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교회사 에세이67-76: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9-14 ㅣ No.779

교회사 에세이 (67)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1)

 

 

고대 교회는 비록 많은 양이 소실되긴 했지만, 우리에게 수많은 저술들을 남겨주었습니다. 그 작품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그리고 동방의 여러 언어들, 예를 들면 시리아어, 아르메니아어, 꼽트어 등으로 쓰여졌고, 이런 많은 작품들의 존재는 우연의 소산은 아니었습니다. 살펴보면, 그리스도교는 오직 섬김의 예절로만 건설되지 않았고, 다른 많은 형식들을 통해서 이뤄졌고,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바로 교의, 신앙고백 그리고 선교와 신학 등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유산은 소통의 핵심인 언어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좌우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고대 교회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많은 근원이 되는 저술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저술들의 내용은, 주로 신앙에 관한 설교들, 성경에 관한 주석, 구원의 신비들에 대한 설명, 윤리 도덕적인 안내, 등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관련된 것들과 유다교와 이방 종교 그리고 이단과 그리스도교의 다른 점들을 강조하는 내용들입니다. 이런 내용을 볼 때 고대 교회의 저술들은 교회를 건설, 조직하기 위한, 그리고 그리스도교 믿음의 신조들을 설명하고, 타 종교와 논쟁하며, 선교적 목적을 가진 저술들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초세기 저술들의 종류들은 서한들과 복음, 사도들의 행적과 설교들이 주를 이룹니다. 이어지는 세기에서도 저술과 연설, 대화에 관련된 주석들과 신앙의 고백, 전례적 기도문, 순교자들의 행적과 수도자들의 삶 그리고 공의회의 결정들과 문서들이 전해져옵니다. 이제 우리는 고대 그리스도교적 저술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의미 깊은 날과 이름들을 선택적으로 다뤄볼까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존된 가장 오래된 저술은 바오로 사도가 테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가장 최근, 늦게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은 약 120-130년 경에 저술된 히브리서와 베드로 후서로 기억됩니다. 그리고 성경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그리스도교 저술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에서 코린토로 보내진 것으로, 소위 말하는 ‘클레멘스의 첫 번째 편지’(Ilettera di Clemente)입니다. 2세기 초에 다른 저술들이 전해지는데 이 중에서 특별한 것들로는,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의(Ignatio di Antiochia) 일곱 편지와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까르포의(Policarpo di Smirne) 2개의 편지, 위바르나바의(Pseudo Barnaba) 편지, 클레멘스의 두 번째 편지, 그리고 디다케(Didache), 헤르마스의 목자(Pastore di Erma)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사도적 교부들이라 칭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모든 저술들이 사도시대와 아주 근접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술들은 대부분 공동체 내부를 향한 저술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고 실천적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교의 또는 그리스도인의 윤리, 조직 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내부를 향한 저술의 배경은 이방 종교와 유다교로 다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경고와 이단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권고가 주된 동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저술들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 공동체의 시대적 관심과 배경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저술들이 교회를 안정화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서 솟아나는 주제란 것들도 알 수 있습니다.

 

2-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교의 주변부 집단들에게서 쓰여진 숨겨진 저술들, 소위 말하는 ‘외경’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보편 교회에서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읽혀졌습니다. 이런 저술들은 무엇보다도 호기심과 상상을 충족시켜주는 것들로써, 환상적인 이야기들, 예수님의 유년시절과 부활에 대한 기적 같은 이야기들, 사도들에 대해서도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로 꾸며졌고, 세상의 마지막과 지옥과 하늘나라에 대한 대중적 수준에서의 계시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저술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복음과 사도들의 행적 그리고 종말에 관해 아주 특별한 문학의 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2016년 9월 11일 연중 제24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8)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2)

 

 

우리는 초세기의 그리스도교 저술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런 저술들은 먼저 그리스도교 내부를 향한 것들이 주를 이뤘고 그런 것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지난 호에서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앙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또 다른 저술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순교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글들의 주제와 내용은 주로 고문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상황에서 순교자들이 지켜낸 태도들을 통해서, 박해자들의 면전에서 종교적 우위성과 무너뜨릴 수 없는 신실함과 구원에 대한 신뢰의 우월성을 드러내었다는 기록이었습니다. 이런 저술의 의도는 쉽게 유추가 가능합니다. 즉 어려운 상황에 놓인 그리스도인들을 교육하고 인도하며, 예배의 신실한 실천에 대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술은 고문과 처형, 참수의 과정 등을 상세하게, 그리고 영웅적으로 전해줍니다. 이런 저술들이 역사적 입장과 신화적 측면에서 함께 요약 정리되고 편지들의 형식으로 모아 편집되기에 이릅니다. 가장 오래된 예로 ‘뽈리까르포(Policarpo)의 순교’로 약 2세기 중반에 저술되었고, 사도 교부들에 의해서 새롭게 됩니다. 또 ‘시칠리아 순교자들의 행적들’, 그리고 ‘카르타고의 여섯 명의 순교에 관한 보고서’가 있는데 이것들은 라틴어로 써진 가장 오래된 순교에 관한 기록들입니다.

2세기 중반에 이르면 이제 그리스도교 외부를 향한 저술이 시작되는데, 이렇게 저술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지켜내고자 한 이들을 ‘호교론자’들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 저술들은 모호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을 명료화하고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중상과 비방을 논박하기 위함이었고, 그를 통해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어떤 종교인지를 알리기 위한 목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약간은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였습니다. 이런 호교론자들에 따르면, 이방의 전통에 따라 구원을 찾는 이는 구원에서 결국은 버려짐을 느끼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반대로 구원을 찾게 되며, 풀리지 않는 구원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저술을 통해 이방 종교를 비판하고 그리스도교를 권고하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어리석은 종교이고 미신에 빠진 무지한 백성을 위한 종교’라고 비판하던 당대의 교양인들을 향해 논쟁해 나갑니다.

이런 이유로 호교론자들은 문학적, 사상적으로 높은 수준에서의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비그리스도교인들을 설득하고 논박하기 위해 당대의 철학적, 종교적 사상과 심오하게 그리스도교를 연결 짓고자 합니다. 이런 저술엔 위험이 따르기도 하였는데, 드물게는 그리스도교적 내용의 색이 바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주제들의 핵심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적 비판 혹은 지적인 수준에서의 비판에 대한 응답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교는 당대의 사람들이 주장하듯, 새롭고 어린 종교가 아니라 고대의 이방 철학과 종교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갖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교 사상이 이방 종교보다 우위에 있음을 논증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과 세상, 사람 그리고 인간의 행복과 구원에 관한 개념들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이방 철학자들에게도 무엇보다도 플라톤에 의해서 많은 진리들이 이미 통교되었고, 신적인 로고스가 이미 그들에게 알려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가서 플라톤 철학으로부터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의 발걸음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모든 이가 각자에 합당하게 이성적으로 완성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작품을 저술한 그리스도교의 스승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유스티노(S. Giustino.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타찌아노,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 등이 있었고 그들의 호교론 저술이 보존되어 내려옵니다. 이런 호교론의 흐름은 3,4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이런 작품들이 얼마나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읽혔는지를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것입니다. [2016년 9월 18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69)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3)

 

 

신학 저술들은 그리스도교 내부를 향한 저술 그리고 외부의 비판에 대한 응답의 저술들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단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저술들입니다. 이미 간략하게 언급되었던, 영지주의는 2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릅니다. 이런 이단의 융성에 따라 호교론자들은 영지주의를 대항하여 글을 쓰게 됩니다.

리옹의 주교 이레네오(Ireneo di Lione)는 185년경 영지주의를 거슬러 작품을 씁니다. “이단을 거슬러”(Adversus Haereses)인데요, 그는 이 저술에서 하느님과 성경의 단일성을 드러내었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가능성을 확증하였으며, 교회는 구원과 진리의 보증이며 또 교회가 성경의 신뢰할 수 있는 해설의 원칙들을 발전시켜왔음을 주장합니다. 이 외에도 전통과 그 전통의 계승의 증거들에 대해서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3세기까지 서방 교회는 그리스어로 설교하고 저술하였습니다. 3세기가 지나면서 라틴어가 전례와 설교 그리고 저술에서 중요한 언어가 됩니다. 이 시기에 그들의 신학을 라틴어로 가장 잘 표현한 중요한 신학자들의 하나가 바로 테르툴리아노입니다.(Tertulliano +220)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모두에 능통했었고 그의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은 교회에 잘 보존되어 내려옵니다. 그의 저작은 논쟁적 호교론적 작품과 윤리적 주제들과 실천적 규율에 관계된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해성사와 세례, 그리고 혼인 거행에 관한 것들과 삼위에 관한 교의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몬타니즘(Montanism)으로 넘어간 후에는 그리스도교 삶의 실천적 요구에 대해서 아주 엄격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오히려 보편 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그의 저술들에서 라틴 그리스도교의 전형적 특성을 보게 되는데, 특히 실천 윤리와 규율적인 면에서 분명한 그리스도교 삶의 표현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서방교회에서 마지막으로 그리스어로 저술한 인물은 주교인 히뽈리토입니다.(Ippolito +235) 그는 고대교회의 저술가들 중에 가장 새롭게 보아야 할 인물입니다. 그는 엄격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고 삼위일체와 고해성사의 문제로 주교 칼리스토와 논쟁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모든 이단들에 대한 논박’(Refutatio omnium haeresium)에서 다양한 이단들을 묘사하였고, 그 이단들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그는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대부분 소실되었고, 그의 다니엘서 주석은(약 204년경) 성경의 그리스도교적 주석의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또한 그의 ‘사도적 전승’은 교회적 구조와 질서에 대해서, 그리고 로마 교회의 일반적 실천에 대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들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 서방의 라틴 저술가로는 노바찌아노(Novaziano)가 언급됩니다. 그는 250년경 로마 교회의 뛰어난 사제로, 우리에게 전해진 그의 주요작품은 ‘삼위일체에 관하여’로 서방 교회에서 삼위일체의 개념이 구조화되기 이전, 이미 성숙된 놀라운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해성사와 하느님의 교의의 문제로 정통 교회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Cipriano)는 주교 직무의 역사에서 아주 두드러진 인물로, 고해성사와 이단들과의 세례에 관한 논쟁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합니다. ‘교회의 단일성에 대하여’ 그리고 ‘배교자들에 대하여’는 그의 관점과 노력들을 잘 보여주는 저술들입니다. 박해와 비판에 직면한 이런 시대에서 코스탄티노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교회의 저술도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됩니다. [2016년 9월 25일 연중 제26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0)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4)

 

 

고대 교회의 저술이 이제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미루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인데요, 바로 디오클레찌아노(Diocleziano) 황제의 박해 시대에서 바로 코스탄티노(Costantino) 황제의 평화의 시대로의 변화가 이뤄진 지점이죠. 이제 그리스도교는 모든 종교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 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그리스도교는 이제 그 시대 사람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서 높은 수준에서의 논쟁적인 저술들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시대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아르노비오(Arnobio)는 ‘민족들을 거슬러’(Adversus nationes)라는 7개의 책을 저술합니다. 이 저술에서 그는 2-4세기까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고발과 비난을 거슬러서,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리스도교는 모든 재앙들의 원인이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전쟁과 전염병, 경제적 위기 등을 주제로 한 라탄찌오(Latanzio)가 ‘신적인 교육’에 관한 일곱 개의 저술을 하였습니다. 특히 ‘박해자들의 죽음에 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에서는 마지막 날에 대한 공적으로 언급하였고, 그 비참함 그리고 의로움을 묘사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황제들의 우울한 마지막에 대해 묘사합니다. 이런 그의 저술은 박해와 박해 이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포된 승리의 감정과 느낌들이 아주 잘 표현된 자료입니다.

2세기 마지막 10여 년 경, 고대 세계의 학문, 문화의 중심지 중의 하나인 나일강 주변의 삼각주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Alessandria)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시작하여 또다른 환경에서의 저술들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교적 신학이 이제는 철학적 사고의 형식으로 표현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를 들자면 시대의 학문적인 비판에 적절하게 대응하고, 그것들에 대해 논쟁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교양인들의 승인을 얻어 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선교적이고 호교론적인 방향에서의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알렉산드리아의 여러 스승들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이 스승들은 철학적인 비판에 대응하여 그리스도교를 제시합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교에 관심있는 청취자들에게 가르치면서, 다른 철학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참된 철학’처럼 소개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공적인 임명을 받지 않은 이곳 알렉산드리아 스승들의 신학과 교의는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특별한 용어를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학교의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 전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학교의 신학은 저술 들을 통해서 또한 그 꼴을 갖추게 됩니다. 가장 먼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알렉산드리아의 스승은 판테노(Panteno)이지만 우리가 저술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첫 번째 스승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렌멘스(Clemente Alessandrino +215)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특별히 3개의 위대한 작품들이 우리에게 보존되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 대한 권고의 대화’, ‘교육자’ 그리고 ‘잡문집’이 그것입니다. 이 작품들에서 클레멘스는 철학과 이방신화를 비평하였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와 철학의 연결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스승인 그는 또한 교양인으로서 그들이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비그리스도교적 방법과 그들이 관심갖는 문화적인 방법으로 말하고 글을 썼습니다. 그 방법들과 개념들은 철학의 통상적인 것들 이었습니다. 클레멘스에게 있어서 각각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화는 영지적인 사고의 원동력에 의해서 자극받은 것으로, 다시 말하면 ‘앎’에 대한 열정적 연구였던 것입니다. 클레멘스는 그리스도교를 ‘영지’라 부르기를 좋아했고, 앎, 모든 앎들 중에 ‘최고의 앎’이라 칭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는 ‘참된 영지’ 였던 것입니다. 이 영지는 하느님에 대한 앎으로써 삶 전체를 통해 깊게 해야 하는 연구였던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같은 수준의 앎에 이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2016년 10월 2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1)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5)

 

 

지난 호에 이어서 살펴보고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학교)가 절정에 이른 것은 바로 오리게네스(Origene +254)의 작품들을 통해서 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그리스도교 스승이었습니다. 그의 방대한 저작들은 아주 중요한 부분들이 보존되어 있고 그의 저작은 아주 조직적인 형태로 구성되었습니다. 4개의 책으로 된 ‘원리에 관하여’(Depricipiis)는 신플라톤적, 영지주의적 직관들의 도움을 통해, 과격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들의 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교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과 길은 어떤 변형이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부분은 훗날 그에게 어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또 같은 작품은 성경 텍스트의 다양한 의미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었습니다. 학문적 특성의 해설들과 난해한 주석적 작업을 통해서, 하지만 또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평범한 강론 등 에서도, 오리게네스는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교 교양인들과 평범한 신자들을 성경의 이해에 이르게 하기 위해 십 여 년 간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오리게네스는 클레멘스보다 더 교회의 사람으로서 직접적으로 이런 작업에 임했습니다. 그는 그의 곁에 있는 지식인들에게, 또한 그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마치 호교론적 저술의 모범 답안처럼, 이방 비평가인 ‘첼수스를 거슬러서’(Contra Celsum)에서 참된 교의의 설명을 통한 대화와 나아가 이단들을 반대하여 논쟁적인 저술들을 하였고, ‘순교에의 격려’(Incoraggiamento al martirio)와 ‘기도에 대하여’(Sulla preghiera)와 다른 훌륭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의 주석적 작품들, 특히 ‘하느님께로의 상승’이라는 그의 신비적 개념은 4-6세기의 수도생활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리게네스는 구분하기를 “아주 적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자신 안에 완덕과 영지에 이르기 위한 충분한 열의와 힘을 갖고 있고, 더 많은 이들은 ‘단순한 신앙’에 만족하며 나아가 아주 최소한의 도덕에 만족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사후 오리게네스는 저술에 드러난 교의에 있어서의 몇몇 사소한 이유로 명예가 손상되었고, 마치 이단자처럼 단죄받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많은 사상들과 원천적이고 풍부한 자극 그리고 새로운 성격의 이런 저술들은 그리스도교의 해석에 있어서 헬레니즘적 철학을 사용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일련의 작업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교회의 역사란 측면에서 뿐 아니라 문화와 문명적 관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라는 형식 안에서 그리스도교와 고대의 만남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의는 그리스의 개념(Concetti)과 범주(Categorie)들을 사용하면서 그렇게 형식화되어 갔습니다.

 

이 현상들이 비단 여기에만 드러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호교론자들의 시대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들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런 만남은 신학의 역사에 대한 특별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런 플라토니즘적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드러내고 설명할 가능성에 대한 첫 번째 시스템적인 시도였고,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의 방법들은 당시의 주변 철학의 방법들과 교류하면서 성경의 은유적 해석을 새롭게 꽃피웠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제자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Eusebio di Cesarea)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에 있어서 새로운 장르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당시 4세기에 ‘교회사’(Storia ecclesiastica)를 저술했습니다. 에우세비오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를 통해서 역사의 정점에 이르러 진리를 온전히 드러내는 그리스도교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아주 귀한 자료와 정보 그리고 사료들을 수집해 놓았습니다. 이런 칭송은 그가 코스탄티노 황제 앞에서 취한 감격에 찬 태도를 설명해줍니다. 그는 ‘코스탄티노의 생애’(Vita Costantini)와 찬양의 연설을 작성하는데, 거기서 에우세비오는 코스탄티노야말로 교회의 역사적 승인에 결정적 공헌을 하는 하느님의 도구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소쪼메노(Sozomeno)와 치로의 테오도레토(Teodoeto di Ciro)가 역사를 저술하기에 이릅니다. [2016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2)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6)

 

 

약 4-5세기가 되면 동방 지역은 큰 논쟁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논쟁의 쟁점이 되었던 것은 주로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을 둘러싼 신학적 내용들이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논쟁들은 방대한 양의 신학 저술을 촉진하는 결과를 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해서 그리스도교 저술과 신학적 토론들은 이 시대에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328년부터 알렉산드리아(Alessandria)의 주교였던 아타나시오(Atanasio, 295-373)는 교회적 정치인 활동 뿐 아니라 저술 분야에서도, 특히 교의 논쟁에 있어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있던 이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는 공의회와 자기 신학의 승리를 목적으로 하여 ‘아리아니즘 추종자들을 향한 연설’(Orationes contra Arianos)과 역사와 니체아 공의회의 결과들에 대해 저술하였습니다. 4세기 교회는 아직 이방과 히브리적 개념들과의 대결에서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호교론적인 현실 상황에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오 또한 이런 교회에 공헌을 합니다. 그의 저서로,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의 삶에 대한 전설을 들려주는 ‘안토니오의 생애’(Vita Antonii)는 영성의 영역에서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도자들의 삶의 일반을 포함하고 있는 이 작품은 수도 생활의 이상을 묘사함으로써 동방은 물론 서방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대와 후기 고대의 저술들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의 역사에서 특이한 점이 이 시대에 나타나는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저술, 즉 무명 저술과 저술가의 참 이름을 감춘 위명, 혹은 가명 저술 현상이 그것 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작품들의 참 저자를 알 수 없고, 확신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여기에 더하여 서적들의 파괴 현상도 있었습니다. 책을 파괴시키는 직접적인 이유는 그 책들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들에 문제가 있거나,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방인들의 저술일 경우에 행해졌습니다. 또한 이단 서적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음은 명약관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아리오(Ario) 논쟁과 같은 경우, 온전하게 보존된 저술은 하나도 없으며 오직 파편들만이 그의 적대자들의 작품 안에서 인용의 형식으로만 담겨졌고, 남겨졌을 뿐입니다. 또한 역으로 아주 극단적인 반 아리안주의자들의 저술들, 예를 들면 안치라의 마르첼로(Marcello di Ancira)의 저술들도 파괴되거나 혹은 아주 짧은 파편만이 보존되었습니다. 이처럼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도교의 저술의 역사에서 어쩌면 ‘기획된 상실’이라 칭해야 할 것입니다.

4세기 중후반에서 5세기 초의 시대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이 활짝 꽃 핀 시대였습니다. 신학적 저술의 관점에서도 최고 수준의 저술들이 이뤄졌습니다. 이 시대의 ‘고전들’(Classici)은 무엇보다도 카파도키아의 -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 지역 ? 세 교부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들은 바로 체사레아의 바실리오(Basilio di Cesarea)와 니싸의 그레고리오(Gregorio diNissa)와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Gregorio di Nazianzo) 형제들입니다. 그들 셋 모두는 얼마 동안 주교직에 있었고, 그들의 작품들은 1,2차 공의회의 교의적 논쟁의 전 부분에 해당하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니체아 공의회(Concilio di Nicea)의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하는 저술을 하였고, 콘스탄티노플 신경(Credo di Costantinopoli)의 신학적 작업에 결정적인 방법으로 공헌을 하는 저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신학의 영역은 물론 실천의 영역에서도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그들의 작품들은 은수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영성에 있어서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저술활동을 하였고, 후세의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교회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 신학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이는 니싸의 그레고리오라고 평합니다. 그는 반 이단적 개념의 역할 해주는 신학적 작품들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던 것입니다. [2016년 10월 16일 연중 제29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3)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7)

 


지난 호에서 우리는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의 저술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 작품들의 다양성과 내용의 우수성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나아가 그들 저술들은 교의적 내용에 있어서는 물론이고, 저술의 학문적 수준과 수사학적 측면에서도 또한 두드러졌습니다.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이방 세계의 저술가들에게도 그것을 드러냈는데, 그리스 철학에서도 커다란 가치를 지니는 주석학적 저술과 학문적 가치들을 하나로 하였고, 나아가 그들은 이것들을 그리스도교적 주제 안에서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입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 플라토니즘이 논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저술은 그리스도교 후기 고대 저술에서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깁니다. 다른 방향에서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은 오리게네스와 아타나시오 그리고 다른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전통의 발자국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Cirillo di Alessandria)의 주석들과 반네스토리오 논쟁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알렉산드리아만큼 고대 저술에 있어서 중요한 또 다른 학파가 있었는데 바로 안티오키아(Antiochia) 학파입니다. 이 학교, 학파라는 용어가 여기에서는 동질적 특성을 가진 신학적 전통을 가리키는 한정적인 말로 사용됩니다. 안티오키아 학파의 전형적 특성은 성경의 해석에서 분명한 방법으로 드러납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우의적 해석을 폭넓게 사용했다면, 안티오키아 학파의 사람들은 성경 텍스트의 취지에 중점을 두는 좀더 엄격한 역사적 해석의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우의적 방법을 사용하기는 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두 개의 전통들은 서로 다른 신학적 비전을 갖고 작업하였고, 특히 그리스도론, 즉 그 시대의 가장 예민한 교의 주제에서 서로 다른 선택들로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또 말해 볼 수 있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이 두 학파가 서로 다른 신학적 전망에서 출발했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반대로 주석과 교의에서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갖고 발전하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파들의 융성기에는 서로 간에 끊이지 않는 논쟁과 토론이 있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좁은 의미에서 신학적인 영역을 벗어난 어떤 다른 동기들이 있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입장도 있었던 것입니다.

안티오키아 학파 전통의 여러 저술가 중에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은 타르소의 디오도로(Diodoro di Tarso, +394)였습니다. 그의 논쟁적 작품들과 성경 주석은 작은 파편들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가 얼마 후에 네스토리오와 벌인 계속된 논쟁 중에서 그의 저술들이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네스토리오의 스승을 더욱 심하게 치는 운명을 가져오는데, 그는 바로 안티오키아의 가장 유명한 주석가이며 네스토리오의 스승 테오도로(Teodoro di Mopsuestia, + 428)였고, 이로 인해 테오도로의 특히 성경에 대한 저술은 아주 적게 보존될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Giovanni Crisostomo, +407)도 안티오키아 학파에 속하였지만, 그의 상황은 그래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그의 많은 강론들이 전해졌고, 그 외에도 사제직과 교육 그리고 봉헌생활 등에 관한 간단한 저술들과 편지들이 보존되었습니다. 또한 앞서 언급된 네스토리오의 저술의 일부가 보존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론이 이단으로 판명된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엔 억울한 오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의 다른 한 영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도자들의 저술로 그것은 이집트에서 꽃을 피웁니다. 수도생활은 금욕의 실천만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고, 수도생활 자체가 저술에 이르도록 신학과 영성에 큰 관심을 길러주고 있었습니다. 이 수도자들 중의 가장 뛰어난 저술가를 들자면, 에바그리오 폰티코(Evagrio Pontico, 346-399)입니다. 그는 오리게네스에게서 영향 받았고 그것이 그의 신학의 뿌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5차 콘스탄티노플 보편 공의회(533)에서 오리게네스와 함께 단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수도생활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금욕과 신비, 그리고 신심의 영역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016년 10월 23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4)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8)

 

 

수도 생활 영역에서의 그리스도교 저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호에서 ‘에바그리오라는 저술가가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그의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그는 수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성경적 구절들과 금언들을 저술했습니다. 그로부터 영향 받은 몇몇의 후예들, 그의 제자 팔라디오(Palladio, +431)처럼 자신의 글에서 수도 생활과 이상들에 대해서 저술하였고, 요한 카시아노(Giovanni Cassiano, +430)는 서방에서 동방 수도자의 삶에 대해 소개했고, 사막 교부들과의 대화들을 기록하였습니다. 5세기 말에 가서는 유명한 수도자들의 삶의 모델들과 그들의 이야기들에 대한 집대성이 이뤄집니다(Massime dei Padri). 그리고 서방에 도입된 이상적 수도 생활에 대한 노력은 특히 동방지역 사막 교부들의 이런 저술들과의 관련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서방 교회는 동방 저술로부터 형식에 있어서는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동방 신학에서 교의적인, 주석적 그리고 역사적인 저술들이 많이 유입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힐라리오(Ilariodi Poitiers,315-367)는 황제로부터 귀양 보내진 소아시아(Asiaminore) 지역에서 동방을 접하면서 그가 저술한 아리안 논쟁과 주석 작업들이 영향을 받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머물렀고, 그곳에서 그가 접하고 있는 동방 교회의 신학적 비전들과 교의적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런 동방 교회의 영성과 신학의 수용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을 말하라면, 밀라노의 암브로시오(Ambrogio di Milano) 주교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성경에 관한 작업들에서, 필론과 신플라토니즘 철학의 영향 속에서 성경 주석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구조를 건설했던 그리스 교부들의 발자국을 뒤따르고 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또한 금욕적, 교의적 그리고 전례 교육적 주제의 글도 썼습니다.

 

서방 교회가 동방을 수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아퀼레이아의 루피노(Rufino di Aquileia)일 것입니다. 그는 동방 교회의 서적들의 전권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여 서방 사람들이 접근할 길을 열었습니다. 그것들은 오리게네스의 저서들이 주를 이뤘지만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와 에바그리오 폰티코의 저서와 교회사들과 수도자들의 서적들도 있었습니다. 예로니모(Girolamo, 347-419)도 또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번역가였습니다. 교회에서 아직도 사용 중에 있는 그의 불가타(Vulgata)는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히브리 구약 성경을 번역하였고, 383년에 복음들에 대해서 이전 판본에 대한 라틴어 감수를 하였고, 그들 사이의 부조화를 검토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불가타에 의해서 대체 되기에 이릅니다. 예로니모는 그리스 교부들의 텍스트들도 번역하였고, 수도 규칙들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주석서들을 썼고, 그들 적대자들의 교의와 인물들을 거슬러 논쟁적인 책들을 썼고, ‘교회 저술가들의 목록’과 ‘수도자들의 생애’ 그리고 편지들을 남겼습니다. 예로니모의 저술들은 그의 박식함과 능력을 잘보여준 주목할 만한 수준의 것들이었습니다.

 

4-5세기 라틴 그리스도교회의 저술은 시 분야에서도 이뤄집니다. 이 점에서 유의미한 것을 찾는다면, 동방에서는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 만이 있다면 서방에서는 오히려 아우소니오(Ausonio,+393), 프루덴지오(Prudenzio,+405)와 놀라의 바올리노(Paolino di Nola,353-431)이 있다는 점이고, 이들 모두가 이베리아 반도의 지역의 서방 출신이며, 이들이 이미 적합한 주제에 상응하는 시적 형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살펴볼 인물은 라틴 교회, 서방 교회의 가장 중요한 저술가인 아우구스티노 입니다. 이 짧은 글에서 요약할 수 없는 인물로서, 그도 동방 교회의 자양분에 빚을 지고 있는 인물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주요 작품들과 사상을 다음 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016년 10월 30일 연중 제31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5)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9)

 

 

지금 우리는 고대 교회의 저술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최고봉 중의 하나는 아우구스티노(Augustinus)일 것입니다. 그도 또한 동방 그리스도교의 신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노의 사상과 저술이 그것에만 의존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 저술에서 신학적 측면에서의 독창성이나 원천성은 아주 두드러졌고, 빌려온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고백의 웅변가인 아우구스티노는 다양한 웅변술과 언어술의 달인이었으며 이런 재능이 저술의 높은 수준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와 오리게네스와 같은 저자들의 풍부한 생산성은 그분들이 많은 속기사와 달필가를 갖고 있음에 기인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작품들은 그의 생애 중에도, 그리고 후세에도 논쟁적이고 역동적인 토론의 대상들 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정확한 언어들을 통해 자신의 활동을 표현할 줄 알았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작품 목록의 첫째는 397년에서 401년 사이에 저술된, 13개의 책으로 이뤄진 ‘고백록’(Confessioni)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기도와 명상 그리고 세례에 이르기까지, 자기 삶의 변화무쌍한 여정과 신앙에로의 돌아섬과 입교 등을 기억 안에서 면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합니다. 이런 회고의 시선은 또한 ‘재고론’(Ritrattazioni)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의 자기비평목록인 이 작품은 늙은 아우구스티노가 독자들 앞에 자신의 저술들을 내어놓고 각각의 작품의 내용과 기회, 그리고 목적을 제시하고 동시에 수정과 보완을 가하였습니다. 회개 때로부터(386년경) 400년에 이르는 동안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그리고 악과 인간 영혼의 문제에 관한 철학적 작품을 집필합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몇몇의 호교론적 저술들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합니다. 그 하나가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인들을 거슬러’입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하고 방대한 작업은 22개의 책으로 이뤄진 ‘신국론’(De Civitate Dei)으로, 413년부터 427년 사이에 작업하여 발표하고 다시 새롭게 작업하였습니다. 410년 야만족(Alarico)에 의해 로마가 점령되었고, 이 때가 완벽한 기회였던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제 다시 시작되고 새로워진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악의적 고발에 대항하고자 합니다. 즉 근저에 로마의 패망이 제국의 그리스도교화에 따른 책임이란 고발에 대항하기 위해 글을 쓴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서 구분된 세계에 따른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신학을 묘사하고자 합니다. 세계는 철학적 관점에서 두 개의 왕국으로 갈라져 있는데 바로 ‘하느님의 왕국’(Civitas Dei)과 ‘지상의 왕국’(Terrena civitas o civitas diaboli)입니다. 모든 역사 안에서 진정한 사건은 이 두 세력의 싸움입니다.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그리고 도덕적 영역에서의 이 싸움은 겸손된 신앙과 하느님 앞에선 인간의 오만과 사이의 다툼으로 표현됩니다. 역사는 그러므로 인간들 편에서 하느님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드라마이며 구원과 상실의 역사란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적 전망의 테두리 안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세속의 역사를 과소평가하기도 합니다. 그에게 이 세상은 임시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역사는 점진적인 추락을 하고, 마지막에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410년대의 역사적 위기는 그가 이런 생각을 갖도록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역사의 내부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한 두 왕국 사이의 경계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통해서 그 나라의 결정적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의 이런 사상은 좀 더 단순한 형식을 취해 중세의 근본적 개념이 됩니다. 즉 국가와 교회라는 두 개념으로, 두 세계로 자리하고, 그의 사상은 중세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2016년 11월 6일 연중 제32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회사 에세이 (76) 고대 교회의 신학 저술 (10)

 

 

중세의 근본 형성에 단초가 되었던 신국론을 저술한 아우구스티노는 이후에도 신앙 고백과 혼인에 관한 것, 그리고 신앙과 일의 관련성에 관한 것들과 다른 주제들을 포함한 일련의 교의적 작품들을 저술합니다. 15개의 책으로 된 ‘삼위’(Trinita)에 관한 저술은 대단한 노력과 야심에 찬 작품으로써(399-419년 사이에 저술), 4세기의 소위 ‘삼위의 심리적 신학’이라 불리는 교의적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 원천적인 공헌을 한 저술이었습니다(심리적 신학이란 삼위의 협력을 인간 영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과 같은 유비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에는 교의에 관한 시대적 토론과 논쟁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마니를 반대하여’(Antimanichei)에서는 자신이 몇 해 동안 머물렀던 마니교의 근본적 입장과 거리를 둡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악의 문제와 구약의 신학적 의미와 성경의 올바른 해석, 그리고 실질적 강생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 다룹니다. 또한 ‘반도나티스트’(Antidonatisti) 저술들에서는 거룩함의 이상과 죄, 그리고 교회와 성사의 개념들을 분명히 합니다. 특히 약 420년경부터 아우구스티노는 펠라지아노를 반대하는 저술들에 몰두하게 되는데, 당시 교회는 펠라지아노주의자들과 아프리카 교회의 전통과 원죄와 은총,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예정설과 어린이들의 세례에 관한 펠라지아노의 개인적 신학 개념들에 대해 논쟁 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411-412년 아우구스티노는 3개의 책을 저술하는데, ‘죄인들의 가치에 대하여’(sui meriti peccatori)와 ‘죄의 용서’(il perdono dei peccati), 그리고 ‘어린이의 세례에 대해서’(il battesimo dei bambini)를 저술합니다. 좀 더 늦게 418년, 2개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하여’(Sulla grazia di Cristo)와 ‘원죄에 관하여’(Sul peccato originale)를 저술합니다.

 

이런 여러 저술들에서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최소한의 협력, 즉 어떤 공로도 없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그렇다고 인정하는 은총이 유일한 구원의 원천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원죄와 개인적인 죄는 인간의 본성을 깊게 부패하게 했고, 이로 인해 인간은 선을 행할 능력이 부족하고 탐욕에로 기우는 경향이란 유산에 공고하게 지배당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저작들에서 보이는 이런 사상은 교회 신학의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외에도 아리안이단에 대항해서도 몇 개의 저술을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경 주석에 관련된 저술도 남깁니다. 네 개의 책으로 이뤄진 ‘그리스도 교의에 관하여’(Sulla dottrina cristiana)를 396-426년 사이에 저술하는데, 이것으로 글 해석의 방법들과 가정들을 명료하게 합니다. 이 저술들에서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입장이 형성됩니다. 아우구스티노는 여기서 성경의 그리스도교적 연구를 위해서 고대 문화를 유용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작업합니다. 우리는 그의 구약성경에 대한 열 두 개의 주석 작품들을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에 관하여’(il significato letterale del libro della Genesi) 등입니다. 또한 신약에 관한 두 개의 저술이 있는데, 산상설교에 관하여(Sul discorso della montagna)와 요한 복음에 관한 연구(trattati sul vangelo di Giovanni)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모든 작품들은 모두 주의깊게 쓰여졌고, 아주 중요하고 어려운 저술들은 몇 해에 걸쳐서 저술된 것들입니다.

 

이 외에도 라틴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저술가를 들자면 두 명의 교황이 있는데, 레오 대교황(Leone I, 440-461)은 주로 신학적 논쟁과 정치적 상황들에 대한 그의 개입과 조정을 담은 편지들과 강론들을 남겼고, 그레고리오(Gregorio I, 590-604) 교황은 800개의 편지들을 남겼는데 대부분 그의 사목적 실천의 주제를 담고 있는 편지들입니다. 이후에도 라틴 그리스도교 저술의 역사는 계속되었지만, 4-5세기의 그런 창조성과 원천성에는 미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6년 11월 13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 주일) 청주주보 2면, 김종강 시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3,41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