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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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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4-23 ㅣ No.859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국문 초록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학사적 분석과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책은 서론과 본론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이를 각각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 책과 혹은 순교사 중심의 호교론적 저술로서만 그 성격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한국천주교회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검토해 보았다. 역사 연구를 위한 훈련을 받지 않았던 다블뤼 주교와 역사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던 달레를 비교할 때 《한국천주교회사》가 달레의 단독 저술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달레가 한국사와의 관련 속에서 천주교회사를 서술하려고 한 사상사 연구 방법을 적용하려고 했음을 지적해 두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을 둘러싼 대외 관계 속에서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다루고자 하였다.

 

달레는 한국인들이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배교를 통해서 순교로 어떻게 나아가는가 하는 개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 그 결과 그는 한국 천주교에 대한 박해사의 서술에 많은 비중을 두었는데, 특히 박해가 정치 사상적인 이유에서 일어났음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천주교가 수용되면서 일어난 커다란 변화를 함께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조선이라는 새로운 선교지에 대한 서구 사회의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달레는 특히 한국 천주교회사 속에서 선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부분도 새롭게 이해하였다. 또한 한국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달레가 앞으로 열리게 될 새로운 시대에 천주교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을 크게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달레의 한국관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까닭에 《한국천주교회사》에 실려 있는 방대한 내용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체계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머리말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부였던 샤를르 달레(1829~1878)에 의해서 저술된 《한국천주교회사》(1874)는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이다. 그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가운데 프랑스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는 한국에 천주교가 수용된 과정부터 시작하여 대원군 집권 시기까지의 박해와 그 발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조선 후기의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서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책의 분량이 보여주는 방대함이나, 그러한 서술의 중요 바탕이 된 풍부한 자료들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지금까지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게 해주고 있다.1)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사》는 이와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된 사학사적 분석과 평가를 받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는 이 책의 한글 역주본이 처음 나왔을 때 그 <해제>의 내용이 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2) 그것은 책의 구성을 고려할 때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장을 이루고 있는 <서설>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이 경우에도 대부분 번역을 위해서나, 거기에 실린 해제를 통해서 간단한 언급되어 왔을 따름이다.3) 다시 말해서 그것을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소개서로서밖에 이해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서설> 이외의 본론에서 조선 사회와 관련해서 언급된 내용들까지도 확대시켜서 유기적으로 분석되지 못한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서설>이 본론의 한국 천주교회사 내용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될 수 없었다. 최근에 들어와서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 자료를 제공한 다블뤼 주교의 조선 인식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서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기는 하다.4) 그러나 이때 다루어진 주제가 제한적이었으며, 또한 내용의 정리라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본문에 대해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연구에서 본문과 관련해서 집중적인 관심을 가진 부분은 저술의 바탕이 된 사료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달레가 저술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어떠한 형성 과정을 밟아왔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던 것이다.5) 이때 달레의 저술과 그가 참고한 다블뤼의 서술과의 비교 분석이 실증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검토는 최근까지도 계속적으로 행해지고 있다.6) 이를 통해서 달레와 다블뤼의 서술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다루어진 사료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 작업이었다는 점에서 현 단계 한국 천주교회사의 연구 수준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매우 의미가 있는 연구들로 평가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자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사》가 달레만의 저술이 아니라, 오히려 달레와 다블뤼의 공동 저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7)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가진 다블뤼의 노력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로서 달레의 활동을 무시한 채 다블뤼의 그것에만 지나치게 매달리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달레와의 비교도 중요하지만, 다블뤼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오히려 더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와 함께 사제를 포함한 한국인 신자들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를 거의 무시한 채 프랑스 선교사들의 그것만을 크게 강조하였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한국천주교회사》가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의 흐름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료의 분석에 치중한 까닭에 <서설>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여러 특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점은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일반적으로 순교사 중심의 호교론적 저술로서 그 성격이 단순하게 규정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8) 이러한 사실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숱한 순교사화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그러한 종교적 사실 이외에 한국 천주교회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다양한 관점과 그를 바탕으로 서술된 풍부한 역사적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는 점 역시 보다 구체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자세한 분석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서로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서 보다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작업의 시론으로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읽어보려고 한다. 《한국천주교회사》에 실려 있는 방대한 내용은 앞으로 그 하나하나가 깊이 있는 분석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가지고 있는 주된 특징들을 살펴봄으로써 달레와 《한국천주교회사》를 새롭게 파악해보려는 작은 목표를 추구해보고자 한다.

 

 

2. 저자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살필 때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저자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연구에서 이 책을 과연 달레의 단독 저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을 계속적으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 과정에 대한 원전 자료에 대한 상세한 검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9) 이에 의하면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서 달레의 역할이란 요컨대 다블뤼 주교의 원고를 재검토하고, 정리 · 보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달레 이외에 다블뤼를 공동 저자(내적 저자, 제2의 저자)로 같이 취급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특정한 시기와 개별 인물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도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까지 언급된다.10)

 

이와 같이 다블뤼를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새로운 인물로 파악한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이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이 누구에 의해서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를 보다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블뤼가 순교자들의 글을 모아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사의 체계를 세우려는 작업을 진행하였다고 언급하는 것처럼11) 다블뤼의 작업이 가지는 역사적 위치를 너무 지나치게 부각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다름 아니라 다블뤼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역시 그 이전부터 한국 천주교회사의 체계적 이해를 위해서 이루어진 다양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현재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나고 있지만,12) 박해를 당한 이후 한국인 신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프랑스 선교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지고 있듯이 앵베르 주교 이래로 프랑스 선교사들 역시 한국 천주교회사의 이해를 위해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흐름이 다블뤼에게 어떻게 이어졌으며,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는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더욱 요구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마도 다블뤼는 이러한 두 흐름을 종합하여 새롭게 정리하고 서술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블뤼는 조선에 입국한 다음 해인 1846년에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보다 늦은 시기인 1855년 무렵에야 찾아볼 수 있다.13) 그가 이도기 바오로에 대한 전기 수집 자료를 번역하여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이러한 일을 사목 생활에서 사제가 가져야 할 중요한 의무감으로 인식하였다. 이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여 프랑스에 보낼 뜻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그는 1856년 11월에 이르러 베르뇌 주교에 의하여 순교사 정리 작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블뤼의 등장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전까지 이 작업을 담당한 인물이 바로 최양업 신부였다는 사실이다.14) 1857년에 보낸 최양업 신부의 열세 번째 편지를 보면 그는 자신의 사정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지난번 편지에서 약속한 사항을 실천하기 위해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음을 먼저 밝히고 있다. 그러나 순교사를 서술하는 것이 이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최양업은 그가 그동안 수집한 자료들을 다블뤼 주교에게 모두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아니라, 다블뤼가 한국의 모든 순교자에 대한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국 천주교회에서 앵베르가 시도했던 것처럼 당시까지의 순교사 전체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전해준다. 따라서 앞으로는 다블뤼가 파리에서 그 사적들을 읽을 수 있도록 보낼 것이 확실하므로 그가 따로 보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최양업이 열네 번째 편지에서 다블뤼가 조선 교회의 역사, 특히 우리 순교자들의 역사 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한 데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1856년부터 다블뤼가 정식으로 순교자들의 행적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일어난 변화였다. 이때 그동안 순교사와 관련된 일을 해오던 최양업 신부에서 다블뤼로 왜 갑자기 교체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과도 관련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블뤼는 1857년 11월에 보낸 편지를 통해서 자신이 조선 순교사 자료를 검토할 때까지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을 늦추어달라고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15)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와전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16)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실행 여부를 넘어서 이 무렵에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편찬이 파리 본부에서 논의되었을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이에 조선에 머물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계획에 맞추기 위해서라도 한국 천주교회사의 사료 수집과 서술을 전담할 프랑스 선교사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앵베르 이래로 조선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최대 과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한국인 사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힘으로 이를 이루어보겠다는 의지를 가졌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이 이들에 의해서 추진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양업의 순교사 사료 수집과 저술을 위한 노력은 중단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을 위한 다블뤼의 자료 수집에는 최양업 신부의 노력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것이 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후 다블뤼의 사료 수집과 번역은 1859년에 절정에 도달했다고 이해되고 있다.17) 2명의 서사생과 한문 번역가를 동원하여 작업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다블뤼는 순교자에 대한 구전과 아직 생존해 있는 목격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수집하고자 3개월간이나 지방 여행을 직접 가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가 순교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던 일이었다.18) 이때 다블뤼의 사료 수집과 이해가 가지고 있는 여러 특성이 지적되고 있는데,19) 이 역시 순교의 여부를 다양한 방법으로 철저하게 확인하고자 했던 최양업의 방법과 거의 동일한 것임을 지적해두고 싶다.20) 그리고 다블뤼의 이러한 작업이 그 혼자만의 수고로만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블뤼에게 조선의 사회상을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21)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작업 결과들은 비망기 형태로 마무리되었는데, 늦어도 1862년까지 파리 외방전교회로 모두 보내졌다고 한다.22) 이를 바탕으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저술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다블뤼의 사료 수집 및 번역과 저술은 서로 구별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다블뤼가 1856년에 조선 순교사를 편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1859년에 이르면 조선 순교사를 직접 서술하고자 하던 입장을 전환시켰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집 · 정리한 자료만으로 이 책을 저술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유럽어로 된 다른 사료 및 선교사들의 서한을 자유로이 볼 수 있는 프랑스에서 조선 천주교회사를 더 쉽게 완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는 것이다.23)

 

여기에는 자료의 문제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기존의 연구에서 강조해주고 있듯이 그는 역사과학의 훈련을 받은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순교사나, 선교사의 활동을 위주로 한 소박한 역사서를 생각했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잘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저술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24) 그는 이를 편집으로 표현하고 있지만,25) 아마도 저술의 체계화 문제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에게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자료만이 아니라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역사서를 집필하는 데 자신이 많은 제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 결과 이러한 작업은 그의 손을 떠나 프랑스에 있었던 달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에도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해석을 따라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서 역사가로서 달레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너무 낮추어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저술이 단순히 다블뤼의 비망기를 재정리 보충하였다는 설명은 너무 소박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달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역사가였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역사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26) 특히 인도어에 정통했던 선교사로서 그의 소명은 역사 저술을 통한 문서 선교였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전체 역사를 서술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 기초 작업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데 역사가로서의 달레에 보다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달레는 천주교회사의 자료 수집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우선 그러하다. 그의 활동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프랑스 외방전교회사의 서술을 위한 자료 수집을 하는 가운데 죽었다. 이러한 점은 그가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정약용이나, 다블뤼 등 한국 천주교회사의 자료 수집에 많은 노력을 보인 인물들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료 수집에 대한 그의 관심이나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만큼 자료 수집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달레는 자신의 저술에 사용된 자료의 전거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밝혀주고자 노력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그는 혹시나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자료가 소멸될까 싶어서 저술에서 가능한 그것을 상세히 기록해 두고자 하였다.

 

사실 달레는 그의 《한국천주교회사》 저술을 위해서 단순히 다블뤼의 자료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서설의 1/3에 해당되는 분량 역시 다블뤼의 자료 이외의 것이다. 본론 1편의 경우에도 새로운 자료를 첨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2편의 대부분은 달레 자신이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과 보고에 의거하여 저술하였다.27) 즉 다블뤼의 기록은 기해박해 여진이 남아 있던 1841년에 끝났는데, 달레는 여기에 1871년 신미년까지의 순교자들을 찾아서 수록했다. 그는 선교사들의 편지를 모두 검토했고, 또 그는 1866년 병인박해에서 살아남은 선교사들에게 당시의 상황에 관해 궁금한 점을 편지로 문의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자료 수집을 위한 달레의 독자적인 노력을 충분히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시켜 준다.28)

 

특히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 기간도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달레가 언제부터 《한국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의 편찬에 착수하기 이전부터, 즉 1870년부터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과 서신 연락을 가졌음이 알려지고 있다.29) 그것은 달레가 그때부터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거나, 아니면 이때에 이르러 그것을 편찬하도록 위촉받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달레가 담당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역사 편찬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가 건강으로 포교 활동이 어려워져 파리 외방전교회에 머물게 된 1867년 이후부터 미주 지역의 파리 외방전교회 활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 1871년 사이의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자로 달레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니라 파리 외방전교회의 역사와 그리고 그 한 부분이 될 한국 천주교회사를 함께 담당할 인물로서 역사가인 달레가 가장 적임자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그는 이후 1872년부터 3년에 걸쳐 당시까지 수집된 각종 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함께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서 단순히 다블뤼의 자료를 새로이 보충, 편집하는 데 머물렀던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는 각종 자료가 가지고 있는 의미나 비중을 판단할 수 있는, 즉 사료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서설>에서 인용되고 있는 다블뤼의 <조선사 서설 비망기>와 비교해보면 쉽게 살필 수 있다. 비망기의 구성과 달레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30) 체계가 없는 비망기를 항목별로 분류하고 종합하여 일목요연하게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작업을 한 것이 바로 달레였기 때문이다. 다블뤼에 의하면 바로 그것이 그에게 요청되었던 서술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은 다블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블뤼의 한계였던 것이다. 이 점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에 있어서 다블뤼의 역할과 달레의 역할을 크게 구별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그것은 사료에 대한 달레의 체계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달레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시도한 시대 구분론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본론의 서술에서 시기를 구분하고, 또한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지금과 같은 체재로 서술한 것은 달레에 의한 것이다.31) 그런데 이것은 그냥 단순한 작업이 아니다. 그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이해하는 일정한 기준을 설정해서 각 시기를 구분한 것이다. 자료의 이용에 대한 달레의 독자적인 기준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일일이 시대 구분을 따라서 그 목차를 자세히 설명하고 분석할 여지는 없지만, 한국 천주교회사를 매우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관해 다블뤼의 지침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쉽게 살펴볼 수 있다.32) 또한 저술의 곳곳에서 서술되고 있는 달레의 구체적 의견, 즉 그의 해석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을 단순히 달레의 단순한 편집이라고 평가 절하하여 낮추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한국천주교회사》는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저술에 대한 그의 역사관이 구체적으로 반영된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최초의 한국 천주교회사 통사가 세상에 비로소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저술 과정에서 기울인 달레 자신의 노력이 지대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결과 달레는 박해 시대 조선 천주교회의 역사를 정리하는 위대한 작업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33)

 

따라서 역사가로서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달레에 의하여 한국 천주교회사는 비로소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는 책의 제목을 《한국천주교회사》로 하였다. 이는 처음에 다블뤼에 의해 ‘조선 순교자들의 역사’ 혹은 ‘조선 순교사’라고 불렸던 것과 다르다.34) 처음부터 끝까지 다블뤼에게는 순교사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달레는 이 책을 단순히 조선의 천주교에 대한 종교적인 이해가 아니라, 한국사 속에 수용 이후 당시까지의 역사를 통사로 서술하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이 책을 다블뤼와의 공저가 아니라, 자신의 저서임을 구체적으로 밝혔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블뤼 저술과 달레 저술의 상이점에 대한 분석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한국천주교회사》에 반영된 달레의 역사관에 대한 이해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점에서 달레의 활동과 저술에 대한 본격적인 새로운 관심이 더욱 필요하다고 하겠다.

 

 

3. 연구방법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크게 <서설>과 본론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서설>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란 어떠한 것일까.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서설>과 본론의 유기적인 연관성은 책을 읽어보면 바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이다. 때문에 <서설>이 마련된 동기는 자세히 파악되지 않았던 것 같다. <서설>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많은 관심이 있었다. 외국에 당시의 한국 문화 전반을 상세히 소개한 글로서만 이해되었다. 즉 <서설>과 본론을 구별해서 살폈던 것이다.

 

그러나 달레가 <서설>을 마련한 동기를 그와 같이 단순하게 파악할 수 없을 것 같다. <서설>을 처음 구상한 것으로 알려진 다블뤼에 의하면, 그가 순교자의 역사를 서술할 때 조선의 역사와 풍습에 관한 자료를 많이 삽입하도록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다블뤼는 별도의 작업을 요구하는 것으로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고 있다.35) 아마도 그것은 조선의 순교사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한국 천주교회사를 한국사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다블뤼와는 달리 달레는 이를 완성하였다. 이것이 달레가 <서설>을 마련한 본질적인 동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서설>과 본론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는 본론의 역사적 배경으로 <서설>이 설정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당시까지 한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만족할만한 역사서가 없다는 달레의 한국사 이해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는 조선의 역사서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36) 그는 조선에서 나온 역사서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나온 그것까지를 함께 비판하고 있다. 조선에서 나온 한문으로 된 역사서나 한글로 된 역사서, 중국이나 일본의 한국사 관련 서적 등은 한국사의 흐름을 이해하려는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커다란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한국의 고대를 다룬 역사서는 있지만, 당대사인 조선 시대사를 구체적으로 다룬 역사서가 없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저술에 담긴 내용을 통해서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한국의 역사 전개 과정 속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달레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현재 한국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 한국에 천주교를 전한 선교사들의 활동과 순교의 무대가 되었던 국가와 그들이 선교한 국민의 성격 등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더욱이 서구의 조선이라는 새로운 포교지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고 그릇된 생각을 고쳐줄 수 없다고 크게 우려하였다. 왜냐하면 각 민족의 역사를 모두 인종과 풍토의 차이를 가지고 설명하려드는 물질주의적 이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동양이 서양보다 못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7) 이에 달레는 <서설>을 통하여 천주교가 수용된 한국의 역사적 흐름에 대하여 제대로 된 체계적 이해를 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바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한 달레의 주된 목적의 하나였던 것이다. 이때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조선에 머물며, 조선말을 하고 조선인들과 오랫동안 살면서 그들의 법률과 성격과 편견과 관습을 착실히 알 수 있는 서양인 선교사만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38) 그러므로 <서설>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는 달레의 사상사 연구방법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한국사와 관련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려고 한 달레의 한국사 인식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는 한국과 인접하고 있는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다. 즉 대외 관계사가 그의 한국사 서술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에서 한국사의 출발을 잡고 있는 그의 한국사 이해는, 한국사 서술에 대한 그의 비판에서 보여주었듯이, 당대사인 조선 시대사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는 고려 시대 이래로 확립된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이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확고해졌으며, 또한 그것이 매우 실질적인 것이었음을 그 과정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39) 그리고 그와 같은 대외 관계가 현재 한국의 고립을 이끈 주요한 원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이웃의 두 강국인 중국과 일본에 대하여 자기의 독립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이 자신을 완전한 격리 속에 가두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고립 정책은, 자기네 나라를 할 수 있는 대로 약하고 가난한 나라로 보이게 하여 이웃 강대국들의 야심을 꺾으려는 조선 정부의 옛날부터의 정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달레의 관심은 이러한 조선의 대외 관계에만 머물지 않고 당시 조선의 사회상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가 설정한 자연지리, 조선의 역사, 조선의 왕실, 정부 조직, 사법제도, 과거와 교육제도, 조선어, 사회 신분, 여성의 처지, 가족제도, 종교, 조선인의 성격, 오락, 주거와 풍습, 산업과 국제 관계 등의 15개 항목은 역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조선 시대사의 구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다양한 항목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당시 조선 사회를 움직이는 주된 정치 세력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사회상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특히 양반의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조선이 양반 중심의 사회이며, 양반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떠한 문제를 파생시켰는가를 상세히 밝혀주고 있다.40)

 

조선에는 임금과 백성 사이에 자기 특권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것을 보존하는 데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수많은 양반이 있다는 것이다.41) 조선의 양반 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만하며, 도처에서 지배자와 폭군 행세를 한다고 한다. 모든 사회상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때문에 국왕의 권력이 이론상으로는 최고이나 지금은 실제적으로 매우 약화되었으며, 백성을 위한 왕도정치도 제대로 실행될 수 없어 백성들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42) 그래서 최근 3세기 동안 양반들의 권력 투쟁만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국가는 부패하고, 가난해졌으며, 상업이나 과학의 발전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진보하지 못한 상태, 반미개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43) 이에 백성들에 의한 반란의 요소가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으며, 새로운 변화를 원하는 기운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44)

 

그러므로 달레는 <서설>에서도 간단히 언급하고 있지만, 본론에서 조선 시대의 사회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어떠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한국 민족이 천주교를 수용하였으며, 또한 천주교가 박해를 겪은 과정과 그것을 극복하며 발전해나가는 과정을45)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문화 등의 다양한 요인과 함께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4. 개종의 역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본론은 어떠한 내용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첫 번째의 사실로서 그가 개종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일반적으로 순교사 중심의 교회사 서술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의 책이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측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단순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개종의 역사와 관련하여 새롭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의 <머리말>에서 개종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46) 특히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믿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왜 그다지도 오랜 시일이 걸리며,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숫자는 왜 그와 같이 보잘것없으며, 그리고 개종한 신자들의 신앙의 강도 및 박해를 당한 국가의 교회 상황을 볼 때 과연 개종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문제 등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달레는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47) 그는 먼저 복음이 서양과 동양의 차이 없이, 인종과 언어와 피부색과 상관없이 부름을 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훨씬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진 천주교 국가의 개종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새로 생긴 천주교 집단이 서양의 오래된 어떤 교회보다도 못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달레는 세계 교회사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하며,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를 읽으면 이 정도의 일밖에 못하였다고 이상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어려운 장애에도 불구하고 몇 해 동안에 이렇게 많은 일을 이룩하였느냐고 독자들이 놀라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더 이상 사람들이 개종한 신자들의 신앙을 문제 삼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술을 통하여 개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달레는 한국의 종교 상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48) 유교가 조선의 주된 종교이며, 불교는 당시에 쇠퇴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 무신론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유교나 불교보다도 오히려 미신을 가장 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인을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라고 규정한다. 때문에 그들은 종교에 무관심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높은 권능과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막연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 그런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는 트이지 않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제와 천을 혼동하기도 하고, 상제의 개념에 대하여 명백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며 내세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달레는 이러한 사실이 한국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모든 이교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천주교로 개종을 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어 하였다. 즉 그들의 개종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과정을 거쳤는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서 달레가 천주교회사의 서술을 통하여 신앙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순교사화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앙 형성의 과정에 대하여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주목된다고 하겠다. 이는 그의 서술에서 보여주고 있는 배교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배교 문제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49) 그는 시기별로 배교의 경향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배교의 원인, 배교자의 사회 신분, 배교자에 대한 교회의 대책 등 배교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 특히 달레는 배교자의 향배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가 얼마나 잘 개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배교와 순교의 상호 관계에 대한 그의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배교에서 다시 순교하는 과정을 거친 순교자가 많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배교자인 동시에 순교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순교사를 화려하고 의미가 있도록 장식해준 것은 바로 이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인들이 무신론자에서 유신론자로, 배교를 통해서 순교로 어떻게 나아가게 되는가 하는 개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달레는 그의 저술을 통해서 이 시대 한국인들이 천주교로 개종하기까지, 더 나아가 그 신앙을 확고히 하기까지 무엇을 절실히 고민하며 어려워했는가 하는 신앙생활의 어려움과 고민의 일단을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한국의 천주교회가 지식인과 지도자에 의하여 움직여졌다고 하기보다는 일반 백성, 즉 민중에 의하여 실질적으로 움직여졌음을 강조하고 있다.50) 이러한 가운데 끊임없는 박해를 거치면서도 천주교로 개종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점차적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결과 한국 사회에 천주교가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레가 한국인의 천주교로의 개종 과정, 특히 그 신앙의 형성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크게 주목해도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개종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한국 천주교회사 속에서 인간을 재발견하려는 새로운 노력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5. 대외 관계 속의 한국 천주교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또한 주목할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조선의 대외 관계 속에서 한국 천주교의 수용과 발전 과정 등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저술은 대외 관계가 한국 천주교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많은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본론의 처음에서 그는 한국의 천주교 수용에 있어서 일본과 중국의 역할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국 천주교의 수용과의 상호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한국 천주교 수용의 기원을 모호하게 하려는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51) 오히려 한국 천주교의 기원을 일본으로부터 찾아 이해하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 주장이 조금도 진지하게 검토할 가치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52) 이후 한국 천주교의 발전 과정에 대한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설>에서 조선과 중국과의 대외 관계사를 면밀히 검토했던 그는 중국과의 관계를 통해서 천주교의 수용이 이루어진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있어서도 중국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의 주체적이고도, 자발적인 노력을 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53)

 

달레는 그것을 중국의 대조선 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주목하였던 그는 중국의 대조선 정책이란 결국 조선의 내정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이후 한국 천주교의 전개 과정에서 드러난 중국의 일관된 태도였다고 설명한다.54) 중국인인 주문모 신부의 순교에서 보여준 중국 측의 태도나, 대원군 집권기 중국이 비밀 서한을 보내서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였을 때에도55) 조선이 그것을 내정 간섭이라고 거부한 사실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때문에 중국에서의 변화 과정이란 한국 천주교의 변화 과정과는 상관없이 전개된 것으로 한국 천주교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아편전쟁 이후 중국이 천주교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다시 영불연합군의 북경 침공과 함께 공식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그 역시 한국 천주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56)

 

한국 천주교회사의 주체적 인식을 보여주는 달레는 박해기 한국 천주교의 재건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나타내주고 있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천주교는 새로운 신부의 영입과 함께 교회를 다시 재건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 혁명이 유럽 천주교에 미친 영향과 중국 천주교가 겪은 재난으로 말미암아 중국이나 교황청이 한국 천주교의 재건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57) 따라서 달레는 교황이 오직 기도만을 할 수밖에 없을 때 한국 천주교를 실질적으로 부흥시킨 것은 중국이나 서양의 다른 나라가 아니라, 이 역시 한국 천주교의 자력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부들의 도움이 없이 세워져서 커진 한국 천주교회가 이제야 외부의 조력 없이도 홀로 재건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달레가 세계 천주교회사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사가 차지하는 정당한 시민권을 찾아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달레는 한국 천주교 집단이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서양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진 변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박해를 당한 초기에는 이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주문모 신부가 북경 천주교회에 보낸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달레는 당시 보호권을 주장하고 있던 포르투갈 정부와 한국 천주교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58) 다음으로 유항검, 윤지헌 등의 순교 과정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외국인과 통하고 정부의 의사를 강요하기 위하여 서양의 배를 불러들일 음모를 꾸몄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한다.59) 다만 박해를 멈추기 위해서 천주교 신자들이 서양 천주교 국가들의 사신을 통해서 박해를 멈추게 하기 위한 평화적인 개입을 원하고 또 간청하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외국의 침입으로 조선 정부의 전복을 꾀하였다는 것은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달레는 황사영 백서 사건을 통해서 그러한 상황이 크게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의 평화적인 개입에서 무력 개입 요청으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달레는 그 지향하는 의도가 비록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매우 부정적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황사영의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계획으로, 매우 무모하고 위험하였다고 한다.60) 그러한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는 한국 천주교에 매우 유감스럽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에 머물던 신부들이 계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서양의 개입 요청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희망이 허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레가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달레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한국 진출 과정을 본론에서 자세히 정리하며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추구하고 있다.61) 달레는 아편전쟁을 극동과 유럽과의 관계를 바꾸어준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달레는 당시 서구 국가들의 조선 진출 정책에 대하여 매우 불만족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그는 프랑스의 동아시아 진출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비록 부분적으로는 한국 천주교를 위한 합리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는 그러한 움직임이 적절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62)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때문에 최근까지 이루어진 일련의 조선 원정이 잘 짜이지 않고, 일관성이 없고, 착실한 정견이 없어 조선 정부를 굴복시키기는커녕 그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격하게 하였을 뿐, 통상의 자유를 위해서나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나 유익하기보다는 훨씬 해로웠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에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달레는 영불연합군의 북경 진출 이후 프랑스가 조선에 조금만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더라면 한국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63) 그때야말로 적절한 시기였는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레 역시 그 태도를 바꾸고 있다. 한국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제 서양의 힘의 사용을 통한 조선 개입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64) 조선 정부가 아니라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조선 백성을 위해서도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조선 정부를 이끄는 양반들은 어느 때보다 더 조선을 세상에서 격리시키면서 쇄국을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천성이 외국인을 적대하는 민족이 아니라고 하며, 어쩌면 중국 사람보다도 더 호의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군도 본격적인 육군도 없는 보잘것없는 조그만 나라인 조선이 억지로 인류의 바깥에 남아 있으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달레는 프랑스의 종교로 인식되는 천주교의 종교 자유를 확보해 주기 위해서는 서양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프랑스의 새로운, 올바른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하여 조선을 둘러싼 대외 관계 속에서 한국 천주교의 발전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이루어졌는가의 문제, 아울러 어떻게 하면 한국 천주교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었다고 하겠다.

 

 

6. 박해사의 이해

 

한국 천주교회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달레 역시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박해사의 서술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는 박해가 일어난 원인에 대하여 가장 주목하고 있다. 그는 박해의 원인으로 크게 네 가지 요인을 들고 있다.

 

달레가 박해의 원인으로 가장 먼저 들고 있는 사실은 종교적인 이유이다. 조선의 지배 종교인 유교와 천주교가 대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5) 조선에서 유교, 즉 조상 숭배는 국교였으며, 그것은 사회의 기초와 국가의 기틀이 되며, 모든 자연 관계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천주교가 조상 숭배를 우상 숭배라고 공공연하게 선포한 사실은 조선 국민의 모든 계급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천주교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여 이 새로운 교리가 그들의 국민 신앙을 밑뿌리부터 뒤집어엎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던 것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 대한 외교인들의 본능적인 증오심이 박해의 첫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레는 박해의 원인에 대하여 유교와 천주교의 종교적 대립 문제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주목된다. 달레는 그것이 실질적인 이유가 아니라고 파악하고 있다. 종교의 문제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한국인의 종교를 이해한 그는 한국인들이 조상 숭배의 실질적인 의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66) 또한 유교에서 강조하는 효가 천주교의 교리와 실제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자들의 말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67) 따라서 그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다른 이유에서 박해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종교 간의 대립으로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것보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그 바탕에 있다는 것이다.

 

달레는 조선 시대 당파의 기원 및 그 변화 과정을 상세히 정리함으로써 정치적 이유가 박해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68) 정조의 사후 노론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남인에 대한 정치적 원한을 풀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반대 세력인 남인을 타도하기 위하여 그들이 믿고 있는 천주교를 박해하였다는 것이다.69) 이들이 박해의 대상을 자신들의 정치력과 함께 점차적으로 변화시켜 나간 과정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철종의 사후 대원군 집권기에 일어난 박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70) 이전에 박해를 가했던 당파가 권력을 장악한 것, 비교적 온건파로 알려진 시파 사람들을 물리치고 항상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벽파 사람들이 새 정부에 등장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파 간의 철저한 정치적 원한과 갈등, 즉 당쟁이 천주교 박해의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두 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박해의 이유이다.

 

달레는 이러한 사실을 천주교 박해를 주도한 정치 세력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국왕은 아니었으며, 당시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양반 세력이었다고 한다. 정조에 대한 달레의 긍정적 평가에서 살펴볼 수 있다.71) 달레는 정조 재위 중에는 조선에 전반적인 공식 박해는 없었다고 평가한다.72) 그리고 정조와 천주교 신자와의 토론 내용이나, 천주교 학자와의 우호적인 관계 등을 소개하고 있다. 순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73) 순조는 나라의 모든 고관이 천주교 신자들을 자꾸 죽이려는 것을 통렬히 개탄하여 박해의 움직임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순조의 관대함을 매우 감사해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박해를 주도한 양반들보다도, 국왕이 왕권 강화를 통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시키고, 조선 사회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 것과 관련이 있다.74)

 

이에 그는 정치와 종교의 상호 관계를 집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결합 양상을 한국 천주교의 박해사를 통해서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천주교 박해를 반은 정치적인, 반은 종교적인 재판으로 진행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75) 그는 천주교 박해에 대한 정조의 이해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정조가 천주교 박해를 양반들이 국교에 대한 열성이라는 탈을 쓴 정치적 증오심에서 나온 것임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76) 박해자들이 무엇보다도 종교를 빙자해서 정치적 원한을 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레는 이를 통해서 종교에 대한 증오가 정치적 증오로 한층 악독하게 발전해나가는, 다시 말하면 정치적 원한이 종교적 편견에 섞여 들어가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77) 때문에 모든 아시아 사람들이나, 더 정확히 말해서 옛날이나 지금의 모든 외교인이 그러하듯이 조선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동하여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교에 적대적이라는 뿌리 깊은 편견을 신조처럼 가지게 하였다는 것이다.78)

 

한편 달레는 이러한 종교적, 정치적 이유 이외에 새로운 강력한 이유가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대외 관계였다고 한다. 박해의 세 번째 원인으로 들고 있다. 그는 민족 독립의 감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79) 이때 달레는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개입 요청이나 서양 제국의 동양 진출에 대한 조선 정부의 태도를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각 시기별로 그것을 다루면서 조선 정부의 반응이 매우 민감한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프랑스와 조선 사이에 이루어진 접촉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아편전쟁 이후 조선 정부의 극심한 불안 상태를 잘 보여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 가장 공포감을 준 사건은 영불연합군의 북경 침공으로, 그것이 조선의 중앙과 지방 사회에 미친 엄청난 충격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러시아의 조선 진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대원군이 취한 대외 정책의 변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80)

 

달레는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이 조선 정부에 불안과 공포감만을 안겨다 주었을 뿐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변화나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고 한다.81) 오히려 셔먼호 사건 등에 보이듯 조선 정부는 서양 오랑캐에게 무서운 타격을 주고 해방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천주교인들이 나라와 왕조의 원수라는 여론을 항상 교묘히 유지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의 희망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어 나갔으며,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함대가 그냥 위협만 주고 그대로 돌아가 버린다면 한국에 더 큰 해를 끼친다고 예견하였던 그대로 대규모 박해가 일어났다.82) 달레는 그러한 구체적인 예로서 병인박해를 들고 있다. 대외 관계가 박해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이외에 달레는 박해의 원인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내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정해박해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83) 당시는 한국 천주교회가 비교적 평화를 누리고 있던 시기였는데, 여러 신자의 무모하고 좋지 못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박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순교자 한 토마스의 아들의 나쁜 행실로 말미암아 전라도 일대가 모두 박해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교우들 사이에 일어난 이 불행한 싸움이 그렇게도 많은 파멸의 원인이 되고, 그렇게도 많은 배교의 기회가 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달레는 박해의 원인을 다양하게 설정하고, 또한 그러한 원인들이 박해에 어떻게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는가를 살피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박해의 추이, 박해 방법, 박해를 받은 천주교 신자들의 사회 신분, 박해의 특징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7. 한국 사회와 천주교 집단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하여 천주교의 수용이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주목하였다. 이에 그는 한국 사회와 천주교 집단의 상호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달레는 한국 사회에서 어떠한 신분의 사람들이 왜 천주교를 수용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그는 신자의 신분이 어떠하였는가를 무엇보다도 주목하였다. 그는 한국에 처음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은 학자인 양반이었다고 말한다.84) 그러나 그는 그들의 역할이란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배교 문제에 대한 양반 지식인의 태도에서나 천주교가 수용 직후 곧바로 다양한 직업,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확산되어 나간 사실에서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그는 지역적으로도 천주교가 서울에만 국한된 도시의 종교가 아니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비교적 일찍부터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간 지역적인 기반의 확대 과정을 살피고 있다.85) <서설>에서 조선의 지역적 특성을 파악했던 달레는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경기도 지역만이 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천주교를 지배층에만 주어진 신앙이 아니라, 민중이 중심된 종교였음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달레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천주교가 조선의 사회 상태를 변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신분제도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서설>에서 조선의 사회 신분을 상세히 다룬 바 있다. 처음에는 양반과 노예밖에 없던 신분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양인과 중인의 형성과 함께 변화되었는데,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피지배층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천주교 신자의 주된 구성원이었던 여성의 처지 역시 불쾌하리만큼 천하고 열등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86) 즉 조선은 양반 중심의 철저한 신분제 사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구조는 옛날 로마처럼 조선에서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이 사람을 멸시하고 차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천주교는 한국 사회로 하여금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천주교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믿게 하는 종교라는 것이다.87) 황일광에 대한 달레의 감동적인 설명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천주교는 이 나라의 가장 낮고, 천한 계급까지 신자로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남자와 여자의 차별도 없다는 것이다. 즉 천주교는 부자와 권력이 있는 자와 유식한 자들이 가난하고 불행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하여 느끼는 경멸감을 송두리째 뽑아주는 한편, 사회 계급의 양극단을 접근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는 것이다.88)

 

그것은 기존의 가치관과 전혀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때문에 달레는 천주교가 대부분의 한국 민족으로 하여금 지배 신분의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당하면서도 지방관과 심지어 국왕에까지 아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일찍이 동양에서 들어본 일이 없는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달레는 천주교의 어느 교리보다도, 특히 평등을 강조한 사실이 예전이나 지금도 외교인들로 하여금 가장 반발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설명한다.

 

한편 달레는 다양한 직업과 신분으로 구성된 천주교 신자들의 생활을 통해서 천주교가 조선 사회를 변화시킨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성격이 가지는 장점과 단점을 <서설>의 ‘조선인의 성격’에서 자세히 파악한 바 있다. 한국인의 커다란 미덕은 인류애의 법칙을 선천적으로 존중하고 나날이 실천하는 것인데, 이러한 장점은 한국인을 현대 문명의 이기주의에 물든 다른 여러 나라 국민들보다 훨씬 우위에 서게 해 준다고 말한다. 이때 달레는 천주교의 수용이 한국인의 성격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시켜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그러함을 지적하고 있다. 우상 숭배와 물질 생활에 깊이 빠진 조선 백성에게 하나의 새로운 표양이 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천주교 신자들이 격심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참다운 그리스도교 정신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들의 삶 - 가장 위대한 덕행을 닦는 것,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극기와 순결이나 공동체 정신 등 - 은 외교인들이 전혀 모르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한다.89)

 

뿐만 아니라 달레는 천주교 신자들이 한글로 된 각종 서적을 발간하면서 한국 민족문화의 형성을 위해서도 노력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90) 또한 천주교 의사의 활동이나, 화전의 개발, 감자 재배 및 담배 재배 등 천주교 신자의 사회 경제적 활동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달레는 이러한 모든 일이 대부분 가장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비천한 자와 무식한 자밖에 남지 않은 천주교 집단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91)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들이 보여준 새로운 사회상은 당시 조선 사회의 성격과 크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달레는 천주교 집단이 보여준 새로운 모습이 한국 사회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변화를 낳게 하였다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결과는 그것을 추진한 박해자의 의도와는 너무나 다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거의 누구나 여러 번에 걸친 격심한 박해를 겪으면서도 보여준 천주교 신자의 삶에 감동하게 되었으며, 이에 더 이상 천주교를 멸시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92) 박해는 오히려 한국 사회에 천주교를 더 빠르고, 더 보편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신분, 어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달레는 이와 같이 훌륭한 신자들을 배출하고, 이렇게까지 기묘한 일을 행하는 교회를 가진 민족에게 크나큰 기대를 걸 수 있다고 말한다. 비록 지금은 매우 어렵고 힘들지만, 앞으로 다가올 한국 천주교회사의 제3시기, 즉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진 새로운 시기에 한국 사회를 위한 천주교 집단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93)

 

그러므로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하여 한국 사회와 천주교 집단을 사회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분석을 통하여 한국 사회의 역사적 전통 가운데에서 무엇이 계승되고 새롭게 발전되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8. 선교의 역사

 

달레의 관심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에만 머문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국인 신자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로부터 파견된 사제의 희생과 함께 이룩된 것이었다. 그래서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선교의 역사, 특히 파리 외방전교회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을 끝낸 이후 2세기 동안, 20여 개국에 걸쳐 이루어진 파리 외방전교회의 전체 역사를 서술하는 데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파리의 신학교의 고문서고에 이미 수집된 많은 자료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달레는 선교지역에 대한 계속적인 여행을 통해서 현지에서의 자료 수집과 현지 선교사들로부터의 증언 청취를 추진하다가 사망하였다. 이후 로네 신부에 의하여 1884년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저술이 마침내 이루어졌지만, 그 기초적인 작업은 달레에 의하여 마련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94) 로네 역시 달레와 마찬가지로 한국 천주교회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및 파리 외방전교회사의 서술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전체사를 이해하는 데 커다란 한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달레가 이와 같이 프랑스 외방전교회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선교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달레가 작사하고 구노가 작곡한 <선교사의 노래>를 통해서 쉽게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천주교회사》에 실린 그의 <머리말>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술 목적은 개종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편견을 고쳐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달레는 선교의 역사를 통해서 선교사들이 그들의 선교지에서 무엇이 사제의 길인가를 고민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얼마나 충실히 실천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울러 젊은이들로 하여금 선교가 의무요, 해야 할 일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하였다. 때문에 <머리말>의 마지막을 달레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나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이 심어지게 되기를 바라는 말로 매듭짓고 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 본론 1편의 끝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북경교구에서 독립한 조선교구를 담당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 다음 2편 전체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보여준 조선 선교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창립 약사를 간단히 소개한 다음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배경과 그 진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때 그가 중점을 둔 부분은 조선에서 활동한 개별 선교사의 생애와 활동이었다. 그의 서술 대부분은 이 부분에 관한 것으로, 매우 길고 자세하다. 그러므로 그는 이를 통하여 각 선교사들이 한국 천주교에서 한 일을 파악하는 한편,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피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달레는 이를 통해 선교사들이 그들의 선교지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그 책임을 다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달레는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에 진출하게 된 것은 시대적 배경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95)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지나간 뒤 새롭고 더 강력한 선교에 대한 열기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때 달레는 당시의 선교가 새로운 양상을 갖추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이전에 선교사업의 비용을 부담하던 것을 명예와 권리로 여기던 왕과 그들의 정부가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과 일반 서민의 신앙 속에서 선교를 위한 크나큰 재산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즉 선교를 후원하는 사람들이 달라진 그만큼 선교의 방향과 목적 또한 달라졌다는 것이다.

 

달레는 이와 함께 한국으로부터의 거듭된 사제 파견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교황청의 결정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를 맡고 있던 북경 교회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하는 한편, 포르투갈이 내세워왔던 보호권 주장을 정리함으로써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파견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은 조선교구의 초대 주교였던 브뤼기에르의 노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망설이던 파리 외방전교회 자체의 여러 문제나 외국인 사제의 한국 진출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한 북경교구의 중국인 사제의 방해 등을 극복하며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이제 조선교구가 독립된 교구로 설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달레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비록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였지만, 조선에서 선교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해 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96) 주문모의 생애와는 전혀 다른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 대한 달레의 구체적 언급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선교사는 그것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97) 이에 조선에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한글을 열심히 배우려고 하였으며, 또한 한글로 된 천주교 서적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숱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서울에만 머물지 않고 지방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또한 선교사의 파견이 계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선으로의 입국 통로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달레는 앵베르 주교의 배교 사목이나, 페레올 주교의 한국인 성직자의 양성, 신앙의 자유 획득을 위해서 조선의 대외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베르뇌 주교의 활동, 그리고 다블뤼 주교의 순교자 전기 편찬 등 여러 주교와 모방, 샤스탕, 김대건, 최양업, 메스트르 신부 등 개별 선교사들의 주요 활동을 그 의미와 함께 언급해 주고 있다. 이때 두 한국인 성직자의 순교와 활동을 독립된 장으로 설정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달레는 이들의 선교 활동 가운데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역시 이들의 순교라고 말하고 있다. 달레는 이들이 배교를 거부하였으며, 또한 순교를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꺼이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달레는 앵베르 주교의 모방 및 샤스탕 신부에 대한 자수 권유도 긍정적으로 다루고 있다.98) 왜냐하면 순교를 통해서 선교사들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과 비로소 일치를 이룰 수 있었으며, 그들의 뒤를 잇는 선교사들이나 한국 천주교 신자들에게 위대한 모범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시까지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 16명 가운데 9명이 순교하였다고 한다. 또한 병인박해에도 불구하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새로운 선교지인 한국으로의 진출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의 선교지에 잠입할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알려주고 있다.99) 달레는 이것이 한국 천주교회사의 둘째 시기의 이야기인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 역사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달레는 파리 외방전교회를 비롯한 선교의 역사를 통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그와 같은 선교의 역사를 통하여 발전한 한국 천주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것으로 생각된다.

 

 

9. 맺음말 - 저술의 영향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가지고 있는 사학사적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비록 한국인 신자가 아닌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최초의 통사인 《한국천주교회사》가 서술되었지만, 앞으로 《한국천주교회사》에 담긴 한국 천주교회사의 내용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기에 반영된 역사 이해가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나온 것인가, 달레의 독자적인 이해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미 지적되고 있듯이, 당시 프랑스 역사학의 저술 동향이나, 신학 사상이 달레의 저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하는 점 또한 또 다른 어려운 주제라고 할 수 있다.100) 이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서술이 단순히 한국사만의 연구 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세계 교회사와 한국 천주교회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세계 교회사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사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파악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이후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둠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출간 직후부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101)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유럽어로 꾸준히 옮겨져 갔다. 중국에서는 1879년 《신록고려주증》(新錄高麗主證)이란 제명으로 한문으로 번역되었으나, 1900년에 이르러서야 사천교구에서 간행하였다. 특히 일본의 경우에는 이보다 빨리 번역되었다. 일본의 경우 달레의 저술이 나온 2년 뒤인 1876년에 에노모토 다케아키[?本武揚]에 의해서 <서설>만 《조선사정》이라는 책 이름으로 서둘러 번역되어 나왔으며, 1882년에는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출판되었다.102) 따라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출간된 이후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널리 읽혀진 저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달레의 저술은 서양 국가들의 한국관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달레의 저술은 구한말 조선이 개항한 이후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비숍 여사의 경우처럼 개화기 조선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읽고 여행을 준비했고, 조선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대장성에서 간행했던 《한국지》처럼 개항기에 저술된 조선 관계 서적의 대부분은 달레가 지은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서 조선 관계 기본 지식을 마련하였다.103) 이것은 달레가 <머리말>에서 밝혀둔 저술 동기와도 관련이 있다. 이 책은 19세기 말엽까지도 조선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유럽인들을 의식하여 집필되었기 때문에 조선에 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104)

 

그런데 여기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부정적인 한국관의 형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서양의 한국관 가운데에서 “은둔의 나라”라는 이미지의 형성이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영향을 장기간 파급시켰다고 보는 견해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105) 그러나 그와 같이 파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달레는 <머리말>에서 “오늘 조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고집스럽게 고립을 지키고 있다”든지,106) “조선에는 흉년이 꽤 자주 드는데 이 나라는 쇄국이라는 오랜 전통을 고집하고 있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거의 아무런 교역도 하지 않고, 따라서 외부의 구원을 도무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107)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만으로 달레의 저술을 그와 같이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립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한국인 신자들이 개방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함께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보다는 역시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의 《은둔의 나라, 한국》(1882)과 그것을 조장한 일본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한다.108) 사실 그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은 서양의 한국관만 관련해서가 아니라 일본에서도 제기되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일본어로 번역한 동기는 번역서의 제목이 시사해주고 있듯이 조선에 대한 정보 파악을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의 대조선 정책, 특히 정한론을 위한 자료로써 이용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109) 이 책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영불동맹의 북경 침공 등 함께 실린 첨부 자료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때문에 《조선사정》은 《한국천주교회사》의 <서설>에 실린 내용 가운데 조선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을 전면적으로 크게 부각시켰다. 결국 이는 종교 서적이 정치적으로 이용된 전형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달레의 저술에서 언급된 내용이 다른 국가들의 한국관 형성에 미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구별해서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10)

 

이와 달리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담긴 한국 천주교회사 내용은 이후의 한국 천주교회사의 저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85년부터 한글로 번역되기 시작한 《한국천주교회사》는 1906년에 간행된 《보감》에 처음으로 연재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들어오면 프랑스인 혹은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사가 새롭게 서술되면서 달레의 저술은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1923년에 프랑스인 푸레 교수에 의해 저술된 《한국의 순교자와 선교사》는 달레의 책을 요약한 것이라 할 수 있다.111)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브레 주교의 저술인 《한국의 천주교》(1924) 역시 달레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112)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인에 의한 한국 천주교회사 서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온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1928)에서는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의 하나로써 이용되고 있다.113)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불어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한국의 대외교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해방 직후 한국인 신자에 의해서 저술된 최초의 통사인 유홍렬의 《한국천주교회사》(1949)에도 달레의 저술이 미친 영향은 역시 크다고 말할 수 있다.114)

 

그러므로 달레가 서술한 한국 천주교회사의 관련 내용이 그 이후에 나온 통사류의 한국 천주교회사 저술들이 서로 어떠한 상호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에 대한 비교 · 검토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의 통사 서술에서 어떠한 부분을 계승하고, 어떠한 부분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는가를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시대 한국 천주교회사에 대한 새로운 통사 서술을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야 할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 제123회 한국 교회사 연구발표회에서 처음 발표되었고(2000. 3. 18), 요약된 내용이 《교회와 역사》 300호, 2000에 실렸다. 달레와 《한국천주교회사》를 다룬 그 이후의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참고하여 이를 수정 · 보완하였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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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원순,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사>, 《한국천주교회사연구》, 1986, 365쪽.

 

2) 이러한 방식의 언급으로는 앞서 말한 이원순의 연구 이외에 여러 글을 찾아볼 수 있다. 홍이섭, <한국기독교사연구소사>, 《한국사의 방법》, 1968 및 김종서, <한말 일제하 한국종교 연구의 전개>, 《한국사상사대계》 6, 1993과 조광, <우리 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 한국천주교회사>, 《경향잡지》 1500호, 1993 그리고 이찬수, <한국 그리스도교연구 100년>, 《한국종교문화연구 100년》, 1999 등을 들 수 있다.

 

3) <서설>의 경우 이능식 · 윤지선 역, 《조선교회사서설》, 1947이 나오기는 했지만 번역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이에 정기수 역, 《조선교회사서론》, 1966이 새롭게 나왔다. 거기에 역자의 서문이 실려 있다.

 

4)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인식 - 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 2002.

5) 최석우, <달레 저 한국천주교회사의 형성과정>, 《교회사연구》 3, 1981.

 

6) 김정숙, <대구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분석 - 프랑스어 사료를 중심으로>, 《대구순교사연구》, 2001 ; - - -, <신유박해에 관한 프랑스어 자료 분석 - 달레와 다블뤼의 자료비교>, 《신유박해 연구의 방법과 사료》, 2003 ; - - -, <수리산 순교자 이성례와 이 에메렌시아의 생애와 신앙생활>, 《교회사학》 6, 2009.

 

7) 최석우, 앞의 논문, 115~116쪽에서 주장한 이래 조광, <우리 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 한국천주교회사>, 《경향잡지》 1500호, 1993과 김정숙, 앞의 논문들에서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다.

 

8) 김정숙, <신유박해에 관한 프랑스어 자료 분석 - 달레와 다블뤼의 자료비교>, 355쪽을 참고할 것.

9) 최석우, 앞의 논문을 참고할 것.

10) 조광, 앞의 글 및 김정숙, 앞의 논문들은 최석우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11) 김정숙, <대구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분석>, 30쪽.

 

12) 김수태,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 가문의 순교자 전기를 중심으로>, 《교회사학》 10, 2013 ; - - -, <황사영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사료 재조명>, 《황사영의 신앙과 영성》, 2013.

 

13) 유한영,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 나타난 사목활동과 구역 - 1845년부터 1857년지의 편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천주교》, 2007, 197쪽. 한편 김정숙은 다블뤼가 프랑스에 머물 때부터 이에 대한 관심을 두었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앞의 논문, 337 및 343쪽), 이것은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관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좋을 듯하다.

 

14) 김수태, <최양업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연구>, 95~96쪽.

15) 김정숙, 앞의 논문, 337쪽.

16) 최석우, 앞의 논문, 121~122쪽.

17) 최석우, 위의 논문, 12쪽 ; 김정숙, 앞의 논문, 337쪽.

18) 최석우, 앞의 논문, 123~125쪽.

19) 김정숙, <대구 순교자들에 관한 사료 분석 - 프랑스어 사료를 중심으로>, 37~39쪽.

20) 김수태, 앞의 논문, 92~95쪽.

 

21) 이러한 점은 김정숙, <신유박해에 관한 프랑스어 자료 분석>, 350~351쪽에서 다블뤼가 조력자를 두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다블뤼가 편지에서 밝히고 있듯이 번역인을 따로 두었음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한국인 조력자에 대해서 보다 깊은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22) 최석우, 앞의 논문, 123~124쪽. 김정숙은 앞의 논문, 340쪽에서 1859년과 1860년에 걸쳐서 송부된 것으로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23) 김정숙, 위의 논문, 337∼338쪽.

24) 김정숙, 위의 논문, 343 및 353쪽.

25) 최석우, 앞의 논문, 124쪽.

26) 이하 달레의 생애에 대해서는 최석우, 위의 논문, 116~119쪽을 참고할 것. 

27) 최석우, 위의 논문, 141~146쪽.

 

28) 달레의 이러한 점은 김정숙, 앞의 논문, 372~373쪽에서 잘 지적되고 있다. 한편 김정환, <샤를르 달레의 조선지도>, 《교회사연구》 38, 2012 역시 이러한 달레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29) 최석우, 앞의 논문, 118쪽.

30) 최석우, 위의 논문, 126~127쪽.

31) 최석우, 위의 논문, 130쪽 ; 김정숙, 앞의 논문, 364~365쪽.

32) 김정숙, 위의 논문, 370~371쪽.

33) 김정숙, 위의 논문, 373쪽.

34) 김정숙, 위의 논문, 369∼370쪽.

35) 김정숙, 앞의 논문, 353~353쪽.

36) 샤를르 달레, 안응렬 · 최석우 역주, <조선의 역사>, 《한국천주교회사》 상, 1979. 이하의 서술에서 저자와 역자는 생략한다.

37)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11~12쪽.

38) <머리말>, 15쪽.

39) <조선의 역사>, 40~43 및 48쪽.

40) 위의 글, 48쪽.

41) <사회신분>, 《한국천주교회사》 상, 162~167쪽.

42) <조선의 왕실>, 《한국천주교회사》 상, 59쪽.

43) <산업과 국제관계>, 《한국천주교회사》 상, 263쪽.

44) <조선의 자연지리>, 《한국천주교회사》 상, 28쪽 ; <민란과 한국교회>, 《한국천주교회사》 하, 1980, 332쪽.

45) <머리말>, 11쪽.

46) <머리말>, 12쪽.

47) <머리말>, 13~14쪽.

48) <종교>, 《한국천주교회사》 상, 209~219쪽.

 

49) 이하의 서술은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서술된 순교와 배교의 문제를 다룬 김수태, <초기 천주교회의 배교문제>, 《동양학》 29, 1999를 참고할 것.

 

50) <초기 지방에서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72쪽.

51) 최석우, 앞의 논문, 130~131쪽.

52) <왜란과 조선인 피납자의 입교>, 《한국천주교회사》 상, 284~294쪽.

53) 위의 글, 294~295쪽.

54) <황사영 백서 사건>, 《한국천주교회사》 상, 586~587쪽.

55)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2>, 《한국천주교회사》 하, 1980, 455쪽.

56) <김대건 신부의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하, 63~64쪽.

57) <성직자 영입의 청원>, 《한국천주교회사》 중, 1980, 37~39쪽.

58) <주문모 신부의 영입>, 《한국천주교회사》 상, 37~39쪽.

59) <이 누갈다의 순교>, 《한국천주교회사》 상, 532쪽.

60) <황사영 백서 사건>, 《한국천주교회사》 상, 574쪽.

61) <정해박해 2>, 《한국천주교회사》 중, 194~196쪽 ; <최양업 신부의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하, 134쪽 이후의 서술을 참고할 것.

62) <최양업 신부의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하, 151~152쪽 ;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2>, 《한국천주교회사》 하, 466~481쪽.

63) <경신박해>, 《한국천주교회사》 하, 318~319 및 328쪽 ; <민란과 한국교회>, 《한국천주교회사》 하, 329쪽.

64) <산업과 국제관계>, 《한국천주교회사》 상, 273~275쪽.

65) <첫 수난과 김범우>, 《한국천주교회사》 상, 329~330쪽.

66) <종교>, 《한국천주교회사》 상, 212~221쪽.

67) <신해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46쪽.

68) <조선의 역사>, 《한국천주교회사》 상, 51~53쪽.

69) <초기 천주교 지도자와 신유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429~430쪽.

70) <병인박해>, 《한국천주교회사》 하, 359쪽.

71) <신해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53~355쪽 ; <초기 지방에서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69~370쪽.

72) <정조 말년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426쪽.

73) <정해박해 1>, 《한국천주교회사》 중, 165쪽 ; <정해박해 2>, 《한국천주교회사》 중, 184~185쪽.

74) 김수태, <황사영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사료 재조명>, 169쪽을 참고할 것.

75) <신유박해의 종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589쪽.

76) <정조 말년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97쪽.

 

77) 달레는 신유박해와 기해박해를 비교하면서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의 제2막이라고 말한다(<당고개의 순교자>, 《한국천주교회사》 중, 537쪽).

 

78) <신유박해의 종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600~601쪽.

79) <황사영 백서 사건>, 《한국천주교회사》 상, 575쪽.

80)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1>, 《한국천주교회사》 하, 390쪽.

81) <산업과 국제관계>, 《한국천주교회사》 상, 274쪽.

82) <김대건 신부의 순교>, 《한국천주교회사》 하, 115쪽.

83) <조숙 동정부부의 순교>, 《한국천주교회사》 중, 109~113쪽.

84) <초기 지방에서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72쪽.

85) <최초의 입교자 이승훈>, 《한국천주교회사》 상, 311~314쪽.

86) <여성의 처지>, 《한국천주교회사》 상, 183~197쪽.

87) <주문모 신부의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상, 472~475쪽.

88) <정해박해 2>, 《한국천주교회사》 중, 203~204쪽.

89) <초기 지방에서의 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상, 371쪽.

90)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 《한국천주교회사》 하, 209쪽.

91) <정해박해 2>, 《한국천주교회사》 중, 203쪽.

92) <당고개의 순교자>, 《한국천주교회사》 중, 539~540쪽.

93)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2>, 《한국천주교회사》 하, 482쪽.

 

94) 로네에 대해서는 유소연, <리델의 《나의 감옥생활 1878》의 판본 비교연구 - 아드리앵 로네의 간행본을 중심으로>, 《제4회 한국교회사 연구자 모임 발표 자료집》, 2014, 42~45쪽을 참고할 것.

 

95) <조선교구의 설정과 기해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중, 209~239쪽.

 

96) 브뤼기에르 주교에 대해서는 <초대 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 1>과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 2>, 그리고 <모방 신부의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중권의 내용 가운데 3장에 걸쳐서 서술하고 있다.

 

97) <모방신부의 입국>, 《한국천주교회사》 중, 322~323쪽.

98) <프랑스 선교사의 순교>, 《한국천주교회사》 중, 423~463쪽에서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99)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2>, 《한국천주교회사》 하, 480~481쪽.

 

100) 조광, <우리 교회사의 보배로운 기록>, 79쪽에서 “이 책의 역사 연구방법에는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묘사했던 당시의 사상들에 관해서는 재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101) <조선의 자연지리>, 《한국천주교회사》 상, 23쪽에 실린 역주 ; 조광, 위의 글, 79쪽. 

102) 미촌수수[梶村秀樹], <해제>, 《조선사정》, 1979 ; 신영언, , 《일본언어문화》 21, 2012, 346쪽.

103) 김정숙, <신유박해에 관한 프랑스어 자료 분석>, 2003, 362쪽.

104) 조광, 앞의 글, 78쪽.

105) 신영언, 앞의 논문, 344쪽.

106)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사》 상, 11쪽.

107) <기해박해>, 《한국천주교회사》 중, 51쪽.

108) 이태진, <근대 한국은 과연 은둔국이었던가?>, 《한국사론》 41 · 42, 1999.

109) 신영언, 앞의 논문, 345~357쪽.

 

110) 다블뤼의 한국관에서도 그러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다블뤼의 경우에는 입국 초기에만 해도 조선 사회의 정치 상황과 조선의 관습과 문화, 조선인의 성격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15년 정도 조선 생활을 거친 뒤에는 조선의 사회 원리와 관습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변화상을 보여주었던 것이다(조현범, 《조선의 선교사, 선교사의 조선》, 2008, 331~332쪽). 그것은 조현범이 잘 지적해주고 있듯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관을 단순히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살필 수 없는 복합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앞의 책, 68~69쪽). 그렇다면 서양인의 동양관을 비판했던 달레의 한국관 역시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만은 어렵다고 하겠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서 더욱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11) 이원순, 앞의 논문, 365쪽.

112) 이찬수, 앞의 논문, 239쪽 ; 조현범, <《한국의 천주교》 해제>, 《교회사연구》 38, 2012, 162~163쪽.

113) 김수태, <이능화와 그의 사학 - 특히 《조선기독교급외교사》를 중심으로>, 《동아연구》 4, 1984.

114) 김수태, <유홍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 《교회사연구》 21, 2003 ; 이찬수, 앞의 논문, 256쪽.

 

[교회사 연구 제43집, 2014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김수태(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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