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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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남방제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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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6-22 ㅣ No.1917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남방제 성지 (1)


박해 시대의 교우촌으로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

 

 

이곳 출신 순교자로 유일하게 성인품에 오르신 성 조화서 베드로와 조윤호 요셉 성인이 원뿔 조형물 꼭대기에 십자가를 형상화한 소나무 옆에 서 있다.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라는 말은 제방 둑이 ‘ㄱ’자로 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주변에는 200여 년이 넘는 버드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아주 오래전에 형성된 듯하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5년 수원 도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였다. 신창 남방제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고, 1848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고 한 막달레나가 죽었고,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 조 베드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포졸들에게 잡혀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성 조 베드로가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려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최양업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을 함께 다녔는데, 이를 순교자 기념 원뿔에 새겨 넣었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 1864년 성 조 베드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옥에 갇힌 성 조 베드로는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고 한다. 전라 감사는 성 조 베드로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협박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2020년 6월 21일 연중 제12주일 대전주보 4면]

 

 

[땅에 쓰여진 신앙 이야기] 남방제 성지 (2)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십자가의 길과 그 아래로 한국 순교자들이 십자가를 함께 받치고 있다. 뒤에 핀 장미꽃은 예수님과 순교자들의 피를 떠올리게 만든다.



성 조윤호 요셉은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어났고, 부친을 따라 1864년부터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박해가 일어났을 때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부인과 함께 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깊은 신심과 세심하리만큼 성실한 수계생활은 주위의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아버지 조 베드로를 잡아 집 안에서 심문하고 있을 때, 부인에게 소식을 듣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조 베드로가 아들에게 멀리 피하라고 당부하자 조 요셉은 “아버지, 저더러 이제 어디로 가란 말씀입니까? 저도 같이 묶여 가기가 소원입니다. 이제껏 믿어온 믿음이 결코 헛되지 아니하게 저도 잡혀가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렇게 되는 날을 그 얼마나 기다렸는지요.” 하며 아버지와 함께 잡혀 압송되었다. 전라 감사 앞에 불려 나간 조 요셉은 먼저 문초를 받은 아버지가 배교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배교하라는 감사의 말에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실 줄 압니다. 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저는 배교할 생각이 없으니 통촉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포졸들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긴 여행 중에도 배교하면 잃어버린 재산을 모두 다시 찾아주겠다며 회유하였지만 이에 “나의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당신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 두십시오.” 하며 거절했다. 형장에 도착하여 곤장을 수없이 맞아 얼마를 맞았는지 친 사람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기진맥진하여 고개가 숙여진 성 조 요셉을 보고 죽은 줄 알았지만 뒤늦게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안 포졸은 장터로 모여든 거지 떼를 시켜 밧줄로 목을 매고 양쪽에서 당기니 숨을 거두었다. 성 조 요셉의 장한 순교로 그의 집안은 3대의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남방제 성지 내에 조성된 십자가의 길에는 한국 순교자들이 순교한 방법도 각처에 함께 표현함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더욱 깊이 묵상하도록 이끌어준다.

 

 

남방제 성지는 한눈에 성지 전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성지에 속한다. 하지만 성지에 조성된 조형물과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면 결코 작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성지이다. 성지 중앙에는 두 성인과 순교자들을 기려 만든 원형 조형물이 제작되어 있다. 이는 성령을 향한 순수하고도 추상적인 상승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아 전체적으로 원뿔 형상으로 제작되었고, 정면 하단은 계단으로 시작되어 이 계단을 통해 남방제를 비롯한 신창지역 출신 순교자 36명이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모습을 정밀하게 표현하였다. 상부는 십자가 형상의 소나무와 함께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이 서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조형물 기단부에는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높이 기려 받드나이다.”라고 새겨 놓았는데, 이는 성 암브로시오의 사은 찬미가 (Te Deum)의 한 부분이다. 성지를 둘러 조성된 십자가의 길 역시 한국 순교 역사를 함께 표현하여 기도하는 이로 하여금 더 깊은 순교 영성을 묵상하고 예수님과의 일치를 돕는다. [2020년 6월 28일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대전주보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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