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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방문 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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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08 ㅣ No.897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

 

 

국문 초록

 

알렉산드로 발리냐노는 예수회가 파견한 두 번째 동인도 지역의 순찰사로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시작한 인도와 일본 선교의 토대를 다지고 중국 선교의 물꼬를 틈으로써 아시아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순찰사로서 험난한 아시아의 바다를 다니며 인도와 일본의 문화적인 차이를 깊이 인식했고, 아시아 선교의 베이스캠프를 고아에서 마카오로 옮겼으며, 이를 통해 일본과 중국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을 순찰사로서 또 선교사로서 세 차례 오가며,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일본 통일의 주역과 근대화의 일꾼들을 만남으로써 그들의 국제적인 움직임을 보게 되고 극동아시아 3개국의 국제 관계를 인식하게 되었다.

 

발리냐노가 인식한 조선은 중국의 동쪽 끝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한 유럽에 비견할 만한 우수하고 진보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며, 중국과 같이 강한 쇄국정책을 쓰고 있으며,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 열도에는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고, 히데요시 부대의 군종신부들을 통해 조선인 포로 대상의 개종이 있었으나 이후 일본교회의 운명과 함께 사장되고야 말았다.

 

전쟁을 통해 조선이 처음 만난 그리스도교는 일본군과 함께 온 야소회 혹은 기리시탄이었고, 선교사들은 불교 선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훗날 이벽과 이승훈 등 조선교회의 선각자들이 중국을 통해서 만난 그리스도교는 자(字)를 앞세운 천학(서학)이라는 이름에 유학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순찰사인 발리냐노가 있었다. 그의 허락에 따라 선교사들의 생활양식과 선포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교회의 설립이 세스페데스 신부 등 왜란 시기에 찾아온 일본의 군종 신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벽, 이승훈에 의한 18세기 초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중심에 발리냐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들어가면서

 

알렉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 S.I., 중국명 范禮安, 1539~1606)1)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 이후 인도, 일본, 중국과 그 주변국들의 선교 책임자로서,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방대한 아시아 지역 예수회 선교사들의 순찰사(Visitor)로 32년간 일했다.

 

그는 인도 선교의 뿌리를 내리고,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일본)를 향한 선교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했으며, 철통같이 닫힌 중국 선교의 물꼬를 트고 기초를 다졌다. 현지 문화와 관련하여, 서양인 선교사와 토착 일꾼들을 가능한 한 최선의 방식으로 양성하고 가르쳤다. 교의나 도덕에 위배되지 않는 한, 모든 방식으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도록 하였다.2) 연구하고 준비한 대로 세심하게 배려하는 가운데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했고, 토착 성직자를 양성하고 토착 교계를 설립했으며, 아시아의 길고 험한 바다를 내 집처럼 여기며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

 

1572년 발리냐노가 마체라타(Macerata) 콜레지움의 원장으로 있은 지 1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예수회 새 총장 에베라르도 메르쿠리아노(Everardo Mercuriano, S.I., 1514~1580) 신부는 발리냐노를 동인도 지역 순찰사로 임명하였다. 그의 나이 34살이었다. 순찰사는 총장 다음으로 높은 직책이었고, 그때까지 그 직책은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원들에게만 일임된 일이었다. 종신서원을 한 해 앞둔 나이 어린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에게 주어진 파격적인 인사였다. 발리냐노는 1573년에 종신서원을 하고, 그해 9월 20일 로마에서 밀라노로 출발, 7명의 예수회원들과 함께 제노바, 알리칸테를 거쳐 리스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574년 3월 21일, 인도와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되는 41명의 예수회원들을 이끌고 리스본을 떠났다.3)

 

이후 4~5년간 인도의 말라카에서, 중국의 마카오에서 순찰사 직무를 수행했고, 1579년 7월 25일 처음으로 일본의 규슈[九州]에 도착하였다. 그는 동인도 지역(India Orientalis) 선교의 수장으로서 인도와 일본의 순찰사 겸 선교사로 활동했고, 중국 선교에 관한 의식을 깊이 있게 함으로써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여 미켈레 루지에리(Michele Ruggieri, S.I., 중국명 ?明?, 1543~1607)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S.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를 중국에 파견하여 아시아 선교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였다.

 

본 연구는 델리아(Pasquale Maria D'Elia, S.I., 1890~1963) 신부가 증거 하는 바, ‘거인’4) 발리냐노, 근대 최초로 극동아시아에 파견된 가톨릭교회의 최고 외교관인 그가 조선을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관한 연구다. 그는 동인도 지역 순찰사로 있으면서 혼란스런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통일기에 접어든 일본 전역을 세 차례에 걸쳐 방문한 서양인 최고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통한 조선에 관한 정보가 어떤 것이었는지,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파견된 예수회 출신의 소위 ‘히데요시 부대의 군종 신부들’을 통해서는 또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선교지’의 범주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조선과 일본이 전쟁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는 명(明),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외교적인 정보들을 통해 발리냐노의 선교 정책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통찰한다. 조선교회의 설립 기원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이기도 하다.

 

 

1. 16세기 후반 아시아 순찰사로서 발리냐노

 

1534년, 바오로 3세의 칙령 Aliquum Petamus(<부분적 요청>)에 따라 인도를 중심으로 아시아 선교가 시작되고, 1539년 7월 8일, 고아 교구가 설립되어 예수회에 아시아 선교의 책임을 요청한 이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선두로 많은 선교사들이 투입되었다.

 

1552년 12월 3일 하비에르가 사망한 이후 리치에 의한 중국의 근대 선교가 시작되는 1583년 9월 10일까지, 약 30년간 아시아 선교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하비에르나 리치에 버금가는 60여명의 선교사들이 굳게 닫힌 중국의 문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1555년 이후 예수회 선교사들만 해도 23명이 투입되었고, 1556년부터는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조심스럽게 중국의 문을 두드렸고, 1575년 이래 아우구스티노회에서 2명, 그리고 1579년부터는 작은 형제회에서 23명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애썼다.5) 선교사들의 최종 목표는 중국이었지만, 그로 인해 극동아시아를 향한 바닷길이 선교사들의 자취로 물들었다.

 

발리냐노는 이런 여러 수도회의 경험과 어려운 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보다 신중하면서도 선견지명을 가진 파격적인 인물로 예수회 차원에서 내세운, 어떤 의미에서는 과감한 시도를 한 인물이었다. 그가 동인도 지역의 순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포르투갈 예수회는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와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것이 그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회가 발리냐노를 발탁한 것은 교회 차원에서나 외교 차원에서나 참으로 위대한 ‘신의 한수’가 아닐 수 없었다. 아시아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의 기세를 꺾고, 이전 시대에 남미에 주었던 포르투갈의 ‘포교관할권’(Padroado)을 불식시킴으로써 선교 활동을 식민지 정책과 분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발리냐노가 순찰사 자격으로 인도 고아(Goa)에 도착한 것은 1574년 9월 6일, 하비에르가 사망한지 22년 만이다. 일본 관구(Provincia)와 중국 부-관구(Vice-Provincia)의 순찰사라는 신분으로 왔다. 1568~1643년까지 이 지역 순찰사의 계보는 오른쪽 사진과 같다. (<사진 1> 오른쪽 : 1568~1643년, 일본 관구와 중국 부-관구의 순찰사 계보)6) 예수회의 ‘순찰사제도’는 예수회가 ‘선교 수도회’로서 갖는 ‘네 번째 서원’ 다음가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선교의 현장에서는 총장과 다름없는 직위로 이것 역시 즉각적이고 원활한 선교 활동을 위한 예수회 차원에서 고안한 혁신적인 제도였다. 소통의 수단이 오늘날과 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더욱이 아시아의 위험한 바닷길을 고려할 때, 선교의 현장에서 선교사들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대응해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7) 발리냐노는 예수회가 순찰사제도를 도입한 이래 두 번째 순찰사로 파견되어 1574년부터 마카오에서 사망하는 1606년까지 32년간 그 자격을 유지하며 아시아 선교의 총책임을 맡았다.

 

한편 발리냐노가 특별히 신경을 썼던 일본 선교와 관련하여, 일본 예수회 선교센터 수장들의 계보는 왼쪽 사진과 같다. (<사진 2> 왼쪽. 일본 예수회 선교 원장, 1549~1643)8) 눈여겨볼 것은 네 번째까지는 ‘원장’(Superior)이라는 직책이 있고, 다섯 번째부터 ‘부관구장’(Vice-Provincial)이라는 직책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후 일본교회는 1643년까지 부관구장과 관구장(Provincial)이 계속해서 번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혼란스런 일본교회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수장들의 거주지와 최후 상황도 재임기간 끝에 괄호 표시로 간략히 적혀 있다. 가령 8번째 데 카르발호 신부(Valentin de Carvalho, S.I., 재임 1611~1617)는 관구장으로 1614년 이래 마카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로드리게스 신부(Jeronimo Rodrigues, S.I., 재임 1614~1617)는 부관구장으로 나가사키에서 사망하였다. 열 번째 파케코 신부(Francisco Pacheco, S.I., 재임 1621~1626)는 다시 관구장 신분으로 순교했고, 데 쿠로스 신부(Mateus de Couros, S.I., 재임 1626~1632)는 부관구장 신분으로 정확한 사망 장소는 모르지만 1633년 일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세 번째 원장으로 있었던 프란치스코 카브랄(Francisco Cabral, S.I., 1528~1609)은 선교방식에 있어 발리냐노와 정반대의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발리냐노에 의해 가스파레 코헬료(Gaspar Coelho, S.I., 1530~1590) 신부로 교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발리냐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인도 고아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인도의 모든 섬들을 돌아보고 선교사들과 선교지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꼼꼼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자괴감에 빠진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소심한 선교사들을 고무하고, 겁 많은 선교사들을 격려하며, 그들의 활동에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발전된 미래를 예견하며 새로운 선교사들을 준비시켰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평화적으로 건설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1575~1577년 처음 2년간 발리냐노는 ‘성 토마스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르는 10만 명이 넘는 네스토리우스인들을 가톨릭교회로 인도했다.9)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이 선교에 치명적이라는 의식을 하는 가운데 무엇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를 판단하여 할 수 있는 것부터 실행에 옮긴 매우 현명하고 진일보한 행위로 발리냐노 선교의 전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지역 순찰을 마친 발리냐노는 그제야 멀리 일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일생동안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자기를 아낌없이 내어준 나라였다. 그는 일본을 시작으로 극동아시아 선교를 위해 일생의 거의 반을 험난한 아시아의 바다에서 보냈다.10) 순찰사로서 발리냐노가 일본을 다녀온 것은 모두 세 차례였다. 처음에는 고아에, 나중에는 마카오에 아시아 선교의 베이스캠프를 두고 아시아 전역을 순찰하였다.

 

첫 번째 방문은 1579년 7월 25일부터 1582년 2월 20일까지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통치를 하고 있었고, 그의 사망도 지켜보았다. 동시에 발리냐노는 일본 순찰 중에 마테오 리치를 불러 중국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1차 일본인 사절단을 로마에 보낼 것을 노부나가에게 제안했다.11) 두 번째 방문 시기는 1590년 7월 21일부터 1592년 10월 24일에 있었다. 그때는 인도 총독이 일본에 보내는 대사 자격으로 갔다. 마지막 세 번째는 1598년 8월 5일부터 1603년 2월 11일까지 있었다. 그 시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사망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권력을 잡았다.12)

 

1-1. 첫 번째 일본 방문과 오다 노부나가

 

발리냐노가 순찰사로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당시 45세)가 통치를 하고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당시 43세)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당시 37세)가 보좌하고 있었다.

 

발리냐노가 순찰사로서 일본 방문에서 목격한 것은 예수회원들 간에는 물론,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유럽인들에 대한 일본인 협력자들의 불만, 서로에 대한 신뢰 부족, 세례 후 신앙 재교육 문제 등 해결해야 할 것들이 산적하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일본 선교센터의 세 번째 원장으로 있었던 프란치스코 카브랄(재임 1570~1581)13)의 독선적이고 일방통행적인 선교방향으로 인해 선교사들 간 혼란은 물론 서양인 선교사와 일본인 협력자들 사이에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카브랄과의 상반된 선교 정책은 발리냐노로 하여금 아시아 선교의 방향을 확정 짓는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게 했다.14)

 

발리냐노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풍습과 관습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1년 넘게 잘 되지 않는 것들, 가령 바닥에 앉는다거나 젓가락을 사용하여 식사를 하는 등의 현실적인 것들은 심리적인 부담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한 결단을 내렸다. 복음화의 활성을 위해 일본 선교지를 시모(Shimo, 下島), 붕고(Bungo, 豊後), 미야코(Miyako, 宮古市), 세 지역으로 분할하고,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콜레지움을 설립하였다. 일본인 귀족 자녀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 유럽에 파견할 생각을 했다.16) 그리고 선교 방법론에 있어 상반된 견해를 가진 프란치스코 카브랄을 해임시키고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 S.I., 1530~1590)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리냐노의 첫 번째 일본 방문에서 가장 의미 있게 간주되는 것은 오다 노부나가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노부나가는 예수회원들의 그 동안의 활동에 대해 치하했고, 발리냐노는 그를 통해 적응주의 선교방침을 더욱 명료하고 확실하게 세우기로 결정했다. 아시아의 문화에 적응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인들의 마음에 자리 잡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가부장적인 사회 시스템과 굳이 다른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그들만의 강력한 신념(혹은 종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노부나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민첩했고, 1540년대 말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들과 그들을 돕고 있던 상인들을 통해 서양의 대포를 알았고, 그것이 전투에서 매우 유용할 것임을 깨닫고 다른 다이묘들보다 앞서 철포부대를 조직하고 전술을 개발했다. 그가 만든 철포부대를 발판으로 전국시대 전투 양상을 바꾸었고, 강한 중앙집권적인 행정 체계를 갖춘 힘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발리냐노는 일본이 서양을 필요로 하는 것은 대포지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대포를 위해 통역관으로 선교사들의 입국을 허락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당시 일본 수도인 교토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다. 오르간티노(Organtino Gnecchi Soldi, S.I., 1532~1609)17) 신부는 일본 문화와 일본인들에 대한 카브랄 신부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해 온 인물로 발리냐노의 교토 방문을 반갑게 요청했고, 그곳에서 발리냐노는 야심 있는 권력가로 일본의 여러 지역을 손에 넣으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노부나가를 만났다.18)

 

노부나가와의 만남에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S.I., 1532~1597)19) 신부가 통역자로 나섰다. 노부나가는 발리냐노의 큰 키와 지적인 눈매와 인품에 매우 놀랐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일본사에서 처음으로 비중 있는 유럽 대사의 방문이었고, 분위기는 대단히 좋았다. 발리냐노는 콜롬보(Cristoforo Colombo, 1451~1506)를 시작으로 유럽인들에 의해 발견된 세계의 지리가 포함된 세계지도를 노부나가에게 선물했고, 일본인 귀족 자녀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꾸려 유럽에 보낼 것을 제의했으며, 노부나가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노부나가는 유럽 국가들의 통치 기술에 대해 물었고, 발리냐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에 근거한 국가 체계, 법적 구조, 법률의 적용과 권력 문제, 식민지로 새로 확보한 영토와 무기들을 소개했다.

 

이 무기들은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그에 알맞게 사용합니다. 어떤 것들은 수 세기 동안 일본에서도 사용되어온 것입니다. 그 외 소총이나 대포처럼 새로운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최근에 일본에 들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0)

 

두 사람의 만남은 진솔했고, 노부나가는 순찰사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했다. 노부나가는 빠테렌 오르간티노를 자신의 자녀들에게 소개해 줄 만큼 선교사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순찰사를 대하는 것도 쉬웠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자기가 고안한 우마소로에[馬?え]21) 축제에 순찰사와 예수회원들을 초대하여 그들과의 친분을 공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회원들의 노부나가 정권에 대한 기대는 그의 죽음으로 얼마 가지 못했고, 그에 대해 아우구스토 루카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노부나가는 현명하고 신중한 순찰사를 극진히 환대했고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순찰사가 떠날 때 값비싼 병풍,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 등을 주었다. 병풍은 천황에게도 주지 않았던 귀중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순찰사의 노부나가 방문을 통해 (일본 선교에 대한) 큰 기대를 하게 되었고, 노부나가 역시 순찰사와 선교사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는 자신의 심복에 의해 암살당했고, 선교사들의 기대는 꺾이고 말았다. 그러나 설사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오만함 때문에 선교사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22)

 

노부나가 정권과 일본 예수회 선교사들 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세간의 비평은 이렇게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고, 이것은 교회 입장에서는 ‘신의 개입’이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노부나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오다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23)로 함축된다. 즉, 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대한 원대한 포부는 90% 밖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는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르네상스 시기 서양에서 발명된 각종 기기들을 발판으로 일본사에서 근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누구보다도 컸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오다는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죽여라’, 도요토미는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억지로 노래하게 하라’, 도쿠가와는 ‘새가 노래하지 않으면 노래할 때까지 기다려라!’”24) 한 마디로, 오다는 오만하고 잔인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프로이스는 오다 노부나가를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큰 키에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목소리는 꽤 큰 편이고 언제나 무예를 좋아하여 천하고 상스럽다. 의리가 있고 자비를 베푸는 것을 좋아한다. 오만하면서도 명예를 존중한다. 결단에 재능이 있다. 전술에 치밀하지만, 정작 자기는 규율을 지키지 않고 부하의 진언은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중으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존경을 받고 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겸허하게 자기를 낮추는 일은 거의 없고, 자기 외의 대부분의 다이묘들을 경멸하고, 자신의 부하 다루듯 대한다. 이해력이 빠르고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神)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하여 이와 관련한 것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의상 종교를 법화종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조물주, 영혼 불멸, 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한다. 벌인 일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대화 중에는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25)

 

1-2. 두 번째 일본 방문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첫 번째 방문이 있은 지 8년 만인 1590년 7월 7일, 발리냐노는 마카오를 출발하여 그달 21일에 나가사키 항에 유럽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천정견구소년사절단을 동반하여 다시 일본을 찾았다. 이번에는 인도 포르투갈 총독의 대사자격으로 왔다. 그 사이에 일본의 통치권은 관백(?白, かんぱく)26)이 된 히데요시에게로 넘어갔고(1585년), 1586년부터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비롯하여 여러 수도회들이 일본에 진출하여 예수회와 경쟁하고 있었고, 1587년 히데요시의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27)에도 불구하고 예수회에는 ‘천정견구소년사절’로 인해 예외적인 관용이 적용되고 있었다.

 

1590년 발리냐노가 일본에서 느낀 최초의 것은 일본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시작한 일본의 오랜 전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가 확보한 영토는 다이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반드시 원래 영지와 전혀 다른 영지를 줌으로써 다이묘들과 영지의 전통적인 관계를 끊어버리는 정책(영지전봉정책)을 썼다. 이것은 영지란 다이묘들에게 권력을 유지시켜주는 힘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원래 영지를 떠나게 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의미했고, 자신의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몰락한 다이묘와 호족, 일반 무사 등이 속출했고,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하여 그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것은 곧 이웃나라 조선을 치는 구실이 되었고, 1592~1597년 기나긴 일본과 조선의 전쟁(임진왜란)을 의미했다.

 

발리냐노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8)

 

이 모든 상황을 통찰한 발리냐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히데요시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렸고 히데요시는 그가 무사히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순찰사는 1582년에 13~14세였던 천정견구소년사절단의 청소년들이 이제 청년이 되어 무사히 귀환하게 된 것을 보여주었다. 청년들은 관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슈 지방 그리스도인 다이묘들의 자녀들이었다. 그리고 로마와 리스본 등 서구에서 가져온 진귀한 선물들도 건넸다. 히데요시와 그의 측근들은 유럽에서 돌아온 4명의 일본인 청년들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청년들 중 한 사람인 이토 만쇼는 이 장면을 이렇게 썼다.“(관백을 접견한 자리에서) 우리는 로마에서 가져온 악기로 연주를 했는데, 그것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29)

 

순찰사는 히데요시를 접견한 자리에서 외국인 추방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관백은 특별한 이유 없이 문제를 회피하며 순찰사의 요구를 거절했고, 대신에 순찰사가 일본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허가해 주는 동시에 열 명의 예수회 신부들을 나가사키에 머물도록 허락해 주었다. 이런 불편한 요구와 거절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만남에 대한 분위기를 볼피 교수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매우 편안했다. 히데요시는 형식적인 옷이 아니라 편안한 옷차림으로 나와 발리냐노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청년사절단의 유럽 순회가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해 주었다. 순찰사의 품위 있는 태도와 예의범절, 아름다운 말씨, 자기에게 한 진귀한 선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30) 히데요시가 발리냐노 ‘옆으로 와서 앉았다’는 것은 그만큼 형식을 떠나 편안하게 그를 대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히데요시의 허가를 받고 순찰사는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방문했고, 현지에서 그는 일본인들의 정신과 나름의 그리스도교 문화를 일구고 있는 것을 보며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그들의 신앙수호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깊이 깨달았다.31) 특히 예수회 - 프란치스코회 - 도미니코회로 이어진 수도회들 간의 불화는 선교에 큰 걸림돌이 되었고, 선교자금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의 일본인 노예 매매에 이용당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저지해야만 했다.32)

 

1591년 7월, 발리냐노가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있을 때, 조선 사절단이 히데요시를 방문하여 접견을 기다리고 있었고, 일본은 조선침범을 위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나고야는 대륙 정벌의 베이스캠프가 되어 대규모 군함들이 속속 집결하여 닻을 내리고 있었다. 일본은 전국을 통일한 이후 자신의 힘을 어떤 식으로든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33)

 

발리냐노가 놀란 것은 한 사람의 독재자가 어떻게 그렇게 아무런 이견 없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많은 영주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통일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말이다.34)

 

1-3. 세 번째 일본 방문과 발리냐노의 일본 선교

 

발리냐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일본 방문은 이전의 두 차례 방문 때와는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595년 이후 발리냐노는 더 이상 동인도 지역의 순찰사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 선교에만 전적으로 투신할 수 있었고, 보다 자유롭게 일본 선교사로 올 수가 있었다. 일본의 상황도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통치하고 있었고, 탁발수도회들이 필리핀을 거쳐 일본 열도로 들어와 도처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회의 선교방식, 곧 발리냐노의 선교방식에 대해 큰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훗날 중국에서 일어나게 될 전례 논쟁의 전조로 보였다.

 

1598년 8월 5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4년 반을 있는 동안 발리냐노와 일본교회는 또 다른 교차점을 맞이하였다. 1597년에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프란치스코 수도회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고, 첫 그리스도인 박해를 시작했다. 그때 나가사키에서 26명의 순교자들이 나왔다. 그리고 이듬해에 히데요시는 사망했고, 일본군도 조선에서 철수하였다. 히데요시의 사망에 대한 선교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큰 짐을 내려놓는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고, 대놓고 환호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발리냐노는 선교사들에게 신중할 것을 요구하며, 자신의 세 번째 귀환을 몇몇 그리스도인 다이묘들에게만 알렸다. 그리스도인 다이묘들은 그를 크게 반겼고, 고니시 유키나가 아우구스티노는 성대한 환영식까지 열어 주었다. 일본에서 유키나가는 조선과의 전쟁영웅이며 예수회 선교 활동의 가장 큰 후견인이자 후원자였다.35)

 

히데요시의 죽음에 이어 일본 정계의 혼란이 끊이지 않는 동안에도, 많은 성당이 생겨났고 70,000명 이상의 개종자를 얻는 성과가 있었다.36) 1600년에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ヶ原, せきがはら)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1603년 에도(현재의 도쿄)에서 에도 막부(幕府, 쇼군) 시대를 열었다.

 

내란 중에 유키나가는 이에야스와 대척점에 있던 적장과 손을 잡았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이에야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광분으로 신자들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다이묘 유키나가를 사형에 처했다. 유키나가의 죽음이 그리스도교 전반으로 번질까 우려했으나 다행히 다른 신자 다이묘 구로다 요시다카[黑田孝高]와 그의 아들 나가마사가 이에야스 편에 있는 바람에 죽음을 면하고, 그 불똥이 그리스도인 전반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모든 다이묘들과 귀족들에게 그리스도교와 단절할 것을 명령했다.37) 그 바람에 1600년 이후부터는 대중 입교가 불가능해졌고, 이에야스의 신하 혼다 마사즈미를 비롯한 많은 다이묘들이 신앙을 버렸다. 그렇지만 그들은 신자들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교역을 계속해야 한다며 이에야스를 압박했고, 그 바람에 이에야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에야스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교회는 괄목할만한 신장세를 보였다.38) 여기에는 발리냐노가 체르퀘라 주교(Luigi Cerquera S.I., 1552~1614)를 대동하고 온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체르퀘라 주교는 나가사키에 주재하는 첫 주교가 되었고, 1614년 사망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전임 주교였던 마르티누스(Pedro Martinus, S.I., 1598년 사망)가 일본에서 박해가 시작되자 도착한 지(1596)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일본을 떠난 것과는 사뭇 달랐다. 발리냐노에게 있어 일본에 주교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현지인 성직자를 현지에서 배출할 수가 있게 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에 발리냐노는 현지인 성직자 양성에 집중할 수가 있었고, 그 덕분에 1601년 9월 22일, 나가사키에 새로 건립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일본인 사제가 서품을 받을 수 있었다.39) 발리냐노의 머릿속에서 현지인 성직자 양성은 점점 더 중대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지역교회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또 그동안 경험한 일본의 상황이 불안정하고 쉽게 그리스도교를 박해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빠른 시일 안에 현지인 지도자의 손에 교회를 맡길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은 현지인들이야말로 동족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자기를 감추고 스스로를 닫습니다. 쉽게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수도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사람들의 내면적인 생각을 잘 이해하기란 항상 매우 어렵습니다.40)

 

세 번째 방문에서 발리냐노는 처음 나가사키 수도원에 있다가 1599년 말 아마쿠사 콜레지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여러 차례 아리마[有馬]를 다녀왔다. 그것은 첫 번째 방문에서 느꼈던 바, 카브랄 신부의 선교방식에 따른 수도회 내부의 갈등과 그로 인해 야기된 선교 활동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이제는 사라졌고, 새로운 주교의 등장으로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오로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에만 투신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본교회의 상황을 “일본교회의 기원과 발전”41)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본교회의 약진은 이에야스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야스는 점점 그리스도교를 적대시했다. 거기에는 영국에서 온 윌리엄 아담스(William Adams, 1564~1620, 일본명 みうら あんじん, 三浦按針)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이 복음에 입각한 자비와 덕이 가득한 천국도 아니고, 빠테렌들의 고향이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그곳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희망을 가르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를 속이고 빼앗고 잔인하게 죽인다며 이에야스의 반그리스도교 감정을 더욱 부추겼다. 이에야스로 하여금 선교사들을 향한 적개심을 품는 데 고문 역할을 한 것이다.

 

 

2. 왜란 시기 선교사들이 전한 조선 관련 정보

 

발리냐노가 일본 선교에 투입되기 전 1570년 일본의 신자 수는 3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발리냐노의 신중하고 열정적인 통솔 하에 1582년 아리마[有馬], 오무라[大村], 히라도[平?], 아마쿠사[天草], 고토[五島], 시키(Sakitsu, 崎津), 메아코(Meaco, 京都)와 야마구치[山口], 붕고[豊後] 등에서 15만 명을 헤아렸다.42) 히데요시에 의한 추방령이 떨어진 이듬해인 1588년부터는 그리스도교의 공식적인 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발리냐노의 2차 일본 방문에 따른 활판 인쇄기의 도입으로 일본에서 문서 선교가 시작되어 신자 수가 약 22만 명에 이르렀다.43) 발리냐노가 일본을 떠나(1603년) 마카오에서 사망(1606년)한 이후에까지 그의 영향력은 계속되었고, 1613년에 50만 명에 이르는 신자 증가율을 보여주었다.

 

발리냐노가 아시아 순찰사로 있던 시기에 일본의 주변국들을 향한 근대 식민지배의 야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토 확장과 식민지화를 통한 야심은 선교사들의 업적과 활동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선교사들을 통해 얻은 각종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조선) 정복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일본군 장수 중 한 사람이자 주요 다이묘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명령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의 군대는 일만 팔천 명의 군인들이 거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사람들 중에는 조선군의 장수로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 발리냐노는 그리스도인 개종자들이 가장 많은 규슈 섬의 군도가 조선과 중국에 면해 있고,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범하기 위해 불러 모은 군함들이 이곳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그 기세가 충천해 있었고, 자신은 조선을 거쳐 중국까지 쳐서 지상 최고의 권력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할당된 히데요시 군대의 장수들 중에는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곳곳에 있었다. 히데요시가 침범을 앞두고 조선에 통보한 내용은 ‘중국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달라’는 것이었고, 발리냐노는 이제 막 루지에리와 리치를 파견한 중국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발리냐노는 일본이 중국을 향해 조선을 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44)

 

그 시기에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조선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 일본인들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그 왕국(조선)에서는 외국의 무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만약 일본으로 오려던 우리(포르투갈)의 범선이나 배가 바람이나 조류로 인해 방향을 잃고 항로를 벗어나 그들의 항구에 도착하면, 즉시 많은 무장 선박들을 가져와 전투를 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유나 변명조차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의 항구와 땅에서 완전히 내쫓아 버립니다.45)

 

일본의 조선 침략 이전에도 선교사들 사이에서 알려진 조선은 제한된 일본인들과의 무역 외에는 강력한 쇄국정책을 쓰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선교사들은 아직 가보지 않은 곳, 마르코 폴로의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땅 조선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히데요시 부대의 군종 신부로는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dio de Cespedes), 프란치스코 데 라구나(Francisco de Laguna), 레온 한칸(Leon Hankan), 로만 타무라(Roman Tamura) 신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와 한칸 신부만 19개월간 조선에 왔었다는 기록 외에 나머지 선교사들이 조선 땅을 밟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46)

 

1592년 3월 13일, 나가사키에서 발리냐노가 총장에게 쓴 편지에는 “그들은 이 사람(히데요시)에게서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말이 곧 법이라고 하며, 자기가 조선과 중국으로 가는 데 있어 무엇이건 어렵다고 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파괴하고 죽여 버립니다.”47)고 말하며 히데요시의 사람됨과 함께 조선침공의 기정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되고 1년 6개월여가 지난 1593년 12월 27일부터 약 1년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군의 군종 신부로 남해 연안에 체류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이 조선의 남해 지역을 무참히 삼키던 때, 조선에 온 것이다. 그가 조선에서 본 것은 히데요시 군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던 조선이었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 수천 명의 조선인 전쟁 포로들, 곧 모든 계층의 성인 남성과 여성,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강제 노역을 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했다.48) 세스페데스 신부의 활동을 조선교회의 설립과 연관시켰던 루이즈 데 메디나 신부는 “일부 한국의 역사가들 중에는 예수회와 고니시 유키나가 아우구스티노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며, “오늘날 한국에서 유키나가는 당시 일본의 조선침공의 책임자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대두되고 있어 그것이 세스페데스 신부의 활동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49) 데 메디나 신부의 이런 주장은 전쟁이라는 극적인 상황과 이후 일본교회사를 간과한 것으로 평가된다.

 

1594년, 알퐁소 디 루체나(Alfonso di Lucena, 1578~1614) 신부는 “선교사들은 한쪽에서는 밤낮없이 고해성사를 주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는데 조선인들은 세례를 통해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원했습니다.”50)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는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람이 속출했고, 따라서 부관구장 신부는 오무라에 말을 잘 하는(だんぎ, 談義) 조선인 도주쿠(dojuku, 看坊)51)를 파견하여 예수회 신부를 도와 조선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도록 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200여 명이 개종을 했고, 그들은 교리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신앙을 실천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루체나는 “일본교회 안에서는 초대교회처럼 포로건 자유인이건, 민족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두 하느님의 아들, 한 형제자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짧은 시간에 수천 마일에 걸쳐 그것도 우발적인 상황에서 해외에 자리를 잡은 조선교회를 견고하게 했습니다.”고 전했다.52) 루체나 신부의 ‘해외에 자리 잡은 조선교회’라는 말이 데 메디나 신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듯한데, 그것은 그만큼 조선인 포로들이 많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지, 다른 해석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조선의 입장에서 세스페데스 신부와의 만남은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의 선봉에 선 히데요시 군대의 군종 신부로 간주되지 조선교회 설립을 위해 조선에 온 선교사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그가 조선에 남아서 조선인들을 위해 활동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으로 돌아갔고, 조선은 여전히 그리스도교 선교의 영역에서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1594년 프란치스코 파시오(Francesco Pasio, 1554~1612)도 예수회 선교사들과 일본교회의 수장 페트로 고메즈(Pedro Gomez sj, 1535~1600) 신부가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돕는데 대해 자세히 보고했다. “고메즈 신부는 조선인들 가운데 일본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을 찾으라고 명했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인들 중에 일본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은 교리 공부를 하여 조선어로 교리를 정리했고, 그중에는 더 쉽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기도서를 번역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파시오 신부가 이 편지를 쓰던 1594년에 “2천오백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세례를 받았고, 그들은 하나같이 처한 현실적인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려고 했습니다.”고 전했다.53)

 

1595년 10월 20일, 프로이스가 나가사키에서 쓴 편지에는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 그리고 나가사키에는 일본의 전 대륙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이 전쟁에서 잡아 왔거나 조선에서 보내온 엄청난 인원의 조선인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54)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고메즈 원장의 사도직의 전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도주쿠가 문제가 아니라, 미래 조선인 성소자들을 위한 진정한 신학교를 논의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1580년 발리냐노 신부님이 아즈치[安土]와 아리마에 일본인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한 것처럼 말입니다. 젊은 예수회원들은 일본 전역에서 조선인들을 데리고 와서 교리교육을 했는데 1594년에 2천 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이듬해에 거의 모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았습니다.”55)

 

이렇게 일본에서 전교 활동을 하면서 임진왜란을 목격했거나 전쟁 사실에 대해서 들은 예수회 신부들은 여럿 있었다. 히데요시 부대의 군종 신부로 조선에 와서 조선인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다고 하는 세스페데스나 일본의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10대 소년들을 유럽으로 데리고 갔다 오는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에 밝았던 발리냐노나 조선 사람과는 전혀 접촉하지 않았지만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긴 프로이스나 당시 일본 예수회 신부들이 남긴 서신과 서적 등을 통한 각종 문건들은 서양의 조선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당대 일본 정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선교사들이었기에 그들이 조선에 대해 긍정적인 정보를 제공했을 리가 만무하다며, 선교사들의 조선 이미지가 부정적인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거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국제 정세에 밝았고, 선교사라는 신분상 일본 정계의 야심을 통찰력 있게 지켜보며 조선과의 전쟁에 대해 무모하고 무익한 전쟁이라며 우려하는 면이 더 컸다. 중요한 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을 직접 만난 것은 전쟁이라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였다는 것이다.

 

 

3. 발리냐노의 조선에 대한 인식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왜란 중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한 조선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지형학적인 위치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둘째, 조선도 중국처럼 쇄국정책을 쓰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다.

 

셋째,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인해 일본 열도에는 조선인 전쟁 포로들로 넘쳐났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다.

 

넷째,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전쟁의 종말은 일본의 야심이 조선에 의해 꺾이고, 일본군은 회군했다는 사실이다.

 

선교사들의 보고서가 순찰사의 손을 거쳐 로마로 전해졌다는 것을 고려할 때, 발리냐노가 일본에 있건, 마카오에 있건 조선에 관한 정보는 위와 같은 내용으로 발리냐노의 생각 속에 함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1580년 발리냐노가 순찰사로 처음 일본에 도착하여 자신의 관할 구역인 동인도 지역에 대한 모든 간략한 정보를 담은 《현황보고서》(Sumario)(이하 ‘수마리오’로 표기)56)의 제14장 중국 편에서 언급한 조선에 관한 생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수마리오에는 조선으로 추정되는 나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중국은 다른 모든 나라들, 특히 동쪽 지방(조선?)과 매우 다릅니다. 그곳(동쪽 지방)에 한 번 발을 디디면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곳은 유럽과 매우 흡사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유럽보다도 진보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57)

 

발리냐노는 조선을 중국의 한 지방으로 인식하는지, ‘동쪽’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레스(Orientales)를 대문자로 명기하여 단순한 지방이 아니라 별개의 지방 혹은 나라로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상이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수마리오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발리냐노는 두 번째 일본 방문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모두 히데요시의 야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에 대해 발리냐노는 1592년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58)고 하였다.

 

발리냐노의 이런 평가는 전쟁 초기부터 일본 예수회원들 사이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이 되었다. 두 번째 일본 방문에서 돌아온 발리냐노는 마카오에 있으면서 일본으로부터 오는 소식들을 모두 접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량살상을 자행하고 있었고, 거기에는 잘 훈련된 베테랑 군인들만 7만 명이 넘게 투입되었다고 한다.59) 발리냐노와 당시 예수회 신부들은 일본의 조선 침공에 대해 ‘부당한’(injusticia) 전쟁, 혹은 ‘이유 없는’ 전쟁으로 규정하고 히데요시의 무모한 정복욕을 비판적으로 보았으며, 전쟁의 결과 수많은 조선인들이 포로로 전락하여 일본으로 끌려왔다고 증언하였다.60)

 

발리냐노는 히데요시가 조선에 저지른 너무도 부당하고 잔인한 전쟁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선인들이 조선은 물론 바다와 일본 땅에서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일본인들 역시 육지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칼과 질병이 지나간 자리에 12년간의 박해가 또다시 일본교회를 위협했다고 보고했다.61)

 

발리냐노의 이런 관점은 비교적 일본 정부에 우호적이었던 프로이스조차 전쟁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도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프로이스는 “이 전쟁은 동기가 잘못된 것이었기에 중국인들을 굴복시키고 그들을 복종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면 잘못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략)… (그러나) 히데요시는 중국인들이 자신을 최고 통치자로 존경하고 인정해 주기만을 바랐습니다.”62)고 했다. 사실 이런 관점은 프로이스뿐만이 아니라 알퐁소 디 루체나, 페드로 고메즈, 프란치스코 파시오, 오르간티노 등 당시 일본에 있던 대부분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진 공통된 입장이었다.

 

예수회원들이 볼 때 일본의 조선 침략은 중국을 향한 명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희생자를 냈고, 일본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컸던 사안이었다. 전쟁은 이후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과 일본교회의 박해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전쟁은 결국 히데요시 개인과 그에게 동조하는 일부 권력자들의 야심을 위해 힘없는 이웃 국가를 친 황당한 전쟁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63) 히데요시의 야심에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과 그의 변덕에 따라 일본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은 것이 같은 맥락에 있다는 것이다.

 

발리냐노의 이런 관점은 어떤 의미에서는 데 메디나 신부가 주장하는 바, 전쟁과 조선교회의 설립이 연관되어 있다는 시각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히데요시의 권력 하에서 전쟁을 기화로 전개된 선교 활동은 이후 정권이 교체되면서 일본교회 자체의 존폐마저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조선인 전쟁 포로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가 지속적이지 못했고, 그것이 조선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지기에는 그 한계가 명백하다는 것이다.64) 그 이유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1594년 프란치스코 파시오 신부가 보고한 것에 따르면, 당시 일본 선교센터의 수장이었던 고메즈 신부가 조선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조선어로 교리서를 만들고 기도서를 번역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그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전혀 없다. 따라서 그 실현 여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발리냐노의 기록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만약에 실현되었다면 발리냐노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만큼 그의 기록에서 빠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1595년 프로이스가 쓴 편지에 따르면, 조선인 성소자들을 위한 신학교 건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그것 역시 실현 여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일본을 통해 조선인 개종자들이나 그 후손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했다는 기록도 없다. 오히려 이후 일본에 불어 닥친 박해로 일본교회마저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기에 그에 대한 기대도 무너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세스페데스 신부가 일본군의 군종 신부로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쟁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목자로 온 것이지 짓밟히는 조선 백성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목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세스페데스 신부 역시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했고 이후 일본교회의 명에 따라 즉각 일본으로 귀환하였다. 세스페데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조선인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조선교회의 효시라고 할 만큼 그 명맥이 이어지지 못했다. 완전한 단절은 교회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넷째, 일본교회는 ‘야소회’ 혹은 ‘기리시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8세기 말, 이벽과 이승훈 등 조선교회의 선각자들에 의해 수용되는 종교는 ‘서학’, ‘천학’에서 ‘천주’, ‘천주교’라는 이름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임란시기 조선에 들어온 ‘기리시탄’과 마테오 리치에 의해 중국화 된 ‘천학’(혹은 천주학)의 연관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서, 일본을 통해 들어온 기리시탄 선교사들은 선사 복장에 칼을 차고(일종의 ‘승병’의 모습) 있었고, 중국을 통해서 조선교회의 선각자들이 만난 서양인 선교사들은 유학자 복장에 문자65)를 통해서였다. 전쟁 시기에 예기치 않게 만난 기리시탄 선교사들이 짓밟히는 조선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리 만무다. 그러나 중국의 문화에 적응된 천주교는 자(字)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문자를 스승으로 대하는 조선에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발리냐노의 허락 하에서 리치에 의해 바뀐 중국 선교사들의 생활양식 덕분이다.

 

그러므로 일본에 투입되어 선교 활동을 한 방식과 발리냐노의 주도적이고 계획적인 지휘 하에서 일본선교를 반면교사 삼아 중국 선교를 진행함으로써, 그 여파가 조선교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리냐노가 거기까지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에 의해 처음으로 보편교회는 조선의 존재를 알았고, 중국의 문화권에 있으면서도 중국과는 전혀 다른 우수하고 진보적인 나름의 문화를 가진, 그러면서도 일본에 의해 침략당하고 있는 나라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나가는 말

 

발리냐노가 순찰사로 임명될 때 일본에는 20명의 예수회 선교사 신부들이 있었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2명의 일본인 사제를 포함하여 60명의 신부와 59명의 수사와 협력자(48명은 일본인)과 16명의 예수회 지원자들이 일본 예수회 센터를 채우고 있었다.

 

발리냐노가 세운 적응주의 선교66)에는 하비에르의 기록67)에 따라 서양의 학문, 곧 서학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 외국인 추방령이 잦은 상황에서 토착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건립과 토착 지도자 양성에 대한 교회의 인식 필요성, 극동 아시아 지역은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우두머리 한 사람을 개종시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등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극동 아시아는 중국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는 조선과 일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발리냐노가 생각한 ‘천정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1582~1590)의 유럽 방문 역시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만큼 일본에도 큰 감동을 안겨 준 기발한 발상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칭송이 자자했고, 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의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지만 양측 모두에게 큰 울림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발리냐노가 처음 의도했던 바, 일본인들에게 서양 세계를 알리고 서구 교회와 지도층 인사들에게 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는 의도는 결국 후자에 치중되는 경향이 더 컸다. 이것 역시 일본의 가부장적인 사회시스템이 갖는 한계였다.

 

이렇듯 당시 서양세계에 알려진 극동아시아에 대한 정보는 대단히 빈약했다. 특히 조선에 관한 정보는 너무도 적어서 보편교회 입장에서는 선교지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발리냐노가 접한 조선에 관한 최초의 정보들은 그의 신분을 고려할 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그에 의해 서양에 소개된 조선은 크게 세 가지로 함축할 수 있다. 조선은 중국의 동쪽 끝에 지형학적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수한 문화를 가진 나라로 중국의 문화권에 있으며,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있는 힘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발리냐노에 의한 조선 인식은 이후 리치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전개되는 선교방식과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의 군종 신부로 왔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조선교회의 설립과는 무관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발리냐노에 의해 일본을 통한 부정적인 그리스도교의 이미지가 상쇄되고, 중국을 통해 새로운 종교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에 의해 일본 선교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적응주의 선교 정책이 수립되고, 일본의 기리시탄이 중국의 천학으로 바뀌고, 선사(禪師)의 이미지가 유학자의 이미지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가, 그 자신이, 동인도 지역 서양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또 같은 문화권에 있지만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동아시아 국가들의 선교 수장으로서, 향후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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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1539년 2월 7일, 이탈리아 나폴리 근처 키에티(Chieti)의 귀족 잔바티스타 발리냐노(Gianbattista Valignano)와 이사벨라 데 산그로(Isabella de' Sangro)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18세 되던 1557년 2월에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으로 학위를 받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르네상스 운동으로 인한 환경 개선에 일조했으며, 키에티의 주교좌성당에서 법학 전공자로서 교회법 관련 봉사를 하다가 1561년에 다시 파도바대학으로 귀환했다. 다혈질적인 성격 탓에 1562년 프란체스키나 트로나(Francesca Trona)라는 한 여성과 말다툼 끝에 칼로 얼굴에 상처를 주었고,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밀라노의 대주교 가롤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 1538~1584)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후, 불미스러운 전과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총장 프란치스코 보르자는 1566년 5월 29일 수도회 입회를 허락하였다. 지원기를 마치고 콜레지움 로마눔에서 클라우디오 아콰비바(Claudio Aquaviva d'Aragona, 1543~1615)의 제자로 철학, 수학, 물리학 등의 학업을 계속하였다. 클라우디오 아콰비바는 훗날 예수회 총장이 되고, 두 사람의 우정은 이후 거의 일생에 걸쳐 깊이 이어졌다. Cf. Juan Ruiz de Medina, Alessandro Valignano nell'Estremo Oriente, in Bibliotheca Instituti Historici S.I., Alle origini dell'universita dell'Aquila. Cultura, Universita, Collegi Gesuitici all'inizio dell'eta moderna in Italia Meridionale, Roma, 2000, pp. 497~498.

 

2) 발리냐노는 포스트 - 르네상스맨으로서 서구의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표방한 적응주의 선교 정책을 수립하여 근대 아시아 선교의 새로운 개척자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보라. 졸고, <16~17세기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 정책 - 적응주의의 배경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17,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0.

 

3) Cf. Juan Ruiz de Medina, op.cit., p. 498.

 

4) 델리아 신부에 따르면 발리냐노는 모든 면에서 ‘거인’이었다고 했다. 그가 ‘거인’인 이유는 그의 안목이 거시적이고 그의 시야가 컸으며, 그가 시도한 것들이 모두 ‘원대’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체격도 컸다고 한다. 델리아 신부는 “큰 육체에서 큰 정신”이 나온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을 통일한 세 인물 중 첫 번째 인물로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おだのぶなが, 1534~1582)는 발리냐노를 처음 본 순간 그의 기골이 장대한 외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Pasquale M. D'Elia S.I., Il P. Alessandro Valignano (1539~1606) in I Grandi Missionari, Seconda Serie, Unione Missionaria del Clero in Italia, Roma, 1940, pp. 121~122. 그러나 무엇보다도 발리냐노를 크게 보는 것은 그의 도덕성이다. 거기에 그의 이상과 계획과 방식, 목표가 컸고, 그는 모든 난관을 가슴으로 극복했으며, 문제에 직면하여 용기와 결단력으로 근원적인 것들을 해결해 나가려고 했다. 모든 것에 있어서 그는 거시적인 안목과 선견지명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는 작거나 빈약하거나 초라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바르톨리도 발리냐노를 두고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 제왕과 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Bartoli, Opere, Torino, 1825, X, Giappone, I, c.46, p. 163 : Pasquale M. D'Elia S.I., Il P. Alessandro Valignano (1539~1606), pp. 122~123에서 인용.

 

5) Pasquale M. D'Elia S.I., Il P. Matteo Ricci Fondatore delle Moderne Missioni della Cina(1552~1610) in I Grandi Missionari, Prima Serie, Unione Missionaria del Clero in Italia, Roma, 1939, p. 129.

 

6) C.R.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and Los angeles, 1967, p. 446.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내용이다.

 

7) ‘순찰사제도’는 당시 커뮤니케이션의 상황을 고려하여 선교 현장의 문제점을 시급히 해결하고 수도회가 선교사들을 감시, 지시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일꾼’들을 돕는다는 의미가 크게 내포된 제도였다. 순찰사제도가 도입되기 전 하비에르가 동료이며 총장인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순찰사제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냐시오를 ‘자기 영혼의 아버지’로 생각하며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총장님께서 보내주시는 많은 편지들보다 이곳 콜레지움의 원장이 되실 분을 직접 뽑아서 보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되었건 총장님의 손으로 직접 뽑아 보내주시는 사람이라면 이 집에서 필요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냐시오의 측근에서 생활하던 사람을 마치 총장의 분신으로 생각하며 보내주기를 간청하는 대목이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Ultima Lettera di S. Francesco Saverio a S. Ignazio di Loyola)>, 김혜경 역, 2016년 2월 교회사연구자 모임 발표(Parma, Istituto Missioni Estere, 1923, in Bibl. Storica ARSI, Fx. 200, 17). 한편 순찰사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발리냐노의 편지는 260여 통이 넘는다. 장문의 편지도 여러 통 있어 전체 분량은 상당하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편지들을 각기 서너 통씩 똑같이 작성했다는 것이다. 분실, 화재 그리고 해상에서의 실종 위험을 고려하여 편지가 무사히 수신자에게 도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발리냐노는 이 모든 편지들을 수신자에 따라서 라틴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로 작성하였다. 그래서 그를 두고 ‘글 쓰는 순찰사’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Cf. Pasquale M. D’Elia, Il P.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in Grandi Missionari, Seconda Serie, Unione Missionaria del Clero in Italia, Roma, 1940, pp. 128~129.

 

8) C.R.Boxer,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erkeley and Los angeles, 1967, p. 445. 역시 이 책의 부록에 실린 내용이다.

 

9) Cf. Monumenta Nipponica, Vol.1. NO.1, Sophia University, Tokyo : 1938, p. 71.

 

10) 당시에 바닷길을 이용하여 순찰사 직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각오한 일이었다. 바다를 이용한 여행은 길고 험난했다. 배 안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칸(혹은 방)의 높이는 75cm로, 그것은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Bartoli, Opere, Torino 1825, X, Giappone, I, c.40, p. 142 ; 이런 상황이라 배를 통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는 사람은 적었다. 도미니코 수도회와 예수회 자료에 의하면, 발리냐노 이후 시기에 해당되는 1618년에 중국으로 파견된 22명의 선교사들 가운데 8명만 마카오에 도착했고, 1631년 극동아시아로 출발한 28명의 선교사들 중 10명이 여행 중에 사망 했으며, 1644년에 6명이 중국으로 파견되었으나 4명이 바다에서 숨을 거두었다. 1656년에도 9명이 파견되었으나 5명이 가는 길에 사망했고, 1657년에 17명이 출발했지만 12명이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1674년에 13명이 파견되었으나 10명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거의 빈사상태나 탈진한 채 도착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시아의 바다는 일 년에 한 번씩 일정 기간 계절풍이 분다. 그 시기에는 배를 띄울 수가 없어 종종 뱃사람들은 몇 개월 혹은 몇 년씩 예기치 않던 항구에 발이 묶여 있곤 했다. 발리냐노는 그런 바다를 안방처럼 여기고 살았던 것이다. Pasquale M. D’Elia, Il P.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op. cit., p. 125.

 

11) Cf. Pasquale M. D’Elia, Il P. Matteo Ricci S.J., op. cit., pp. 127~176 ; Pasquale M. D’Elia, Il P.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p. 127.

 

12) Pasquale M. D’Elia, Il P.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p. 127. 

 

13) 프란치스코 카브랄(Francesco Cabral, S.I., 1529~1609)은 1528년 포르투갈의 성 미카엘 섬에서 태어났다. 리스본에서 학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여 터키인들을 물리친다는 명목으로 인도로 떠났다. 항해 중에 안토니오 바즈(Antonio Vaz) 신부의 권유로 수도자가 되었고, 1554년 12월에 고아 예수회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지원기를 보내고 아직 사제품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지원자 양성관으로 발탁되었다. 이후 바자임과 코친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1568년 8월, 마카오로 가서 이듬해인 1569년에 수도 서원을 하였다. 1570년 6월, 일본으로 떠나 1581년 10월 8일까지 12년간(1570~1581) 일본 예수회 선교센터의 원장직을 수행하였다(ARSI, Jap.-Sin., 9, ff. 37~38). 1581년 말~1582년 초, 일본에서 부관구장 선출이 있었는데, 카브랄이 원장으로 있는 동안 일본인 성직자의 학문적인 양성문제를 두고 순찰사인 발리냐노와 크게 대립하였다. 카브랄은 (일본인 성직자를) 하위 성직자로 임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583년 초에 발리냐노는 그를 마카오로 보냈고, 그곳에서 고메즈 신부를 대신하여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중국 선교가 태동되는 시점에서 마카오 수도원의 원장을 지냈고, 그의 통솔 하에서 루지에리와 리치 신부가 1583년 9월 10일, 조경에 자리를 잡은 셈이다. 그러나 그가 일본 선교센터의 원장으로 있을 때 발리냐노는 Catalogo de los Padres y Hermanos que estan en el Japon, nel mes de deziembre en el ano de 1579 (ARSI, Goa, 24, f. 124)에서 그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착하고 덕이 있으며 신중한 수도자입니다. 활동적이고 인간관계에서 사교적이고 무엇보다도 용감하고 대담한 사람입니다. 그의 리더십(많은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은 특별히 이곳 (아시아)지역에서 필요합니다.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을 잘 보살피고, 그래서 복종하게 할 줄을 압니다. 그러나 조금은 거만하고 자기 뜻대로 통솔을 하려고 합니다. 과도하게, 때로는 격하게 화를 내는데, 특히 일본에 대해 그렇습니다. 우리 수도회와 회헌에 대해 잘 모르거나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하기에 관구장으로서 그의 활동은 능동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회헌에서 명시하는 것을 실천하기보다는 인도 지역의 관구장으로 활동하는 데 더 역점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일본어를 알고 일본에서의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관구장으로서 자기 직무에 맞게 수도회를 잘 통솔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상황을 이해할 좋은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595년 11월 11일과 23일, 카브랄이 인도 관구장으로 있을 때, 총장에게 보낸 두 통의 긴 편지에서도(ARSI, Jap.-Sin., 12, ff. 298~301) 발리냐노는 카브랄에 관한 생각을 종합적으로 이렇게 평했다. “카브랄이 일본 선교의 총책임자로 있을 때, 그는 유럽의 선교사들이 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일본인들을 대하며 ‘엄중하게’(in virga ferrea) 통솔했습니다. 일본의 관습에 적응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본인들을 유럽의 관습에 적응시키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일본인 예수회원들은 포르투갈어과 라틴어를 배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양인 선교사들이 자기네끼리 하는 말을 알아들어서도 안 되고, 일본인들 중에서는 한 사람도 사제 서품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유럽인 선교사들은 일본어를 잘 배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6년간 일본어를 공부하고도 겨우 고해성사만 줄 수 있을 정도였고, 15년간 공부하고도 겨우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자질도 공부할 열의도 없으면서 스스로는 항상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인도의 관구장으로 있는 동안 2년간 지원소는 문을 닫았고, 유럽에 편지를 보내 3년간 새 선교사를 한 명도 파견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로서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을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카브랄은 자신의 엄격한 통솔 방식을 고집했고 장상들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결정에 대해 굽힐 줄 몰랐고, 자문단은 언제나 자기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를 잘 내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데는 무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리냐노가 직접 인도의 관구장으로 추천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못했기 때문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도 그가 변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주목을 더 받기 전에, 1596년 9월 그의 3년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Storia dell’Introduzione del Cristianesimo in Cina per opera della Compagnia di Gesu, scritta dal P. Matteo Ricci S.I., edita ed annotata dal P. Pasquale M. D’Elia S.I., 1942, Roma, 김혜경 번역, Fonti Ricciane(리치원전), II책 2장 참조.

 

14) 이와 관련하여 다음 자료를 참고하라. 김혜경, <16~17세기 동아시아 예수회의 선교 정책 - 적응주의의 배경을 중심으로>, 《신학과 철학》 17,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0 ; 김혜경,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 역사와 의미》, 서강대 출판부, 2012.

 

15) Lettera Annale delle cose de Giapone del M.D.LXXXII. (Rom 1585). 이 편지에서 발리냐노는 첫 번째 일본 방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6) 사절단은 正使:伊東マンショ(Mancio、滿所、伊東祐益), 正使:千?石ミゲル(Miguel、千千石?左衛門), 副使:中浦ジュリアン(Juliao、小佐佐甚五), 副使:原マルティノ(Martinao) 등 네 사람이었다. 사절단의 이름은 소위 덴쇼소년사절단이라고 불리는 ‘천정견구소년사절’(天正遣?少年使節, Tensh? sh?nen shisetsu)(1582~1590)이었다. 발리냐노의 이 계획은 교황과 유럽의 여러 왕실과 도시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관해서는 쿠퍼가 잘 정리하였다. Michael Cooper, The Japanese Mission to Europe 1582~1590 : The Journey of Four Samurai Boys Through Portugal, Spain and Italy, Folkestone, Kent : Global Oriental, 2005 ; Guglielmo Berchet, Le Antiche Ambasciate Giapponesi in Italia, Istituto Universita Orientale, Venezia, 1877년도 참조.

 

17) 밝고 유머 넘치는 이 매력적인 성품의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오르간티노 신부는 발리냐노가 자신을 방문하지 않고 인도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며 방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는 이탈리아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더 가깝습니다. 좋으신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이 백성의 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덕분입니다.” Vittorio Volpi, Il Visitatore Alessandro Valignano, Un grande maestro italiano in Asia, Spirali, Milano, 2011, p. 101. 그는 고아(Goa, 1567), 마카오(Macao, 1568)에 파견되었다가 일본으로 왔다(1570). 당시 수도였던 교토에 정착하여 30여 년을 지내면서 일본인들에게 큰 호감을 갖고 다가갔고, 그만큼 일본인들 역시 그를 ‘우루간빠테렌’(Urugan Bateren, 宇留岸伴天連, padre Organtino)이라 부르며 따랐다. 교토에 사는 동안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1576년 교토에 3층의 목조건물로 성모승천(聖母被昇天) 성당, 즉 남방지[南?寺]를 세웠다. 1580년에는 아츠치[安土]에 신학교를 세워 원장이 되었다. 1587년 빠테렌 추방령이 내려지자 쇼도시마[小豆島]로 피신했고, 1591년 교토에 체류해도 된다는 재허가를 받아 교인들을 돌보았다. 1597년 26명의 일본인 신자들이 순교할 때는 순교자의 잘린 귀를 받아 안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http://cafe.naver.com/kyotojp/2865(2016.08.05.검색) 참조.

 

18) Cf. Vittorio Volpi, Il Visitatore Alessandro Valignano, Un grande maestro italiano in Asia, Spirali, Milano, 2011, p. 21.

 

19)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로 1563년에 일본으로 파견되어 30여 년 동안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 통일의 역사를 지켜보았고, 그 덕분에 일본 내부 사정에 정통했다. 프로이스는 ‘포르투갈령 동인도 역사’를 편찬하려던 포르투갈의 국책 사업에 따라 1549~1594년까지 《일본사》(Historia de Japam)를 편찬하였다. 거기에서 서양인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의 발발원인, 전개, 일본군의 패배원인 등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우리에게도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정성화 · 양윤선 옮김, 살림, 2008)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프로이스는 임진왜란에 직접 종군한 선교사는 아니지만, 그 시기에 일본에 머무르며 전쟁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었고 그것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천주교인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555~1600)와 같은 유력한 영주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전쟁을 주도한 당시 권력층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각을 담은 매우 정확한 정보를 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동북아 3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대항해 시대 초기에 극동의 역사와 문화, 정치와 사회 등을 유럽에 소개했던 극소수의 서양인 중 한 사람이다. 노부나가는 프로이스 신부를 두고 “위대한 나라만이 이렇게 큰 생각을 하는 사람을 배출할 수 있다”고 할 만큼 그의 활동을 지지했다. Vittorio Volpi, op. cit., p. 102.

 

20) Vittorio Volpi, op. cit., p. 108.

 

21) 1581년(텐쇼 9년) 2월 28일부터 일주일간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가 교토에서 펼친 축제다. 기마부대를 집결하여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한 부케의 행사로 일종의 군사행진(military parade)으로 봐도 무방하다. blog.naver.com/swyou89/220207478899 信長の安土城 (2016.08.06. 검색) 참조. 이 퍼레이드에는 2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했고, 노부나가는 주요 다이묘와 선사들, 그리고 세 명의 자녀들과 함께 발리냐노가 선물한 안장에 올라 행사를 주관했다. 이 자리에는 발리냐노를 비롯한 많은 예수회원들도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참석했다. Cf. Vittorio Volpi, op. cit., p. 111.

 

22) Augusto Luca, Valignano in Giappone, in AA.VV., Quaderni del Centro Studi Asiatico, Xaverian Missionaries, Osaka-Japan, 9(2014), p. 23.

 

23) http://kimtaeyeon.co.kr/siteagent/100.daum.net/encyclopedia/view (2016.08.05.검색) 참조.

24) Vittorio Volpi, op. cit., p. 145.

25) http://otsuke.blogspot.kr/2008/01/nobunaga-by-luis-frois.html; (2016.08.06.검색)

26) 平安(へいあん)시대 이후 天皇(てんのう)를 보좌하던 최고위의 大臣(だいじん).  http://dic.daum.net/ <일본사> (2016.08.06.검색)

 

27)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1586~1587년 규슈 남부에서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세력이 일어나 규슈 전체를 통제하려고 하자, 오토모와 코엘료 신부는 히데요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관백은 이를 받아들여 200,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그들을 제압했다. 히데요시 군에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여러 독실한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오사카, 사카이, 다카츠키, 아카시 등지에 새로운 성당이 세워졌고, 히데요시는 규슈를 평정하고 나서 영토의 절반을 그리스도교 영주들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그런데 히데요시가 왜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을 내릴 정도로 갑작스레 태도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추정하기로, 코엘료 신부가 잘 무장된 포르투갈 상선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는 것과 포르투갈 장교가 배를 하카다로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히데요시 군대의 몇몇 신자들이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보다 신앙을 우선으로 두었다는 것 등이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의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으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히라도 항에 집결했지만 몇몇은 숨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퇴거 명령이 오래가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일본을 떠나지 않고 규슈의 신자 다이묘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에 계속 머무르기도 했다. 히데요시의 외국인 추방령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기 전에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는 오이타[大分]의 후나이(Funai) 교구를 설정하고 데 모라이스(Sebastiao de Morais) 주교를 선임했다(1588.03.27.). 이것이 일본의 첫 번째 교구 설정이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64670&cid=50762&categoryId=51340 (2016.08.06.검색) 참조.

 

28) Cf. Vittorio Volpi, op. cit., p. 173.

29) Vittorio Volpi, op. cit., p. 176에서 인용 : 원문 반영이 없음 ; 또 다른 자료로 Giuseppe Sorge, Rassegna per il quarto centenario della prima ambasceria dei giapponesi a Roma, pp. 223~237를 참조하라.

30) Ibid., p. 175.

 

31) Cf.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 des Sumario de Japon(1592), pubblicato privatamenta da Jose Luis Alvarez - Taladriz, Osaka.

32) Cf. Vittorio Volpi, op. cit., pp. 162~171.

 

33) 1592년 3월 13일, 발리냐노가 나가사키에서 총장에게 쓴 편지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할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Valignano, Nagasaki, 13 Marzo 1592, Archivum Romanum Societatis Iesu (ARSI), Jap.-Sin., 11, II 288.

 

34) 이 점에 관해서는 프로이스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루이스 프로이스, 정성화 · 양윤선 옮김, 《임진난의 기록 :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살림, 2010(3쇄본), 35~36쪽 참조.

 

35) Cf. Vittorio Volpi, op.cit., pp. 189~194.

 

36) 히데요시는 말년에도 계속해서 공식적으로는 외국인 선교사 추방령과 그리스도교 금교령을 내렸으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그리스도교는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정하미는 히데요시의 목적이 선교사와 규슈를 통제하여 무역의 이익을 통일 정권에서 독점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선교사 추방령과 그리스도교 금지정책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수는 증가했다고 평하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를 금지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구교도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니라, 신교도 국가인 네덜란드 곧 새로운 무역의 대상자를 발견하고 난 후였다. 결국 일본에서 그리스도교 금교령은 무역의 이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정하미, <예수회 순찰사 발리냐노의 역할과 일본의 기독교 금교령>, 《비교 일본학》 15, 2005, 174~175쪽 참조.

 

37) 이와 관련하여 전후 관계를 간략히 서술하면, 1592년~1598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강행할 때 이에야스는 일체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 후계자 자리를 두고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라이벌로 떠올랐고, 유키나가는 미쓰나리 편에 섰다. 1600년 10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동군(東軍), 미쓰나리를 지지하는 세력은 서군(西軍)으로 포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동군의 완승으로 끝나 서군의 주요 세력들은 거의 처형되거나 영지가 몰수되어 평민으로 전락하였다. 유키나가가 처형당한 후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잠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다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1612년 이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불신이 폭발, 금교령(禁敎令)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는 포르투갈 · 네덜란드 · 영국 등의 무역을 통해 각종 병기를 접했고, 상업적 이득과 폭넓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고, 그 사이에서 통역을 맡았던 선교사들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포교(布敎) 요구에도 특별히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야스도 1612(게이초 17년)년 3월 21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 사건을 계기로 ‘오해와 참소, 그리고 점차 그리스도교의 폐해를 경험하게 되었기에 국가 정책상 그리스도교 금지령을 선포’(사바 와타루[佐波亘],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와 그 시대》, 야먀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 고경문 옮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 페이퍼로드, 2012, 341쪽에서 인용.)한다며, 히데요시 시절보다 더한 박해를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을 자신이 힘들여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서 온 예수회의 선교사들은 모두 필리핀 등으로 추방되고, 신자들은 청동으로 제작한 성화를 밟는 배교를 강요당했다. 이 시기에 신도들은 가쿠레다 기리시탄이라고 하여 동굴 같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이에야스의 반(反) 그리스도교 정책은 이후 30년 동안 충실히 수행되었고, 그 결과 일본에서 그리스도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역도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엔도 슈사쿠, 김윤성 옮김, 《침묵》, 바오로딸, 2016(19쇄본)는 이 시기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이다.

 

38) 1601년 도처에서 반그리스도교 감정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나가사키, 교토, 오사카 교회는 법적으로 보장을 받았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신부들은 에도(1599)와 우라가(1608)에 성당을 지었고, 선교사들의 숫자도 크게 늘었다. 1601년 나가사키에 주교좌가 설치되고, 예수회는 대학과 수련원, 신학교를 운영하며 현지인 사제들을 양성했고, 인쇄소와 기술학교 등을 운영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와 서양의 문물을 확산시켰다. 1611년 나가사키에만 성당 11개, 신자 40,000명을 헤아렸다. 1601년과 1614년에는 체르퀘이라 주교가 15명의 일본인들에게 사제품을 주었다(교구신부 7명, 예수회원 8명). 1614년에는 140명의 예수회원, 26명의 프란치스코 회원, 9명의 도미니코 회원, 4명의 아우구스티노 회원이 있었고, 신자 수는 400,000명이 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Japan, The Catholic Church in (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2007.11.25.,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참조.

 

39) 이들은 기무라 세바스티아노(Kimura Sebastiano)와 니아바라 루이스(Niabara Luis)다. 두 사람 모두 체르퀘라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았고, 기무라는 현재 일본에서 복자로 존경 받고 있다. Vittorio Volpi, op. cit., p. 192 ; 1601년 10월 24일 발리냐노가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서품식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고 적었다. Pasquale M. D’Elia, Il P. Alessandro Valignano(1539~1606), p. 154.

 

40) Adiciones del Sumario de Japon(1592).

 

41) Del Principio y progress de la Religion Christiana en Japon, y de la especial Providencia de que Nuestro Senor usa con aquella nueva Iglesia로, 모두 5권으로 구상하여 발리냐노가 제1권을 쓰고 그 마무리는 제2권의 저자가 하는 것으로 했다. 각권의 내용은 제1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하는 1549년부터 그의 후임자인 코시모 데 토레스가 사망하는 1570년까지, 제2권 프란치스코 카브랄이 일본선교의 책임자로 있던 시기(1570~1581), 제3권 가스파르 코엘료가 첫 번째 부관구장으로 있던 시기(1581~1590), 제4권 1590년부터 1600년까지 페드로 고메즈 신부가 부관구장으로 있던 시기이고, 제5권 세 번째 부관구장으로 프란치스코 파시오 신부가 임명된 시기(1600년 이후)다. Vittorio Volpi, op. cit., p.193, nota 17.

 

42) Francisco J. Montalban S.J., Manual de Historia de las Misiones, Secretariado de Misiones Pamplona, 1938, p. 318 ; 같은 맥락에서 슈르함머도 하비에르가 사망한 이후 일본 선교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고 말하며, 1570년에 3만 명의 신자, 1582년에 15만 명, 1593년에 21만 7천 명, 1618년에는 30만 명을 넘었다고 전한다. P. Giorgio O. Schurhammer S.J., Il contributo dei missionari cattolici nei secoli XVI e XVII alla conoscenza del Giappone, in AA.VV., Le Missioni Cattoliche e la Cultura dell'Oriente, Istituto Italiano per il Medio ed Estremo Oriente, Roma, 1943-XXI, p. 121. 또 다른 정보에는 일본 선교에서 ‘최성기’(3기)는 발리냐노가 구체적인 선교 정책을 수립하는 1580년부터 히데요시가 빠테렌 추방령을 공포하는 1587년까지 일본선교의 번영을 구가한 최초의 시대로 약 20만 명의 신자 수에 성당이 200개가 넘었다고 전한다. http://nantomo.at.webry.info/201201/article_2.html (2016.08.06.검색)

 

43) 이 시기를 “제4기 <금령기>”로 규정하고 있다.

http://nantomo.at.webry.info/201201/article_2.html (2016.08.06. 검색)

 

44) Cf. Vittorio Volpi, op.cit., pp. 180~186.

 

45) Luis Frois, Die Geschichte Japans (1549~1578) von p. Luis Frois, s. j., nach der Handschrift der Ajudabibliothek in Lissabon Ubersetzt und kommertiert von G. Schurhammer und E. A. Voretzsch (Leipzig: Verlag der Asia major, 1926), pp. 504~511 ;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vol. 1, bk. 2, p. 720 : Cf. Cheong Sung-hwa & Lee Kihan, A Study of 16th-Century Western Books on Korea : The Birth of an Image, in Korean Historical Review in June 1999, pp. 11~12.

 

46) Juan Ruiz de Medina S.I., Metodo misionales para la evangelizacion de Corea, in A Companhia de Jesus e a Missionacao no Oriente, Actas do coloquio internacional promovido pela fundacao oriente e pela revista broteria Lisboa, 21 a 23 de abril de 1997, Lisboa, 2000, p. 149.

 

47) Valignano, Nagasaki, 13 Marzo 1592, Archivum Romanum Societatis Iesu (ARSI), Jap.-Sin., 11, II 288.

 

48) Luis Frois, Historia de Japam : Francisco Pasio, Carta anua de Japon de 1594 : Juan G. Ruiz de Medina S.I., 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 Bibliotheca Instituti Historici S.I., vol. XLV, Roma, 1986, p. 51에서 인용.

 

49) Cf. Juan Ruiz de Medina S.I., Metodo misionales para la evangelizacion de Corea, pp. 149~151.

 

50) Anonymous(Alfonso de Lucena, S.J), Editor of Annual Letter, 1594, ARSI, Jap.-Sin., 12, II, 340 ; 아울러 Erinnerungen aus der Christenheit von Omura, by P. Afonso de Lucena, S. J. Translated and edited by Josef Franz Schutte, 1972도 참고하라.

 

51) 간방(看坊, 도주쿠)은 선종에서 쓰이는 용어다. 사원을 지키거나 주지를 곁에서 돕는 승려를 말하는 것으로 helper, assistant에 해당된다. Jesus Lopez-Gay, S.J., “Las organizaciones de laicos en el apostolado de la primitiva mision del Japon”, AHSI 36(1967), 3~31 참조.

 

52) Juan G. Ruiz de Medina S.I., 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 Bibliotheca Instituti Historici S.I., vol. XLV, Roma, 1986, pp. 51~52.

 

53) Jap.-Sin., 45, I, 196.

54) Jap.-Sin., 52, 94v.

 

55) Jap.-Sin., 52, 94, Frois, Nagasaki, 20 octubre 1595 ; Cf. Juan G. Ruiz de Medina S.I., Origenes de la Iglesia Catolica Coreana desde 1566 hasta 1784, Bibliotheca Instituti Historici S.I., vol. XLV, Roma, 1986, pp. 51, 53.

 

56) 순찰사가 일정 기간마다 그 지역 현황에 대해 총원에 보내는 보고서로, Sumario라는 용어 자체는 ‘종합 보고서’, 혹은 ‘요약적인 연구’, ‘개괄적인 연구’라는 뜻이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은 관할 선교지에 대한 ‘현황 보고서’라는 의미가 크다. 혼란의 소지가 있으므로 그냥 ‘수마리오’로 쓰기로 하겠다. 서강대학교, 심종혁 신부 권장 (2016.08.24.).

 

57) Goa, 6, f. 21v. : Alessandro Valignano, Sumario Indico Shimo, Agosto 1580. 

58)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1592)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59) Cf. Jap.-Sin., 41, 96v, Valignano, Apologia (1597).

 

60) Cf. Alejandro Valignano S.J., Apologia de la Compania de Jesus de Japon y China (1598), edicion por Jose Luis Alvarez-Taladriz, Osaka, 1998, p. 394 nota 12.

 

61) Alejandro Valignano S.J., Apologia de la Compania de Jesus de Japon y China (1598), edicion por Jose Luis Alvarez-Taladriz, Osaka, 1998, p. 394.

 

62) Vittorio Volpi, op. cit., pp. 186~187.

 

63) Alejandro Valignano S.I., Adiciones del Sumario de Japon (1592), in Monumenta Nipponica Monographs (No.9), Editados por Jose Luis Alvarez-Taladriz, Tomo I, Sophia University, Tokyo 1954, pp. 487~488.

 

64) Cf. Jap-Sin., 13, II, 260~261v. 1599년 2월 22일, 발리냐노가 일본에서 총장에게 쓴 편지 참조 ; Cf. Lettera del P. A. Valignano, Visitatore della Compagnia di Giesu nel Giappone, e nella Cina de 10. d'Otobre 1599 al Claudio Acquaviva General della medesima compagnia (Napoli 1603).

 

65) 문자를 이용한 문서선교에 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졸고, <마테오 리치의 적응주의 선교와 서학서 중심의 문서선교의 상관성에 관한 고찰>, 《선교신학》 27, 한국 선교신학회, 2011.

 

66) 적응주의 선교 정책과 관련해서는 졸고,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 서강대학교출판부, 2012를 참조하라. 특별히 발리냐노 관련 부분은 163~177쪽에 있다. ; Josef Franz Schute, S.J., Valignano’s Mission Principles for Japan, Volume I : From His Appointment as Visitor until His First Departure from Japan (1573~1582). II Part : The Solution (1580~1582), St. Louis, 1985, p. 190 ; Carmen Radulet, “O ‘Cerimonial’ do P. Alessandro Valignano: encontro de culturas e missionacao no Japao” in O Seulo Crista do Japao. Actas do Coloquio Comemorativo dos 450 anos de amizade Portugal?Japao (1453~1993), Lisbon, 1994, pp. 55~69을 보라.

 

67) “일본인들은 천체의 움직임, 일식에 대해서 몹시 궁금해합니다. 달의 이지러짐과 참, 빗물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눈과 우박, 천둥, 번개에 대해서, 혜성과 유사한 자연 현상들에 대해서 궁금해합니다. (권력가들은) 백성의 뜻을 알기 위해 이런 현상들을 많이 이용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이냐시오 로욜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Ultima Lettera di S. Francesco Saverio a S. Ignazio di Loyola)>, 김혜경 역, 2016년 2월 교회사연구자 모임 발표(Parma, Istituto Missioni Estere, 1923, in Bibl. Storica ARSI, Fx. 200, 17).

 

[교회사 연구 제49, 2016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혜경(대구가톨릭대학교 인성교육원 강의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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