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 (3) 영적인 시간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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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09 ㅣ No.507

[레지오 영성] 영성생활에 대한 단상(斷想) (3) 영적인 시간관리

 

 

영성생활에 있어서 늘 유혹으로 작용하는 것이 ‘시간관리’이다. 하루 중에서 하게 될 많은 활동과 시급한 상황은 기도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끊임없이 방해하며 괴롭히기 때문에 번번이 급한 일들에 양보하게 된다. 시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 하는 사람일수록 의외로 게으르면서도 교만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 사람이 무엇에 더 관심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시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교육의 부족은, 특히 인내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무질서한 생활로 흐르게 한다. 이렇게 될 때 참여해야 할 다양한 활동이나 긴급한 우선사항 또는 중요성의 서열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일의 우선순위를 가릴 여지가 없이 삶 안에서 모든 활동이 무질서한 소용돌이처럼 흘러가 버리고 내적 생활도 날로 피폐해진다. 늘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지배하는 훈련을 꾸준히 하면서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안다. 자기 억제는 무엇보다 시간의 지배를 통해 실행된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첫째 ‘당연히 해야 할 것’, 둘째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 셋째 ‘우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은 첫 번째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일에는 목숨을 걸고 전력을 기울인다. 여기에는 성실성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리고 두 번째의 것에는 지금 당장 결실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기다리며 자연히 이루어지도록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옳은 것에 대한 확신과 상식선을 지키면서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 우연히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나 현혹되는 경우가 없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기대할 것이 못되는 것인데도 호기심과 특이한 일에 관심을 쓰면서 조급해서 기다려주지 못하며, 편법을 쓰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우연히 일어나는 것에 집착을 가지며 미신이나 주술적인 데 더 관심을 쓰기 때문에, 상식선과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며,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면서도 반성을 못하고 불평만 해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시간이 늘 있는 것으로, 새로움이 없이 늘 ‘지속되는 영원’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속되는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란 지혜로운 방법으로 시간을 충분히 살지 않고, 기다림(Adventus) 없이 주님 오심의 확실성도 갖지 못한 채 그냥 단순히 흘러가게 두는 시간을 말한다.

 

 

‘시간의 성화’ 없이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은 이루어질 수 없어

 

오늘날은 시간의 가속과 분산으로 특징지어진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사는 우리 방식의 병적 증상은 더욱 두드러지고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영적 전통은 언제나 시간과의 관계를 강조했다. 영적 전통은 하루의 첫 시간을 기도와 성경묵상에 가장 적합한 시간으로 제시해왔다. 그 시간이 하루를 질서지우는 첫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이트리히트 본 회퍼의 다음 이야기는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데 성공했을 때, 그 하루는 질서와 규범을 지닙니다. 특히 그러한 일관성은 아침기도에서 시작되며 활동으로 이어집니다. 곧 아침기도가 하루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부끄러워야 할 헛되이 보낸 시간, 유혹에 빠진 시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 이웃과의 관계에서 무질서와 혼란을 일으킨 시간 등 그 모두가 아침기도를 소홀히 한 것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간의 성화’라는 규정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은 이루어질 수 없다. 주어진 그 시간 안에서 무엇인가 할 것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시간을 미리 배정하고 나누어야 한다.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때 우선적으로 할 것은 하루 가운데 취소할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삶의 중심이 되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 내 하루의 일상생활의 시간을 성화하는 영성적인 무게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서, 사실 많은 사람이 시간과 멀어진 것 때문에 건강한 성장이 불가능해진 삶, 취미처럼 되어버린 신앙생활을 한다. 바오로 사도는 시간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한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시간을 잘 쓰십시오. 지금은 악한 때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에페 5,15-17)

 

어느 경영학 시간에 교수가 학생들에게 시간의 경영관리에 대한 교육을 한 적이 있었다. 커다란 항아리에 돌을 채워 넣는 것이었는데, 처음에는 큰 돌, 작은 돌, 모래의 순서였다. 그런 다음에는 다 꺼내서 반대의 순서로 채워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처음보다는 반도 훨씬 못 채우는 것이었다. 교수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 “만약 너희들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영원히 큰 돌을 넣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현재 주어진 시간에 대한 가치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하느님과의 관련성 안에서 그 충만함 찾아

 

‘현재’를 뜻하는 영어 ‘present’는 ‘선물’이라는 의미도 있다. 곧 ‘현재’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곧 은총의 시간인 셈이다. 현재 내게 부여되는 시간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할 때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무의미한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경우 바로 지나친 다음에 늘 후회를 하지만 그 시간들은 결코 재활용이 안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Augutinus) 성인은 그래서 “지나치시는 주님이 두렵다”고 한 적이 있다.

 

성경 안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카이로스’(καιροs)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크로노스’(χρονοs)의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영원을 향한 시간, 생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구원의 시간을 가리키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편 ‘크로노스’의 시간은 흘러가는 시간, 어제 · 오늘 · 내일 등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 두 가지 시간과 관련해서 인간의 삶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구원의 시간인 카이로스 안에서 하느님과 동행하면서 온전하게 살아가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누리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육체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시간은 이처럼 하느님과의 관련성 안에서 그 충만함을 찾아볼 수 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3월호, 이동훈 시몬 신부(서울대교구 상설고해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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