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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진리를 찾아서: 식별의 쓰임새 - 결정 장애의 해결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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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5-22 ㅣ No.2009

[진리를 찾아서 – 식별의 쓰임새] 결정 장애의 해결책은

 

 

지난 2월 호에서 우리는 ‘일상 돌아보기’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그날이 그날 같지만, 사실 똑같은 날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시간의 흐름을 대면하는 나의 상태가 늘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성찰하고 짧게라도 내 마음의 상태를 기록으로 남겨 둡니다. 그것은 며칠 뒤에 내가 요즘 어떤 상태로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지표가 됩니다. 나의 전반적인 감정적 분위기를 잘 들여다보면, 무엇이 나를 활기차게 하고, 또 무엇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살핌으로써 선택 앞에서 진지하면서도 좀 더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는 방법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하느님을 더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면, 신앙인의 삶은 그만큼 더 보람찰 것입니다. 무엇이 더 의미 있고 보람된 것인지를 분별해 내는 일을 우리는 ‘식별’이라고 합니다. 식별을 통해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결정할 수 있습니다.

 

 

경험

 

프랑스에서 신학생으로 지내던 시절, 부제품을 준비하고자 한 달 일정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오월의 어느 날 예수회 프랑스 관구장님은 부제품을 앞두고 여름 방학 동안 이 과정에 참가할 이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잘 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관구장님의 편지를 읽으며 ‘결국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는 평신도의 삶이었지만 부제품을 받으면 성직자의 삶이 시작되고, 그만큼 삶의 무게를 느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독신 서약이 주는 부담이 가장 크게 다가왔습니다. ‘기억에서 온전히 잊히지 않는 옛 사랑의 그림자가 계속 떠오르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불쑥 들었습니다. 수도 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수도회를 떠난 형제를 여러 번 본 적이 있기에 내게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닫기보다는 모든 가능성을 열고 마주 대하자고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시간은 흘러 정신없이 학기말 보고서를 작성하고 시험을 치르고 나니 긴 여름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부제품 준비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직’에 대해 생각하면서 마음에 무엇이 올라 오는지를 잘 느끼고 그것에 솔직하게 응답하겠노라 다짐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밀려들었습니다.

 

고백하건데 수도회에 들어온 이상 서원을 지키며 일관성 있게 사는 것이 옳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퇴회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저를 비웃거나 무척 실망할 것이라고 혼자 고민했습니다. 저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 앞에서 제 체면을 엄청 세우고, 타인들의 평가가 무서워 제 삶도 솔직하게 결정짓지 못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모인 곳은 남프랑스 산악 지역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엔 마당이 딸린 큰 저택이 있었고, 우리는 이곳에 머물면서 각자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앞으로 성직을 수행해야 하는 수도자로서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숙고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성직자로 살아가는 사목자의 이야기도 듣고, 성직과 관련한 문헌도 읽어 보았습니다.

 

여름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시원했습니다. 숙소 주변으로 숲과 농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미루나무 위로 부는 바람과 지저귀는 종달새 소리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았던 마을은 집에 자물쇠를 걸어 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 석양 무렵 벤치에 앉아 하늘과 새들을 바라보는 일은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성찰

 

그렇게 한 달 동안 동료들과 어울리며 ‘과연 나는 성직자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했습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헤아리면서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마음이 설레던 기억과 그 기억의 주인공으로 말미암아 요동치는 마음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도 용기를 내어 내 행복을 찾아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키 큰 나무를 쓰다듬고 달아나는 바람과 새들의 노랫소리에 넋을 잃었는지, 제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기만 했습니다. 과연 나란 인간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심해 봐야 할 정도로 내적으로 평온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관구장님의 편지를 받았을 때 지레짐작했던 불안감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제 안에 쌓인 위로와 위안은 제가 성직의 길을 걷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신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만일 이런 내적인 지지나 격려와는 거리가 먼 다른 감정이 계속되었다면 저는 위로와 위안이 아닌 고독과 실망을 느꼈을 것이며, 성직은 제 길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부제품 준비 과정의 마지막 열흘은 산속 어느 작은 봉쇄 수녀원에서 머물렀습니다. 침묵 속에서 좀 더 집중하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곳 수녀님들과 함께 드린 시간 전례도, 그 수녀원 옆에서 홀로 은수자로 살아가는 노 신부님의 삶도 제게 무척 긍정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자연이 주는 위안도 상당히 강력했습니다.

 

이렇듯 제 마음에는 평화로운 힘이 넘쳤습니다. 그것은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마음속에 두려움이나 근심을 없애 주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영혼이 고독할 때 결코 어떠한 변경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오직 위안 상태에 있을 때에 한 결심을 끝까지 고수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위안 상태에서는 주로 성령이 우리를 안내하지만 고독한 때에는 주로 악령이 책동하는데, 이 악령의 권고를 따라서는 결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독의 상태에서 처신하는 법을 알려주는 조언이기도 하지만,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그것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 앞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반응을 읽는 데도 필요한 지침입니다. 곧 ‘그것을 한다.’는 답에 대해 성령의 지지가 오는지, 기운 빠지게 하는 악령의 움직임이 감지되는지를 식별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저는 당시 한 달 동안, 제 마음에 차오르던 기쁨을 통해 제가 부제품을 청원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식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 안에 미룰 수 없는 결정을 할 때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우리 각자는 내적으로 경험하는 위안을 통해 용기도 더불어 얻게 됩니다.

 

 

실천

 

저의 경우와는 반대로 늘 화나고 불안감에 휩싸인 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날마다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는 남편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이혼하겠어.’ 하는 결심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풀이했습니다. 급기야는 서로 지쳐 아내와 아예 말도 안하며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한 남편은 아내와 서로 말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혼할 때 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다투었는지는 알고 헤어지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로 아내에게 물어야 할지 몰라 막막했습니다.

 

결국 그가 결심한 한 가지 실천 사항은 아내에게 아침에 한 마디만 질문하고, 아내의 답에 맞춰 아무런 토를 달지 말고 그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딱 한 마디 질문은 이렇습니다. “여보, 내가 당신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 주면 좋겠어?”

 

이 질문을 받은 아내는 매우 의심쩍은 표정이었습니다. 곧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남편에게 소리쳤습니다. “어제 먹고 쌓아둔 것이나 설거지해!” 남편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격분을 느꼈으나 그의 결심대로 군소리 없이 일어나 설거지했습니다.

 

다음 날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아내의 태도는 마찬가지였고 “쓰레기 분리해서 배출해!”라고 응답했습니다. 남편은 그날도 그대로 했습니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먼저 말을 걸어왔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해 주면 좋겠어?” 그 순간부터 부부는 다시 대화를 시작하였고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식별하는 사람은 고독을 위안으로 바꾸는 데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거창하지 않지만 삶을 개선하려는 작고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꼭 실천합니다.

 

* 박종인 요한 - 예수회 신부. 청소년 사목을 맡고 있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성찰과 성장’ 과목을 담당하고 있다. 「교회 상식 속풀이」를 펴냈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박종인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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