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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회고록49: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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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5-13 ㅣ No.453

[추기경 정진석] (49)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


소외된 이들 삶 속으로 들어간 교회, 복음 열매도 풍성

 

 

- 정진석 대주교가 1998년 9월 열린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임시총회에서 임기 중 세계 평균 복음화율(18%) 달성 의지를 밝히고 있다. 서울대교구 제공.

 

 

정진석 대주교의 마음은  대형화된 본당을 분할해 가능하면 많은 본당을 신설하는 데 있었다. 사제들이 가능하면  작은 공동체에서 신자들을 돌보는 것이 사목적으로 훨씬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형화된 도시 본당은 공동체 구성원의 유대가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교회 공동체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전례적 일치, 심리적 유대감이 올바르게  형성되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정 대주교는 교구장 취임 후 바로 본당 신설 등을  통해 사제들이 작은 공동체에서 사목 효과를 증진하는 데 초점을 뒀다. 그래야 신자들과의  깊은 유대 속에서 사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대주교는 사목의 효과는  무엇보다 사제들의 마음 자세에 달렸다고 굳게 믿었다. 

 

정 대주교는 본당 주임 신부에게 전권을 주고 본당을 맡기는 스타일이다. 자율성  안에서 인간의 능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사석에서도 가끔  농담조로 말했다. 

 

“신부님들은 주교가 간섭을 안 하면 사목을 훨씬 열심히 합니다. 믿고 맡겨야  해요. 모든 사제는 충분히 자격이 있고, 인격적 자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시콜콜 간섭하면 좋아하던 일도 하기 싫은 게 사람 심리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조금 실수를 해도 가만두면 제 힘으로 제 길을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 1998년 9월 명동본당 ‘예비신자 · 새 영세자 축제의 날’에 참석한 정진석 대주교가 신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아마도 오랜 기간 교구장으로서 사제들과의 관계에서 나온 경험이었을 것이다.  

 

정 대주교는 1998년 교구장 부임 첫해부터 본당 신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이어진 사제 인사와 새 본당 신설에서도 본당 소형화를 강조하는 자신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이어 정 대주교는 특별한 실험을 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밀집한 지역에  선교본당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본당 공동체에서도 자칫 소외될 수 있는 가난한 지역의  신자들을 더욱 집중적으로 사목하기 위해 정식 본당은 아니지만 선교본당을 설립해  주임 사제를 임명했다. 그 사목적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 대주교는 빈민사목을 하고 있는 사제들의 열성과 진정성을 믿고 선교본당 설립을  추진했다. 그래서 서울대교구 최초의 선교본당이 설립됐다. 솔샘 공동체로 불리는  미아1동선교본당이었다. 1998년 11월 14일 축복식을 한 미아1동선교본당은 곧바로  본격적인 사목에 들어갔다. 빈민지역 선교의 새 장을 연 교구는 선교본당 설정이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기존의 본당 인식에서 탈피해 세상에 열린 교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 경험을 가진 안광훈(골롬반외방선교회)  신부가 주임을 맡았다. 그는 솔샘 공동체가 지역사회 운동의 중요한 하나의 축이  되어 본당을 중심으로 힘을 모아 하느님이 원하시는 마을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실제로 미아1동선교본당이 지역 주민센터의 역할도 해나가며 복음적 가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미아1동선교본당 외에 금호1가동, 무악동, 봉천3동에 선교본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가정집을 고쳐 본당 건물로 운영한 무악동선교성당에서 2004년 박문수 신부(왼쪽 시계 방향으로 두 번째)와 신자들이 문화 기행과 캠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3개 선교본당의 추가 신설은 미아1동선교본당을 필두로 1999년 2월까지 교구 내  지역별 도시 공소 지역에 네 곳의 선교본당을 설립키로 한 계획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선교본당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목하겠다는 취지는 빈민사목도 다양한 요구가 많아짐에  따라 지역 특성에 맞게 설립된 선교본당을 통해 안정성 있는 사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무악동선교본당은 성전을 짓지 않고 청빈한 생활을 하며 가난한 이들을  선교하는 데 투신한다는 선교본당의 설립 취지에 따라 66㎡ 규모의 일반 주택을 구입해  사제관으로 봉헌했다. 이에 따라 무악동선교본당은 미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례와  모임을 사제관이나 신자 또는 마을 주민들의 가정을 돌아가며 하게 됐다. 

 

독립문 공동체라고 불린 무악동선교본당은 종로구 무악동과 서대문구 현저동 지역의  세입자들, 집 없는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계획했다. 특히 주민들과  함께 한누리 공부방, 한솥밥 공동체, 공공임대아파트 입주 준비 등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활동을 지원하고 실업 극복 사업에도 참여할 계획이었다. 본당이 더욱더 신자와  주민들 속으로 깊이 들어간 형태로 복합적 사목을 시도한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금호1가동선교본당도 성전을 짓지 않고 빈민지역 주민들을 위한 선교본당으로 가난한  이들을 선교하는 데 투신한다는 설립 취지에 따라 100㎡ 규모의 일반 가정집을 구입해  성전으로 봉헌했다. 다른 선교본당도 소중한 걸음걸음을 옮겨갔다.

 

정 대주교는 선교본당이 일종의 시범 운영과 같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처음 시도해보는 것이라 외부적 반발과 일반 본당과 마찰 등 내부적인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패기 있는 젊은 사제들이 잘 견디어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했다. 특히 젊은 사제들의 순수한 마음이 상처받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서울대교구의 복음화율이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10%대를 돌파했으며,  교구 내 본당 수도 200개를 넘어섰다는 소식이 교계 신문을 통해 알려졌다. 서울대교구  각 본당에서 선교 운동에 주력한 결과로 풀이되고 있다는 해석도 덧붙여져 있었다.

   

서울대교구가 집계한 교세 통계에 따르면 1998년 말 교구 신자 수는 125만 3392명이었다.  관할 지역의 전체 인구 대비 신자 비율, 즉 복음화율이 전년도의 9.94%에서 0.28%p  증가한 10.22%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998년 성인 영세자의 증가율이  두드러졌다. 상설 예비신자 교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주교좌 명동본당이 한해 1084명의  새 영세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교계 언론은 복음화율과 새 영세자 수가 이처럼 부쩍 증가한 것은 정진석 대주교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교구의 복음화율을 끌어올리겠다며 선교를 강조하고 각 본당에서도  선교 운동에 주력한 결과로 진단했다.

 

정 대주교는 저녁에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한 것이 없는데 사제들과 수도자들,  신자들이 너무 열심히 따라주었습니다. 그분들을 축복해주세요! 그리고 한 가지,  제가 주님 품에 들기 전에 교구 복음화율 20%가 달성되는 걸 지켜볼 수 있도록 꼭  도와주세요.”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14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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