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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75: 요셉 피츠마이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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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24 ㅣ No.442

[20세기를 빛낸 신학자들] (75) 요셉 피츠마이어 (하)

성경 연구, 상아탑 넘어 교육과 종교간 대화에도 앞장



피츠마이어 신부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


지난 호에서도 언급했듯 신약성경의 아람어적 배경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는 고대 유다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에게는 보고(寶庫)와 같다. 특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약성경의 호칭에 대한 문헌학적 고찰」(The New Testament Title ‘Son of Man’ Philologically Considered)이라는 논문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이 생겨난 배경이 되는 유다교를 이해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욥기 타르굼에 대한 피츠마이어 신부의 연구와 아람어 서간학에 대한 연구는 제2 성전기와 초기 랍비 시대 유다인의 사고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열쇠 역할을 했다. 그래서 유다인 학자 로렌스 쉬프만은 피츠마이어 신부를 두고, 사도행전 5장 34절에 나오는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라고 평했다.


사제로서 사목적 관심과 배려

피츠마이어 신부의 학문적 업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연구 활동은 대학에 국한되지 않았다. 가톨릭 사제로서 그는 신자들을 향한 사목적인 관심과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성경에 관한 지식을 일반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기 이전인 1964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이용해 성경 강좌를 개최하는 ‘여름 성경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후 25년간 이 연구소를 이끌었다. 2013년 이 연구소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그 이름을 ‘조지타운대학교 요셉 피츠마이어 성경 연구소’로 바꿨다.

가톨릭 교회 내 일반 신자들에게 성경 지식을 나누고자 하는 피츠마이어 신부의 관심은 일반 신자들이 쉽게 참조할 수 있는 주석서를 편찬할 의향을 품게 했다. 그의 바람은 같은 뜻을 지녔던 다른 두 가톨릭 성경학자들과 협력을 통해 결실을 맺게 됐다. 미국 가톨릭 성서학계의 세 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뜻을 함께한 것이다. 예수회의 피츠마이어 신부, 슐피츠회의 레이몬드 브라운 신부, 가르멜회의 롤랜드 머피 신부는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68)와「신 예로니모 성경 주석서」(The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 1990)를 편찬했다. 이외에도 피츠마이어 신부는 여러 본당 단체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강의했는데, 팔순을 넘어서도 계속했다고 한다.


종교간 대화 활동

그는 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파를 초월해 신학적 대화를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훌륭한 역할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88년까지 교황청 일치평의회 자문위원으로서 다양한 개신교 교파들과 대화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꼽는다면 1999년 10월 31일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대표자들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을 하게 된 기념비적 사건이다.

교황청 일치평의회 의장 카시디 추기경(오른쪽)과 루터교 세계연맹 크라우저 회장(왼쪽)이 의화론에 관한 공동선언에 서명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30년 간 두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출처=http://elcic.ca


의화론(義化論)은 가톨릭 교회와 루터교 간의 오랜 쟁점이었다. 루터교는 믿음(신앙)으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했고,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함께 선행을 실천해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쳤다. 두 교회는 공동 선언을 통해 “구원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고 합의했다.

공동 선언이 발표된 날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95개의 주제문을 붙였던 날과 같은 날이다. 공동 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두 교회가 35년간 신학 대화를 주고받은 결과였다. 피츠마이어 신부는 신약 성경 학계의 주도적인 가톨릭 학자로서 거의 30여 년에 걸쳐 가톨릭 교회와 루터 교회 간 대화에 참여했다.


평가와 인간적 면모

지금까지 살펴본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생애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부터 현재까지 약 60년에 이르는 가톨릭 성서학계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과 같다.

그는 공의회 이전까지 이뤄진 가톨릭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두는 동시에 19세기 이후 개신교 성경학자들이 성경 연구에 적용한 방법들을 성경 연구에 도입했다. 이제는 그의 뒤를 이어 훨씬 더 많은 가톨릭 성경학자들이 학문적인 성경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피츠마이어 신부처럼 학문적인 성경 연구가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학자들 덕분에 성경 연구에 바탕을 둔 초교파적 신학 대화의 문이 그전보다는 훨씬 더 넓게 열리게 됐다. 그리고 피츠마이어 신부와 같은 학자들의 노력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고, 성경에 대한 지식에 목마른 수천 명의 남녀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피츠마이어 신부가 세운 여름 성경 연구소로 밀려들었다.

피츠마이어 신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거의 수도자처럼 생활한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저녁 8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었다.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서 피츠마이어 신부는 아주 정확하고 꼼꼼했다. 논문을 쓸 때 사용하는 일차 자료와 이차 자료를 모두 두 번씩 반복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학문적 논쟁에 참여하게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모임을 통해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세상의 여러 곳을 방문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이와 함께 그는 성경 연구만큼이나 요리를 즐겼다. 이제 만 94세가 된 피츠마이어 신부는 워싱턴 D.C.에 있는 예수회 대학 조지타운대 예수회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평생을 교육자로서 가르치고, 미래의 학자들을 길러내는 일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모든 노력은 이제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많은 후학을 통해,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여름 성경연구소를 통하여 배웠던 수많은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의 삶의 통해 이어질 것이다. 피츠마이어 신부가 뿌린 씨앗은 온 세상 곳곳에서 오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다.

요셉 피츠마이어 신부의 저서 중 한국에 번역된 책은 다음과 같다. 「바울의 신학」(솔로몬, 1996). 「바울로의 신학」(분도출판사, 2001), 「로마서를 통한 영신수련」(바오로딸, 2000), ‘예수의 동정 잉태와 신약 성서’(「신학전망」제 36호, 92~116쪽)

[평화신문, 2015년 1월 25일, 
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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