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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교 집회장소의 변화양상 - 강원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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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1 ㅣ No.1128

천주교 집회장소의 변화양상


- 강원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

 

 

강원지역천주교 집회장소의 변화 양상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임시 집회 장소로서의 개인 집의 활용이었다. 개인 집의 활용할 때에는 일정한 규식이 있었으며, 박해를 받던 시기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별도의 건물을 짓지 못한 채 개인 집을 활용하였다.

 

두 번째는 한옥 형태의 별도 건물이었다. 한옥형 성당의 경우 기존 한옥의 활용이라는 토착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한옥형 성당은 오래된 교우촌을 중심으로 신자들의 모금에 의해 이루어졌다. 강원지역에서도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한옥형 성당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한옥형의 별도 건물은 성당뿐만 아니라 공소집으로도 만들어졌다.

 

집회장소의 변화 세 번째는 서구식 성당의 도입이다. 서구식 성당은 선교사의 주도하에 건립되었고 강원지역의 성당들은 다소 뒤늦게 건립되었지만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어 초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개인 집에 몰래 숨어 하던 집회가 한옥형 성당으로 표현되고, 이후에는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집회장소의 변화는 천주교 전래 이후 정착과정에서 교회의 지위 역시 변화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Ⅰ. 머리말

 

오늘날 도심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에 대해서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기독교가 생활 속으로 깊이 들어오면서 이들이 향유하는 교회 건물이 많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던 시기에는 지금과 같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으므로 자유롭게 종교 관련 건물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느 곳에 모여서 집회를 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했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본고는 종교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그를 믿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신앙을 유지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의 집회장소의 변화에 대해 주목하였다.1) 집회장소의 변화양상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임시 집회장소로서 개인 집을 활용한 것이다.

 

박해를 피해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한 이들은 숨어서 신앙을 유지하였고, 초기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상주(喪主)의 복장으로 변신하고 이동하며 전교활동을 하였다. 이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이래 신자들은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하며 신앙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한옥 형태의 별도 건물인 공소집이다.

 

박해를 피해 신앙을 유지하던 신자들은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부터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즉 선교사들은 전보다는 자유롭게 전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므로 집회장소의 변화를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통 한옥을 이용하거나, 한옥 형태의 별도의 건물인 공소집을 만들었다. 전통 한옥의 이용이나 한옥 형태의 별도 건물은 토착화의 시도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서구식성당으로의 변화이다.

 

한옥 형태의 별도 건물을 만들어 토착화를 시도한 한국 천주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외국의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고 신자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면서 본격적인 성당 건물을 건축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구식 건축형태의 성당이 차츰 증가하게 된다.

 

개인 집에서 시작된 집회 장소는 전통 한옥과의 만남을 통한 토착화에서 서구식의 건축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집회장소의 변화는 천주교의 지위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이에 본고에서는 집회장소의 변화를 강원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하며, 시기는 1945년으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1945년 이후에 건축되는 성당은 대부분 서구식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지역의 사례를 살피는 것이므로, 강원지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서한, 오래된 성당의 옛 사진, 증언 등을 활용하였다.

 

 

Ⅱ. 임시 집회 장소로서의 개인 집[私家]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수용된 이후 첫 집회 장소는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李蘗)의 개인 집이었다. 1784년 겨울, 이벽의 집에는 이승훈을 비롯하여 권철신, 정약전 · 약용 형제가 모였고, 그 자리에서 이승훈은 본인이 북경 선교사들에게 배운 대로 세례를 했고 이것이 바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벽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교리를 전하는데 열중하였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 한 켠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면서 초기의 신앙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또한 1785년 봄, 신자들은 이벽의 주도하에 명례방에서 집회를 가졌다. 바로 그때 형조의 금리(禁吏)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집회 장소를 수색하게 되었으며,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이 모두 형조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집주인 김범우는 단양으로 도배(徒配)되었다. 이 사건 이후에도 다소 주춤하기는 비밀리에 진행되는 신앙집회는 계속되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이른바 사학(邪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 추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점점 퍼져나가 미혹시키도록 하여 천륜(天倫)이 막혀 통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컴컴한 곳에 소굴을 틀고 그 종족들이 번성하게 한 나머지 심지어는 태양을 향해 스스로 항거하는 자들이 나오게까지 하였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2)

 

이는 사학(邪學)의 종류들임이 분명합니다. 이밖에 또 얼마나 되는 흉패하고 추악한 무리가 어디에 숨어서 어떠한 화변(禍變)을 어떠한 곳에서 일으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빨리 숨어 있는 무리들을 수색하고 그 모여드는 소굴을 파헤쳐서 사당(邪黨)으로 하여금 용은(容隱)할 곳이 없게 하는 일을 결단코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3)

 

라고 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보면, 천주교인들이 비밀리에 집회를 하는 곳을 ‘소굴’이라고 표현하며, 소굴을 파헤쳐서 사학(邪學)를 믿는 무리들이 숨을 곳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실록 기사는 1795년과 1801년의 기록으로 1785년 이후에도 비밀리에 신앙집회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확실하다. 이러한 비밀 집회의 양상은 초기 천주교 신자들의 공초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성균관의 전복(典僕)이었던 이합규(李鴿逵)의 공초에 의하면4)

 

“홍문갑(洪文甲)5)의 집에 모여 강론에 참석하기도 했고, 매월 7일에는 김이우(金履禹)의 집에 가서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여 첨례 날에 아랫집 벽장 가운데 예수 상을 걸어 놓고 장막을 드리우고 방석을 깐 다음 여러 사람들이 사서(邪書)를 강습했다”

 

고 되어 있다. 이는 중국인 신부였던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래, 신자들이 첨례날을 정해 놓고 개인 집을 이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군다나 벽장 가운데 예수 상을 걸어놓고 장막을 드리웠다는 것은 개인 집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격식을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집을 활용한 사례는 《사학징의》의 다른 공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충주에서 사형을 당한 이국승(李國昇)의 경우6)“황사영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여러 차례 맞이하여 경문을 외우고 첨례를 했다”고 되어 있어, 황사영의 집도 첨례를 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양근 출신으로 홍문갑 즉 강완숙의 집에서 10년 정도 산 윤점혜(尹占惠)는 공 초7)에서,

 

“주문모 신부는 홍문갑의 집 안방에 머물러 살면서 그곳에서 매월 첨례를 하고 경을 외웠는데 그것이 6-7차례 혹은 10여 차례였으며, 첨례하는 날에는 각처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고 하였다. 이는 강완숙의 집이 당시 신자들이 주문모 신부와 함께 첨례를 보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실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죄인 김이우(金顯禹)는 사학에 차츰 빠져들어 주가 놈8)을 맞이해 놓고 흉상(凶像)을 걸고서 설법(說法)하고 예배를 보고, 요서(妖書)를 외면서 남녀가 뒤섞여 거처하였습니다.9)

 

두어 글자의 수수께끼로 각각 표명(標名)을 세우고 혹은 반폭의 사특한 그림으로 몰래 소굴을 장식하였으며, 혹은 깊은 밤 비밀한 방안에서 머리를 모아 강독하여 외고 혹은 대낮에 큰 도시의 왕래하는 곳에서 소리 높여 공공연히 선동하였다.

 

위의 실록 기사에 의하면,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하면서 그냥 이용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장식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김현우는 주문모 신부를 맞이해서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하며 흉상(凶像)을 걸어 놓았고, 표명(標名)을 세우거나 그림을 통해서 집회 장소를 장식한 것이다.

 

본인의 집을 첨례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 예와 더불어 첨례를 위한 공간을 마련한 사례도 《사학징의》에서 보인다.

 

정광수(鄭光受)의 공초11)에 의하면,

 

“신자[敎中人]들에게 백여 냥을 모아 집거간꾼을 데리고 벽동으로 가서 집을 정하고 집값을 지불한 뒤에, 설법할 장소를 위해 공터에 몇 칸 되는 방을 깨끗하게 지어서 날마다 강습했다”

 

고 되어 있다. 이는 개인 집을 활용하면서도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서 이를 집회를 위한 공간으로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 사람이 집의 대가를 모두 지불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돈을 모아서 지불했음을 알 수 있다.

 

《사학징의》를 통해서 보면 초기 신자들이 본인의 집을 첨례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여 비밀리에 집회를 가지거나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여 비밀집회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한 사례는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초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개인 집을 사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여인의 집안만이 다 신자였으므로 자기 집을 공소집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초대받았던 그 공소집에서 성사 집행을 끝내고 읍내에서 겨우 나올까 말까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배웅했던 그 가정의 젊은 주인이 아직 귀가하지도 못한 때였습니다. 그 청년이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돌연 읍내가 떠들썩하게 소란한 무리의 군중이 공소집에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서 이 불쌍한 가족의 살림살이를 모두 약탈하거나 파괴하고 공소집마저 때려 부수고, 그 집 식구들을 읍내에서 쫓아냈습니다. 앞으로 이곳의 신자들이 어떻게 선교사를 다시 모시고 공소를 꾸밀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온 식구가 다 신자인 집은 이 공소집 한 집뿐이고, 읍내에서 쫓겨난 그 집 외에는 신자들의 집회 장소를 마련할 수 있는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12)

 

위의 서한에서 보면 온 집안이 신자인 사람이 있어 개인 집을 공소로 활용하고 있었는데 신자가 아닌 사람에 의해 집안이 약탈당하는 모습과 더불어 다른 집회장소를 마련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위의 서한은 1857년의 것으로 한국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끝나기 전으로서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도 같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다른 서한에서도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한 사례는 보인다.

 

그는 자기의 모든 가족들이 이사하여 다음해에는 자기들이 세례받을 준비를 다 마치고 자기 마을에서 공소집을 차리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13)

 

위의 서한의 경우는 한 신자가 가족 모두를 데리고 이사하여, 자기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하겠다는 것으로서 박해가 끝나지 않은 시점에서 자발적인 입교와 입교 후의 마음도 볼 수 있다.

 

박해기 개인 집을 활용한 임시 집회 장소로 활용한 사례를 강원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강원지역에서의 박해 관련 기록에서 잡혔다는 기록은 있으나 어디서, 어떠한 생활을 하다가 잡혔는가에 대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당시에는 강원지역의 관할이었던 배론의 기록을 하나 볼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죄인 김귀동(金貴同)은 옹점(甕店)을 제천의 배론에 옮겨 거처하였는데, 김한빈(金漢彬)이 한 이가(李哥)의 상제(喪制)를 데리고 오자, 힘을 합해 땅을 파서 숨도록 하고는 사서(邪書)를 학습하였다.14)

 

라고 되어 있어, 배론에 숨어있던 김규동이 땅을 파고 숨어서 생활하며 천주교를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지역과 관련에서는 직접 박해시기보다는이후의 기록에서 개인 집을 임시 집회 장소로 활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뮈텔 주교 일기》에 나타난 공소 순방 기록이다.

 

1900년 뮈텔 주교가 강원지역을 순방했을 당시의 기록에서 개인 집을 이용하거나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사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정오경에 서내 교우촌에 도달했다. 나는 1882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집은 같은데 증축이 되었을 뿐이다.(1900년 11월 14일)

 

언덕은 몹시 가파르고 산은 매우 높았는데 그 맞은편에 산너미15) 공소가 있었다. 공소집은 1882년의 것이었으나 조금 확장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집주인은 바뀌었다. 저녁에 약 40명의 고해를 들었다.(1900년 11월 19일)

 

공소 집주인 한 이시도로는 꽤 잘살고 있으나 큰 근심거리가 있다.(1900년 11월 20일)

 

교우들은 공소로 사용하고 있는 집 외에 또 방 두 개가 있는 집을 지어 놓았는데 방 하나는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다만 선교사들의 방문 때에만 사용되고 있다(1900년 11월 24일)

 

위의 기록에서 보면 뮈텔 주교가 1882년에 순방을 했을 때도 공소집으로 사용되는 개인 집이 1900년 당시에도 공소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개인 집을 사용한 것은 오랜 시기동안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인 집을 사용하는 경우 이외에도 공소 순방시만을 위해 사용하는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은 경우도 있어, 천주교 전래 초기 신자였던 정광수의 공초에서 보이는 것처럼 신자들이 별도의 공간을 만들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개인 집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초기 천주교가 들어와 박해가 지속되던 시기보다 한참 후대인 1923년에 공소의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로 편찬된 《회장직분》에 집회 장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주교께서 어떤 공소 하나를 정하고 본당신부 한 위(位)가 장구히 계시게 되면 불가불(不可不) 그 공소 내에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고 신부 집과 성당을 짓는 것이 필요하니 신부께서 성당 짓기 전에 임시 얼마동안 본 댁에서 미사를 드릴만하나 이는 잠깐 동안만 허락하는 바이다. 성당이나 본당신부 댁을 짓게 되면 본 지방 교우들과 특별히 본당 교우들이 일도하고 돈도 내어 협력할지니라.

 

공소마다 성당을 세우고 오롯이 천주 섬기는데 쓰기 위하여 잘 꾸며 축성하게 함이 좋고, 적어도 강당 하나씩을 지어 천주 섬기는 집을 삼으면 매우 좋으니라.

 

성당이나 강당을 짓게 되면 2-3칸을 따로 짓든지 혹 성당이나 강당에 달아 지어 춘추(春秋)전교 때나 별(別) 성사 때에 신부 계시기에 편리하게 잘지니라. 성당이나 강당이 없거든 합당한 집에 미사방 하나를 잘 예비하여 신공과 성교예절 행할 때 쓰게 할 것이오, 세속 사정에는 잠시라도 쓰지 못할 것이며 교우들도 신공하기 위하여만 그곳에 모일 것이오, 집안 세간이나 곡식 같은 물건을 그 곳에 두지 말고 항상 정결하게 할지니라.16)

 

위의 기록을 보면, 합당한 집에 미사 방 하나를 마련하여 예절을 행할 때 쓰도록 하고 세속의 사정에는 쓰지 못하게 하며 항상 정결하게 할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록은 성당이나 강당으로 대표되는 집회장소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개인 집을 사용할 경우의 주의사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신자들이 개인 집이라는 공간을 집회장소로 사용함에 있어 일정한 규식과 절차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개인 집을 활용하여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오래된 교우촌에서 생활하는 신자들의 증언 및 각 성당들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원지역에서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용소막성당 및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의 증언17)을 통해서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먼저, 김근배의 증언에 의하면,

 

그때는 공소라는 이름도 없고, 장소도 없었어요. 주일이면 모였고, 판공 때면 용소막에서 신부님이 오시는데 그때 김지한과 최재규의 처가에서 그냥 했어요

 

라고 되어 있고, 장재준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묘재공소는 이해선씨 할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 그 집을 공소로 썼고, 창터공소는 오우반이라고 개인 집을 공소로 썼지요

 

또한 심규택은 개인 집을 공소로 활용할 당시 제대를 사용하던 것을 증언함으로써 회장직분에 나타난 규식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신자 집에 모여서 기도도 하고 판공성사도 받았대요. 기존의 조그마한 상을 祭臺로 이용하다가 송판을 이용해서 직접 제대를 짜면서 다른 신자 집으로 옮겨서 모였어요.

 

또한 이순희의 증언에 의하면,

 

거무내라는 곳으로 이사를 왔는데 외삼촌 집에서 공소를 했어요. 근데 외국신부님이 오셨는데 어깨가 천장에 닿으니까 불편하신 거야. 우리 집은 일제 때 철도 길 닦느라고 사람들 밥해 주던 집을 사서 고친 것이라서 우리 집을 공소로 썼어요.

 

라고 하였다.

 

이들이 증언하는 시기는 《사학징의》가 이야기하는 박해가 한창이던 시기를 지나고 《회장직분》에 기록된 개인 집을 사용할 당시의 규식보다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 집을 사용하는 것 및 개인 집을 사용할 당시의 규식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이는 초기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이래 박해가 집중되던 시기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집회장소의 한 공간으로서 개인 집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공간인 공소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집회장소의 변천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Ⅲ. 한옥 형태의 별도 건물[공소집]

 

개인 집을 임시 집회장소로 활용하여 신앙을 유지하던 이들은 박해가 점차 잦아들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기존의 한옥 건물을 사용하거나 별도로 한옥 형태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반 민중에게 저항감을 주지 않고 전통문화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1880년대 조선 정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묵인하기까지 그들은 주민들과 직접 접촉할 수 없었으며,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와 성사집행도 공개적으로 거행할 수 없었다. 프랑스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박해와 탄압을 피하여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니며 숨어살아야 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탄압과 박해를 피해 큰 마을에서 떨어진 궁벽한 산속에 거주하였다. 이들은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면서 교우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활을 영위하였다. 교우촌이라는 특징 때문에 신자들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경당을 마련하였고, 경당은 선교사가 오면 미사를 올리고 성사를 받으며 천주신앙의 단일성을 보존하고 키우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교우촌은 외진 곳이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당이 신설되면서 많은 외진 교우촌의 신자들이 본당 인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5년 중반 이후 점차 변화를 겪으며 교통이 편리하고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초기 성당으로 사용된 건물은 기존의 한옥을 개조하여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외형은 일반적인 한옥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를 최소한의 전례행위가 가능한 모습으로 변형시켜 사용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한옥형 성당건축 형식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사라지고 대외적으로 선교활동이 지속되던 시기까지 이어졌다.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조인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시대 교회와 인연이 깊었던 곳이나 그 부분의 땅을 사들여 성당의 터전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건축양식도 고딕양식을 추구하였으나 서울, 인천, 대구 등지의 대도시에서만 국한되었을 뿐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한옥을 변조해서 쓰거나 모방해서 지은 한옥 형태의 과도기적 성당 건축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한옥형 성당이 만들어진 것인데, 1900년대에 존재한 한옥형 성당을 나타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에서 보이는 한옥형 성당들은 생활공간과 결합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별동으로 형성하여 생활공간과 종교공간을 구분하였다. 성당의 바닥은 목재 마무로 구성되었으며, 평면은 ‘ㄱ’자 형이나 ‘+’자형으로 구성된 사례도 있으나 대안리 공소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단순한 장방형을 많이 채용하였다. 남녀신자는 구분하여 별도 공간에 수용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는데 ‘ㄱ’자형이나 ‘+’자형 평면은 남녀 신자를 각각 다른 공간에 위치시켰으며 장방형 평면은 남녀구분 칸막이를 장축 방향으로 설치하여 남녀신자를 구분함으로써 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19)

 

강원지역에서 한옥형 성당의 사례를 찾아보면 다음 <표 2>와 같다. 

 

 

 

〈표 2〉에 서술된 강원지역 한옥형 성당 대부분은 191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서 현재 지방문화재 2개소(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와 등록문화재 2개소(원동, 대안리공소-한옥형식)로 분류된다.

 

강원지역의 한옥형 성당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풍수원 성당과 관련한 기록이다. 풍수원 성당의 경우, 르메르 신부의 파견으로 1888년 본당이 설립되었다.

 

르메르 신부는 꽤 편리한 사제관을 지은 모양이고,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순조선식 경당을 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20)

 

르메르 신부는 그의 동네에 성당을 지었는데 그 기회에 성당을 강복하고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이 지방 성당들은 순 조선식 즉 대단히 수수한 경당들입니다. 조약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허가하지 않습니다만 우리의 재력도 우리가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여야하겠습니다.21)

 

위의 기록은 풍수원 성당에 부임한 르메르 신부가 1891년과 1892년 순조선식 경당을 짓기 시작해서 1892년 완공했음을 보여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한옥형태의 별도의 경당을 만든 것으로, 당시 풍수원은 본당이었으므로 성당 건물을 만든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한옥형태의 건물을 짓게 된 것은 조불수호조약 이후에도 서양식의 건물이 짓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음과 더불어 경제적인 부분도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풍수원의 한옥 형태의 강당은 서구식으로 되기 전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다. 정규하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풍수원 교우들이 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하였으니 그전 성당은 너무 낡아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미사 참여하는 동안데도 갑자기 천장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집니다.22)

 

새로 짓는 성당으로 말하면, 거의 마쳐가나 아직도 일이 많습니다. 크기는 12칸인데 식은 한국식이요 모양은 전보다 낫습니다.23)

 

라고 되어 있어, 1892년에 완공한 조선식 경당이 천장에서 흙덩어리가 떨어지기고 되고 너무 낡아서 다시 짓기 시작하였으나 이 역시도 한국식임을 알 수 있다. 두 번에 걸쳐 준공된 초기 풍수원성당의 순 조선식 경당은 이후 서양식의 건물로 변화하므로 현존하지는 않는다.

 

초기원동 성당의 사례를 보면, 한옥 형태의 강당을 지으면서는 주변의 건물 부재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원주본당(현재 원동)에서 활동했던 부이용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리굴로 신부님이 원주 근교에 있는 기와집 한 채와 주위의 밭을 조금 매입하려는 사실에 대하여 주교님께 이미 편지를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중략 - 앞서 말씀드린 기와집은 제가 장호원에 짓고 있는 성당 지붕에 얹을 기와를 찾던 중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장마철에는 그곳에서 장호원까지 강을 따라 배가 왕복하게 되니 제가 짓고 있는 성당을 위해 필요한 기왓장과 목재를 큰 어려움 없이 운반할 수 있을 것입니다.”24)

 

라고 하여, 목재를 비축하고 기존 한옥의 기와를 사용한 것이다. 

 

이후 원주본당은 1906년 시잘레 신부가 비축한 목재를 기반으로 조제 신부가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한 후 뮈텔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그러나 이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었다.25) 현재의 성당은 1954년 4월 이 바드리시오 신부에 의해 공사를 시작, 9월에 완공되었다.

 

용소막성당은 1896년 원주 본당의 공소로 설정된 후 1899년 용소막이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최도철이 초가 8칸의 작은 경당을 세웠다. 신자들에 의해 세워진 성당에 관련해서는 아래의 기록이 있다.

 

원주에서 멀지 않은 용소막에서 신자들이 기부금을 내어 지은 아주 아담한 성당을 축성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너무나 간소한 모습의 이 성당이.26)

 

위의 기록에 의하면, 교우촌이 형성되고 나서 신자들이 돈을 모아 아담한 한옥 형태의 건물을 짓고 나서 1904년 뮈텔 주교가 초대 신부로 프와요(Poyaud, 表光東)를 부임한 것이다. 이후, 1906년 프와요 신부는 8칸의 초가였던 용소막성당의 증축 필요성을 느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2칸을 증축, 10칸의 장방형의 초가성당을 만들었다. 증축하였다고는 하나, 신자들의 규모에 비해서는 매우 작은 규모였다.

 

한옥형식으로 남아 있는 대안리 공소의 경우, 口傳에 의하면 박해시대에 대안리 남쪽에 있는 덕가산 일대에 숨어살다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지금의 공소가 있는 마을에 내려와 살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27) 교우촌이 형성되고 공소가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신자들의 구전에 의하면 르메르 신부가 원주본당에 부임하기 이전인 1892년 5월에 설립되었다고 전해진다.28) 하지만 1892년에 공소가 설립되었다면 당시 풍수원이나 원주본당의 교세통계표 및 보고서에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고, 뮈텔 주교가 1900년 10월 공소순방을 하였을 당시의 기록에 있어야 하는데 뮈텔 주교의 당시 일기에는 대안리 공소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드브레 신부의 1901년 6월 4일자 보고서에 의하면,

 

예비자들이 많은 곳은 특히 원주근교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니 지난 가을 주교님께서 지나가실 때 나와서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 수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봄 사목 때 새로운 다섯 공소를 만들어야 했는데 매번 신부의 방문을 요청하는 새 신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매우 선량한 이들로, 지금까지 제가 해결해야 할 어떤 사건도 일으키지 않았고, 주님을 위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도안리(To-an-ri), 항골(Hang-kol, 혹은 홍골 hong-kol), 분줄(Pountjyoul), 오리절(Ori-tjyel), 고사리골(kosarikol)이 다섯 새 신자마을입니다.

 

라는 기록이 있어 기록상의 ‘도안리’가 바로 대안리임을 알 수 있다. 대안리 공소 건물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910년 《뮈텔 주교 일기》에 현재 공소 건물은 축성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1월 9일 성당 축성식 시간인 8시 조금 전에 시어골에서 강(姜道永) 말구 신부가 도착했는데 … 대안리의 짐꾼들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다. … 11월 10일 … 대안리에서 짐꾼들이 도착했다. 11월 11일 8시경에 대안리로 떠났다. … 거기에 대안리 교우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 조제 신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11월 12일 성당에는 드브레 신부가 만든 방이 딸려있다. 축성해달라고 했다. 그것은 진짜 성당이기에 성당 축성 예절로 축성했다. 성당은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이를 통해 대안리 공소의 건립 시기는 1901년에서 1906년 사이로 생각된다. 이때 건립된 이후, 대안리 공소는 한국전쟁 당시에도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1965-1966년 사이에 행해진 증축 공사시 상량에는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벽체를 구성하는 부재는 그대로 두고 대들보는 교체하였고, 기와에 변형이 발생하여 1970년대 슬레이브 지붕으로 변경되고 이때 합각을 형성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29) 김대흠30)에 의하면 성당을 지을 때 교우들이 별로 없어서 일손과 재목, 돈 모두가 부족한 상황이었는데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함께 참여하는 등 모든 주민들이 함께 나서 이 공소를 지었다고 한다.

 

대안리 공소는 가공되지 않은 부재를 사용하여 한옥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잘 보여줌과 동시에 천주교 초기 공소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건물로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140호로 지정되었다.

 

춘천의 죽림동성당의 전신인 고은리의 경우 원주지역의 한옥식 성당들 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인 1920년대에 등장한다. 1920년대 서울교구 연보에 의하면,

 

고은리 - 공소 19개와 교우 1,069명이 있는 이 본당은 창설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초가집 한 채가 성당과 동시에 김유용 비리버 신부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는데, 베들레헴의 가난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난 가을 사목 때 본인은 주교관을 쓰고 앉아서 견진성사를 주어야했는데, 왜냐하면 천장이 너무 낮아서 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너무 가난해서 아직 임시 성당조차 짓지 못하고 있습니다.31)

 

라고 되어 있다. 위의 고은리의 경우 이후 춘천 시내로 옮기게 되는데 춘천으로 옮긴 후의 한옥형 성당의 사진이 남아 있다.

 

본당으로 설립된 곳 이외의 한옥 형태의 공소집에 대해서는 《경향잡지(京鄕雜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26년 6월의 《경향잡지》에, 

 

홍천군 화촌면 송정리 황신부 본당은 겨우 3년 전에 신설되었으나 성당을 건축하지 못하여 한옥 10여 칸을 지어 한편은 미사실로 쓰고 한편은 신부실로 쓰고 있다.

 

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성당 건물 없이 있던 곳에 한옥으로 성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으고 있음도 알수 있다.

 

1929년 2월 《경향잡지》 기사에

 

고성군 장전항 공소는 경당이 없어 춘추성사 때마다 불편이 많았는데 그 공소 교우 박베드로씨 부부가 자기소유의 4-50평에 10여 칸 되는 경당을 정묘하고 화려하게 독담 건축하여 성교회에 봉헌하였다.

 

라고 되어 있고, 1927년 7월 3일자에

 

강릉군 남량리 공소는 김 바오로 신부가 전교하시던 공소이나 그 후 교우들이 떠나 공소가 없어졌다. 한 15-6년 전부터 황회장이 들어와 공소를 만들고 한 10년 전부터는 교우들이 점차 모여 지금 40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경당을 건축하지 못하여 항상 불편하였는데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심하고 교우들이 각각 부담하여 6-7년간 강당은 신축하였다.

 

이라고 되어 있어 교우들이 모금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원지역의 공소집에 대한 《경향잡지》의 기사는 또 있다.

 

화천군 운수동 공소는 40여 년 전에 경당이 없이 개인집에서 춘추 성사를 치루는 것이 좁고 마땅치 못한 형편이었으나 몇 해 전부터 청년회를 실시하며 겨울에 신을 삼아 몇 전 씩 저축하며 회장을 비롯한 교우들이 몇 원씩 수합하여 도합 200원을 모으고 교우들이 힘을 합해 주야로 일을 함으로써 6칸의 경당을 건축하여 부활대축일에 낙성하고 경당의 주보는 성요셉으로 하였다.32)

 

춘천 신풍리 공소는 춘천지방의 굴지의 공소이니 이 공소라 설립된 지 이미 40년이 되는 오늘까지 천주의 강복을 많이 받는 가운데 이 공소 설립 이래 회장의 직무를 맡은 이한용(스테파노)의 노력에 있다. - 중략 - 자비를 내어 자기 집에 공소 9칸과 신부실 3칸을 건축하여 상당한 공소를 성립하고 대부분의 자비로 종을 사다가 그리스도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며, 빈한한 교우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생애를 마련하여 주어 영육 간에 돌보고 있다.33)

 

양양군 토성면 학야리는 공소가 설립된 지 오늘까지 57년인바 20년 전까지는 공소를 치르기가 극히 어렵더니 1914년에는 교우수가 6,7호였음으로 애령회를 조직하여 매 가정에서 40전을 수합하여 저축하던 중에 교중 공동묘지에 속한 산림에서 지벌과 낙엽을 팔아 200원에 달하였고 이를 차차 길러 공소집이 없어 곤란함에 애령회에서 95원과 신회장(시몬)씨가 150원을 합하여 8칸의 초옥을 매수하였고, 작년에는 교우수가 112명에 달하였고 교우들이 단합하여 토기를 산매하여 260여원에 달하였다.34)

 

양양군 도천면 상도문공소는 70여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가진 공소로소 현재 30여호에 인구는 근 200명에 달하며 예비자가정 외에 외교인은 한 호도 없는 교우촌이므로 영육에 모든 범절이 편리하나 다만 강당이 없음으로 유감이 막대하더니 15년 전에 10여칸 되는 초가를 매수하여 선묘히 수리하고 베드로 최신부(최문식)를 모시게 되어 영동지방 첫 성당이 이 공소에 설립되었음으로 불같은 열성에 기쁨을 금치 못하다가 불과 10여삭에 양양읍 서문리에 성당이 옮겨지니 섭섭함을 실로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들었던 꽃에 열매가 맺혀지기 시작하여 낙망하였던 열성은 더욱 뜨거워져 교련회를 조직하고 호상친목하며 단결 합심하는 중 7년 전부터 본당 유신부의 지도하에 강당기성회를 조직하여 오던 중 작년 초에 3백원의 현금이 되었음으로 공동 작업을 실시하여 2백원의 수입으로 합계 5백 원의 현금으로 금년 봄부터 약 1개월간 건평 26평에 8칸의 강당을 신축하였다.35)

 

위의 기록들은 본당으로 설립되지는 않았으나, 한옥 형태의 별도의 건물인 공소집을 지은 사례들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초기 한옥형태의 공소 집 및 성당은 첫째, 유서 깊은 지역의 교우촌에 지어지거나 한국인 평신도들의 자본에 의해 지어졌다는 것과 둘째, 교회 건축의 토착화 셋째, 경제력의 부족과 당대의 사회인식의 반영이었다는 것이다.

 

 

Ⅳ. 서구식 성당으로의 변화

 

박해시대에 교회의 전례형식과 전통 한옥의 만남을 통해 토착화를 시작하였던 한국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맞이하자 본연의 전례형식을 수용하기 위해 본격적인 성당건축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외부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신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본격적인 성당건축이 이루어졌다.

 

1831년 조선대목구 설정 이후 한국에 진출한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속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중세의 신학사상과 신념체계를 잘 반영한 고딕 양식을 교회 건축의 최고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오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자 개항장과 대도시의 성당은 고딕을 지향한 벽돌조 양식 성당이 추구되었다.36)

 

당시 교회가 원한 것은 첫째,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집회의 공간, 둘째, 일반 민중에게 저항감을 주지 않고 전통 문화에 상충되지 않는 건축형태, 셋째, 오랜 박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획득한 교회가 한국 사회에 존재감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중 둘째와 셋째는 서로 성반될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원함이 지역과 신앙공동체의 배경에 따라 실제 필요한 것으로 요구됨으로써 한옥 성당과 서양식 성당이라는 두 갈래의 수용 형태로 발생한 것이다.37)

 

오랜 박해 끝에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는 선교사의 주도하에 성당을 건립하였으나 대도시와 몇몇 교우촌에 지은 서양식의 벽돌조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옥이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들의 문화 우월주의로 인해 본국의 양식을 피상적으로 재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 성당의 특징은 각 선교 단체의 선교 이념이나 선교 단체가 속한 본국의 건축양식을 충실히 따르려고 하였다.

 

약현 성당의 경우, 1887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주교에 의해 공소로 출발했다가 1891년 종현(현 명동) 본당에서 분리되어 서울에서는 2번째, 전국에서는 9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본당의 설립은 늦었지만 성당 건립에 있어서는 1892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 성당을 완공하였다. 한국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성당으로 이후 한국 성당 건축에 있어서 표본이 되었다. 1886년 조불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인은 서울이나 기타 개항지에 대한 토지 구입권과 건물을 세울 권리를 인정받게 되었다.

 

블랑 주교는 이에 성당과 부속시설에 필요한 대지의 물색을 서둘렀고, 마침내 종현 언덕에 아주 넓고 전망도 좋은 대지를 구입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대지 매입과정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으며, 국유지 시비 및 풍수설 시비를 낳아 한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38) 서울교구연보에는 당시의 사정이 기재되어 있다.

 

서울에서는 여러 가지 건축을 하려고 우리가 합법적으로 사들인 대지 문제로 조선 정부가 일으킨 말썽 때문에 여러 달 동안 불안에 싸여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외부대신이 너무 악의를 보였기 때문에, 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권리를 양보하려고 열렬히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타협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사태는 매우 중대한 지경에 이를 뻔했습니다. 한 동안은 우리를 위협하기 위해 몇몇 교우를 옥에 가둔다는 문제가 나왔었는데, 우리를 두둔해서 말씀한 조선왕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구제되었습니다.39)

 

우리 첫 번째 건축물들은 교우와 외인들에게 아주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룩한 일이 아직은 매우 수수하지만, 벌써 이 입 저 입으로 옮겨지는 소문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우리 대성당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비 교우들은 더 열심히 공부하고, 외교인들은 교우들을 가까이하고, 우리에게 대한 편견이 차츰차츰 사라지며, 누구나가 우리 건축물을 정부가 가톨릭교에 이제부터 내려주려는 완전한 자유의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지(整地) 작업을 시작했을 때 우리 교우들이 취한 행동 방식에 얼마나 기쁨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서울과 근방의 모든 건강한 남교우는 사흘씩 무보수로 일하러 왔는데, 그것도 12월과 1월의 큰 추위를 무릅쓰고 그렇게 했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이 일에 놀랄만한 열성을 쏟았고, 여자들과 직접 일할 수 없는 남자들은 그들 대신 일할 일꾼들을 사서 보냈습니다.40)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당시 프랑스 공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연되다가 1890년 토지 문권이 정부로부터 교회에 반환되었다. 교회의 토지 소유권이 확인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한동안 불리했던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적대적 태도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명동 성당 건축이 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후 많은 종교 시설들이 각지에 들어서게 되었다.

 

강원지역의 성당들은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뒤늦게 건립되었지만 다른 지방의 주요 성당에 비해 큰 시차를 보이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어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초기 성당 건축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크다.

 

풍수원 성당의 경우, 초가 성당이 지어진 이후, 1896년 정규하 신부가 부임하면서 현재의 성당을 1909년 1월 착공하여 1910년 2월에 완공하는데 정규하 신부의 서한에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성당을 새로 지으려 하였으나 돈이 모자라 금년에는 시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41)

 

교우들이 성당을 짓기 위하여 엽전 15,000냥을 모았습니다. 이 돈을 가지고는 부족한데 교우들은 짓기를 재촉합니다.42)

 

풍수원 교우들이 여러 해 전부터 성당을 건축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금년 들어서 기어이 짓겠다고 결심하고 중국인들과 계약까지 체결하였습니다. 그 중국인은 진 베드로인데 명동 대성당을 지을 때도 일을 한 사람입니다. 교우들의 태도가 주교님 의향에 마땅치 않다든가 성당을 건축할 시기가 적합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성당의 크기는 대략 30칸이고, 재료는 벽돌이며 양식은 약현 부감목 두세(J.Doucet) 신부님의 성당과 같습니다. 높이는 5미터이고, 비용은 2100원입니다.43)

 

건축을 시작하였던 성당을 준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이 넉넉지 모사여 잘 짓지는 못하였습니다. 성당축성식은 주교님의 명령에 따라 시일을 정하겠습니다.44)

 

위의 서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자들은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그를 토대로 해서 서양식 성당을 건축한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에 서양식 성당인 풍수원 성당이 건립되면서 강원도의 서양식 성당 건축의 뿌리가 내려진 것이다.45) 특히 강원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인 풍수원 성당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서양식 성당인 약현 성당의 특성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천주교 전래가 이루어졌던 시기의 건축형식을 이해하는 주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나아가 초기원동 성당을 비롯하여 풍수원 성당 이후에 건립된 성당들도 풍수원 성당의 형식을 토대로 부분적인 변화를 통해 발전을 이루어왔다.

 

풍수원 다음으로 건립된 초기 원동성당은 1896년 8월 17일 르메르 신부가 원주에 부임하면서 창설되었고, 조제(Jaugey, 楊秀春) 신부가 1913년 70평의 성당을 완공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초기 성당을 대신하여 건립된 현재의 성당은 1954년에 완공되었다.

 

용소막성당은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1914년부터 중국 기술자와 함께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1915년 가을에 완공하였다. 용소막성당이 서구식 성당 건축 과정은 용소막에서 부임하던 신부의 서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모든 이들을 수용하기에는 저의 경당이 너무도 협소합니다.46)

 

대성당 - 근사한 바실리크 양식의 성당 - 을 짓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용소막 본당이 현대적이면서도 저의 교우들이 주일에 모두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성당을 갖게 되길 희망합니다. 저는 편지를 통해 이미 그런 생각을 비쳤고, 지금 뭐라 한탄하는 것은 아니지만, 벽돌장(長)이 저를 찾아와 가마를 보러 가자고 했을 당시에도 그와 같은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마 문을 열어보니 벽돌들은 회색으로 완전히 대실패였습니다. 지난번에 구워진 벽돌들은 붉은 색이라 성공을 거둔 듯 했기에, 이일로 크게 놀라 저는 얼른 벽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가마중앙에 위치한 벽돌들은 좋고 단단했으나 가장자리에 있던 벽돌들은 금이 갔고, 손으로 만져보면 금세 부서졌습니다. 이는 벽돌이 이슬에 축축이 젖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과를 말씀드리면, 지금까지 구운 벽돌들은 모두 쓸 수 없답니다. 4만장 이상의 벽돌 손실을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뭐라 말씀을 올려야할지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47)

 

저는 교우들에게 마지못해 약간의 이례적이긴 하지만 시간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밭일로 너무나 바쁘기 때문에 그 가난한 교우들이 성당 건축을 위해 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당 건축 시간은 미사 때인 오전 9시 반경부터 정오까지를 규정 시간으로 삼고 있습니다.48)

 

성당과 제 사제관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고 있사오니 현재 용소막 경당을 팔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청합니다. 저의 예산 경비가 신통치 않아 그렇게만 된다면 저는 중국인들에게 대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의 경당 부지는 어느 교우 소유이고, 새로 짓는 성당과도 거리가 멀어 학교 등의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답니다.49)

 

위의 서한을 통해서 보면, 용소막성당은 1910년 4월 용소막성당에 부임한 기요 신부가 성당 공사를 준비하여 1914년 5월에 시잘레 신부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915년 가을에 기와지붕의 용소막성당을 완공하였다.

 

늘어난 신자 수에 비하여 초기의 경당은 너무 협소하였으므로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당을 건립하는 데에는 신자들이 직접 참여하여 벽돌을 굽고, 목재를 운송한 것을 알 수 있다.

 

강원지역의 서구식 성당인 용소막, 풍수원, 초기 원동과 죽림동 모두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건축된다. 이는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명동성당이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지위가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강원지역에 건립된 서구식 성당을 건립시기에 따라 분류하면 풍수원 성당과 초기 원동성당, 용소막성당이 1900-1910년대 성당으로, 한옥형 죽림동성당이 1920년대이고, 나머지는 1949년 이후이므로 본 논문에서는 1940년대까지 만을 다루었다. 이후에 건립되는 강원지역의 서구식 성당은 1900-1910년대 성당에 비해 면적이 증가하였고, 가장 큰 변화로서 1940-1950년대 성당은 삼랑식에서 이탈하여 간결한 공간 형식으로 전이되었다.50)

 

 

Ⅴ. 결론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되었던 시기에는 지금처럼 종교의 자유의 없었으므로 자유롭게 종교건물을 만들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사람들의 집회 장소는 어디였을까? 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천주교 집회 장소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임시 집회장소로서 개인 집의 활용이었다. 초기 신자들의 공초에서 개인 집을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고, 뮈텔 주교의 순방 기록 및 선교사들의 서한을 통해서 강원지역에서 개인 집을 사용해 집회장소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회장 직분을 통해 개인 집을 공소로 활용할 때의 규식에 대한 언급이 있어 당시 개인 집에 대한 사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후 시기의 증언에서도 별도의 공소 공간 대신 개인 집을 집회장소로 활용하였음을 볼 때 박해를 받던 시기뿐만 아니라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에도 공소 건물이 짓지 못한 채 개인 집을 사용한 것은 사례는 많았다.

 

두 번째 집회장소의 변화는 한옥형 별도의 건물이었다. 한옥 성당의 경우 토착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으며, 대부분은 유서 깊은 지역의 교우촌에 지어지거나 한국인 신자들의 자발적인 모금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자금의 부족과 당대의 사회 인식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의 한옥을 활용하거나 기존의 자재를 활용한 한옥형 성당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맞게 강원지역에서도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한옥형 성당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한옥형의 별도 건물은 성당뿐만 아니라 공소집으로도 많이 건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있었다.

 

집회장소의 변화 세 번째는 서구식 성당의 도입이다. 오랜 박해 끝에 자유를 획득한 천주교는 선교사의 주도하에 성당을 건립되면서 서양식의 벽돌조 건물이 지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강원지역의 성당들은 서울이나 다른 지방에 비해 다소 뒤늦게 건립되었지만 다른 지방의 주요 성당에 비해 큰 시차를 보이지 않으며,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어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초기 성당 건축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크다.

 

집회장소의 변천 과정은 신앙을 유지하기 위한 당시 신자들의 노력을 볼 수 있는 부분이고, 개인집에서 한옥형 성당, 그리고 서구식 성당으로의 변화는 처음 교회가 들어온 이후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기까지의 과정에서 교회의 지위가 변화됨도 보여준다. 즉, 개인 집에서 숨어서 하던 집회가 한옥으로 된 성당 건축으로 표현되고,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서 높이 솟은 십자가의 서구식 형태로의 변화는 천주교 전래 이후 정착과정에서 교회의 지위 역시 변화한 것이다.

 

본고에서는 천주교 집회장소의 변화 양상을 강원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개인집에서 한옥형으로, 한옥형에서 서구식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은 주지하고 있던 사실이나 강원지역의 사례를 통해서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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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기 외, 〈가시체계로 본 강원도 성당 건축의 평면구성 변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4권, 2008.

金鍾麒, 《江原道 長軸型 聖堂의 祭壇構成과 可視體系에 關한 硏究》, 서울市立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9.

이원희, 《강원지역 천주교사 연구》, 강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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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성당 건축에 관해서는 김정신 교수가 성당 건축이 수용, 변천, 발전되는 과정을 박해시대(1785-1886), 개화기(1886-1910), 일제 강점기(1910-1945), 해방과 격동기(1945-1962), 현대(1962-1992)의 다섯 시기로 나누어 처음으로 정리하였다(《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이후 각 지역에서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오래된 성당 건물에 대해서는 건축학적인 입장에서 정리가 이루어졌다.

강원지역의 경우, 원주의 용소막성당(《문화재실측조사보고서 - 용소막성당》, 2000)과 횡성의 풍수원성당(《문화재실측조사보고서 - 풍수원성당》, 1999)에 대한 실측조사보고서가 있다. 또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춘천의 죽림동성당과 소양로성당에 대한 목록화 조사보고서 및 강릉 임당동 성당, 횡성성당에 대한 목록화조사 보고서가 있다. 이 보고서들은 성당에 대한 간략한 역사를 담고 있기는 하나, 역사적인 측면보다는 건축학적인 입장에서 실측, 설계, 건축유형 등에 대한 것을 담고 있다.

 

2) 《정조실록》 정조 19년(1795) 8월 1일자 기사

3) 《순조실록》 순조 1년(1801) 2월 23일자 기사

4) 《역주 사학징의 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편, 2001, 142-146쪽 참조.

5) 홍문갑은 강완숙의 의붓아들이다. 일반적으로 홍필주(洪弼周)라는 명칭으로 많이 나온다.(위의 책, 142쪽)

6) 앞의 책, 162-163쪽 이국승 공초.

7) 앞의 책, 182-184쪽 윤점혜 공초.

8) 주문모 신부를 말함

9) 《순조실록》 순조 1년(1801) 5월 22일자 기사

10) 《순조실록》 순조 1년(1801) 12월 22일자 기사

11) 《역주 사학징의 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편, 2001, 193-198쪽 정광수 공초.

12) 최양업 신부의 1857년 9월 14일자 서한

13) 최양업 신부의 1858년 10월 3일자 서한

14) 《순조실록》 순조 1년(1801) 12월 26일

15) 평창군 미탄면 회동리

 

16) 《회장직분》, 제4편 제1장. 회장직분은 1923년에 편찬된 회장들을 위한 지도서로, 뮈텔 주교는 서문에서 신자들이 신자답게 살고 교회의 가르침을 잘 지켜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 지침서가 필요했다고 적고 있다. 회장직분은 《회장》(한국교회사연구자료 2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년)을 참고하였다.

 

17) 이 증언은 필자가 용소막성당 100년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직접 채록한 것으로 증언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다.

 

18) 김종기, 《강원도 장축형 성당의 제단구성과 가시체계에 관한 연구》,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 26쪽 참조.

 

19) 김종기, 앞의 논문, 25쪽.

20) 《서울교구연보Ⅰ(1878-1903)》, ‘1891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4, 109쪽.

21) 《서울교구연보Ⅰ(1878-1903)》, ‘1892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4, 117쪽.

22) 정규하 신부의 1896년 8월 18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5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3) 정규하 신부의 1897년 2월 7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5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4) 부이용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9년 7월 3일자 서한

 

25) 드브레 신부의 1902년 2월 27일자 서한

“… 요즘 제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항은 다음 봄까지 가옥을 넓히는 일입니다. 이번에는 꼭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저는 인근의 모든 가옥들을 매입했습니다. … ”

드브레 신부의 1902년 5월 25일자 서한

“… 인근 가옥들을 모두 매입했고, 요즘은 담장 두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한때 행정관리가 지금의 집까지 나있는 길을 막아선 안 된다고 금지했으나 지금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는 보름 전쯤에는 저보고 제게 매입해 허문 가옥의 수를 알려줄 것을 요청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지내고 있는 방들은 터서 자그마한 예배당으로 쓰일 것입니다.”

 

26) 《서울교구연보Ⅰ(1878-1903)》, ‘1901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4, 285쪽.

27) 오영환, 박정자, 《순교의 맥을 찾아서》, 가톨릭출판사, 2009, 330-331쪽.

28) 《원동백년사》, 천주교 원주교구 원동교회, 1999, 267-270쪽.

29) 김종기 앞의 논문 27-28 참조.

 

30) 김대흠 옹은 1929년 1월 대안리에서 태어나 대안리에서 성장하였다. 올해 82세로 5대째 대안리에 살고 있으며 1985년 공소회장을 지냈다.

 

31) 《서울교구연보 Ⅱ(1904-1938)》, ‘1922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7, 173쪽.

32) 1930년 5월 《경향잡지》 기사

33) 1934년 1월 《경향잡지》 기사

34) 1934년 2월 《경향잡지》 기사

35) 1935년 7월 《경향잡지》 기사

36) 김정신, 앞의 책, 45쪽 참조

37) 김정신, 《한국 가톨릭 성당 건축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27-28쪽 참조.

 

38) 이와 관련해서는 《프랑스외무부분서》, ‘(39) 선교단이 매입한 토지로 야기된 문제에 대한 보고’ 1888년 11월 30일자 관련 문서의 별지, 부속서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이를 참조하였다.(《프랑스외무부문서》 1888, 국사편찬위원회, 2003, 120-145쪽).

 

39) 《서울교구연보Ⅰ(1878-1903)》, ‘1888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4, 65쪽.

40) 《서울교구연보Ⅰ(1878-1903)》, ‘1888년도 보고서’, 명동천주교회, 1984, 72쪽.

41) 정규하 신부의 1906년 5월 6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2) 정규하 신부의 1907년 1월 30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3) 정규하 신부의 1909년 1월 11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4) 정규하 신부의 1910년 2월 9일자 서한 - 풍수원, 《교회와 역사》 228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45) 《뮈텔 주교 일기》 1900년 11월 7일자에 “아오스딩(정규하) 신부는 10리 거리까지 우리를 마중 나왔다. 1시 반쯤 풍수원에 도착했다. 성당은 작은 교우 집들이 그 앞에서 자취를 감춘 듯 계곡에 우뚝 솟아 있는 듯하였다. 이 성당은 두세 신부 성당의 모방이다”라고 되어있다.

 

46) 기요 신부의 1911년 4월 20일자 서한 - 용소막

47) 기요 신부의 1913년 9월 15일자 서한 - 용소막

48) 시잘레 신부의 1914년 6월 22일자 서한 - 용소막

49) 시잘레 신부의 1914년 9월 19일자 서한 – 용소막

50) 김종기 외, 《가시체계로 본 강원도 성당 건축의 평면구성 변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24권, 2008, 174쪽.

 

[학술지 교회사학 vol 9, 2012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원희 (강원대학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90682&Page=14&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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