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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알베르 카뮈와 유발 하라리 종교 비판, 21세기 종교의 블루오션으로 변모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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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4 ㅣ No.1436

알베르 카뮈와 유발 하라리 종교 비판, 21세기 종교의 블루오션으로 변모될까


종교에 자유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의 자유 위해 종교 필요

 

 

「호모데우스」 저자 유발 하라리(왼쪽)와 소설 「페스트」 저자 알베르 카뮈.

 

 

전염병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19가 낳은 현상’으로 평가받는 알베르 카뮈(1913~1960)의 소설 「페스트」는 세계 최대 인터넷 서점 아마존의 베스트셀러 목록(6일 기준) 프랑스 문학 1위, 유럽 문학 2위, 그리고 세계 문학 8위를 탈환했다. 카뮈 자신이 “가장 반-그리스도교적인 책”이라 칭한 창조된 세계에 대한 반항의 의미를 다룬 「페스트」. 사람들은 이제 성경보다 이 책을 펼쳐보기 바쁘다. ‘유발 하라리 현상’도 이에 못지않다. 세계 언론은 서로 앞다투어 인류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종교지도자가 아닌 역사학자에게 자문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코로나19 현상이 낳은 카뮈의 현재성과 하라리의 천재성을 통해 드러난 종교의 과제와 의미는 무엇인가? 대유행 사태 이후 종교가 자신의 추상성에서 내려와 현실의 구체성에 기반을 둔 진리의 보편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두 지성의 메시지를 살펴본다.

 

 

연대의식의 문제, 코로나19 속 카뮈의 현재성

 

왜 사람들은 다시 「페스트」(1947)를 읽고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최대 걸작’이란 평을 받은 이 소설은 알제리의 항구도시 오랑을 무대로 한다. 「페스트」는 전염병이 휩쓴 잔혹한 현실과 죽음 앞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임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번역가 김화영(책세상)은 “「페스트」 착상의 기폭제가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며, 작품의 첫 착상에서부터 페스트는 ‘전쟁’의 내면화 과정을 상징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라 평가했다.

 

카뮈는 폐쇄된 도시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이미 갇힌 존재임을 일깨워주며, 이런 현실 속에서 각 개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또 다른 번역가 유호식(문학동네)은 “「페스트」는 한 개인이든 아니면 오랑 시민처럼 집단 전체든 위기의 순간에 인간이 향해 가야 할 연대의식의 지평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어 “카뮈에게 순전히 개인적인 상황은 없다. 한 상황은 우리 모두의 상황이 되고 공동의 해결책을 요구한다”면서 이 작품이 “개인의 일이 집단의 관심사가 되고 집단에 닥친 사건 때문에 개인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연대에 대한 중요성은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의 저자 역시 견해를 같이한다. 지난 4월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하라리는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닌 인간 내면의 악마인 증오와 탐욕, 무지”라고 지적했다. 그는 “연민과 국제적 연대를 통해 현 위기를 타파해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하라리, 코로나19 이후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달라질 것

 

하라리는 코로나 이후 죽음에 대한 전통적 인식에 대한 변화를 예측했다. 4월 20일 영국의 일간지 ‘더 가디언’ 기고에서 그는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법이 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실험실의 과학자 몇 명이면 된다. 과거에 죽음이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전문분야였던 반면, 이제는 실험실의 공학자들이 그 권한을 인수받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2015년 출간된 「호모데우스」를 통해 분석한 내용과 같으며 자신의 견해가 코로나 사태에도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같은 책에서 하라리는 “현대의 과학과 문화는 삶과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이 둘은 죽음을 형이상학적 신비로 간주하지 않으며, 당연히 죽음에서 인생의 의미가 나온다고 보지도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더 가디언’에서 그는 “인류 최고의 지성들은 이제 더는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삶을 연장하기에 바쁘다”며 과학기술 발달로 인해 인간이 죽음에 대한 종교적ㆍ형이상학적 의미를 찾기보다 연장에 그 의의를 둘 것임을 예고했다.

 

 

미래에도 인간 실존의 문제는 미해결로 남을 것

 

동시에 카뮈와 하라리는 과학이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에 열변을 토하기보다, 여전히 남아있게 될 인간사의 문제와 불평등을 인지한다. 사후에 출간된 「작가수첩Ⅱ」에서 카뮈는 “과학은 기능을 설명할 뿐 존재를 설명하지 않는다”며 과학의 범위와 역할에 관한 한계점을 그은 바 있다.

 

‘더 가디언’에서 하라리는 “의사들은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해결하지는 못하며, 단지 연장된 삶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어 “만일 수세기 안에 인간의 생명이 무한정으로 연장되더라도, 그것은 소수의 억만장자의 자녀들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대부분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며 생명 연장이 실제로는 일부의 특혜로 남을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했다.

 

 

카뮈 × 하라리, “정치적 전체주의에 저항하라”

 

두 지성이 전염병 위기 속 의견 수렴이 이루어진 부분은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이다. 평론가들은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카뮈가 전쟁과 전체주의, 나치즘을 마치 페스트와 같은 대재앙으로 여겼음을 지적한다.

 

지난 3월 ‘파이낸셜 타임스’에 게재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에서 하라리는 시민들은 개인의 사생활과 건강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이 둘 모두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일부 국가들을 예로 들어 코로나 위기 속 시민의 건강을 위한 명목으로 ‘전체주의적 감시 체제’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현상을 경고하며, ‘시민역량 강화’를 통한 상호 간의 불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개인의 사생활과 자유의 침해, 이에 따른 사후적인 피해 또는 습성이 국가에 남아있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인간의 의식과 자유에 관한 상호 간의 사상적 일치는 존재

 

종교의 가치와 의미에 타격을 가한 하라리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과 자유에 관한 상호 간의 사상적 일치는 존재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세상의 빛」(2010)에서 “인간이 발전하면서 능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도덕적이고 인간적인 성숙과 잠재력까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다시 내적 균형을 되찾아야만 하며 정신적인 성장도 필요하다는 것을 시대의 커다란 역경들을 통해 점점 더 절감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는 하라리가 「호모데우스」에서 “의식과 지능은 다른 것이다. 인류가 컴퓨터의 지능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은 무엇이며, 인간의 의식을 더 개발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연구하고 투자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와 일맥상통한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또 「미래의 도전들」(2005)에서 “과학 발전이 ‘새로운 억압들’과 ‘새로운 지배계층’을 양산하는 것을 우려하고 경고”한 바 있다. 하라리는 전체주의적 감시가 팽배해져 현실의 완벽한 통제가 곧 개인에 대한 완벽한 감시와 통제로 이어질 수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는 인간 자유의 박탈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교황은 “종교에 자유가 필요한 것처럼 자유를 위해 종교가 필요함”을 강조하며 “과학이 인간을 존중하는 데 기여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고유한 척도로서 과학의 성공 자체만을 지향할 때 과학의 진정한 본질은 사라지고 만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종교를 이미 대체했으며 실리콘밸리가 결국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하라리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과학의 찬양에 대한 건전한 비판세력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여전히 종교의 역할로 남게 된다. 카뮈와 하라리의 견해들을 다각적으로 수용하고 검토한 새로운 사고의 영역 위에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종교 분야의 블루오션이 21세기에 탄생할 수 있을까? 그것의 여부는 오늘날 보여지는 종교의 행보에 따라 결정될 소설 「코로나19」에 등장할 사제의 캐릭터가 말해줄 것이다. 「페스트」의 파늘루 신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5월 24일, 정석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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