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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의 박해(1-2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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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3-20 ㅣ No.807

[세계 교회사 여행] 그리스도교의 박해(1-2세기)

 

 

애석하게도 1~2세기 호교 교부들은 박해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엄청난 불행과 재난들을 생각하면서 그 불행과 재난의 원인을 찾았다. 즉, 자신들에게 불어닥친 불행과 재난에 대해 책임질 희생양을 찾았다. 사람들은 그 희생양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를 비난하는 중상모략들이 난무하게 되었고, 이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노와 폭동을 자극했고,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로마제국은 비난받을 짓을 한 자들에 대해서는 법대로 처벌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박해와 순교라는 말을 들으면 무시무시한 고문과 피가 낭자한 장면, 그리고 카타콤바 지하 묘지로 경배하러 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떠올린다. 물론 이런 것들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박해를 당하는 교회, 순교자들의 교회, 심지어 카타콤바의 교회라는 용어들이 지나치게 일반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300년 동안 계속해서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대 로마 시대에는 박해에 대한 의식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고문과 사형이라는 명백한 박해 이외에도 위협, 탄압, 정치적 · 군사적 이데올로기적 장벽 등도 박해에 들어갈 수 있다. 최초의 박해인 네로 황제의 박해는 로마에서만 일어났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는 로마제국 전역에서 자행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300년 동안 카타콤바에 숨어 지내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도 아니다. 카타콤바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초가 지나면서부터다. 카타콤바는 토지 대장에 표시된 구역이었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하는 피난 장소로 카타콤바를 사용할 수 없었던 시대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초기 300년 동안에는 비교적 불안정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지만 대체로 종교적 평화를 이룬 시기도 많았다. 따라서 신앙으로 인한 체포와 감금, 고문과 사형이 만연한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초기 200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당하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했다. 이때까지는 아직 그리스도인들을 직접 겨냥한 박해 법령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지엽적인 차원에서 박해가 있었고 기간도 대단히 짧았다. 로마 시대 첫 박해자는 네로 황제였다. 네로 황제는 64년에 발생한 화재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처벌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소아시아 북쪽 비티니아의 총독이던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97~117년)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비티니아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처형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트라야누스 황제는 추적과 심문을 하지 말라는 답변을 준다. 다만 끝까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만 말한다.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주교가 이 시대에 순교했지만 대대적 박해는 아니었다.

 

[2017년 3월 19일 사순 제3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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