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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천당강론의 천국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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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10-30 ㅣ No.1063

[천주가사 속 하느님 나라 이야기] ‘천당강론’의 천국 풍경

 

 

‘천당강론’은 복되고 거룩한 천국의 모습과 그로 말미암은 천국에서의 기쁨과 감격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잠깐 머물다가는 현세에서 영원한 천국을 묵상하라고 권고하는 노래이다. 이 천주가사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민극가 스테파노 성인(1787-1840년)이 창작했다고 전해 온다.

 

그는 아내와 딸이 세상을 떠나자 서책 필사를 생업으로 삼아 계명을 지키며 살다가 전교 회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였다. ‘삼세대의’를 비롯해 ‘천당강론’과 ‘지옥강론’의 가사를 창작하여 교리 교육과 전교에 힘을 쏟았다.

 

‘천당강론’과 ‘지옥강론’은 사말 교리와 관련한 천주가사인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와 달리 다수의 이본이 전해 온다. 이는 당시에 현세의 삶에 대한 결과로서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음을 방증한다.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위한 묵상집 「회죄직지」의 ‘사후를 생각함이라’에서 사심판과 공심판에 대한 언급 없이 지옥의 괴로움과 천당의 즐거움만을 묘사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여러 이본 가운데 「시복자료본」 소재의 ‘천당강론’은 4음보 55행으로 이루어졌다. ‘천당강론’이 다른 천주가사에 비해 분량이 적은 이유는 1925년 이순성 신부가 지은 「사말일언」의 ‘천당’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신부는 “천당의 복락을 조금 형언하려다가 오히려 천당의 그림자도 알지 못하는 말로 하였으니, 천당의 그 높은 낙과 높은 복에 욕이 될까 하여 그만 그치나이다.”라고 하였다. 곧 하느님께서 마련한 천국의 복락을 인간이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는 겸허함이 투영된 결과이다.

 

 

천당 영복의 정경

 

‘천당강론’의 구성은 ‘천당 영복의 정경’, ‘천당의 아름다운 풍경’, ‘천당의 복락’, ‘천당의 거룩함’, ‘천당 권면’으로 이루어졌다. ‘천당 영복의 정경’은 4-9행에서 잘 드러난다.

 

삼위일체 영광이요 성령은총 바다로다

복해련류(福海連流) 흘러가니 성령지체 젖어있네

성모의 높은위는 십이수은(十二受恩) 벌려있고

친애지신(親愛至信) 사랑하며 치명지성(致命至誠) 찬송하고

동정지녀 혼배지정 함께이어 송양하니

육복지은(六福之恩) 어떠하며 사기지은(四奇之恩) 어떠할꼬

 

선한 이는 죽은 뒤 천국에서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성모와 함께 여섯 가지 복인 ‘육복지은’과 네 가지의 기이한 은혜인 ‘사기지은’을 누리게 된다. ‘육복지은’은 「사후묵상」의 ‘론천당이라’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성경’(聖京), ‘천향’(天鄕), ‘태평역’(泰平域), ‘낙지’(樂地), ‘정길계’(定吉界), ‘수구강산’(壽久江山)을 말하며, ‘사기지은’은 ‘통투’(通透), ‘무상’(無傷), ‘영광’(榮光), ‘경쾌’(輕快)이다. 이 연원은 바오로 사도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 3,21)라고 한 데에 두고 있다.

 

 

천당의 아름다운 풍경

 

천국의 아름다운 풍경은 10-17행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청강미수(淸江美水) 흘러있고 경지옥수(瓊池玉樹) 벌려있어

시들잖는 초목이요 여위잖는 꽃이로다

사시없는 상춘이요 밤이없는 낮이로다

백옥경 굳은곳에 십이문 열리고

황금백벽 현황(眩慌)하니 값없는 보배로다

오색구름 어린곳에 기린봉황 넘노난듯

천신들은 주악(奏樂)하고 성인들은 경탄하니

엄엄(掩掩)한 사랑이요 융융(融融)한 화평이라

 

천국의 풍경은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성경(묵시 21,9-27 참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천국은 천사와 성인들이 함께하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물로 꾸며져 있으며, 암흑과 시샘과 미움이 없는 사랑스럽고 화평한 기운이 넘치는 곳이다. 늑대와 새끼 양, 표범과 새끼 염소, 송아지와 새끼 사자, 암소와 곰,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살아가는 ‘평화의 왕국’(이사 11,6-8 참조)인 것이다.

 

 

천당의 복락

 

이어지는 22-31행은 현세의 삶에 대한 보상으로서 천국의 복락을 노래한다.

 

열심애주(熱心愛主) 하였으면 사랑하온 복락이요

능학지고(凌虐之苦) 받았으면 영복지락 복락이요

기의여갈(飢義如渴) 하였으면 포의하온 복락이요

양선지덕(養善之德) 하였으면 화평하온 복락이요

체읍지덕(涕泣之德) 하였으면 위로하온 복락이요

겸손지덕(謙遜之德) 하였으면 높고높은 복락이요

화목지덕(和睦之德) 하였으면 친애하온 복락이요

신빈지덕(神貧之德) 하였으면 충만하온 복락이요

심정지덕(心淨之德) 하였으면 정결하온 복락이요

 

상선벌악 교리를 충실히 반영한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설파하신 참행복, 곧 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에 근원을 둔다. 생전의 공로로 천국에서 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세에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학대의 고통을 참아 내며, 의로움을 갈구하고,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곧 내세의 복락은 현세의 삶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육화론적’ 영성과 ‘종말론적’ 영성이 모두 강조되고 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구체적인 시어를 동원하여 추상적인 복락의 실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가시화함으로써 천국에 대한 갈망과 천국에 가야 하는 당위성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이 노래를 향유하는 이들이 천주교의 가르침을 더욱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그야말로 ‘강론’에 합당한 표현이다. 아울러 ‘천당강론’의 마지막 55행은 1행과 마찬가지로 ‘우리벗님 가사이다 천당으로 가사이다’라는 천국 권면으로 마무리한다. 이러한 수미 상관법을 통하여 현세의 ‘잠깐 즐거움’보다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기를 강조한다.

 

올해는 기해박해 180주년이다. 그때 순교한 민극가 성인이 지은 천주가사를 곱씹으며 찰나와 같은 현세의 삶과 내세의 영원한 삶을 대비적으로 떠올린다. 지상의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매진하는 삶과 천상의 하느님 나라 완성을 위하여 정진하는 삶이 결코 둘이 될 수 없음을 되새기게 된다. 죽은 뒤에 누릴 천국의 행복은 현세의 삶을 기반으로 삼고 천상의 하느님 나라는 지상의 하느님 나라를 토대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과 완전히 정화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1요한 3,2) ‘얼굴과 얼굴을 마주’(1코린 13,12) 보기 때문에 영원히 하느님을 닮게 될 것이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항)라는 교회의 가르침이 가슴에 파고든다.

 

* 김문태 힐라리오 - 서울디지털대학교 교양학과 교수이며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기획조정위원장을 맡고 있다. 중국 선교 답사기 「둥베이는 말한다」, 장편 소설 「세 신학생 이야기」 등을 펴냈으며, 「천주가사」에 관한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9년 10월호, 김문태 힐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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