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 (수)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가톨릭 교리

십계명 따라 걷기: 첫째 계명 -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1977

[십계명 따라 걷기] 첫째 계명 :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자유의 길

 

차라리 모른다고 하십시오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 가는

죄 없는 생명들의 고통을

호흡하지 못한다면

 

비록 하느님께서 빚어내신

창조 세계에 경탄한다 해도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차라리 모른다고 하십시오.

 

자기 탓 없이 일자리 보금자리 빼앗겨

하느님께서 선물하신 귀한 생명을

찢기는 마음으로 내던지는

벗들의 피눈물을 씻어 주지 못한다면

 

비록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해도

 

정의와 해방을

삶과 죽음으로 선포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차라리 모른다고 하십시오.

 

세속에 깃든 신성함과

거룩함에 깃든 일상성을 외면하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여정을

정해진 시간과 좁은 공간 안에만 놓는다면

 

비록 매일의 기도를 통해

삶의 한 부분을 거룩하게 보듬는다 해도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잃어버린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아 주시려 오신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을 모른다고 하십시오.

 

예수님을 안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거부한 더러운 영이

예수님께로부터 쫓겨났음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어야 하고

오직 예수님을 온몸과 마음으로 따르며

예수님과 맺어진 관계를 이어 감으로써만

온전히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때로는 움켜쥐고 때로는 내던지는

살면서 하나쯤 지니면 좋을

폼 나는 장식품이 아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심을

머리와 입이 아니라

삶으로 묵묵히 드러내십시오.

 

하느님은 계시는 분이십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시지 않으시며, 만들어지실 수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마치 하느님인 양 만들고 섬기는 것은 모두 우상일 따름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느님도 사실 그들이 만든 우상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계시기에 하느님은 자유(自由 : 스스로 말미암음)이십니다. 자유이시기에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지으십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그분을 닮아 자유에로 향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창세 1,26 참조)이 그러합니다.

 

자유이신 하느님께 모든 억압의 굴레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억압의 굴레를 만드시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만들 따름입니다. 사람이 만든 온갖 종류의 우상을 깨뜨리시고,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에서 해방시키시어 다시금 자유를 선물하시는 분이 곧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할 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탈출기는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탈출 20,2-3).

 

 

자유를 잃은 사람

 

자유이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사슬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합니다. 윗사람에게 아부하고 아랫사람은 얕보게 만드는 비인간적인 인간관계가 우리를 얽어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닮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재산, 권력, 지위, 명예, 능력 등’을 삶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물신 숭배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보다 피눈물 나는 치열한 경쟁이 정당화되는 현실이 우리를 얽어맵니다.

 

우리의 탓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사슬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지 모릅니다. 아랫사람을 밟고 끊임없이 위로 오르려 발버둥 치는 안쓰럽다 못해 처절한 모습에서, 사람의 됨됨이보다 그가 가진 것에 솔깃하여 내 편 네 편 가르는 옹졸한 모습에서, 입으로는 일치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오로지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 우정과 신의를 서슴없이 내팽개치는 가증스러운 모습에서, 오히려 노예의 삶을 강요하는 사슬에 길들여진 우리를 봅니다.

 

분명 삶의 사슬에 얽매여 노예로 살면서도 자유인이라 외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우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얽어맨 사슬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침없이 그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다시 자유의 길을 걸어요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믿음의 벗님들,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지음받은 우리는 자유여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인 만큼, 자유이신 하느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이려면, 자유이신 하느님만을 흠숭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하느님으로, 창조주요 구세주로, 주님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으로, 사랑과 자비가 무한하신 분으로 인정하는 것”(가톨릭교회 교리서, 2096항)입니다. 쉽게 말해, 오직 하느님만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흠숭은 그분을 존경하며 온전히 순명하는 가운데, 하느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피조물의 허무’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폐쇄하는 데에서, 죄의 속박에서, 세상의 우상 숭배에서 해방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097항).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섬기며, … 그 어떤 신도 따라가서는 안 된다”(신명 6,13-14). 십계명의 첫 계명은 우리를 자유에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온갖 우상의 사슬을 끊고 하느님만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로 대표되는 우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 6,24 참조).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재물과 썩은 권력을 하느님께 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언제나 내어 주시고 정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혹여 어쩌다가 잠시 더러운 재물로 배를 채우고 썩은 권력을 누린다 해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말아야 합니다. 비겁한 웃음을 띤 감사의 기도가 자비와 정의의 하느님에 대한 용서받지 못할 극도의 모독이요, 돈과 힘에 취해 비틀거리는 자신을 향한 우상 숭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이제 억압의 사슬을 끊고 자유의 길을 걸어요,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 주시려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 상지종 베르나르도 - 의정부교구 신부. 의정부교구 제8지구장 겸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상지종 베르나르도]



4,95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