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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한국 교회사의 주역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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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2-15 ㅣ No.62

[지금 여기 평신도] 한국 교회사의 주역 평신도

 

 

1777년 정유년 겨울, 신앙의 선조 이벽은 눈 덮인 험한 산길을 밤새 걸어 권철신 등 당대 고명한 학자들이 서학(천주교)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외딴 절을 찾는다. 정조 임금이 감탄했을 만큼 중국 고전에 통달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그였지만 그곳에서 진리이신 하느님을 접하고는 그분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이승훈과 동문수학한 그는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에 가던 이승훈에게 천주교를 알려 주며 성당에 찾아가 세례를 받고 기도문과 교회 서적을 얻어 오도록 당부한다.

 

북경 북당성당에서 교리를 배운 이승훈은 1784년 정월에 한국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우리나라의 첫 가톨릭 신앙인이자 평신도가 된 그는 교회 서적과 십자가상, 묵주, 성화 등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리고 이벽(요한 세례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요한), 권철신(암브로시오),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에게 세례를 준다. 뒤이어 여러 평신도 지도자가 세례를 받고, 이들과 함께 이승훈은 김범우(토마스)의 명례방 집에서 신앙집회를 연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원년이 평신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출발, 박해와 복음화의 시작

 

한국 교회의 탄생 직후 박해가 시작되어 김범우가 처형되고(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배교의 압력에 시달리던 이벽 또한 끝내 순교한다. 이승훈은 교회를 떠나고, 명례방 신앙 공동체는 와해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진리에 맛들인 신앙 선조들의 선교 열정은 더욱 뜨거워진다. 권일신이 경기도 양근에서, 그의 제자 이존창(루도비코)과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각기 충청도 내포와 전라도에서 복음을 전파한다.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이승훈은 정약용과 함께 성균관 인근 반촌에서 청년 교리반을 열었지만, 유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킨다(1787년 정미 반회 사건). 그 와중에 전라도 진산에서 모친상을 당한 윤지충(바오로)이 권상연(야고보)과 함께 상장례도 하지 않고 신주를 불태웠다는 죄목으로 순교한다(1791년 신해박해).

 

그로 말미암아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많은 신자는 깊은 산 속으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이룬다. 교우촌의 형성은 중인 이하 계층의 복음화를 촉진시켜 한국 교회 10년인 1794년에 신자 수는 약 4천 명에 달한다. 복음화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해 설립한 명도회 조직과 평신도 회장제 도입으로 더욱 촉진되어 1800년 신자 수는 1만 명에 이른다.

 

 

한국 교회의 완성

 

초기 한국 교회는 성직자 없이 평신도가 사제 역할(가성직 제도)을 한 불완전한 교회였다.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구장이던 구베아 주교에게 파견되어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고, 조상의 제사와 신주를 모시는 문제를 질의한다. 구베아 주교의 단호한 조상 제사 금지는 ‘신해박해’의 발단이 되고 신부 영입도 무산된다.

 

그러다가 1794년 초에 지황(사바)이 북경에 가 구베아 주교에게 신해박해와 한국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신부를 파견해 주도록 재차 간청하여 주문모 신부가 들어온다. 그러나 배교자의 밀고로 주 신부 체포령이 내려지고 그를 보호하던 윤유일(바오로), 최인길(마티아), 지황이 순교한다(1795년 을묘박해). 

 

주 신부는 중국으로 귀환하다 신자들을 걱정하여 자수하지만 순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를 보호하고 시중 든 강완숙(골룸바), 윤점혜(아가타), 최창현(요한), 정약종, 이존창, 유항검 등 회장들을 포함한 수백 명의 신자가 순교한다(1801년 신유박해). 한국 교회를 시작하게 한 이승훈, ‘백서’를 쓴 황사영(알렉시오)과 그곳에 서명하고 북경을 오가는 밀사로 활약했던 황심(토마스)도 그때 순교한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뒤 목자 없는 교회는 10년이나 계속된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뿐 아니라 교구 설정까지 탄원한다. 그들은 1811년 교황과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두 통의 편지( ‘신미년 서한’)를 써 이여진(요한)을 북경으로 보낸다. 편지는 전달되었으나 뜻은 이루지 못한다. 이듬해 이여진은 또다시 힘든 북경길에 올랐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박해는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도 일어난다(1815년 을해박해). 성직자 영입은 더욱 간절해졌다. 정하상(바오로)회장은 1816년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가 북경 교구장한테서 2명의 중국인 사제 파견을 약속받고 교황청 포교성성에 그 사실이 보고되는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파견된 두 신부는 조선 입국에 실패한다.

 

정하상은 그 뒤 해마다 북경에 가 성직자를 영입하고자 노력하는데 1824년에 역관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이 동참한다. 유진길은 조선 교회 신자들의 명의로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 청원서를 쓰고 정하상 등이 연서하여 북경교구를 통해 교황청에 보낸다. 이 청원서는 1831년 조선교구 설정과 브뤼기에르 주교의 초대 교구장 임명에 큰 역할을 한다.

 

 

평신도들의 호교와 교회 재건

 

조선교구 설정과 파리외방전교회의 성직자 파견으로 교회는 완전해졌지만 박해는 더욱 거세진다. 정하상 등 평신도 회장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호교에 앞장선다. 유방제(파치피코)신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제2대 교구장)의 입국과 활동을 돕고,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을 추천하여 김대건과 최양업 두 한국인 사제 탄생의 길을 연다. 성직자들을 헌신적으로 돕고 신자들을 보살핀 이는 회장들만이 아니었다. 부인들도 집을 공소로 내어놓고, 선교사들을 맞아 뒷바라지하며 여신자 공동체를 꾸렸다.

 

박해의 칼은 매서웠다. 앵베르 주교 등 성직자 3명과 정하상, 유진길,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등 많은 회장과,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재준(이냐시오)을 포함한 118명의 신자들이 순교를 피하지 못한다(1839년 기해박해). 정하상 회장이 순교 직전에 관아에 제출한 호교론을 담은 ‘상재상서’는 교회를 지키려 한 그의 강한 의지를 잘 보여 준다.

 

한국 교회는 또다시 성직자가 없는 시련을 겪다 1845년 김대건 신부의 안내로 페레올 주교(제3대 교구장)와 다블뤼 신부가 입국하지만,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가롤로), 남경문(베드로), 한이형(라우렌시오) 회장 등이 순교하고 만다(1846년 병오박해). 중국으로 피신한 두 선교사가 한국 교회의 평신도들과 연락이 이루어져 명목상 성직자 없는 교회는 겨우 면한다.

 

1850년대 이후 한국 교회는 괄목할 만한 체제를 갖추어 간다. 거기에는 평신도 회장들의 주도적, 헌신적 참여가 있었다. 1854년 한국 교회의 첫 복지 단체로 설립된 ‘영해회’는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양육한다. 정의배(마르코)회장은 매우 가난한 형편에서도 이 단체의 모금과 운영에 헌신한다. 1855년에는 배론에 첫 신학교가 세워진다. 장주기(요셉) 회장은 자기 집 일부를 신학교 교실로 제공하고 순교할 때까지 11년간 운영한다.

 

교도권도 자리를 잡는다. 1857년 3월 베르뇌 주교(제4대 교구장)서품식이 있는 서울에서 한국 교회 최초로 시노드가 열려 최양업 신부 등 성직자들과 서울 회장들과 평신도들이 참석한다. 1861년에는 최양업 신부가 선종했지만 2명의 주교와 7명의 선교사가 관할하는 8개의 사목구도 설정된다. 그해 서울에 교회 인쇄소가 생기고 신자 교육용 서적들이 출판된다. 최방제 신학생의 형으로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식부터 순교 때까지 시중을 들었던 최형(베드로) 회장이 책임자였다. 황석두(루카) 회장은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제5대 교구장)를 도와 서적들의 집필과 번역, 교정 등 교회 업무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병인박해(1866년)는 10명의 선교사 가운데 주교 2명과 신부 5명, 8천 명 이상의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평신도 회장이 모두 순교하자 체제를 갖추어 가던 교회도 맥이 끊기고 만다. 살아남은 평신도들은 중국으로 피신한 선교사들과 연락하며 교회 재건에 나서지만 박해의 피해가 워낙 컸던 터라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1877년에 리델 주교(제6대 교구장)의 입국으로 교회 재건은 가속화한다. 1886년 조불조약 체결 뒤에는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 증가와 한국인 사제 배출, 해외에서 초청된 수녀회의 의료와 교육 등의 전담으로 교회는 빠르게 재편된다. 그에 따라 평신도의 교회 활동은 교도권 안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1889년 블랑 주교(제7대 교구장)가 세운 ‘전교 회장 양성 학교’를 이수한 전교 회장들의 선교활동이 돋보였지만 19세기 후반부터 한국 교회사의 주역으로서 평신도 회장들이나 지도자들의 역할은 사실상 끝난다.

 

* 오용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주교회의 평신도사도직위원회 위원과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사회사도직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고, 경성대학교 명예 교수이다.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3차 정기 총회 참관인으로 초청되어 발표와 토론에 참가했다.

 

[경향잡지, 2018년 2월호, 오용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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