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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5) 고통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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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21 ㅣ No.947

[수도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5) 고통의 체험


성모 품에 안겨 죽음의 고통도 초월하다

 

 

- 로마에서 돌아온 직후의 콜베(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신부와 동생 알폰소(네번째) 수사.

 

 

1919년 콜베 신부는 7년간의 로마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 폴란드로 돌아왔다. 7년 세월은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무엇보다도 세상을 모르던 어린 폴란드 소년은 어엿한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풋내기 수도자는 교회의 사제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성장은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면에서 더욱 크게 이루어졌다.

 

 

고통을 영적 성장의 자양분 삼다

 

성인과 평범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성인은 삶의 긍정적이고 행복한 체험뿐만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체험까지도 영적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을 줄 안다는 점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조국 폴란드는 정치ㆍ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으며, 국가의 어려움은 고스란히 국민들의 가정에 부과되었다. 콜베 신부는 가난한 방직공의 아들로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조차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두 동생을 어린 시절에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환경을 오히려 가족과의 유대를 깊게 하고 신앙을 두텁게 하는 계기로 삼는다. 특히 어머니와 또 훗날 같은 수도회에 입회한 동생 알폰소와 나눈 인간적이고 신앙적인 유대는 힘겨운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됐다. 

 

콜베 신부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육신의 병고였다. 그는 고질적인 폐병 환자였으며 이는 평생 그를 따라다닌 고통의 사슬이었다. 사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영양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할 만큼 가난했던 가정 형편도 그의 병세 악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로마 유학시절인 1914년 이미 각혈을 할 만큼 그의 병세는 심각했으며, 훗날 일본 선교 시절에도 이 병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아마도 덥고 습한 로마와 나가사키의 환경이 그의 약한 폐에 악영향을 끼친 듯하다. 

 

그는 로마 유학에서 돌아온 뒤, 폴란드 크라쿠프의 수도회 신학교에서 신학과 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이듬해인 1920년 자코파네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서 긴 시간을 보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그의 사도적 열성 때문에, 관구장은 그에게 모든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을 엄하게 명령해야만 했다. 온 정열을 기울이던 일에서 손을 떼는 것이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는 유순한 마음으로 장상의 명에 순종하였다. 

 

1926년 그는 다시 한번 자코파네 요양원으로 옮겨진다. 병세는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한 상황을 이미 넘어섰다. 요양원 의사들이 3개월밖에 살지 못하리라고 예상할 만큼 병세가 심각했다. 당시 촬영한 콜베 신부의 X-레이 흉곽 사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데, 이를 분석한 의사들은 콜베 신부의 폐 기능이 정상인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육신은 사실상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는 걸음도 빨리 걸을 수 없었고, 미사 집전도 최대한 천천히 해야 할 만큼 심각한 병고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겪는 고통을 다른 형제에게 하소연하는 일이 결코 없었기에, 아주 가까이 있는 형제들조차도 그가 그렇게 심각한 고통 중에 있음을 거의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는 몇몇 짓궂은 형제들이 그의 느린 말투와 몸동작을 흉내내며 조롱하기도 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힘든 상황을 형제들에게 하소연하지 않았고 특별한 배려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는 형제들에게 누구보다 자상했으나 자신과 자신의 고통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함께 일하는 젊은 형제들을 ‘아들’이라 부르면서 그들이 겪는 열악한 조건을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자신의 육신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려 하지 않았고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았다.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그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로마 유학시절 그는 산책하던 도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형제들에게 업혀 방으로 들어온 적이 있다. 그날 밤 그는 일기에 그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오늘은 몸이 조금 피곤해서 평소처럼 산책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성모께 의탁하여 그리스도와 일치

 

그가 고통 앞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특별히 고통에 둔감한 초인이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고통과 그로 인한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려고 하지 않고 진솔한 마음으로 그것을 포용했다. “우리는 암흑, 불안, 의혹, 공포, 때로는 극히 귀찮은 유혹, 육체의 고통을 각오하는 동시에 그것보다도 훨씬 심한 정신적 고통에 대해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병으로 인한 현실적 한계를 한탄하기보다, 그는 그 한계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였다. 그에게 자코파네 요양소는 병약한 육신이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선교의 기회였다. 그는 병으로 원하는 일에서 손을 떼야 했음을 한탄하지 않고, 요양소에서 허락해 주는 한계 안에서 다른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했고, 그들의 영적인 쇄신을 위해 힘썼으며,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요양소 안에서조차 병자라기보다 사제였다. 그리고 이 모습은 그의 생애 마지막에 보여준 아사감방에서의 영웅적인 죽음을 예고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현실을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모두 의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육신이 무기력해질수록 자기 자신을 더욱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완전히 봉헌할 수 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의탁이 클수록 성모님께서는 나의 삶 속으로 더욱 깊이 개입하여 오시고 내가 나의 능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그분께서 당신 손으로 직접 하시게 된다. 결과적으로 나의 영혼은 성모님을 통해 더욱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세상의 일은 나의 인간적 능력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결코 자신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나의 이 한 몸에 유혹과 시련을 더하여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내맡기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모님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게 될 때까지 열렬히 성모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목해야 할 것은, 요양원을 오가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1920년대에 그가 시작한 사업이 기틀을 완전히 잡았을뿐더러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그의 육신은 병약했고 나이는 갓 서른이 넘었을 정도로 젊었지만, 높이 성장한 초자연적인 영성으로 그는 십자가 길에서, 또한 숱한 반박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희생하면서, 자신을 완전히 마리아의 손에 내맡김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할 수 있었다. 병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의 일상을 괴롭혔지만 그것은 성모님께 드리는 귀한 봉헌예물이 되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21일, 최문기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유대철 베드로 수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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