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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26: 냉엄한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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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1-27 ㅣ No.414

[추기경 정진석] (26) 냉엄한 현실


성모병원 신축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1966년 6월 5일 장면 박사 빈소를 조문하는 노기남 대주교를 정진석 신부(오른쪽)가 수행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학생들을 가르치던 라틴어 선생 정진석 신부는 1965년 교구청으로 부름을 받고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1967년까지 서울대교구장 비서와 상서국장을 맡았다. 당시 상서국장은 교구 공문서를 책임지는 오늘날의 사무처장 역할을 했고 교구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는 비서도 겸하는 자리였다. 어린 시절 한국 최초의 주교 서품식에서 미사보(복사)를 서며 보필한 노기남 주교를 신부가 되어 더 가까이에서 모시게 됐으니 참 신비한 인연이었다.

 

 

교구 행정에 필요한 것들 하나씩  

 

이 시기 교구의 사제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정진석 신부는 교구장이 사제들의 영명축일 축하 인사를 제때 전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을 고심하다 월별 사제 축일표를 만들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매월 교구 행사표를 만들어 교구 행정에 필요한 부분들을 미리 준비해 나갔다. 월례 행사표는 사제의 축일이나 교구장의 주요 동정, 교구 내 중요한 행사들을 날별로 정리하여 교구 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기록한 표다. 이는 교구 행정을 체계화하는 첫 단추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구 월례 행사표는 오늘날도 주교단과 교구청 부서, 각 본당에서 찾아보는 유용한 자료다.

 

정진석 신부가 성심을 다해 보좌할 당시,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매년 참석했다. 4년에 걸쳐 진행된 이 공의회가 l965년 말 종료되고 난 뒤, 노 대주교는 1966년 2월 귀국해 델 주디체 당시 주한 교황대사를 통해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다. 물론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진행됐다. 노 대주교의 사의는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고, 그동안 쌓여온 교구의 문제들이 큰 부담이 됐던 탓이 컸다. 

 

정진석 신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대사관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노 대주교 당신께서 교구 현안을 잘 매듭짓고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정진석 신부는 생각했다. 곁에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봤듯이, 이는 노 대주교가 오랜 시간 기도하고 고민한 결과였다고 믿었다. 또 노 대주교의 마음도 짐작됐다. 자신이 벌였던 사업을 수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과제를 떠안게 된 남겨진 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뒤범벅됐을 것이었다. 당사자인 대주교의 속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할 것이라고 정진석 신부는 생각했다.

 

노 대주교가 교구장직을 내려놓으려는 이유는 한두 마디 말로 설명되지 않았다. 매우 복잡하며 오랜 기간 누적된 문제의 결과임을 정진석 신부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에는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논의된 ‘노년에 접어든 성직자의 은퇴 문제’가 있었다. 일부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주교들은 사제의 70세 정년제를 채택해 보수 성향이 강한 가톨릭 교회의 세대교체를 촉진하고, 교회 밖 세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이 실제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지만 회의에 참가한 나이 든 주교들로서는 교회 내 요청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 노 대주교는 정년 대상에 속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4년 동안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절감한 것은 급변하는 시대 조류에 교회도 대응해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고, 공의회에서 결정한 주요 사안을 수행해 내기에는 스스로의 힘이 벅차다는 사실이었다. 노 대주교는 젊고 의욕 있는 후배들에게 일할 기회를 내어줘야겠다는 생각이 컸을 것이다. 

 

또 당시 교구에는 몇 가지 난제가 있었다. 특히 명동대성당 앞 성모병원 신축을 위한 재정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실 성모병원은 서독 ‘미제레오르’(Misereor, 가톨릭해외원조기구)의 원조를 약속받고 착공했다. 1958년 쾰른대교구 프링스 추기경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20만 달러의 지원 약속을 받아 병원 신축을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돈이 정작 교구에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나서였다. 물론 병원 신축을 전적으로 서독의 지원에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약 100만 달러의 공사 비용 중 서독의 지원이 큰 몫이었기 때문에 이 자금의 전달이 늦어짐으로써 교구 재정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결국 여기저기서 빚을 얻는 지경이 됐다. 병원 공사에 들어갈 당장의 자금이 급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구로서는 우선 이자를 갚는 것이 큰 부담이 됐다. 2년 후 도착한 서독의 지원금 20만 달러는 그 사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를 갚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또 당시 교구가 운영했던 경향신문의 누적된 적자와 6·25 전쟁이 끝난 뒤 교회 복구 및 교구 산하 학교의 시설 확충 등이 겹치면서 재정 사정은 악화일로에 있었다. 노 대주교는 그동안 누적된 교구의 재정 적자, 특히 성모병원 신축 공사비 조달에 차질이 생겨 교구 재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된 데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채권자들이 주교관에 몰려오니 

 

그러나 노 대주교는 문제의 뒷수습을 후배에게 떠맡길 수 없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갔는데, 1967년 1월에는 6000여만 원의 부도가 발생하고 말았다. 교구의 상황이 더 다급해졌다. 이 때문에 채권자들이 주교관에까지 몰려오니 노 대주교는 교구장으로서 다른 사제들 보기가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장 결제를 기다리고 있는 수표가 또 7000만 원이나 됐다. 시급히 메워야 할 돈이 당시 금액으로 1억 3000여만 원이었다. 

 

하루같이 빚쟁이들이 교구청으로 몰려들었다. 채권자들이 갖고 있는 수표는 한 장에 500만 원짜리였는데, 그걸 한 보따리로 들고 있었다. 수표는 당가(경리) 신부 이름으로 발행한 것이었다. 거액의 빚 앞에서 수표 발행인이 사제라고 봐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빚쟁이들이 성당 마당으로 몰려와 고성과 행패를 이어갔다.

 

끈질기게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빚쟁이들 때문에 당시 교구 재정을 담당했던 사제들은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줄줄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래서 교구청에는 정진석 신부가 홀로 남아 빚쟁이들을 상대해야 했다. 이들이 부르면 나가서 설득하고 노 주교를 직접 만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곤욕스러운 시간이 나날이 이어졌다. 수십 명이나 되는 빚쟁이들을 혼자서 막기엔 힘이 부쳤다. 빚쟁이 중에는 빚을 내준 당사자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고용한 불량배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이 왔다 하면 명동이 들썩거렸다. 채권자들은 처음에는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고성을 지르고 폭력도 불사했다.

 

“노 주교 나오라고 해!” 

 

채권자들은 노 주교가 들으라고 일부러 큰소리로 외쳤다. 그래도 아무런 답이 없으면 길을 막아서는 정진석 신부를 붙잡아 앙갚음했다. 

 

“야! XXX야, 안 비켜!”

 

반말은 기본이고 욕설이나 멱살을 잡는 것은 보통이었다. 심할 때는 주먹이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어이쿠!”

 

덩치 큰 남자에게 멱살을 잡힌 정진석 신부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1월 27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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