파를 넘어 소론 계열의 인사였던 홍양호와도 교유하며 반서학적 입장을 공유하고 18세기 서학 비판의 핵심 인물이었던 안정복과도 서신을 주고받고 각자의 서학 비판 저술을 교환해 보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의 저술 <천학문답>은 총 2,260자 분량의 7개 항목으로 구성된 문답 형식의 서학 비판 저술로서,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서학의 속성을 드러내고 이를 배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서학의 그릇된 실질을 비판하며 서학은 불교보다도 보잘것없는 학설이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이헌경은 서양의 과학 기술이나 천문 역법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서학 과학 기술이 뛰어난 이유는 중국의 고대 제도를 잘 활용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 절하한다. 더욱이 마테오 리치에 대해서도 유람을 하다가 혹은 표류를 하다가 온 것이며, 서학 관련 저술들은 명말청초 호사가들이 해괴한 이야기를 만들어 꾸며낸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헌경은 서학을 금할 방도로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고 그들의 학설을 뽑아내려는 행동과 더불어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쳐 다시금 중화의 도를 제고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이헌경의 이러한 주장을 보면 과연 그가 서학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식견과 이해가 있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하지만, 이보다 우리가 주목하고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성호우파 계열과는 관계없이 근기 남인 계열 안에서 서학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무리의 인사들이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헌경과 목만중으로 대표할 수 있는 이 인사들은 천주학이 청나라는 물론 조선에까지 유입이 되어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을 매우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닌 반서학적 입장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을 초월하여 무조건적으로 거부되고 부정되어야 하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헌경의 <천학문답>에서는 천주학에 대해 일관되게 비난과 폄하 조의 발언으로 점철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서학서는 모조리 불태워야 하는 대상이고, 천주학의 학설을 모조리 뽑아내고 축출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들은 진산사건 당시에는 천주교도에 대한 강경한 배척 활동을 벌이고, 이후 신유박해 때는 공서파의 핵심인물로 자리 잡게 만든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건대, 이헌경은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 서학 비판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인하고 직접 실행으로 옮겼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천학문답>은 후대 서학 비판 저술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1.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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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鼎福, 《順菴集》, 한국문집총간 229.

丁若鏞, 《與猶堂全書》, 한국문집총간 281.

洪良浩, 《耳溪集》, 한국문집총간 241.

 

2. 논문 및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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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우근, 《星湖李瀷硏究 - 人間 星湖와 그의 政治思想》,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 이봉규, <유교적 질서의 재생산으로서 실학 - 반계와 성호의 경우>, 《철학사상》 12,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1.

 

2) 홍이섭, <실학의 이념적 一貌 : 하빈 신후담의 <서학변>의 소개>, 《인문과학》, 연세대학교인문학연구원, 1957. ; 이원순, <조선후기 실학자의 서학의식>, 《역사교육》 17, 역사교육연구회, 1975. ;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59~135쪽. ; 차기진, 《조선 후기의 西學과 斥邪論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51~264쪽. ; 강병수, <하빈 신후담의 학문과 사상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금장태 외, 《순암 안정복의 서학 인식과 교육사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2. 등등

 

3) 김선희 역, 《하빈 신후담의 돈와서학변》, 사람의무늬, 2014의 <해제> 참조.

4) 서종태, <順菴 安鼎福의 <天學設問>과 <天學考> · <天學問答>에 관한 연구>, 《교회사연구》 4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5) 심경호, <18세기 중 · 말엽의 南人 문단>, 《국문학연구》 창간호, 태학사, 1997.

 

6) 번암 채제공의 천주교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대해서는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196~236쪽 참조.

 

7) <與嶺中士人論文書>,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268쪽. 僕自幼及長, 不就外師, 惟大人之訓敎, 是奉是遵.

8) 박광용, 《조선시대 탕평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30쪽.

9) <寄安順菴鼎福書>,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284쪽. 弟自童孺時, 已爲憂歎, 輒料其天主之說, 終必誤蒼生.

10) 李升鎭, <家庭聞見錄>,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507쪽. 府君自弱冠時, 已憂西學之誤蒼生, 每嘗憂歎.

 

11) 그는 1760년 모친, 1764년 장녀, 1764년 장인, 1767년 6촌형 홍경(弘慶), 1768년 부친, 1771년 동생 한경(漢慶), 1772년 아들 정린(廷?), 1777년 부인까지 모두 16년간 무려 8차례의 상을 당하였다.

 

12) 박희인, <餘窩 睦萬中의 시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대응양상>, 《한국한시연구》 19, 한국한시학회, 2011, 260쪽.

 

13) 李升鎭, <家庭聞見錄>,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504~505쪽. 時權姦國榮以知申事直宿衛所, 府君晨夕赴公, 直過宿衛所前而一不訪見, 國榮又送人致其款洽之意, 欲與相識, 府君終不往謝, 以是國榮大憾之, 竟有北邑左遷之行.

 

14) <送洪侍郞良浩燕?之行序>,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407~408쪽. 今聞爲天主之學者, 盛行於中國, 雖未得其說之詳, 其本出於西洋國. … 中州之人驟聞而創見之, 無不嗟異酷信. ??然流入我國, 我國學者論天人性命之理者, 往往以其說爲宗, 而古聖人賢人之論, 幾乎弁?而不知省, 噫?其惑之甚也.

 

15) 洪良浩, <爾雅軒記>, 《耳溪集》, 한국문집총간 241, 218~219쪽.

 

16) <答權旣明書 甲辰十一月二十二日> 《順菴集》 卷1, 《順菴覆?稿》 卷10. ; <答權旣明書> 甲辰十二月初三日> 《順菴集》 卷6, 《順菴覆?稿》 卷10. ; <與權旣明書 甲辰> 《順菴集》 卷6, 《順菴覆?稿》 卷10.

 

17) <與樊巖書> 丙午 《順菴集》 卷5, 《順菴覆?稿》 卷11.

 

18) <答李艮翁獻慶 丁未八月> 《順菴覆?稿》 卷13. 憶昔丁巳秋, 族弟廷益座上, 雖奉英眄, 稠廣中不能一語相接, ?今五十餘年矣, 台能記之否. … 不幸近者少輩有天學之機, 聞台立說而斥云, 其果然否. 天下之事變無常, 不意吾?有此事, 是果天之所廢其心, 豈不知其非, 而甘心惑溺者, 比亦西士所謂魔鬼之幻弄而然耶. 若台兄居前列者, 不深斥之, 有誰斥之. 或從便示及, 幸甚幸甚.

 

19) <寄安順菴鼎福書>, 《艮翁集》, 한국문집총간 234, 283~284쪽. 俯索天學問答, 果嘗有所論著. 近聞爲此學者, 見而笑之, 以爲全不知天學妙處. … 嚮所謂天學問答及送別燕使序, 別紙錄呈, 俯賜詳覽, 回敎其可不可也.

 

20) <答艮翁李參判夢瑞獻慶書 己酉> #《順菴集》 卷5, 《順菴覆?稿》 卷14. 俯示天學問答, 莊玩重複, 辭嚴義正, 文章簡潔, 不任欽賞. … 弟果有斥此學文字, 徒取人言而無其效, 旋自悔恨. 後來正本嶺儒借去, 初本在此, 故玆以奉呈, 可知其?矣. 盛撰留此, 與鄙草同付一?, 以爲藏?之地耳.

 

21) 고려대학교 한적실 [청구기호 : 신암 C16 A14].

 

22) <天學問答> 1項. 客有問於爾雅軒主人曰 : 頃年, 洪尙書漢師之聘於燕也, 聞子作序送之, 盛斥天主之學, 其時, 天主之書, 雖行於中國, 中國之人不甚尊信, 且不流布於東方, 則子何以逆料其禍天下而斥之嚴耶. 其後數歲, 其書果來東方, 東方之人, 往往酷信而誦慕之, 其勢??然將日熾而月盛, 子其有先見者乎.

 

23) <天學問答> 1項. 聖人之學, 理旣平易, 而用工辛苦, 異端之學, 語甚新奇, 而用工徑捷. 心?也, 故每憚辛苦之工, 業惰也, 故喜趨徑捷之地. 老氏之無爲, 佛家之頓悟, 適中其好新喜捷之心, 故?之者甚衆, 遂使學者眩於趣捨. … 當列於大禹 · 孟氏之下, 而自夏運漸衰, 夷禍益熾之後, 有西河毛奇齡者, 譏?朱子, 不遺餘力, 其徒漸盛, 朱子之言語文字, 皆爲此輩所非議. … 天主之學, 適倡於此時, 吾固知天下之人, 必將?粮而躍馬矣. 其爲書, 豈止行於中州, 而不傳於東土乎. 行於一時, 而不禍於天下後世乎.

 

24) 천기철, <正祖朝 詩經講義에서의 毛奇齡 說의 비판과 수용>,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25) <天學問答> 2項. 客曰 : 天主之學, 雖甚駭異, 書曰 : 惟皇上帝, 降衷于下民. 作善降之百祥, 作不善降之百殃. 詩曰 : 上帝臨汝, 無貳爾心. 此言何謂也, 天主之學, 實本於此, 則子何斥之甚也.

 

26) <天學問答> 2項. 天之主宰命之曰上帝者, 古聖人尊天之辭. … 在事物則當行之理, 是上帝也, 在人心則所賦之性, 是上帝也. 《大學》之止至善, 乃所以順上帝也, 《中庸》之率性, 乃所以事上帝也. 安有耳目口鼻, 可以圖像, 魂魄精爽, 可以廟祀乎. … 今也, 圖像以明之, 殿宇以嚴之, 使上帝之尊, 下同一鬼, 其爲慢天褻天, 孰甚焉. … 而特以別種妖魔之性, 挾其細?小慧之智, 敢於聖學之外, ?出奇僻之論. 於是天堂地獄之說, 蹈襲於佛家, 嚴畏上帝之論, 依據於經傳, 星曆推步之學, 推演於璇衡.

 

27) <天學問答> 3項. 客曰 : 佛氏誠誕妄, 而天主之學, 專心奉天, 勸人爲善, 賢於佛氏, 不亦遠乎.

 

28) <天學問答> 3項. 否否. 釋迦, 本夷狄之人也. 夷狄之人, 貪而喜殺, 故釋迦倡爲地獄之說, 恐?而禁制之, 雖以虛僞?誘, 見斥於先儒, 原其心則出於勸善. 禪家寂滅之學, 便同槁木死灰, 其弊至於絶倫亂俗, 而本其意則在於澄慮, 雖以是壞人心禍天下, 而猶不若天學之專事妄誕, 實無所據也. 佛老陷天下於夷狄禽獸, 天學溺天下於?魅??. 夷狄猶是人類, 禽獸亦有形之物, 比之?魅??, 固有間也.

 

29) <天學問答> 4項. 客曰 : “我國治敎休明, 士?克正. 天主書出來之後, 臺閣斥之, 司寇禁之, 雖有一二?誤之人 今皆釋然改悔, 其學更安所?於世, 子之爲慮無已過乎.”

 

30) <天學問答> 4項. 其論十二重天則信之, 其論五大州則信之. 高談天人之際者, 莫不以其說爲眞, 一句一話, 曾不彷彿於程 · 朱所論, 而攘臂大言, 略無顧忌. … 苟知爲惡木與狂流, 則何不伐其根而杜其源乎. 盡信其書, 而獨斥其天主一說, 則彼必有辭, 我無以自解. 今也, 盡焚其書, 盡黜其說則可也. 不然, 今雖斥之, 終必信之, 寧有近脂膏而不浸漬, 邇燎火而不灼爛者乎. 吾見其日益熾蔓, 未見其?絶也.

 

31) <天學問答> 5項. 客曰 : 西洋推步之學竗, 天下曆家皆用其法, 此等處其將盡斥之乎.

 

32) <天學問答> 5項. 西洋人雖善推步, 不過因羲 · 黃 · 堯 · 舜之舊法, 敷衍爲說, 雜之以誕妄妖幻之辯而已. 若無羲和閏法, 帝舜璇衡, 則渠安能範圍天地, 曆象日月乎. 西洋未通中國之前, 司馬遷 · 壺遂等作大初曆, 唐一行立歲差法. … 設使西洋推步之學, 賢於中國, 僅明一曲, 固不足貴. ?其學本不出於中國曆法之外乎.

 

33) 이에 대해서는 노대환, <조선후기 ‘西學中國源流說’의 전개와 그 성격>, 《歷史學報》 178, 역사학회, 2003. 참조.

34) <天學問答> 6項. 客曰 : 西洋去中國九萬里, 開闢以來所未通, 而利瑪竇始通之, 雖未爲聖智, 獨不爲神異之人乎.

 

35) <天學問答> 6項. 利瑪竇之來, 果欲壯遊者乎, 抑航海遇風而漂者乎, 是未可知也. 唐時遣玄?求佛經於西域, 則好事者因之爲西遊記, 宋時宋江作亂, 張叔夜討平之, 則好事者因之爲水滸傳. 中國多才喜事之人, 固多如此之習矣. 吾意此等輩人因利瑪竇之來, 假托絶國之人, 創出荒誕之辯, 連編累帙, 至於汗牛. 上以抗儒書, 下以敵佛經, 要以玩世愚弄, 自騁其弔詭而已. … 必是明末淸初輕薄迂怪者所爲也.

 

36) <天學問答> 7項. 客曰 : 天主之書, 遍天下, 未易盡焚, 將以何術而禁之也.

37) <天學問答> 7項. 不過明吾道以敎之耳. 日暮而燐出, 天陰而狐嘯. 吾道素明, 視若坦路, 則左道之惑, 邪徑之走, 何足慮也.

 

38) 최동희, 《西學에 대한 韓國實學의 反應》,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126쪽. *초기연구에서 이헌경의 <천학문답>에 대한 언급은 매우 소략하였지만, 이것이 향후 이헌경과 그의 저술에 대한 연구가 중요치 않은 것처럼 인식하게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듯하다.

 

39) <與權旣明書 甲辰> #《順菴集》 卷6. *참고로 《順菴覆?稿》 卷10에는 ‘권기명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 사흥에게도 겸하여 보내다’[與旣明第三書 兼呈士興]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40) 睦萬中, <從心錄>, <述感更疊>, 《餘窩集》, 한국문집총간 속집 90, 143쪽.

 

41) 丁若鏞, <貞軒墓誌銘>, 《與猶堂全書》, 한국문집총간 281, 325쪽. 厥明年辛酉春禍作, 臣家煥瘦于獄以死, 臣基讓謫端川, 臣鏞謫?. 是年冬, 惡人睦萬中 · 洪樂安 · 李基慶等用事, 追奪臣濟恭爵, 復議臣家煥罪請加律.

 

42) 洪良浩, <哀艮翁李京尹獻慶>, 《耳溪集》, 한국문집총간 241, 166쪽.

43) 安鼎福, <挽艮翁李判尹獻慶>, 《順菴集》, 한국문집총간 229, 359쪽.

 

[교회사 연구 제50집, 2017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조지형(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박사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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