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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과 신앙: 드젠의 척도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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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7 ㅣ No.291

[과학과 신앙] 드젠의 척도 개념

 

 

성경 속 척도 개념

 

하느님 성소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유독 ‘측량’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소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기뻐하며 스켐을 나누고, 수콧 골짜기를 측량하리라’”(시편 60,8; 108,8).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동정심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그 안에 나의 집이 다시 지어지리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측량줄이 예루살렘에 펼쳐지리라’”(즈카 1,16).

 

“그리고 나에게 지팡이 같은 잣대가 주어지면서 이런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일어나 하느님의 성전과 제단을 재고 성전 안에서 예배하는 이들을 세어라’”(묵시 11,1).

 

저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측량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무언가 모를 두려움을 느낍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심판을 회피할 수가 없기’(집회 17,15 참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올바른 심판을 받게 되고 의로운 행동들을 빛처럼 빛나게’(집회 32,16 참조) 하시는 사랑이시며 자비로운 하느님이시지만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제 행실에 따라 심판하신다.”(집회 16,12)고 하셨으니, 우리의 행실은 심판의 잣대가 되는가 봅니다.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위 말씀처럼 하느님의 측량자는 우리의 행실에 대해 심판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과학기술에서 측량자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과학기술에서 측량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는데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측량자는 이런저런 ‘기준’을 제시하는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키가 크다’고 하거나 ‘작다’라고만 하기보다, ‘키가 170cm이다.’라고 하면 어느 정도인지를 어림잡을 수 있습니다. 그냥 ‘무겁다’고 하거나 ‘가볍다’ 하는 대신, ‘20kg이다.’, ‘100kg이다.’ 하면 얼마나 무거운지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곧 어떤 ‘척도’를 기준으로 하는 측량자는 매우 편리하면서도 유용한 과학기술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른바 첨단 과학기술을 보면 어떤지요? 내용 자체도 쉽지 않지만 그 현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수학을 자주 사용하는데, 여기서 사용하는 방정식은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집니다. 특히 현대 물리학이나 각종 공학기술 등에서 사용하는 방정식을 보면 너무 어렵습니다.

 

보편적인 현상을 설명하려 들면 들수록 수학은 더 어려워지고 방정식에 등장하는 변수들은 더 많아집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기술을 쉽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방편으로 수학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는 해설 방식일수록 대중적으로 큰 지지를 받게 됩니다.

 

‘아인슈타인’ 하면 ‘E=MC2’란 식을 떠올릴 것입니다. 이 식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에너지와 질량에 관한 등가(等價) 공식입니다. 상대성이론이니 양자론이니 하는 현대 물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이 식은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널리 응용될 정도로 우리에게 이미 상식이 되어버린 식입니다. 그 정확한 의미는 잘 몰라도 말입니다.

 

 

드젠의 척도 개념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젠(Pierre-Gilles de Gennes, 1932-2007년)은 1991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분입니다. 그분은, 노벨상 수상식에서 스웨덴 왕립학술원이 ‘이 시대의 뉴턴’이라고 칭송할 만큼 탁월한 물리학자였습니다. 액정에 관한 그의 연구는 오늘날 액정디스플레이(LCD) 기술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초전도체와 고분자 물리학, 미세 물질, 뇌 기억 물질 연구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그의 업적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현대 물리학이나 현대 화학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기술은, 대부분 복잡한 수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문외한인 일반사람들은 먼저 수식만 보고도 지레 겁먹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기술을 어렵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드젠은 아무리 어려운 물리적, 화학적 현상이라도 아주 간단한 수식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구하던 액정과 초전도, 고분자 등의 많은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에 이른바 척도(scaling) 개념을 도입하여 노벨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척도 개념이란 가령 어떤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이라도 모두 어떤 기본 성질의 몇 배, 수십 배, 수백 배 등으로 관련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측량의 기본 잣대를 정하고, 어떤 성질이 그 기본 잣대의 몇 배가 되는지만 과학적으로 알아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아인슈타인의 E=MC2이란 에너지와 질량에 관한 등가 공식도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척도 개념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빛의 속도(C)라는 기본 잣대만 알면 그 잣대를 제곱하면 에너지(E)라는 물리적 값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척도 개념의 기본입니다. 드젠은 아인슈타인의 에너지 - 질량 등가 방정식과 같이 아무리 복잡한 성질이라도 모든 물리량을 어떤 기본적인 잣대의 몇 제곱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척도 개념을 일반화시켰습니다.

 

드젠의 척도 개념은 제가 전공하는 고분자 과학에서도 엄청난 복음이 되었습니다. 이 개념이 제안되기 이전에는 어떤 고분자의 물성을 해석하려면 슈퍼컴퓨터로도 일주일 이상을 돌려야 겨우 답이 나올 수 있는 어려운 문제도 E=MC2와 같은 간단한 수식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드젠에게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드젠은 아무리 어려운 과학 문제라도 이를 복잡한 수학 공식 대신에 아주 간단한 척도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함으로써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입니다. 사실 척도 개념 자체는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따라서 어찌 보면 별것 아닌 것같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위대한 발상의 전환이며 일반 대중들에겐 과학기술을 우리 생활 속으로 깊숙이 전파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드젠과 과학의 대중화

 

과학의 대중화는 어려운 과학기술을 사람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작업을 말합니다. 사실 과학 대중화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지난 호에도 말씀드렸듯이 통합적 지식이 부족한 과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연구결과를 과학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특별한 재능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에서 드젠은 탁월한 유머 감각을 지닌, 뛰어난 대중 강연자이며 과학 대중화의 선두주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많은 고등학교를 직접 방문하여 청소년들에게 과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2년 동안 150시간 이상을 강연하였다고 합니다. 어떤 어려운 물리학 법칙이나 현상도 척도 개념만 가지고 쉽게 설명하니 고등학생들도 그 강연을 즐겼다고 합니다.

 

저는 1997년 해외 연수 기간 중에 사흘 동안 그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맛보았습니다. 고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써 고체 물리학의 기초로부터 재료의 첨단 응용에 이르기까지 망라한 그의 강의는 청중을 매료시킬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아무리 복잡한 이론이라도 그 원리를 간단한 수식 몇 줄로 단순화시킬 수 있는 과학적 연구에 대한 접근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로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저명한 고전 물리학자들의 간단한 수식 모델을 사용하여, 21세기에 적용되는 첨단 이론을 끌어냈습니다. 두세 개의 변수를 이용한 간단한 공식만으로 모든 현상을 정확히 설명해 내는 단순하고 명확한 논리전개는 정말 경탄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강연을 들으면서 비단 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가정이나 기업, 심지어 한 나라의 경제, 정치, 사회 문제 등 다른 문제에도 드젠이 발전시킨 바와 같이 척도 개념을 잘 활용하면 어떠한 어려운 문제도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수학은 물론이고 생명과학, 대기과학, 지질학 같은 다른 과학 분야는 두말할 나위 없고, 요즈음은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심지어 심리학 같은 분야에서도 척도 개념이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영에도 척도 개념을

 

가정이나 사회, 기업 등의 경영자들이 난마처럼 얽힌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였을 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깊이 고뇌하게 됩니다.

 

국가 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수록 오히려 그 문제를 단순화시켜 무엇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인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른바 가장 근본적인 측량의 잣대, 곧 척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의 목록을 만들고, 도출된 문제가 그 잣대의 몇 배 정도의 난이도가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난이도의 정도에 따라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순차적으로 하나씩 하나씩 내어놓자는 것이 척도 개념적 사고일 것입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면 문제 해결의 시기나 소요 비용이 잣대가 될 수도 있겠고, 국민의 정서나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잣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품은 걷어내고 척도의 개념에 따라 도출된 문제 해결 방식을 과감히 실행에 옮기는 발상의 전환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양 진영 사이에 끝이 보이지 않는 소모적 갈등이 상존합니다. 그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기념일 가운데 하나가 5월 18일입니다.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1980년의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연히도 드젠의 기일 또한 5월 18일입니다.

 

답답한 우리 사회의 이념 문제도 드젠의 척도 개념에 따라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다 보면, 국민이 모두 이해할만한, 속 시원한 해결책이 나올 것이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해봅니다.

 

* 하창식 프란치스코 - 부산대학교 고분자공학과 교수. 부산가톨릭문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호주 퀸즐랜드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접착 및 계면학회 회장, 부산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경향잡지, 2016년 7월호, 하창식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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