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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앙드레 부통 신부의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의 대형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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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24 ㅣ No.722

앙드레 부통 신부의 대전교구 주교좌 대흥동성당의 대형 벽화


다채로운 표현 기법으로 ‘구원’ 이야기하는 벽화 되살려

 

 

대전 주교좌 대흥동본당은 2019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앙드레 부통 신부의 벽화를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해 최근 완성된 벽화를 공개했다. 2점을 제외하고 흰색 페인트 뒤로 모습을 감췄던 8점의 벽화가 정밀하게 재현된 것이다. 부통 신부의 벽화 재현에 참여한 조형예술학 박사 김경란(마리아·대전 대흥동 주교좌본당) 조각가의 글을 통해,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부통 신부의 작품 세계와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벽화들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를 성찰해 본다.

 

앙드레 부통 신부(Andre Bouton, O.S.B., 1914~1980)는 1966년 한국 입국 후 1977년 프랑스 북부 위스크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10년간 한국에서 50여 개 이상의 성당 내부를 그림으로 장식했다. 그는 같은 수도회의 알빈 슈미트 신부(Alwin Schmid O.S.B., 1904~1978)와 함께 국내에서 건축과 그림을 통해 예술 선교를 펼친 대표적 인물이다.

 

 

다채롭고, 유머가 담긴 성화

 

그는 1934년 가을 프랑스 위스크의 성 베네딕도회에 입회한 후 1940년 사제품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수도원을 떠나 모로코의 마라케시, 알제리의 틀렘센, 예루살렘 등지를 돌며 여러 교회의 벽화를 제작했다. 1960년대 그의 첫 아시아 선교는 베트남 하노이 주교의 권유로 시작됐고, 한국과의 인연은 당시 동아시아 선교를 담당하던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 소속의 올라프 그라프(Olaf Graf) 신부의 초청으로 시작됐다.

 

당시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다소 틀에 박힌 아름다운 성화에 익숙해 있었는데, 부통 신부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며, 그 안에 다채로운 표현 기법을 사용해 다양한 창조적 도상을 탄생시켰다.

 

1963년 준공된 대흥동성당의 내부 보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대전교구장 황민성 주교는 부통 신부에게 의뢰를 했다. 부통 신부에게 커다란 대흥동성당 건물은 그저 차갑고 특별한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기도하는 장소이자 종교 교육까지 가능한 다양한 색채의 대벽화를 제안했다. 부통 신부는 성당 내부 대벽화 작업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대벽화는 종교적 구원의 역사에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신비로움을 환기시켜 신자들이 종교적 구원의 이야기에 더욱더 친숙함을 느끼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사라진 벽화 8점

 

부통 신부는 모자이크나 세라믹 등 비싼 재료를 사용하지 못했던 대신 이남규 작가가 1964년 설치한 십자가의 길과 무채색의 반투명 유리로 성당 내부를 비추던 창에 주목했다.

 

당시 성당 벽면은 균열이 많아 이 틈들을 메우는 작업이 필요했다. 벽에 칠하는 석회 성분의 도료는 두께도 일정하지 않았고, 질이 나빠 빛을 밝히면 바래 버린 색이 분말 상태로 드러났다. 부통 신부는 먼저 성당 내벽의 표면 전체 도료를 칼로 긁어냈다. 내부 표면의 더러운 부분을 닦아내는 작업이 새로운 채색 작업과 동시에 진행됐다.

 

그는 성당 전체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권고한, 전례 의식에 적합한 성소를 구현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에 좌우 각각 5개씩 총 10개의 벽면에 그려질 대벽화 아래 자리한 십자가의 길을 함께 묵상하며 각각의 벽에 예술혼을 불어넣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벽면에 다시 균열이 생겼고, 벽화 색은 바래고 균열 사이로 습기가 스며들어 벽화에 곰팡이가 피었다. 1970년대 중반, 두 점의 벽화를 제외하고 칙칙하고 어두워진 그림들은 모두 흰색 페인트로 덮였다.

 

2019년 100주년을 맞은 대흥동본당은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벽화를 되살려 내기로 하고 1년여의 작업 기간을 거쳐 지난 5월 1일, 그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벽화 8점의 모습이 공개됐다.

 

 

벽화, 십자가의 길을 통해 빛으로 들어서다

 

제대를 바라보며 앞줄부터 한 줄씩 벽화를 살펴보면, 왼쪽으로는 ‘증인으로서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가 십자가의 길 1처인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예수님’ 위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십자가의 길 14처인 ‘무덤에 묻히시는 예수님’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려져 있다.

 

첫 번째 벽화 ‘증인으로서의 성 베드로와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던 순간의 청천벽력 같은 느낌을 툭툭 도드라진 각이 들어간 직선들을 이용해 표현했다. 위로는 임하시던 성령의 비둘기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고, 그 아래 거꾸로 된 십자가와 천국의 열쇠를 꼭 잡고 있는 베드로와 두루마리를 품에 안은 채 오른손에 쥐었던 칼을 떨어뜨리는 바오로의 모습이 보인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일깨워 주듯 수탉이 베드로를 향해 벼슬을 곤두세운 채 날카롭게 울고 있다. 예수의 피 흘리심을 상징하듯 베드로가 잡고 있는 십자가도, 배경도 온통 붉은 빛이다. 그 뒤로는 부통 신부가 즐겨 사용하던 보색대비 효과로 차가운 녹색이 이 모든 상황을 정지시키고 있다.

 

‘무덤에 묻히시는 예수님’ 위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예수의 형상은 옷을 중심으로 하얗게 그려져 있고 얼굴을 중심으로는 묻히셨던 동굴에서의 부활을 상징하듯 황토색으로, 이전까지의 찌를 듯한 모든 고통은 이제 끝이라는 듯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 ‘Z’가 붉은 색으로 예수께서 서 계신 위로부터 아래까지 이어 그려져 있다. 부활의 영원한 신비를 상징하고 있는 손과 발, 등 뒤에서 솟구치는 푸른 빛을 통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극복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줄은 성삼위 일체를 드러내기 위해 그려졌다. 왼쪽에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 의한 그리스도의 세례’,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변모’가 그려져 있다.

 

두 번째 벽화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기 시작하는 데에서 시작되는데 그 위에서 예수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있다. 몸을 물에 반쯤 담근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손길이 축복하고 있으며 성령의 비둘기는 그리스도의 머리 위로 임하고 있다.

 

오른쪽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변모’에서 성령의 상징인 빛나는 큰 구름은 거침없이 직선으로 내려와 예수를 감싸고 있다. 뒷 배경에 자리한 십자가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불길을 달고 있는 엘리야와 십계명 판을 들고 있는 모세와 함께 있는 예수의 모습은 영광스럽고 찬란하다.

 

셋째 줄에는 왼쪽으로 ‘예수의 탄생’이 십자가의 길 3처인 ‘예수께서 첫 번째 쓰러지심’ 위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수태고지’가 십자가의 길 12처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 위에 그려져 있다.

 

3처 위에 그려진 ‘예수의 탄생’에서 성 요셉은 이 세상의 아버지로서, 또한 노동자로서의 요셉은 자신의 노동으로 여전히 교회와 교회의 수행자들을 도와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복을 입고 마루에 앉아 이사야서를 읽고 있는 마리아가 한국의 성모로 표현된 ‘수태고지’에서 성령은 하늘에서 내리는 신성한 빛으로 마리아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천사가 내민 하얀 백합꽃은 작은 십자가로 이어져 있다.

 

네 번째 열에는 왼쪽으로 ‘사도들의 소명’이, 오른쪽으로는 ‘최후의 만찬’이 그려져 있다.

 

십자가의 길 4처 위에 그려진 ‘사도들의 소명’은 어머니와 만난 예수가 모든 인간의 구원과 마리아를 결부시키고 있다. 초기교회 박해시대 때 쓰였던 약어 ‘IXTHUS’는 헬라어로 ‘물고기’를 나타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의미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뾰족한 가시가 달린 듯한 배경의 어두운 부분은 예수께서 앞으로 겪으실 어두운 밤과 수난의 고통을 알리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몸과 피를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신의 열두 제자에게 나눠 준다. 그 아래 십자가의 길 11처에서는 예수의 피가 사형집행인의 망치 아래 흐르고 있다.

 

다섯 번째 열의 왼쪽에는 ‘아녜스 김과 유 베드로가 포함된 세 명의 한국인 순교자와 함께 있는 복자 앙드레 김’과 오른쪽으로는 ‘성령 강림 축일에 베드로의 첫 번째 강론’이 그려져 있다.

 

‘아녜스 김과 유 베드로가 포함된 세 명의 한국인 순교자와 함께 있는 복자 앙드레 김’ 벽화 바로 아래, 십자가를 짊어진 시몬처럼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고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가 겪은 치욕과 그리스도의 죽음을 순교로서 함께 나눴다. 예수께서는 한국의 첫 번째 순교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려고 십자가에서 그들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성령 강림 축일에 베드로의 첫 번째 강론’에서 배경의 하늘색 빛으로 표현되는 큰 바람은 집들을 일으켜 세우고 안에서 터져 나오는 폭풍의 기운은 창문의 커튼을 온통 밖으로 날리고 있다. 성령의 강한 빛을 머리 위로 내려 받은 베드로와 사도들은 최후의 만찬 장소에서 나와 사방으로 외치고 있다. 부통 신부는 이렇게 적었다. “그때 한국인이 한 명이라도 예루살렘에 있었다면 이 성령 강림 축일에 그는 한국어로 사도들이 증언한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통 신부의 벽화는 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성 미술은 글로 기록된 성경을 그림으로 형상화해 글자가 익숙하지 않았던 신자들을 가르치는 교육적 역할을 한다. 대흥동성당 벽화도 이런 맥락을 지닌다. 부통 신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선교지에서 벽화를 마주하는 신자들이 성경의 시각적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닫기를 원했다.

 

성 미술의 토착화를 위해 노력한 부통 신부의 미술적 경향은 묵상을 통한 직관적 감성에 기초한다. 건축가이면서 대칭적이고 기하학적인 그림을 그려 온 알빈 신부와는 대조적이다. 그는 즉흥적이면서도 과감한 터치와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색채를 사용해 한국의 전통적 아름다움을 직설적으로 묘사해, 한국 성미술의 토착화를 외국 선교사의 눈으로 실현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한국 미술계와 교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고전적 틀에 박힌 고정 관념은 부통 신부의 강렬한 선과 색이 드러나는 즉흥성을 경계했다. 하지만 대흥동성당 벽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그가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이미지가 담긴 색채를 풍부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에게 벽화의 모습이 강렬하면서도 친숙하게 다가온다. 자신의 작품들이 한국 미술계와 신자들 사이에서 환영 받지 못함을 알게 된 부통 신부는 무겁고 슬픈 마음으로 한국 선교의 마지막 시기를 보냈다. 그는 1977년 한국을 떠나 위스크의 성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돌아간 후 1980년 뇌출혈로 사망해 현재 수도원 근처 수도자 묘역에 영면해 있다.

 

수도원 관계자들은 부통 신부가 한국에서 돌아온 후 한국에서 자기 작품들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지닌 채 하느님께로 돌아갔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부통 신부의 작품들이 한국교회의 성미술을 통해 그 예술적 가치와 신앙적 가치를 재평가 받고 복원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천국에서 기뻐할 것이라며 함께 축하해 줬다.

 

 

 

 

 

 

 

[가톨릭신문, 2020년 5월 24일, 김경란(마리아 · 조형예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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