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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신학ㅣ사회윤리

[윤리]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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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1335

[복음살이]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1)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굳이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경험을 통해 누구나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은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이며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삶의 의미를 잃게 됩니다.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 역시 ‘사랑’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 37-40)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고 하였고, 사랑 안에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을 안다고 하였으니 사랑이야 말로 하느님을 닮은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의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또한 누구나 막연하게 사랑에 대해 알고 있고 사랑하며 살지만,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고 총체적인 정의를 내리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깊고 넓은 하느님 사랑부터 남녀 간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 조국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부모의 자식 사랑, 일과 사물에 대한 사랑, 쾌락적인 사랑 등 사랑의 형태도 가지각색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들 역시 에로스(남녀의 사랑), 필리아(우정), 아가페(신적인 사랑) 등 조금씩 다른 의미를 지닌 용어가 사용됩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의 예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착한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 굶주린 이들,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같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는 지의 여부라고 단언하시고, 최후의 만찬에서 극진한 사랑의 표시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요한 13장 참조) “친구들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고 강조하신 것을 종합해보면 그리스도교 사랑의 핵심은 몸과 정신을 다해 타인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를 ‘아가페’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타인의 선익을 바라는 진정성이 바탕 돼야

 

여기서 주의할 것은 자기를 내어놓은 위대한 행위라 할지라도 행위는 그 지향이 단지 이기적인 자기만족이나 타인의 평가, 의무감에서 출발한다면 진정한 사랑에서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되 이기적인 동기에서 벗어나 온전히 타인의 선익을 바라는 진정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겸손, 인내, 친절, 정의 등 보다 성숙한 사랑을 보여주는 인격적인 자질과 덕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유명한 코린토 전서 13장에서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3-7)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에 발표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회칙에서 사랑의 개념을 설명하며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에 관한 가르침을 전해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에로스’로서의 사랑과 ‘아가페’로서의 사랑에 대한 교황님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보통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에로스’는 구약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는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고 대신 ‘아가페’라는 말을 주로 사용합니다. ‘필리아’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교황은 에로스보다 아가페라는 말로 사랑에 대한 관점을 표현하려했던 이러한 경향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그리스도교가 에로스를 독살하였다”라고 비판했음을 언급하면서 그만큼 당시에 교회가 계명과 금기로 남녀 간의 사랑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런 비난은 오해이며, 고대 종교에서 신전 안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매춘이 성행했던 것처럼 신을 향해 오르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를 그릇되게 신격화하고 왜곡시켜 타락으로 이끄는 것에 대해 구약성경은 맞서왔으며, 그리스도교 역시 에로스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에로스의 진정한 위대함을 회복시키기 위해 에로스의 절제와 정화를 추구해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존재로서의 인간이 육체적 쾌락만으로는 인간의 전 존재를 생생하게 드러낼 수 없으며, 육체와 영혼이 긴밀히 일치될 때 참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따라서 신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동력이 되는 에너지인 에로스를 단순히 육체를 통한 ‘성적 쾌락’으로 전락시키고 상품화하는 현대의 경향은 에로스가 정화되고 상승하여 영적인 충만함 이르러 정신과 육체가 통합되는 ‘새로운 고귀함’으로 이르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됩니다. 에로스가 타인을 위한 사랑인 아가페로 오르지 않으면 그 사랑은 타락하여 고유한 본성조차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성장할 때 사랑자체이신 하느님 만나

 

교황은 ‘에로스’가 정화되고 상승하여 ‘아가페’로 성장하듯이 남녀의 사랑도 처음에는 자신을 중심으로 상대방을 갈망하는 에로스적인 사랑에서 시작하지만, 점차 사랑하는 이를 염려하고 배려하며 그의 행복을 추구하는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옮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럴 때 그 사랑은 “결정적인 사랑”이 될 수 있고 “영원”을 만날 수 있으며, 이때의 사랑은 참으로 “황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 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줌으로써 자아를 해방시키고,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참으로 하느님을 발견하는 여정인 황홀경”입니다.(6항) 자신의 목숨을 버릴 때 오히려 목숨을 살릴 것이라는 말씀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러한 아가페적 사랑의 본성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대중매체와 성의 상품화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왜곡된 가치관을 지니며 그저 관능적 쾌락으로서의 왜곡된 ‘에로스’에 머물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의 단계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지 성찰해 봅시다. 서로에게 느끼는 성적매력으로서의 ‘에로스’로부터 사랑하는 이의 선익과 행복을 추구하고 배려하며 자기를 내어주는 가운데 두 인격의 온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아가페’로 성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남녀의 사랑이 서로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평생 둘이 하나가 되기 위해 헌신하는 혼인으로 나아갈 때 그들의 사랑은 에로스이며 동시에 아가페이신,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반영하게 됩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9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복음살이]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2)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회칙에서 사랑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관점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우선 사랑을 ‘에로스’와 ‘아가페’의 두 차원으로 구분하여 ‘가지려는 사랑(자신에 대한 관심)’과 ‘내어주는 사랑(타인을 위한 헌신)’ 혹은 ‘올라가는 사랑’과 ‘내려오는 사랑’으로 대비시키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이렇게 서로 다른 차원을 지닌 하나의 실재”이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가페’가 없는 ‘에로스’는 결국 타락하게 되고 ‘에로스’가 없는 ‘아가페’만으로는 인간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두 차원이 완전히 분리될 때 “기묘한 모습이 되거나 가장 빈약한 형태의 사랑으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황은 바로 성경에서 드러나는 신앙이 바로 인간에게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사랑을 추구하도록 이끌어준다고 말합니다.

 

교황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라는 신앙고백은 우선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하느님께서 피조물의 존재를 바라셨기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과 그 분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하느님은 철학자의 사고에서 성찰될 수 있는 메마른 신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으로 선택하고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 사랑은 “분명히 에로스”이기도 하고, “또한 전적으로 아가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

 

에로스로서의 하느님 사랑은 예언서, 특히 호세아서, 예레미아서, 에제키엘서 등에서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열정을 약혼이나 혼인의 비유되고, 우상숭배, 불충실, 율법을 어기는 것 등은 매음, 간음 등 배우자를 배신하는 행위로 묘사됩니다. 반면에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충실한 사랑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 안에서 참된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고 사랑받는 기쁨, 진리와 정의 안에 사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는 아가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공로 없이 거저 주어지는 사랑이기도 하지만 특히 “용서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아가페적 차원이 잘 드러납니다.

 

호세아서는 그분의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 대한 하느님의 슬픔과 연민과 함께 이스라엘을 버리지 못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잘 묘사합니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호세 11,8-9). 하느님의 아가페는 당신께 대한 불의마저도 덮어버리시며 끝까지 충실하시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혼인의 사랑으로 비유된다는 점에서 아가서와 창세기의 에로스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관능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여 마치 연애시집 같은 ‘아가서’는 ‘어떻게 이런 내용이 성경에 포함되었을까’라고 논란이 되었던 책입니다. 보통 학자들은 아가서를 원죄 이전의 최초의 남녀 아담과 하와의 결합을 축복하신 창세기 2장의 주석으로 해석하며 인간적인 사랑이 하느님의 선한 창조 사업 안에서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교황은 아가서는 “인간의 원초적 꿈인 하느님과의 결합”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이 결합은 “사랑을 창조하는 일치”이며, 이 결합으로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치 안에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 있지만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에로스는 어느 정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뿌리박고” 있어서 아담이 하와를 찾아 나서며 함께 해야 완전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한 몸’이 됨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창조의 관점에서 볼 때 에로스는 인간을 혼인으로, 곧 유일하고 결정적인 유대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에로스는 그 가장 심오한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분이신 하느님 모습에 부합하는 것이 일부일처제 혼인”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로서의 하느님 사랑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교황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약의 하느님의 활동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몸소 ‘길 잃은 양’, 고통 받는 잃어버린 인간을 찾아 나서실 때 극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행위야 말로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살아가고 사랑하여야 할 길을” 찾아낼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세우신 최후의 만찬에서의 성체성사는 바로 “당신 자신을 바치는 이 행위가 영원히 현존하게” 해 준다고 지적합니다.

 

 

영성체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일치 이뤄

 

그러므로 교황은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그 분을 받아 모시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치는 그 분의 “역동적인 행위”로 들어가는 것임을 지적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혼인의 비유로 표상되는 사랑보다 더 위대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결합됩니다. 더 나아가 영성체는 나 자신에서 벗어나 모든 그리스도인과 일치를 지향하게 해 줍니다. 사도 바오로는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이루기 때문입니다”(고린 전 10,17)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됩니다. “성찬례에서 하느님 자신의 아가페가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성찬에서의 ‘예배’ 자체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사실과 이어서 이웃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아가페적 사랑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에게 새로운 계명으로 다가옵니다. 교황은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통해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지적합니다.

 

누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서 시작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참조)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의 이웃이라는 점과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루카 16, 19-31 참조)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는 관심과 구체적인 행동으로 사랑의 계명은 이행되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신 것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웃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요한1서 4장10절 참조) 그 사랑의 ‘응답’으로 우리도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먼저 깊이 체험하며 그 분과 일치할 때 우리의 아가페도 점차 자라나 이웃에 대한 기꺼운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0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복음살이]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3)

 

사랑의 이중 계명의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당신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사랑의 본질과 성경에서 사랑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찰하고 나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한 우리 자신의 태도에 관하여 두 가지 물음을 던집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보지 않고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입니다. 하느님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냐는 말씀도 있습니다(요한1서 4,20 참조).

 

둘째 질문은 “사랑은 명령할 수 있는 것인가?”입니다. 즉 사랑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의 감정이지 계명이나 의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입니다.

 

첫째 물음에 대해 교황은 우선 요한1서의 말씀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너무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이웃 사랑이 곧 하느님을 만나게 해 주는 길이며,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다는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은 완전하게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먼저 당신을 드러내셨고 아드님을 보내셔서 그분 안에서 당신을 볼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1서 4,10 참조).

 

하느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듯이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 마음에 다가오셨고, 교회 역사 안에서도 사람을 통하여, 말씀, 성사, 전례, 기도, 살아있는 신자 공동체를 통해서 언제나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일상 안에서 그분의 현존을 깊이 깨닫게 되면 우리 또한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첫째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없는 감정을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면서 그분께 대한 사랑의 감정 또한 우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꽃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며 지성과 의지도 함께 작용하게 됩니다.

 

사랑받는 체험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의 감정,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인식, 그분의 의지에 순응하려는 우리의 의지 모두가 사랑의 행위 안에 결합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우리의 사랑이 성숙하면 점차 우리는 하느님과 같은 것을 바라게 됩니다. 사랑 안에서 우리의 의지와 하느님의 의지가 일치할 때 사랑은 계명을 통해 강요되는 의지가 아닙니다. 내 안에 나 보다 더 깊이 현존하시는 주님을 깨닫고 그분과 일치하게 되면 하느님의 의지를 내 자신의 의지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관계 가져야

 

교황은 이렇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성숙하게 되면 이웃사랑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방식으로 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과 내밀한 만남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만남은 의지의 친교가 되어 내 감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순전히 내 눈과 감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18항).

 

교황은 나의 삶에서 하느님과 관계를 갖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을 전혀 볼 수 없으며, 타인에게서 결코 하느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종교적 의무만 다하려고 하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메말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기꺼이 이웃을 만나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면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마더 데레사를 예로 삼습니다. 성녀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 이웃 사랑의 힘을 끊임없이 길어 올렸고, 다시 주님과의 그 만남은 이웃에 대한 봉사를 통해 더욱 생생해지고 심오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계명’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서 생겨나고 우리를 성장시키며, 마침내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일치하게 해 줍니다.

 

이어서 교황은 이웃 사랑은 신자 개개인의 본분이면서 또한 온 교회 공동체의 본분이기 때문에 교회는 공동체로서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초기 공동체 안에서부터 신자들이 공동의 소유를 통해 가난한 이들이 없도록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왔습니다.

 

교황은 사랑의 섬김(diakonia)은 하느님 말씀 선포, 성사 거행과 함께 교회가 타인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 “교회의 존재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표현”이라고 강조합니다.

 

 

사랑 실천은 하느님의 현존을 전하는 것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교회의 공동체적인 사랑의 활동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야 할까요?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첫째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긴급한 요구와 특수한 상황에 무조건 응답해야 합니다. 즉 굶주린 이를 먹이고, 헐벗은 이를 입히며, 병자들을 돌보고 치유하며, 감옥에 갇힌 이들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교황은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전문적 역량을 갖추고, 제대로 인재를 양성하고 지속적으로 돌보는 임무를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문성만으로는 부족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헌신하는 인간애도 동반되어야 함을 지적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사랑 실천은 당파와 이념에서 벗어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실천은 세상을 이념적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이 아니며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사랑을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하는 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거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신앙을 강요하거나 개종 권유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다른 목적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접어 두고서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의 현존을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이 보이는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여야 할 때와 침묵하며 사랑만을 보여 주어야 할 때를 압니다. … 우리가 오로지 사랑을 실천하는 바로 그때에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31항).

 

사랑 실천에 대한 이러한 교황님은 통찰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에게 사랑의 계명은 자신을 억누르는 명령이 아니라 기쁨과 충만함을 주는 내밀한 친교로의 초대입니다. 하느님 사랑 안에서 성숙하여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게 된 신앙인은 타인을 향해 자연스럽게 그 사랑이 흘러가게 합니다.

 

만일 타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나눔부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사랑의 힘을 얻을 수 있는 기도와 영성생활의 시간을 더 충실히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1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복음살이] 사랑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4) 부부의 사랑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980년 발표하신 교황 권고 <가정공동체>에서 사랑은 모든 인간의 기본 소명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으며,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존재로 부르셨고, 인간에게 사랑의 소명을 주셨습니다…인류를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시고 계속 존재하게 하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의 인간성 안에 사랑과 일치의 소명, 능력, 책임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인간의 기본 소명이고 타고난 소명입니다(11항).”

 

여기서 강조한 사랑의 소명은 바로 부부의 사랑 안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교황은 11항에서 “그리스도적 계시는 인간이 사랑의 소명을 실현하는 두 가지 구체적 방법, 곧 혼인(marriage)과 동정 또는 독신(virginity or celibacy)”이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자신을 실현하는 합당한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 이외에 남녀의 성적인 관계는 인간 사랑에 대한 하느님 계획에 부합하지 않으며 사랑의 소명의 실현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즉 부부에게만 유보된 “남녀가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性)은 오직 남녀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완전히 자신을 바치는 사랑의 일부일 경우에만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이며, 만일 전인적인 자기 증여가 결여되고, 어떤 것을 유보하거나 미래에 다른 것을 염두에 둔다면 “온 몸을 내어 준다는 것은 한갓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부 사랑이 요구하는 이 전체성”은 또한 책임 있는 출산과 양육에 대한 요청도 포함됩니다. 출산은 하느님의 창조 의지에 협력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닮은 존재라는 측면에 부여되어 있는 “부성과 모성”의 소명을 실천한다는 의미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남녀의 사랑에서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의를 지키며 책임 있게 출산과 관련된 인간적 가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교황은 그 장소는 바로 “자유롭고 의식적으로 선택된 부부 사랑의 계약인 혼인 뿐”이라고 단언합니다.

 

혼인 제도는 사회가 부당하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대로 아주 충실하게 살고자 특유하고 배타적인 것으로 공인된 부부 사랑의 계약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의 자유가 이 충실성으로 말미암아 제한되기 보다는 온갖 형태의 주관주의나 상대주의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라는 것입니다(11항).

 

 

이 세상의 어떤 권위도 혼인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바꿀 수 없어

 

따라서 교회는 남녀가 인격의 깊은 합의로 맺은 사랑의 계약인 혼인과 이를 바탕으로 세워진 가정은 거룩하며 창조주의 섭리로 세워졌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권위도 혼인의 본질을 훼손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 교회는 혼인계약으로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마태 19.6)이 된 부부는 “인격의 행위의 내밀한 결합으로 서로 도와주고 봉사”할 의무가 있으며, “이 깊은 결합은 두 인격의 상호 증여로서, 자녀의 행복과 더불어 부부의 완전한 신의를 요구하며, 그들의 풀릴 수 없는 일치를 촉구한다”고 가르칩니다(사목헌장 48항). 특히 “혼인 생활에서 부부의 육체관계는 정신적 일치의 표징과 보증”이 되며 “남자와 여자가 부부에게만 허용된 고유하고 배타적인 행위를 통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성적행위는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존재”와 관련되어 있다고 선언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361항).

 

따라서 교회는 부부의 신의를 저버리는 간음(adultery)은 물론 이런 부부사랑의 깊은 유대와 의미가 결여되어 있는 혼인하지 않은 남녀의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사음’(fornication)이 인간의 품위와 부부의 친교와 자녀 출산을 위해 마련된 성의 품위에 크게 어긋난 것이라고 경계합니다. 아울러 약혼자들도 혼인할 때까지 부부사랑의 고유한 애정 표현을 미루며 절제로써 정결을 지키도록 촉구합니다. 이혼(Divorce)역시 창조주가 부여한 사랑의 소명을 어긴 것이며 죽을 때까지 지키기로 한 부부의 약속을 파기한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1968년 발표한 회칙 <인간 생명> 9항에서 인공 피임 등 인위적인 산아제한을 금지하는 교회 전통을 확인하면서 혼인은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을 인간들 사이에서 실현시키고자” 제정한 것이며, “자신을 근본적으로 또 독점적으로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완성시키는 인격적 교류를 이루며,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교육을 위하여 하느님과 협조하는 것”이라고 혼인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부부는 모든 것을 나누는 특별한 형태의 인격적인 우정

 

교황은 이어서 부부로서 나누는 사랑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 부부의 사랑은 “완전히 인간적(human) 사랑”인데, 그 의미는 부부의 성적 사랑이 동물처럼 본능이나 충동이 아니라 인격의 특성인 “자유의지(free will)의 행위”이며 부부는 이를 통해 서로 “하나의 마음, 하나의 영혼같이 되어 인간적 완성을 함께”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둘째, “전체적인(total) 사랑”입니다. 부부는 어떤 부당한 제한 없이 또 “자기만의 편리도 찾지 않고” 모든 것을 나누는 특별한 형태의 인격적인 우정입니다. 부부는 배우자에게 무언가를 받았다는 어떤 조건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우자 자신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자신을 그에게 줌으로써 그를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신의 이익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배우자의 선익을 우선적인 가치로 삼는 태도입니다.

 

셋째, “죽기까지 충실하고(faithful) 독점적(exclusive)”인 사랑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혼인의 유대를 맺으며 이 유대는 평생 동안 좋을 때든 나쁜 때든 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비록 이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세기를 통해 많은 부부가 보여준 모범은 이런 신의는 혼인의 본질에 따르는 것이며 거기서 깊고 지속적인 행복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강조합니다.

 

넷째, “이 사랑은 결실 풍부한 것(fruitful)”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흘러 넘쳐 “새 생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 창조로 이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사랑의 결실인 자녀들은 부모들을 신적 신비를 체험하게 하고 완성으로 이끌어주는 소중한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교황은 이처럼 부부 사랑의 본질은 자유의지로 자신을 배우자의 선익을 위해 조건 없이 온전히 충실하게 내어주는 가운데 부부의 일치를 이루며, 생명 전달이라는 자연법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왜곡된 사랑에 대한 의식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야기되는 성적 일탈과 가정의 붕괴를 치유하기 위해서 교회는 정결의 덕을 요구합니다. 절제력과 자제력을 훈련함으로써 인격적 존재로서 자신의 자유를 올바로 사용하게 하는 정결은 독신 생활을 하는 이들 뿐 아니라 부부를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훈련하고 키워야 하는 덕목이자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인격적인 남녀의 사랑, 진실한 부부의 사랑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성찰해 보면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과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실천하는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12월호, 박정우 후고 신부(가톨릭대학교 종교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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