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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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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8-11 ㅣ No.1777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1) 말씀이 육이 되신 곳, 나자렛

 

 

-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내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제대 앞에 라틴어로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라고 씌어 있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후손들이 사는 ‘약속의 땅’. 하느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성지 중의 성지’. 4000년 역사 안에 이민족의 숱한 침략과 유배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처음 울려 퍼진 땅. 이스라엘이다. 7월 24일~8월 1일 일주일간 타임머신을 타고 성경 속을 거닐듯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이스라엘 관광청과 공동 기획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스라엘 순례기를 4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스라엘=이정훈 기자

 

 

이스라엘 북부 갈릴래아 지방의 작은 마을 나자렛. 성모 마리아가 천사를 만나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고, 이후 예수님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공관복음은 이 시기 예수님 이야기를 풍부히 다루고 있진 않지만, 예수님이 어린 시절 믿음을 다지며 생활하고, 공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혜를 쌓던 고향이다.

 

- 나자렛 마을 모습. 과거에 비해 도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상단 중앙이 주님 탄생 예고 성당 뒷모습.

 

 

2000년 전 이 작은 마을은 겨우 150명 남짓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가난한 동네였다. 믿음의 성지 예루살렘과는 150㎞ 떨어져 있고, 갈릴래아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다. 스코틀랜드의 저명한 화가 데이비드 로버트가 1830년쯤 이곳을 방문한 뒤 그린 나자렛 마을 전경 작품만 들여다봐도 당시 나직나직한 전통 가옥 몇 채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 나자렛은 아랍인들이 주를 이루는 인구 8만 명의 제법 큰 도시로 성장했다.

 

나자렛 마을은 해발 600m 언덕 분지 안에 집들이 빙 둘러 자리한 모습을 띠고 있다. 3~4층 높이의 제법 큰 건물들도 곳곳에 자리한 동네가 됐다.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나자렛 마을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다닐만한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대형 첨탑이 드리운 성당에 다다른다. 성모 마리아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며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잉태하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인 위대한 신앙 고백의 현장이다. 작고 가난한 유다인 마을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고, 마리아의 태중은 이내 찬란하게 빛날 분이 모셔진 성스러운 지성소가 된다. 하느님의 총애 속에 마리아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을 곧 잉태하게 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정면 모습.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은 ‘성모님의 집터’로 추정되는 동굴 위에 세워져 있다. 1969년 봉헌된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마당은 전 세계 각국이 봉헌한 성모 성화로 둘러싸여 있다. 육중한 문을 열고 대성전에 들어가면 주님 탄생 예고 동굴 앞 제대가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Verbum Caro Hic Factum est)’. 제대 정면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신비가 라틴어로 쓰여 있다. 2층 본 성전을 따라 눈길을 올려다보니 첨탑 꼭대기에 성모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백합과 아베 마리아(Ave Maria)를 뜻하는 무수히 많은 ‘A’와 ‘M’이 수놓아져 있다.

 

그런데 마리아의 집이 동굴이라니. 의아할 법도 하지만, 이는 헤로데 대왕 시대의 전형적인 가정집 형태였다. 석회암으로 만든 작은 방과 부엌, 물 저장소, 곡식 창고 등이 1~2평 남짓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작고 가난한 집에서 성가정을 이뤘을 2000년 전 소박한 예수님 가족이 눈앞에 그려진다.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는 요셉의 집터 위에 세워진 ‘요셉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살았던 모양이다. 어린 예수는 부모의 손을 잡고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회당을 찾았을까. 또 어린 예수는 목수였던 아버지 요셉이 일하는 것을 얼마나 유심히 지켜봤을까. 물을 길어오는 어머니 마리아의 정성스러운 손길, 철없이 뛰어다니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줬을 요셉과 마리아의 따스함은 얼마나 컸을까. 인근에는 예수님이 드나들었던 유다인 회당 자리의 성당과 마리아가 매일 우물을 길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

 

나자렛의 국제마리아센터 지하에 그대로 보존된 예수님 시대 이전의 가옥 모습.

 

 

2010년 ‘주님 탄생 예고 기념 성당’ 바로 옆에서 예수님 시대 집터가 새롭게 발견됐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잘 보존된 주거지가 발굴된 것은 이 지역에서 드문 일이다. 새로 발굴된 주거지에서는 기원전 1000년 솔로몬 시대 때 가옥의 벽면과 지하 3층 깊이 저수시설, 점토 항아리 등이 발견됐다.

 

구약성경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나자렛 마을이 이미 신약의 예수님 시기 이전부터 촌락을 이루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어서 의미가 크다. 이스라엘 문화재청은 이 집터에 국제마리아센터를 건립해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 시대와 그 이전의 집터를 생생히 감상하도록 돕고 있다. 예수님 관련 영상 감상실과 전시실, 나자렛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경당 등을 갖추고 있다.

 

가장 가난하고 작은 마을 나자렛. 나타나엘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1)하고 필립보에게 보인 시큰둥한 반응이 그럴 법하게도 다가올 만큼 보잘것없는 이곳에 주님의 천사가 찾아왔다. 그리고 성가정은 파스카 축제 때마다 머나먼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신심 깊은 가족이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12일, 이정훈 기자]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2) 공생활 무대, 갈릴래아

 

 

- 예수님은 이 언덕 어딘가에서 1만 명의 군중에게 산상 설교를 펼쳤다.

 

 

‘교회의 믿음’은 갈릴래아 지방에서 시작됐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마태 4,23)

 

예수님은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기원후 28년경이다. 예수님은 약 3년간 갈릴래아 호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과 여러 기적으로 ‘무형의 성전’을 지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말씀과 여러 기적으로 ‘무형의 성전’을 지으셨다.

 

 

이스라엘의 젖줄 요르단강과 굽이굽이 연결된 갈릴래아 호수. 예수님의 숨결이 깃든 신성한 곳이다. 폭 15㎞, 수심 40m에 이르는 갈릴래아 호수는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충분히 ‘바다’로 여겼을 만큼 드넓다. 그 시절 20여 개의 항구가 있었고, 어업과 수로 교통이 발달한 풍요로운 지역이다. 지금도 20여 종의 물고기가 잡히며 적지 않은 유다인들이 여전히 이 ‘황금어장’으로 고기잡이 배를 몰고 나가 전통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말씀을 통해 스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에 오르시어 1만 명에 이르는 군중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셨다. 산상 설교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첫 마디가 “행복하여라”였을까. 당시에도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 아프고 병든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하고, 자비롭게 되면 이를 수 있는 ‘하늘나라 길’을 열어주셨다.

 

예수님이 산상 설교를 펼치신 곳에 1937년 봉헌된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이 있다. 예수님의 여덟가지 참 행복 선언이 적힌 기념석들이 성당 밖 정원을 장식하고 있고, 길을 따라 아담한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팔각형 돔에 걸린 창문마다 라틴어로 적힌 팔복을 볼 수 있다. 순례객들이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설교 현장에 가득했을 뜨거운 기운을 느끼는 곳이다.

 

수많은 군중이 이곳에서 예수님 설교에 귀 기울였다니. 이렇다 할 음향시설도 없었을 그 시절, 드넓은 구릉지에서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 아마 예수님 따르는 이들의 ‘강한 믿음’이 작용했으리라. 언덕에 듬성듬성 자리한 바위에 잠시 몸을 기대어봤다. “하늘의 아버지를 닮아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 음성이 호수를 때리고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 카파르나움의 회당과 주거지 모습(상), 참행복 선언 기념 성당(중), ‘Duc in Altum(라틴어 ‘깊은 곳으로 가라’)’ 성당(하).

 

 

예수님은 ‘찾아가는 목자’였다. 갈릴래아 호숫가는 물론, 회당과 제자의 집, 산, 외딴곳, 심지어 멀리 시돈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만났다. 그 중 갈릴래아 호수 북쪽의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공생활 거점’이자 ‘기적과 설교의 현장’이었다.

 

카파르나움은 ‘부유한 상업 지역’이었다. 예수님은 많은 유다인이 거주하던 카파르나움 지역의 중심인 회당에서 설교하고 기적을 베풀었다. 악령 들린 자와 중풍 병자를 치유한 예수님은 회당 바로 인근 베드로의 집에서도 아픈 베드로의 장모를 고쳤다. 예수님이 자주 머물렀던 베드로의 집터 위엔 5세기 때 지은 팔각형 성당 터가 있고 그 위 어선 모형의 현대식 성당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회당 터가 있고 그 앞에 1세기 주거지가 펼쳐져 있다. 큰 규모의 회당만 봐도 과거 이 지역이 얼마나 번성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카파르나움에서 남쪽으로 3㎞가량 내려오면 ‘일곱 개의 샘물’이란 뜻의 ‘타브가’ 지역이 있다. ‘오병이어 기념 성당’과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자리한 곳이다. 예수님은 치유를 넘어 굶주린 이들 5000명에게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일용할 양식까지 주셨다. ‘오병이어 기념 성당’은 614년 페르시아군에 의해 파괴되고 1300여 년간 폐허로 방치됐다가 19세기 들어서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시며 이 땅의 사도로서 ‘수위(首位)’를 맡겼다. 이를 기념하는 ‘베드로 수위권 성당’ 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갓 구운 물고기로 식사를 나눈 ‘주님의 식탁(Mensa Christi)’이 있다. 예수님이 차려준 밥상을 나눈 제자들이 부럽게 느껴지는 곳이다.

 

헤로데 왕의 아들 안티파스가 기원후 22년 갈릴래아 호수 서남부 지역에 세운 중심 도시 티베리아스. 이 지역 바로 옆에 위치한 ‘막달라’ 지역은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향이다. 그런데 2009년 이곳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집터, 어업 공장 터, 세례 터 등이 대규모로 발굴됐다.

 

본래 피정센터와 숙소를 짓는 공사를 한창 진행 중이던 그리스도 레지오 수도회 측은 이후 발굴에 전념했고, 현재 발굴터 뒤편에 숙소를 건립 중이다. 이곳 ‘막달라 회당’에서는 안티파스 시대 동전 4000여 개와 모자이크화, 유다교의 상징인 메노라(7개의 촛대)가 새겨진 돌이 발견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1세기 시절 회당이 발견된 것은 ‘막달라 회당’을 합쳐 지금까지 7곳뿐인 데다 카파르나움과 지척이며 예수님이 설교를 위해 다녀갔을 것으로 여겨져 의미가 크다.

 

발굴터 뒤쪽에는 2014년 ‘Duc in Altum(라틴어 ‘깊은 곳으로 가라’)’ 성당이 건립됐다. 예수와 제자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려진 각종 모자이크화와 ‘예수님의 배’를 형상화한 제대 등 성미술 작품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성당 지하에 1세기 회당 모습을 그대로 연출해 만든 경당에서도 연중 미사가 봉헌되는 등 ‘막달라 성지’가 활발히 조성 중이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과 ‘사람’뿐이었다. 예수님은 세리, 죄인과 함께 식사를 나눴고 안식일에도 기적과 선행을 베푸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유다인, 사마리아인, 간음한 여자, 나환자, 이방인, 원수 등 신분과 지위 구분 없이 전해졌다. 모두를 위해 강생한 ‘치유자’요, ‘위로자’였다. 율법만 고수하던 바리사이와 사두가이파들은 그런 예수님을 비난하기 급급할 뿐이었다. 예수님은 이에 타보르산에 올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빛나는 옷을 입고 천상 모습을 보여주셨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19일, 이정훈 기자]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3)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예루살렘

 

 

올리브산에서 본 예루살렘 전경. 예루살렘 황금 돔 사원과 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 때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강제 호구 조사를 당하고, 시도때도없이 로마군에게 멸시받는 등 폭정에 치를 떨고 있었다. 이런 치욕을 두고 보지 못했던 열혈당원과 민중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때마다 많은 유다인이 붙잡혀 십자가형에 처해지거나 학살당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 예루살렘 하늘엔 어김없이 뜨거운 태양이 떴다. 숱한 침략과 전쟁으로 무너졌다가 재건되길 반복한 8m 높이 성벽으로 둘러쳐진 해발 700m 고지의 예루살렘.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역에서의 공생활을 마치고, 무교절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예루살렘 입성에 앞서 이미 라자로를 살리시고, 예리코에서 눈먼 이를 치유하신 막바지 기적을 일으키신 터라 많은 유다인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 양옆에 도열해 “호산나”를 외치며 맞았다.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폭정에 항거할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멋들어진 말 대신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예수님의 설교는 예루살렘에서도 이어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불신’과 ‘모함’의 땅이었다.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끈질겼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붙잡아 제거해버릴 심산이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바위가 있는 ‘겟세마니 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고 있다.

 

 

예루살렘 시내가 파스카 축제로 온통 들썩이던 날.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파스카 음식을 차려주셨다.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님은 붙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셨다. ‘몸’과 ‘피’로 제자들과 새 계약을 맺으신 것이다.

 

성찬례가 제정된 거룩한 장소인 ‘최후의 만찬 기념 성당’은 예루살렘 남서쪽 시온산에 있다. 작은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고스란히 제자들에게 내어주셨다. 함께한 제자들을 끝까지 챙기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영광스럽게 되실 예수님의 의중을 잘 알지 못했다.

 

예수님에게도 ‘아버지께 이르는 길’은 고독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리라. 3년 내내 복음을 전하고, 이웃을 치유해준 예수님에게도 인간적 번민과 모멸감이 왜 없었을까. 하느님의 큰 뜻은 모른 채 그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고 침을 뱉으려는 유다인들과, 하느님 뜻을 온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비통한 심경이 왜 들지 않았을까.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의 고독은 절정에 달한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하고 기도하신다. 그러자 예수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겟세마니 동산.

 

 

겟세마니 동산은 예루살렘 성벽 밖 키드론 골짜기 넘어 우뚝 솟은 올리브 산자락 아래에 있다. 예수님이 ‘절정의 고뇌’를 맞으신 이곳에 ‘겟세마니 성당’이 있다. 예수님께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했던 바위가 제대 앞에 자리하고 있다. 어두컴컴한 성전 분위기가 예수님의 고뇌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산 중턱에 ‘주님 눈물 성당’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 우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곳이다.(루카 19,42-44) 유리창 십자가 뒤로 황금 돔 사원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전히 믿음이 약한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선 하늘에서 지금도 이따금 눈물을 흘리고 계시진 않을까.

 

이윽고 유다의 입맞춤에서 촉발된 포박은 예수님을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모인 최고 의회로 끌고 갔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형 선고를 탐탁지 않아 하던 빌라도 총독 앞에서 유다인들은 바라빠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쳤다.

 

겟세마니 동산 쪽에서 들어갈 수 있는 성 스테파노문(사자문)을 지나 조금 걷다 보면 모욕의 현장인 ‘채찍성당’과 ‘사형선고성당’이 나온다. 사형선고 후 40여 대에 달하는 채찍질에 이어 로마군 조롱 속에 가시관을 쓴 예수님 고통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장소다.

 

- ‘주님 무덤 성당’ 내 예수님 무덤과 부활 경당에 순례객들이 끊이지 않고 방문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 수난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바칠 수 있다. 대형 십자가를 빌려주기도 하고, 매주 금요일 오후 3시면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진행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도 거행된다. 크기 2m, 무게 70㎏이 넘는 거칠거칠한 십자가는 피땀으로 범벅이 된 예수님의 살갗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수난의 길’ 위에 내 발을 한 걸음 한 걸음 포갤 때 형언하기 어려운 무거운 마음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워 하는 아들을 먼발치서 지켜봤을 어머니 마리아의 심경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해골산 ‘골고타 언덕’까지 800m. 오늘날 십자가의 길 14처 가운데 제1~9처는 수많은 상점 사이사이와 여러 성당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십자가의 길을 바치다가 좁고 혼잡한 거리의 시끄러운 상인들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집중해야 할 정도다.

 

제10~14처가 있는 ‘주님 무덤 성당’은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가톨릭ㆍ그리스 정교회ㆍ콥트 교회 등 여러 종파가 공동 소유하고 있다. ‘주님 무덤 성당’ 입구 오른편에 예수님 십자가가 박혔던 골고타가 있고, 입구 중앙에는 주님 무덤 석관이 있다. 성당 중앙에 자리한 ‘예수님 무덤과 부활 경당’은 매일 수많은 순례객이 조문하고 기도하는 곳이다. 주님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돌 위에 손을 얹고 잠시나마 예수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동시에 봉헌할 수 있다.

 

온갖 모략과 음모를 꾸민 대사제 카야파와 수석 사제들. 금요일 오후 3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목적 달성’을 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흘 후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미 흩어진 제자들 눈앞에 예수님은 친히 방문해 평화까지 기원하셨다. 인간의 모든 죄를 한 아름 안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종교’요, 예수님 여정은 ‘생명과 구원의 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고 계시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8월 26일, 이스라엘=이정훈 기자]

 

 

예수님 발자취를 따라 이스라엘 성지를 가다 (4 · 끝) 신앙과 기억의 땅 이스라엘 

 

 

- 유다인들과 순례객들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다.


2015년 예루살렘 다윗 도시 바로 옆 주차장 부지 아래에서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요새 터.


예루살렘 시온산에 우뚝 세워져 있는 성모영면기념성당. 이곳 지하 경당에 모셔진 성모님상 앞에는 연일 순례객들이 찾아 기도를 바친다.

 

 

성경을 낳고, 성경을 품은 중동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은 ‘성경의 땅’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인류사에 개입하신 하느님 섭리를 다룬 ‘하느님의 서사시’ 성경 말씀이 살아 숨 쉬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남부 광활한 광야 지역에는 구약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비옥한 평야와 갈릴래아 호수가 넘실대는 북부 지방에는 예수님 설교가 아직 귓전을 때리는 듯 잘 보존돼 있다. 이곳에서 ‘말씀’을 ‘현장’으로 만나는 순간, 누구나 가슴 뜨거운 전율을 느낄 수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을 ‘성지 중의 성지’라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는 한시도 바람 잘 날 없는 침탈과 유배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기원전 1000년 유다 민족의 12지파를 최초로 통일한 위대한 임금 다윗왕. 이어 가장 번성했던 솔로몬왕 통치로 찬란한 황금시대를 구가한 이스라엘 왕국은 그러나 통치 80여 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된다.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였던 이스라엘은 이후 3000년 가까이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마케도니아, 십자군, 이슬람 민족, 터키, 대영 제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의 침탈과 유배의 아픔으로 얼룩지고 만다. 모세의 계약의 궤를 모셨던 ‘하느님의 지성소’ 예루살렘 성전은 붕괴와 재건을 반복한 끝에 이슬람 ‘황금 돔 사원’이 1500년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 이후 2000년이 지난 오늘날. 도시 전체가 거대 박물관이 된 예루살렘은 ‘종교의 백화점’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길이 6㎞로 둘러쳐진 성곽 안 올드 시티(Old City)는 로마 가톨릭, 유다교, 무슬림이 각기 구역을 나눠 살아가는 ‘공존’과 ‘상생’의 터다. 2만 명의 사람들이 좁은 골목 안 3000여 개 크고 작은 상점과 주거지에 산다. 정오 기도 시간이면 이슬람 모스크 사원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 소리와 성당 종소리가 혼재돼 묘한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올드 시티 밖은 유럽 각지에서 ‘반유다주의’로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던 유다인들이 19세기 이후 정착해 뉴 시티(New City)를 형성하고 있다.

 

‘신앙’은 기념과 기억이라고 했던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한 뒤 전 세계로 흩어졌던 유다인들이 1948년에 이르러 오늘의 이스라엘 국가를 다시 세우기까지, 특히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세계 유다인의 3분의 2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가운데서도 이들이 역사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자신의 역사와 믿음을 지키는 ‘유다교 신앙’ 때문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의 가르침 아래 매주 토요일이면 온 가족이 ‘안식일’을 지킨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전기도 쓰지 않고 오로지 메시아가 오길 기원하며 토라 경전을 외운다. 특히 오늘날에는 안식일에 가족 식사를 마치고 모세 오경 통독과 기도 후 저녁에 회당에 다시 모여 자정까지 남녀노소가 한데 모여 춤을 추는 방식으로 공동체 결속을 키우고 있다.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 자정까지 춤을 추며 공동체 신앙을 다지고 있다.


'다윗의 탑 박물관'이 예루살렘 서쪽 성벽을 스크린 삼아 이스라엘 역사를 화려한 영상 기법으로 상영해주는 모습.

 

 

순례 중 초대받은 예루살렘 시온산의 한 회당에서 ‘유다인의 신앙과 공동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회당 한편 강의실에서 ‘고시 공부’하듯 토라를 열심히 외우고 토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각. 다시 모인 이들은 회당 뜰에서 신 나는 리듬에 맞춰 연신 춤을 췄다. 하느님 아래에 사는 기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시간이다. 어르신, 어린아이할 것 없이 다 같이 손잡고,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메시아 도래를 위해 찬양하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하나 된 마음이 한편으론 부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전역이 ‘역사 현장’이요, ‘발굴터’다. 수십 미터 지하에서 신구약 속 역사가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땅이다. 새 건물을 신축하다 이내 로마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유물과 요새가 대거 발견되곤 한다. 2009년 갈릴래아 막달라 지방에서 1세기 유다교 회당과 어업 공장터가 대규모로 발견된 데 이어, 2010년에는 나자렛에서 기원전 1000년 시대 주거지가 발굴됐다. 2015년에는 예루살렘 다윗 도시 바로 옆 주차장 부지 아래에서 ‘아크라(Acra)’라고 알려진 기원전 2세기 고대 그리스 요새 터가 발견됐다.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68년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모든 유다교 활동을 금지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통제하고자 지은 요새로, 고고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찾던 곳이다. 고고학자들은 땡볕 아래에서 3년째 발굴터를 복원 중이다.

 

유다인들은 아픈 과거를 절대 잊지 않는다. 오히려 유배와 학살, 핍박과 박해의 고통을 더 잘 보존하고자 애쓰고 있다. 유다인들은 밤낮으로 20m 높이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통곡의 벽)에서 자신들의 본래 지성소였지만 현재는 이슬람 사원이 돼버린 ‘황금 돔 사원’ 성벽 밖에서 통곡하며 기도를 바친다. 그 옆에서 많은 순례객이 각자 자신의 소망을 종이에 적어 이곳 바위틈에 끼워 넣기도 한다.

 

역사를 기리는 방법도 현대화되고 있다. 매일 밤마다 올드 시티 서쪽 요빠 성문(Jaffa Gate) 옆 야외에서 성벽을 스크린 삼아 수십 대의 빔프로젝터가 상영해주는 화려한 영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를 감상할 수 있다. 전 세계 유다인의 모금으로 2005년 개장한 ‘야드 바쉠’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는 유다인 학살의 아픈 역사를 관람할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한 민족만의 발자취가 아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드러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다. 틀림없는 사실은 파괴와 복원을 반복한 예루살렘 성벽과 돌 바닥, 성당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섭리, 예수님의 고뇌와 피땀을 온전히 품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늘엔 하느님이 창조한 태양이 뜨고, 땅 위엔 아들 예수님의 발자국이 짙게 남아있다. ‘하느님 역사’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9월 2일, 이스라엘=이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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