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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도 법관, 김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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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3-07 ㅣ No.564

[허영엽 신부의 ‘나눔’] 사도 법관, 김홍섭

 

 

2015년 3월16일 서울법원종합청사 1층 대회의실에서는 한 법관을 기리는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1년여 동안 후배 판사들이 자발적으로 기획하고 준비한 이 행사의 주인공은 사도법관 김홍섭(1915~1965) 바오로 판사였습니다. 그는 김병로 선생, 최대교 선생과 함께 한국의 3대 법조인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김 판사의 50주기 행사에 모인 후배들은 입을 모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더욱 더 고인의 삶과 자세를 주목해야할 때’라고 말했습니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후배 법관들이 그를 추모하며, 롤모델로 삼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제강점기인 1915년 전북 김제군 원평에서 태어난 김홍섭은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꿈을 잃지 않고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을 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의 품성과 노력을 기특히 본 한 변호사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고, 1941년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 10월에 서울지방검찰청 검사로 임관하였고. 1946년 2월 판사로 자리를 옮겨 서울고등법원 판사 및 부장판사, 광주고등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당시 대법원 판사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지닐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법원 판사가 되어 대법원에 출근할 때면 늘 고무신을 신고 허름한 바지 차림이나 물감 들인 군복을 입은 채 관용차를 타는 대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하루는 버스를 타고 갈 때 그의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행적이 수상하다고 여긴 경찰관으로부터 불심검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점심 한 끼 사먹지 못하고 날마다 단무지 반찬이 든 도시락만 들고 다녔습니다. 이렇게 청렴하게 살았던 것은 그의 곧은 성격도 한몫했지만 여덟 명의 자녀들 뒷바라지와, 죄수들을 돌보는 데 본인의 월급을 모두 써버리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은 뒤에도 의지할 곳 없는 사형수 묘지 조성, 사형수들과 함께 묻혀

 

1962년 10월12일 광주고등법원 대법정에서 경주호 납북미수 사건의 공소심 판결 공판이 열렸습니다. 재판장 김홍섭이 판결문을 통해 3명의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순간 침묵이 흐르던 법정에서 김 판사는 피고인 한 명 한 명을 바라보며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에게 이렇게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보시기에는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능력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사형을 선고하니 그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대자의 묘소를 찾아 기도하는 김홍섭.

 

 

한 후배판사는 “김홍섭 판사는 자신이 죄를 판단하는 입장에 위치할 만한 자격이 되는지 스스로 물으며 사람에 대한 본성과 법률을 끊임없이 연구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피고인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했기에 중형을 받은 죄수가 판결을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김 판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에도 훌륭한 법조인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법관으로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지니고, 스스로 그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직무상 사형판결을 내린 뒤에도 교도소로 사형수들을 찾아 위로하며 돌보아주어 ‘사형수의 대부’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일화 중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사형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그는 사비로 책을 사서 사형수들에 선물했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족과 친지가 떠나버린 그들의 남은 삶을 돌보았습니다. 죽을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사형수들이 종교에 귀의해서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김 판사는 기꺼이 대부를 서주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도 의지할 데가 없었던 사형수들의 묘지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에 있는 천주교회 묘지입니다. 그도 선종한 후 자신이 생전에 돌본 사형수들과 함께 그곳에 묻혀있습니다. 1965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김홍섭 판사를 아버지처럼 여기며 따랐던 장기수와 사형수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라고 감옥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삶의 근원적 질문 스스로에게 물으며 공정한 재판에 최선

 

김 판사는 늘 인간에 대한 형벌의 궁극적 근거에 대해 깊이 고민했고, 자신의 독특한 실존적 법사상을 수립하여 중국의 오경웅, 일본의 다나까 고오따로와 함께 동양의 3대 가톨릭 법사상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늘 “사람이 과연 사람을 재판할 수 있는가? 재판은 어떤 근거로 할 수 있는가?” 등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으며 살았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공정한 재판을 이끌고자 했습니다. 그는 판사로서 남을 재판하기 위해서는 삶과 세상에 대한 보다 넓고 깊은 통찰력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평생 구도의 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늘 인간이었고 인간보다 우선하는 가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비굴하지 않았고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지켰습니다. 대법관이었던 그가 불의를 모른 척 하기만 해도  대대로 호의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들은 시간이 흐르면 사라져버리는 의미 없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많은 흐른 오늘날에도, 여전히 법과 재판의 시비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식과 헌법에 따른 공정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사람들은 김홍섭 바오로 판사를 그리워합니다. 그가 보여줬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실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공경과 겸손이 우리에게 필요한 요즘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8년 3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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