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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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7-07 ㅣ No.530

[허영엽 신부의 ‘나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가톨릭교회에서 성 프란치스코는 가장 예수님과 닮은 인물로 손꼽히며 ‘제2의 그리스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했다. 현재 우리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 직후 동료 추기경이 건넨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말아주세요”라는 한마디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떠올리고 교황 명으로 삼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성인은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 아시시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많은 부와 명예가 바로 행복이라고 생각하던 욕심 많은 보통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네가 나의 뜻을 알려면, 지금까지 사랑하고 탐하던 것들을 경멸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지금까지 피했던 것들은 모두 달고 넘치는 기쁨이 될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프란치스코는 악취가 진동하는 나환우와 마주쳤다. 그는 나환우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코를 찌르던 악취가 단맛과 행복이 되어 그의 영혼 속으로 흘러들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인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다.

 

성인은 허물어져 가는 성당에서 또 한 번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프란치스코야, 가서 나의 집을 다시 세워라. 나의 집이 허물어져 가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내다 팔아 여러 성당을 보수하는데 봉헌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돈이 떨어지자 아버지의 상점에 쌓여있던 물건을 내다 팔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이 겉으로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교회 내적인 신앙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와 동네 주민들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사람들에게 외쳤다. “저는 이제부터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임을 선언합니다. 이제 저는 지금까지 세속에서 제 아버지였던 분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립니다. 이제 저는 빈 몸으로 완전히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가난’은 오직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뜻해

 

-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그 때부터 성인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탁발을 하며 생활했고, 기도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특히 가난을 복음생활의 본질로 보았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수도공동체가 크게 성장한 후에도 새로 수도원과 성당을 짓지 않았다. 아시시 포르치운쿨라(‘작은 몫’이라는 뜻) 경당 옆에 나뭇가지를 엮어 움막을 짓고 나서 “이게 프란치스칸 집의 모델”이라고 말했다. 겸손과 가난의 표징인 이 작은 경당은 지금까지 아시시에 보존되어 있으며, 이곳을 순례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큰 영적 무기는 ‘가난한 삶’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늘나라’는 물질적이고 영토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뜻한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이 ‘가난’은 오직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뜻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어떤 영향력이나 권력이나 특권을 가지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당하는 현실 속에서 전적으로 하느님께만 의존하는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가난’이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하느님께만 그 도움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순종하고 무릎을 꿇는 마음의 자세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난한 마음이 복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물론 가난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빈곤이나 결핍, 쇠약한 상태를 축복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분께서는 오히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게 되기를 바라셨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또한 물질적인 가난이 행복하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매우 가난한 상황이 되면 오히려 그것에 집작하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반대로 너무 많이 갖게 되면 마음이 교만해지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는 지나치게 물질 위주의 삶에 젖어있다. 물질만이 최고이자 최선이며, 무엇이든지 빨리 많이 소유하려고 한다. 이웃과 함께 하기 보다는 경쟁대상으로 여기며 이기고 앞서가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된 행복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이를 안다면 권력이나 돈이나 세상의 것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그것들을 모으고 쌓고 지키느라 하느님을 뒤로 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나 자신조차 잊어버린다면 그것이 바로 불행한, 불쌍한 삶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 하느님을 소유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우리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 맑은 햇빛과 푸름 가득한 이 계절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7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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