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종교철학ㅣ사상

예수회수사들의 과학적업적 3

스크랩 인쇄

김철빈 [ssk5762] 쪽지 캡슐

2017-08-13 ㅣ No.335

 

1908년 프레데릭 루이스 오덴바흐Frederick Louis Odenbach(미국 지질학의 선구자 : 1858-1933) 신부는 예수회 대학과 아메리카 전역의 대학 광역화시스템far-flung system이 지진관측소의 네트워크 탄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다. 이것은 결국 예수회 지진국이 되었다. 예수회 수도회의 고위교육기관의 교장이면서 아메리카 예수회 대교구장이었던 오덴바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다음 해에 실행에 옮겨 15개의 지진계를 구입, 예수회 교육기관에 배포하였다. 각 지진관측소는 데이터를 수집하여 클리블랜드에 있는 중앙관측소에 보냈다. 그곳에서 데이터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국제지진센터로 전해졌다. 그리하여 예수회 지진국이 태어났다. 예수회 지진국은 “동일한 기계를 갖추고 대륙적 규모로 확립한 첫 번째 지진학적 네트워크”로 통한다(Augustin Udias, S.J., and William Suauder, "Jesuits in Seismology," Jesuits in Science Newsletter 13 (1977); Benjamin F. Howell, Jr., An Introduction to Seismological Research: History and Develop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31-32. 지진학에 대한 예수회의 연구를 더 알고 싶으면 North America, see Udias, Searching the Heavens and the Earth, 103-24를 참고 할 것).

 

The Reverend James B. Macelwane

with Sprengnether Vertical Seismometer.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예수회 지진학자이며 가장 존경 받는 과학전문가의 하나인 매클레인J. B. Macelwane 신부는, 1925년 예수회 지진국을 재편성하고 활기를 띠게 만들었다-예수회 지진협회로 세인트루이스대학에 위치하였다. 뛰어난 연구가 매클레인 신부는 1936년 미국에서 첫 번째 지진학 교재인 『지진학 입문Introduction to Theoretical Seismology』을 편찬하였다. 그는 미국지질학회와 미국지구물리학연합의 회장을 지냈다. 1962년 미국지구물리학연합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훈장을 제정하여 예외적인 젊은 지구물리학자의 연구를 발굴하여 오늘날까지 그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천문학에서도, 성직자들은 증거를 따르기보다는 자신들의 선입관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어느 정도의 과학을 추구하였다는 인상이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우리는 이미 그런 제안이 얼마나 진실이 아닌지 보아왔다. 그러나 좀 더 많은 증거로 우리의 토론을 마무리 할 것이다.

 

Johannes Kepler(1571-1630)

Kepler solar system 1596.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는 예수회 천문학자들과 계속 서신을 교환했다. 그의 행성운동의 법칙은 아주 중요한 과학적 진보를 이루었다. 그의 삶의 어느 시점, 케플러가 망원경을 박탈당하는 등 과학적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굴딘Paul Guldin 신부는 반사망원경의 발명자인 자신의 친구 추키Nicolas Zucchi에게 망원경 하나를 케플러에게 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러자 케플러는 굴딘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사후에 출간된 그의 『꿈The Dream』에는 특별한 감사의 글이 있었다.

 

예수회의 성직자이며 덕망있고 학식 있는 그리고 친애하며 존경하는 굴딘 신부님께.

요즘 저는 당신 외에는 천문학 문제에 대해 함께 논의할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당신 수도원 사람이 제게 전달한 당신의 인사는 제게는 더 없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당신은 분명 제가 이 망원경을 사용하여 얻은 즐거움의 첫 번째 문학적 결실은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MacDonnell, 20, 54.).

 

케플러의 타원형 행성궤도 이론은 경쟁적인 여러 다른 이론들보다 간단하다는 이점이 있었다. 당연히 원형 행성궤도를 가진 프톨레마이오스(지구중심)와 코페르니쿠스(태양중심) 모델 둘 모두를 역행하는 이 행성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이퀀트equant(행성운동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가 고안한 고대의 기하학적 측정모형), 주전원, 이심원 등을 도입해야 했다. 또한 원형 궤도를 주장하는 브라헤의 시스템 역시 이런 복잡함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타원형 행성궤도를 주장함으로써 케플러는 이런 모델들을 매우 어설프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Ptolemy's equant model

그렇다고 케플러의 시스템이 옳은 것인가? 예수회 리치콜리와 그리말디의 학생이었던 이탈리아 천문학자 카시니Giovanni Domenico Cassini(Jean-Domonique Cassini로 불리기도 함)는 볼로냐의 멋진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Basilica of San Petronio에 있는 관측소를 사용하여 케플러의 모델을 뒷받침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교회가 오늘날까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제외한 모든 천문학에 공헌한 중요한 방법을 보았다. 볼로냐, 플로렌스, 파리, 로마에 있는 성당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전 세계적인 태양관측소의 기능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태양을 연구하는 더욱 더 정밀한 기구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한 모든 성당은 햇빛이 들어와 바닥에 있는 타임라인(자오선)을 지나도록 하는 구멍이 있다. 이 타임라인에 있는 햇빛을 따라 관찰함으로써 연구원들은 정확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고 춘분?추분점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부활절의 정확한 날을 계산할 수도 있었다.-이것이 관측소의주요 기능이었다.

Giovanni Cassini

카시니는 태양의 투사상의 측정오류가 0.3인치보다 더 크지 않을 만큼 충분히 정확한 기구가 필요하였다(태양의 像은 매년 5-33인치의 차이가 있었다). 망원경 이전의 기술은 그 당시 그런 정확성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다. 카시니의 연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에 있는 관측소였다. 만약 지구궤도가 정말로 타원형이라면, 두 개의 물체가 서로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즉 타원의 초점 중 하나에 있을 때, 성당 바닥에 나타나는 태양의 투사상은 더 커져야 하며 그것들이 점점 더 멀리 떨어질 때, 즉 다른 초점이 있을 때 더욱 작아져야 한다고 카시니는 제안하였다.

카시니는 마침내 1650년대 예수회 동료들과 함께 자신의 실험을 지휘할 수 있었고 그가 계획한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케플러의 타원궤도 주장을 확인하였다(Heilbron, Electricity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A Study of Early Modem Physics<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9>, 112에서 하일브론은 카시니가 발견할 것을 언급하기 위해 이와 관련한 다소 기술적 용어인 “이심률의 양분bisection of the eccentricity"을 사용한다. 이 말은 단지 타원형 행성궤도를 의미할 뿐이어서 때때로 그냥 ”이심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 학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므로 예수회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케플러 버전의 초석을 확인하였다.……그리고 교황권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에서의 관찰로 천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부수었다.”

그것은 결코 작은 발전이 아니었다. 사실 18세기 위대한 프랑스 천문학자 랄랑드Lalande의 말대로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에 있는 자오선의 사용은 과학 역사상의 획기적 사건”을 이루었다. 18세기 초의 어느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인하였다. “이 업적은 오랜 세월동안 인간정신의 영원한 기쁨을 위하여 기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태양과 별의 규칙적인 운동을 아주 정확하게 흉내낼 수 있다.” 가톨릭 성당이 과학발전에 그런 중요한 공헌을 할 것이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런 성당 관측소들은 과학발전을 든든하게 도왔다. 1655년과 1736년 사이,천문학자들은 산 페트로니오 대성당 관측소에서 4,500여 개의 관찰을 할 수 있엇다. 18세기가 되어 관찰기계들이 향상되자, 성당 관측소들은 점차 퇴물이 되어갔지만, 그것들은 계속해서 시계 기증과 철도의 시간 조절에 사용되었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캠퍼스의 하일브론이 지적했듯이, “로마가톨릭교회가 중세동안 고대교육의 복원에서부터 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6세기가 넘는 동안 다른 어떤 기관들보다 천문학 연구에 재정적?사회적 후원을 해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왔듯이 과학에 대한 교회의 공헌은 천문학을 넘어 그 이상이다. 가톨릭의 신학적 아이디어는 처음으로 과학발전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중세의 사상가들은 현대과학의 첫 번째 원리의 일부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가톨릭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수학에서 기하학, 광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지진학 그리고 그 외 많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과학에 많은 관심과 업적을 보여주었다.

이 중에서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얼마나 될까?

얼마나 많은 서양문화 관련교재가 이것을 언급하고 있을까?

이런 질문이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그러나 기꺼이 교회에 감사하려는 최근의 몇몇 과학역사가들 덕분에, 진지한 학자라면 이제 다시는 종교와 과학 사이에 주장되어 온 적대관계에 관한 그 진부한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서양 유럽의 가톨릭 환경 속에서 현대과학의 등장은 결국 우연이 아니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778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