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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 한국교회의 시복 운동: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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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5 ㅣ No.1581

[계속되는 한국교회의 시복 운동]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

 

독일 오틸리아연합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09년이다. 당시 조선 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05년 을사늑약 뒤 개신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많은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보고 조선에 가톨릭 교육을 담당해 줄 수도회를 찾았다.

 

‘눈먼 이들에게 빛을’이라는 모토를 통해 베네딕도회적인 선교를 설립 이념으로 하는 오틸리아연합회에서는 뮈텔 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교사들을 파견하였고, 그들은 서울 동소문 바로 옆에 있는 백동(지금의 혜화동) 언덕에 첫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한국에 진출한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본디 취지대로 2년제 사범학교인 숭신학교와 기술학교인 숭공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일본 당국이 선교사들의 사범학교 운영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숭신학교는 첫 번째 졸업생만을 배출한 채 문을 닫아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커졌다. 독일 모원과의 연결이 단절된 것이다.

 

1920년 포교성성은 서울의 베네딕도 회원들에게 이제 막 설정된 원산대목구를 위탁했고, 그 관할구역은 만주의 남동쪽을 병합하면서 확대되었다. 그밖에도 길림의 주교에게서 중국으로 이주한 한국인 사목과 의란 지역의 사목도 위임받았다.

 

1927년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선교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선교 지역과 떨어져 있던 서울수도원을 신학교와 함께 원산 근교의 덕원으로 옮겼다. 그 뒤 원산대목구도 재정비되어 연길지목구가 분리, 설정되고 테오도로 브레허 신부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복음전파만이 아니라 사회복지에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선교 방향을 분명히 설정하였다. 그것은 먼저 수도생활을 중심으로 한 선교였다.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는 이미 백동수도원에서부터 베네딕도회의 영성에 따라 공동 성무일도를 포함한 전례생활과 노동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본당에서의 선교보다 수도생활 자체가 선교에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도 주교좌성당이었던 원산본당이 아니라 덕원수도원에 머무르면서 수도원이 모든 선교활동의 중심이 되도록 애썼다. 이미 백동수도원 시절부터 숭공학교 설립을 통해 선교사들은 목공과 철공, 기계와 도장 등의 교육을 실시해 왔고 그 일은 덕원수도원에서도 계속 되었다.

 

전례서와 교회 서적의 출간을 위한 인쇄소도 새로 건축하였다. 이는 일선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을 돕고 성소를 개발하는 데도 필요했지만 조선시대 박해 때문에 사회적 경제적 기반이 취약했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상공인으로 키우려는 이유였다.

 

선교사들이 고심했던 문제는 복음전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가난과 문맹, 그리고 열악한 의료와 복지 등 전방위적인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설립한 본당들은 단순한 본당이 아니라 하나의 선교기지였다.

 

실제로 거의 모든 본당에 농장은 물론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해성학교가 있었고, 시약소나 병원, 여성들을 위한 가사 교육장을 지니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20여 년 동안 24개의 본당을 신설하였고, 수도원과 본당을 연계하여 이 땅의 복음화와 좀 더 나은 사회여건을 만들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 설립도 중요한 일이었다. 1921년 백동수도원에 설립된 원산대목구 신학교는 수도원과 함께 덕원으로 이전하였으며, 1935년 일본 정부의 공식 인가를 받았다. 그 뒤 일본의 공식 인가를 받지 않았던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에 문제가 생기자 교회 장상들은 모든 신학생을 덕원으로 보냈고, 덕원신학교는 한동안 한국교회의 중심 신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뒤 남한의 많은 교회 장상과 신학교 교수가 덕원신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박해의 시작

 

베네딕도 회원들의 성공적인 선교 사도직과 수도생활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결국 일본이 패망하고 북한 땅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은 갈수록 위태로워졌다. 그래도 소련군과 백동수도원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소련군이 북한 정권의 탄압에서 수도원을 보호해 주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북한 정권이 들어서자 선교는 완전히 금지되었고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덕원수도원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수도원 재정 책임자 다고베르트 엥크 신부가 밀주를 제조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인쇄소 책임자 루도비코 피셔 수사가 반공 전단 제작 혐의로 체포되었다.

 

결국 1949년 5월 9일과 10일 사이 밤에 정치보위부원들은 수도원에 난입하여 처음에는 장상들을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 그리고 한국인들 가운데에 사제들만 체포한 뒤 수도원을 폐쇄하였다. 그 운명은 원산의 툿칭 포교 성베네딕도회 수녀들과 본당에 남아있던 사제들도 비켜가지 않았다.

 

체포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처음에 원산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5월 12일 밤에 평양인민교화소로 이송되었고, 거기서 남자와 여자가 나누어졌다. ‘중죄인’으로 분류된 일곱 명의 선교사와 한국인 사제는 평양에 남겨두고 나머지 독일인 선교사는 옥사덕수용소로 옮겨졌다.

 

옥사덕수용소에서 선교사들은 가혹한 환경과 노동에 처해졌고, 영양실조와 과로 그리고 국경 근처 만포수용소까지 ‘죽음의 행진’ 속에서 17명이 세상을 떠났다.

 

평양인민교화소에 남겨진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신상원 보니파시오 아빠스가, 이어서 루페르토 클링자이스 신부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나머지는 1950년 10월 유엔군과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직전 집단 학살당했다.

 

그 밖에도 원산에서 김봉식 신부, 해주에서 한윤승 신부, 황해도 장련에서 신윤철 신부, 청진에서 이재철 신부, 순안에서 박빈숙 수녀, 함흥에서 장 악네타 헌신자가 각각 공산정권에 살해되었다.

 

 

시복시성 추진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2007년부터 본격적인 시복시성 추진절차에 들어갔다. 그 대상자로 1949년부터 1952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고 덕행이 탁월했던 서른여덟 분이 선정되었다.

 

그 대상자들은 국적으로는 독일인과 한국인, 신분으로는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인 헌신자로 이루어져 있고, 순교한 장소도 여러 곳이지만 대상자 모두 어떤 식으로든 덕원수도원과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었기에 단일 소송으로 묶는 것이 가능하였다.

 

순교자인 시복시성 소송의 관할권자는 대상자가 순교한 지역의 주교이다. 이에 덕원자치수도원구장 서리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는 관할 주교들에게 관할권을 이양해 줄 것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음으로써 관할권을 통합하였다.

 

하지만 덕원자치수도원구에는 시복시성 안건을 추진할 교구 법원을 갖지 못하였기에 당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에게 안건을 맡아 소송을 진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는 장익 주교는 이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또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비록 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순교한 분들의 시복시성 안건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이미 착수 준비가 끝난 왜관수도원에서 안건을 개별적으로 추진하는 데 동의하였다.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2009년 12월 25일 자로 춘천교구에서의 안건 착수 교령을 반포하고 법원을 구성함으로써 본 안건의 예비심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2009년 베네딕도회 한국 진출 100주년을 경축하던 왜관수도원에서 12월 28일 시복시성 법정 개정식이 열렸다.

 

2010년 장익 주교가 춘천교구장을 사임하고 새 교구장으로 김운회 주교가 임명되었다. 김운회 주교는 장익 주교가 주교 대리인으로서 법정을 계속 주재하도록 위임하였다.

 

현재까지 시복시성 법정은 왜관과 서울, 부산 등지에서 제12차 회기까지 열렸으며, 이 법정에 출두해 증언한 증인들은 모두 16명이다. 과거 북한에서 하느님의 종을 만났던 목격 증인들 가운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법정에 출두하여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증언한 셈이다.

 

지금은 하느님의 종에 대한 모든 문서 증거와 기록들을 정리하고 하느님의 종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역사위원회의 작업이 진행중이며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 이제 예비심사에서 남은 일은 교황청에 접수시키고자 관련 서류들을 번역하는 것과 마무리 절차이다.

 

 

순교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는다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의 시복시성 안건은 근현대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을 재조명하고,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한 시복시성의 첫 발을 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을 뿐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시복시성 안건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이 안건의 추진은 한국 천주교회의 근대사를 밝히는 데도 많은 역할을 할 것이다.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이 가장 큰 어려움을 겪던 시대, 곧 일본에 의해 국가 주권을 빼앗기고 그 뒤로도 남북으로 갈려 결국 북녘 땅이 공산화가 되던 시기에 이 땅에 복음을 전하였다.

 

교회적으로도 조선대목구 하나뿐이던 교구가 여러 교구로 분리 설정되던 시기에 함경도와 만주 연길에 이르는 넓은 지역의 복음화와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들이 대면하고 해결해야 했던 문제는 복음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국가의 도움조차 기대하지 못하던 민중들 편에 서서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더욱 나은 삶이 되도록 도와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분들이 보여준 ‘수도생활 중심적인 선교활동’의 본보기는 현재 덕원수도원의 후신인 왜관수도원의 선교 본보기가 되었으며, 양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은 그분들의 생명은 비록 지금은 어둠 속에 잠겨있지만 북녘 땅에도 다시 복음이 싹트리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우리 교회의 역사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으며,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헛되이 뿌려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믿는다.

 

시복시성을 추진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신자들의 관심과 기도이다. 시복시성은 이미 하느님 곁에서 지복직관을 누리고 계실 순교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들의 신앙의 모범적인 삶과 죽음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을 이 시대에 증언하는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참의미를 보증해 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분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 이성근 사바 - 성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신부. 서울분원장과,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의 시복시성 안건 부청원인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6년 9월호, 이성근 사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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