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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시 읽어주는 신부: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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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9-05-11 ㅣ No.371

[시(詩) 읽어주는 신부]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는 건

 

 

최근 종교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절실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종교인이 오랜 세월을 종교적 행위에 매진해 왔다할지라도 그 종교적 행위가 자동적으로 그 종교인의 인격적 성숙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톨릭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이라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종교적 행위 자체는 고유의 의미와 효과를 지닙니다. 하지만 어떤 형식적이고 반복적인 종교적 행위가 거기에 참여한 사람의 인격적 성숙을 자동적으로 담보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참여하는 종교적 행위라 할지라도 그 안에 담겨있는 보이지 않는 효과(은총)가 참여자의 인격 성숙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종교인의 인격적 성숙의 문제는 그 종교인이 종교적 행위에 참여할 때 어떤 지향과 마음과 태도로 참여하는가에 달려있고 또한 그 종교인의 일상적 수행의 방식에 달려있습니다. 다시 가톨릭 성사신학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인격성숙은 인효성(人效性)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조금 단순하게 말하면 평생 동안 종교적 행위를 하며 살았다 할지라도 그 종교적 행위를 아무런 의식적 집중과 내면의 지향 없이 그저 습관적이고 형식적이고 반복적으로 해 왔다면, 그 종교인의 인격적 성숙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듯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 같은 종교인이 될 위험이 더 많다는 의미입니다. 오랜 시간을 종교인으로 살아오면서 거듭 확인합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종교 행위가 갖는 위선과 위험을 우리 종교인들은 더욱 끊임없이 경계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세월이 간다고 해서, 나이가 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인격이 성숙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자신감을 상실하고 그래서 더 옹졸해질 수 있습니다. 잘 늙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오랜 시간 동안 종교적 행위를 반복적으로 해왔다고 해서 인격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형식적이고 교조적인 사람이 될 위험이 더 많습니다. 자신이 행하고 참여하는 종교적 행위 안에 부단히 의식적 집중과 내면적 지향을 실을 때 아주 조금씩 인격적 성숙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 일상의 모든 자리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자신의 종교적 열린 시선으로 수용하고 응답하는 수행의 삶을 살아갈 때 그제 서야 조금씩 인격적 성숙과 변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실을 나이 들어 이제 조금 깨닫습니다. 인격이 성숙하다는 것은 사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삶의 구석진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종교적 수행의 삶을 살아가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많은 종교인들에게서 사람다움과 아름다움의 모습보다 편견과 아집과 위선의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슬픈 현상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은 삶과 타인의 슬픔에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거듭 생각합니다. 신용목 시인(1974년생)의 시집을 읽으면서 내내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허수경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신용목 시인도 인간 운명의 비극적 속성에 예민하고 타인의 슬픔에 대해 공감적 민감함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2004년에 상재한 첫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 지성사)에서부터 올해 발간한 『나의 끝 거창』(현대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섯 권의 시집 전체에 삶의 상처와 슬픔에 대한 시선과 흔적이 가득합니다. 한 시인의 전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과 그의 삶이 보이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말해, 시집 안에서 시인의 삶과 시인의 시간을 읽어낼 때, 또 그것들이 보일 때는 좋고 기쁩니다. 시인과 그의 삶의 시간이 보이지 않고 언어만 보일 때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시에 대한 언어적, 문학적 분석보다는 시를 매개로 사람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저의 시 읽기 방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허수경 시인도 고백합니다. “어떤 시집은 그 시집의 시간을 독자들에게도 그대로 살게 한다.”고 말입니다.(신용목,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창비, 2017, 뒷표지 글에서) 한편으로 한 시인의 전체 시집을 읽다보면 초기 시집이 후기 시집을 이해하게 해주고, 후기 시집이 초기 시집을 이해하게 해주는 경우를 자주 발견합니다. 신용목 시인의 전 시집을 읽으면서도 그랬습니다. 처음에는 어렴풋했던 부분들이 전 시집을 읽다보면 조금씩 환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렇게 삶은 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신용목 시인은 첫 시집 뒷표지 글에서 자신은 “망한 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버릇을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섯 권의 시집 전체 안에는 슬픈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가득합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며, 공감과 연대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슬픈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가난하고 참혹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름답습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시인은 첫 시집에서부터 누추한 삶과 시간 속에서 소멸하는 삶에 대한 관심을 드러냅니다. 시인의 초기 절창으로 여겨지는 「갈대 등본」에는 폐염전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고단한 염전 노동자의 삶과 폐허의 화석으로 변해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공감과 연대가 고스란히 노정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곳은 시간 속에서 유적이 됩니다.(「아파트인」) “방도 때로는 무덤이어서 사람이 들어가 세월을 죽여 미라를 만”(「오래 닫아둔 창」)들고, “살아 많은 날들이 죽어 하루로 남”(「祭日」)고, “감당하지 못할 사랑을 덮어주는 것은 이별”(「왕릉 곁」)이라고 시인은 쓸쓸하게 노래합니다. 시인에게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화석이 되고 지층이 됩니다.(「말의 퇴적층」) “삶을 시간 속에서 사유하려는 시인의 심성적 태도”(황광수)의 근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의 죽음과 문학청년의 시절을 함께 한 사람들의 급작스런 죽음에서 기인된 상처와 관련이 있음을 『나의 끝 거창』에 실린 시와 에세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은, 실존적 삶의 자리는 ‘폐허’이며 사회적 현실은 ‘적국(敵國)’의 모습입니다. “사물이 견디는 시간에 대해/ 유행가의 비틀거리는 가사를 병 속에 불어넣고서, 인간은 끝없이 파멸해가는 기호들이라고/ 우리의 숙주인 물과 공기 그리고 세상 이전의 숙주인/ 어둠을 함께 바라”(「늙은 산들의 마을」)본다고, “삶의 얼굴을 벗은 죽음의 표정을”(「우리가 잊혀질 때」) 본다고 시인은 탄식합니다. 모든 사각의 자리는 관(棺)이며 “어디에 닿아도 무덤”이고 “어디를 가도 화장터이므로” 우리는 그저 “시간의 부장품”에 불과합니다.(「꽃들의 귀가」) “세월은 제가 손님인 줄도 모르고 허락 없이 놀러 와서 돌아가지 않”(「허락 없이 놀러 와서」)습니다. 무심한 시간 속의 우리의 실존적 삶은 운명과 우연의 포로수용소의 삶일 뿐입니다. “지나간 모든 이야기는 운명이 된다, 다가온 모든 이야기가 우연이었듯.”(「우리가 헤어질 때」) “묻지 마,// 중력의 울타리를 친 행성의 서러운 수용소에서/ 줄지어 밥을 타러 가는 이유에 대하여.”(「포로들의 도시」) 따라서 “이 생과의 계약이 오래 아프리라는 것”(「꿈 밖에서 잠들다」)을 시인은 본능적으로 예감합니다. 삶이라는 폐허 속에서 “발굴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않는 것”(「얼굴의 고고학」)입니다. “누구도 자기 얼굴에 그려진 지도를 읽지 못”(「얼굴의 고고학」)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분명한 당위는/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을 후회”(「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하는 일일 뿐입니다. 시인의 시선 속에는 사회적 현실 역시 ‘역모’와 ‘반란’과 ‘섭정’과 ‘부역’의 혼돈 상태입니다.(「敵國의 가을」)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고,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습니다.(「아무 날의 도시」) 실존의 풍경이든 사회적 풍경이든 시인에게 모든 풍경은 슬픔의 자리입니다. “슬픔은 풍경의 전부를 사용”(「저지르는 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가진 “재주는 어둠이 깨진 자리에 정확한 크기로 박히는, 슬픔의 오래된 습관”(「공터에서 먼 창」)일뿐이며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나에게 와 잠을 청”(「공동체」)한다고 시인은 담담히 말합니다.

 

신용목 시인이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미지의 하나는 ‘시체’입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밀했던 동료의 죽음은 “육체 속에 숨어 있던 시체”(「게으른 시체」)를 발견하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왜 육체가 시체가 되었냐고/ 왜 시체는 육체가 못 되냐고”(「게으른 시체」) 간절히 묻지만 “하나의 시체에 꼭 하나의 죽음만 달라붙어 있는 게 아니라는”(「그해 안부」) 슬픈 사실만 깨달을 뿐입니다. 육체와 시체의 흐릿한 경계 안에서 “꿈은 시체의 삶”이 되기도 하고 “삶은 시체의 꿈”이 되기도 합니다.(「그림자 섬」, 「근육」) 그래서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연금술일지도”(「게으른 시체」) 모른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시인에게 삶은 “일상이라는 죽음을 죽기까지”(「나는 알고 있거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공원 벤치에

누워서 바라보면 구름의 수염 같은 나뭇잎들 누워서 바라보면

하얗게 떨어지는 별의 비듬들

누워서 바라보며

칼자루처럼

지붕에 꽂혀 있는 붉은 십자가와

한켠에 가시넝쿨로 모여 앉아 장미 같은 담뱃불 뒤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어린 연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버려진 매트리스에 붙은 수거용 스티커를 바라보며 한때의 푹신한 섹스를 추억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종량제 봉투를 꾹꾹 눌렀던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는 얼굴로

어느 저녁엔 시를 써볼까

어둠 속에서 자라는 환한 그림자를 밤의 기둥에 쿵쿵 머리로 박으며

방 없는 문을 달고 싶다고

벽 없는 창을 내고 싶다고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오래 눕지도 못하는 공원 벤치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으로 칠한 조립식 무지개처럼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별이 진다 깨진 어둠으로 그어 밤은 상처로 벌어지고 여태 오지 않은 것들은 결국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그대로인 기다림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너는 환하게 벌어진 밤의 상처를 열고 멀리 떠났으니까

나는 별들의 방울소리를 따 가슴 주머니에 넣었으니까

바람 불 때마다 방울소리 그러나

나는

비겁하니까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라는 시의 전문입니다. 삶과 죽음, 시체와 육체의 경계가 흐릿하고, “슬픔이 나를 내 인생에 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귀가사(歸家辭)」)겠다고 엄살(?)을 떨지만 삶은 또 그저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정직하게 성찰합니다. 우리는 “인생은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겨지는 것”이라 애써 변명하며,(「카프카의 편지」) “타인의 상처를 제조해 자신을 치유”(「게으른 시체」)하는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오랜 맹세를 철없는 객기로 돌려세울 시간을 조금씩” 늦추고 있는 비겁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은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모든 계절은 습관이 되고 모든 날들은 순서가 되는 생활의 텅 빈 창고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숨김없이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의 생활은 체념 그러나 체념의 끝에서 우리가 해야 할”(「모리재」) 것은 기억하고 호명(呼名)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만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서로를 기억하는 사람 또한/ 우리라서.”(「우리라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모래시계」) “죽은 후에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아름다웠다.”(「그림자 섬」)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공동체」)

 

신용목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슬픈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운명의 비참함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해도 그저 슬픈 눈으로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슬픈 시선 안에서 기억하고 호명하는 행위가 구원의 시작임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 도저한 슬픔의 기운이 구원의 단초일 수 있다는 생의 역설을 시인의 시에서 배웁니다. 슬픔의 자리에서 간절한 질문을 던지고 말(또는 시)을 찾아가는 시인의 태도가 저에게는 더 수도자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철학자 김영민 선생 역시 참된 공부는 “절실하게 묻고 말을 기다리는(切問待言)” 일이라고 정의합니다. 참된 신앙의 삶과 참된 신앙인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삶의 자리, 특히 고통과 슬픔의 자리에서 간절하게 묻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모습이 신앙의 수도자일 것입니다. 신용목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삶 속의 진정한 수행자는 세상을 슬픈(연민과 연대의)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며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며 그들의 이름을 간절히 부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월간빛, 2019년 5월호, 정희완 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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